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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배치, 얼굴
들뢰즈와 가타리의 언어철학은 『천의 고원』의 고원 4(「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공준들」), 고원 5(「서기전 587년·
서기후 70년: 몇 가지 기호체제에 관하여」), 고원 7(「0년: 얼굴성」)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고원 4는 기존의 언어철학들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언어철학 -- 話行論(le pragmatique) -- 을 제시하고 있는 고원으로서, 이들의 언어철학의 기초를 보여준다.
고원 5는 4강에서 수립한 기호체제 개념의 몇 가지 예를 논하며, 고원 7은 언어의 문제를 얼굴의 문제로 이어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의 본질을 정보, 기표화에서 찾는 입장과 소통, 주체화에서 찾는 입장을 비판함으로써 화행론으
로의 길을 연다.
사행어(使行語)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활동(le langage)의 기초 단위를 언표(l nonc )로 본다.
이 점에서 이들은 『지식의 고고학』에서의 푸코를 따른다.
푸코는 이 저작에서 언표를 명제, 문장, 발화행위(speech act)와 구분하고, 언표의 성립 조건으로서 네 가지 규준 -- 상관적 세계의 존재, 언표행위( nonciation) 주체의 자리들, 방계공간의 존재, 언표의 물질성 -- 을 제시했다.
푸코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1) 언어를 비언어와 맞물려 있는 존재로 보았으며(언어를 추상적으로 다루는 과학적 입장의 거부)
2) 언어를 주체 이전의 존재로 보았으며
3) 언어를 복수성의 관점에서 보았으며
4) 언어를 정치, 제도와의 관련성 속에서 보았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표의 개념을 구사하는 한 이들의 작업은 푸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표의 기초 단위를 사행어(mot dordre)로 본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란 기본적으로 타인으로 하여금 일정하게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늘이 참 맑죠?"라고 물어볼 때, 물어보는 사람은 단지 어떤 당연한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타인이 동조하고 함께 날씨를 즐기자고 요청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라는 것을 랑그로 추상화하거나(이것은 signifiance 즉 기표화이다) 상호주체성의 산물로서
보는 것(이것은 subjectivation 즉 주체화이다)을 거부한다.
언어를 철저하게 언어 바깥의 복잡한 현실 -- 언어에 대해 잉여를 구성하는 것 -- 속에 놓고서 본다.
이 점에서 이들의 언어철학은 話行論이다.
말과 행위
여기에서 사행어는 "...하시오", "...하면 좋겠습니다" 등 명시적으로 使行的인 말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 전체, 언어의 본질이 곧 사행어라는 것이다.
언어란 사물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주체들 사이의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언어는 간접 담론의 형태를 띠며(즉 사물과의 직접 만남을 통한 정보 획득보다는 들은 이야기를 전
하는 것) 또 주체는 명료한 동일성을 띤 존재가 아니라 무수한 목소리들, 정념들의 뒤범벅이기 때문이다
("정념 안에는 너무도 많은 정념이 있고, 목소리 안에는 모든 종류의 목소리들이 있으며, 소문 안에는 모든 종류의 횡설
수설이 떠돌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로부터 언어는 정보나 소통보다 使行에 본질이 있다고 말한다.
주안점은 행위에 주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가 오스틴이 말하는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이다.
이 개념은 使行이 언어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언어와 행위는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언어 자체 내에 이미 행위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밥이 맛있네요"라는 말은 "(나는) 밥이 맛있네요(라고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따라서 나와 좋은 관계를 맺읍시다)"
라는 뜻이고, "사람이 너무 많군"이라는 말은 "사람이 너무 많으니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라는 뜻이다.
"Ill give you that book"이라는 말은 "I promise that Ill give you that book"이고, "A brick!"이라는 말은 "I beg you that you give
me a brick"을 뜻한다.
그래서 모든 언어 표현들은 이미 使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과 행위의 관계는 이미 말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언어를 기표(signifiant)로 보는 관점과 다르다.
이 관점(소쉬르의 구조주의로 대변)은
1) 사물과 말 사이의 자의적인/임의적인 관계
2) 기표들 사이의 변별적 차이를 통한 의미생성
3) 기표들의 체계의 존재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관점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표화의 관점이라 부른다.
그러나 使行語로서의 언어에 대한 생각은 자족적인 언어, 랑그와 파롤의 구분, 말과 행위의 구분 같은 전제들을 파기한다.
또 이런 관점은 언어를 주체들 사이의 소통으로 보는 관점과 다르다.
벤베니스트는 수행적인 것을 자기지시적인 항들의 속성으로 환원시킨다.
즉 나, 너, ... 같은 연동소(連動素, embrayeur)로 환원시킨다.
이것은 상호주관성의 체계를 통해서 話行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체화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푸코의 언표 이론이나 오스틴의 발화수반행위 이론에 입각할 때, 주체들 이전에 이미 使行의 場이 함축되어 있
다고 보아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호를 배치(agencement)와 관련시켜 이해하고자 한다.
배치는 층(strate)의 구조이다.
배치와 층은 체계, 구조, 장으로 바뀌어 온 (후기)구조주의의 핵심 개념에 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어이다.
소쉬르의 체계, 레비-스트로스, 라캉, 알튀세 등의 구조, 푸코의 에피스테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세르의 인식론적 장
등등, (후기)구조주의 사유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들 중 하나는 그것이 場의 사유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흐름에 대응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이 층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세계가 무수한 층들 -- 지층들, 계층들 등등 -- 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며, 또 층들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늘 층화작용(stratification)을 겪는다고 본다.(그 가장 거대한 그림은 「도덕의 지질학」에서 그려진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다원적·역동적 구조주의가 그 극한적 형태로 펼쳐진다.
각 층의, 또는 여러 층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들은 배치라고 부른다.
배치는 선들과 속도들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선들은 계열들(s ries) -- 현대 사상의 또 하나의 핵심 개념 -- 을 말하며, 속도들은 이 계열들의 형성, 변환,
접속, 분리, ... 등등의 운동 속도를 말한다.
예컨대 한국에서의 중산층의 배치를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배치에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와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가 있다.
(여기에서 욕망은 인간의 심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능, 생명을 뜻한다. 동북아 사상에서의 氣와 매우 흡사)
이 두 항은 푸코에서의 비담론적(= 신체적) 실천과 담론적 실천에, 더 멀리로는 스토아 학파에서의 물체적인 것(s mata)와
비물체적인 것(as mata)에 해당한다.
그리고 들뢰즈의 『푸코』에 자주 등장하는 볼 수 있는 것(visible)과 말할 수 있는 것( non able)에 해당하기도 한다.
주체화란 복합적인 배치의 결과이다.
언어활동은 기본적으로 사행어들, 암묵적 전제들(발화수반행위에서의 전제들), 話行들의 집합들, 즉 전체적으로 말해서
욕망의 기계적 배치와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로 이루어지는 배치 전체를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언어나 행위를 추상화시키지 않고 그 전체에서 파악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잉여성(redondance)이라는 개념을 도입
한다.(롤랑 바르트의 언어의 두께를 상기하는 것도 좋을 듯)
어떤 부분을 자족적인 것으로 추상화할 때 항상 그 바깥에는 무엇인가가 남아 있으며, 더 중요하게는 그 남아 있는 것과
추상한 것 사이에는 내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모든 것을 배치의 관점에서 보는 이유이다.
이 잉여성은 푸코에게서의 언표장 개념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잉여성은 주파수(fr quence)와 공명(r sonance)이라는 두 형태를 갖는다.
주파수는 기표화와 연관되고, 공명은 주체화와 연관된다.
매끈하게 정리된 기표화와 정확히 합치하는 주체화는 그 아래에 먼저 존재하는 場, 즉 잉여성으로부터 마름질되어 성립
한다.
정보가 마름질될 때 기표화가 성립하며, 소통이 마름질될 때 주체화가 성립한다.
기표화는 기표작용(signification)을 통해서 성립하며, 주체화는 주체작용(assujettissement)을 통해서 성립한다.
그러나 이런 마름질 이전에 존재하는 잉여성의 장, 사행어들로 구성된 사회적 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하다.
(들뢰즈 사유의 근본 구도: 고정된 코드들, 층들, 기계들, ... 등등 아래에는 언제나 욕망, 역능, 생명, 강도, ... 의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한 망각이야말로 일정한 기표화와 주체화를 고착화시키는 행위, 하나의 층을 실체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논의된 구도를 상기할 것).
비물체적 변환
말을 하기 전에, 매끈한 기표화와 주체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배치가 존재한다.(물론 이 배치 자체도 실체화하면 곤란
하다. 배치도 계속 변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는 행위와 언표의 잉여적 복합체이다.
즉 언표와 행위는 단지 서로 다른 두 가지로서 밀접하게 관련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의 복합체 -- 내적 관계
-- 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합체가 동일성을 갖춘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계속 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복합체인 한에서 그것은
잉여적 복합체이다.
그렇다면 이 배치의 실제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신체들(기계적 배치)과 더불어 그 신체들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비물체적 변환들(transformations
incorporelles)이 존재한다.
비물체적 변환들이란 다름 아닌 사건들이며, 특히 언표행위에 결부된 사건들이다.
이 대목에서 『천의 고원』의 구도는 『의미의 논리』의 구도와 접속된다.
使行語에 내재해 있는 행위는 곧 비물체적 변환인 것이다.
언어와 행위는 밀접하게 관련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법조계는 감옥, 법원, 형사들과 판사들과 검사들, ... 등등의 신체적 배치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범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는 언표행위는 비물체적 변환(= 사건)이다.
빵과 술을 먹는 것은 물체적 변환이지만, "이 술이 내 피요, 이 빵이 내 살이니라"라는 말은 비물체적 변환을 동반한다.
대중매체는 폭력적인 비물체적 변환을 야기시키는 대표적인 장치이다.
비물체적 변환은 곧 사건이고 사건은 언표와 하나를 이룬다.
비물체적 변환은 신체적 배치와 맞물려 있다.
누구나 "총동원령을 내린다"는 말을 입에서 발음할 수는 있지만, 신체적 배치가 전제되지 않을 때 이 표현은 우스갯거리가 된다.
비물체적 변환은 사건이고 따라서 거의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한 피고가 무죄 석방이냐 3년형이냐는 순간적으로 언표된다.
영희가 X 대학에 합격했는가 불합격했는가는 영희가 통지서를 열고 종이를 펴는 그 순간에 발생한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것은 그의 머리에 왕관이 얹히는 그 순간에 발생한다.
그래서 비물체적 변환들에는 늘 날짜가 동반된다.
피고에 대한 판결, 영희의 합격/불합격, 나폴레옹의 등극 등등에는 날짜가 동반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신체에는 날짜가 동반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체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사건에는 날짜가 동반된다.
언어와 정치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언어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를 전혀 상관없는 두 영역으로 다루는 것은 잘못이다.
알튀세처럼 언어를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 또한 잘못이다.
화폐 개혁에 있어서처럼 비물체적 변환이 거대한 경제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며, 레닌의 슬로건(mot dordre)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사건 및 언표(행위)가 언제나 물체적 변화의 표면 효과인 것은 아니다.
레닌은 슬로건을 이용해서 정치적 행위를 펼쳐나갔다. "모든 슬로건은 특정한 정치적 상황의 특수성으로부터 도출되
어야 한다."
배치를 구성하는 수많은 변수들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경우, 즉 기표화와 주체화의 체계가 결정되어 있는 경우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호체제(r gime de signes) 또는 기호론적 기계(machine s miotique)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와도 같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발상과 두 가지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1) 기호체제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기호체제 아래에 배치가 있으며(물론 더 궁극적으로는 역능, 생명이 있다) 기호
체제는 유동적인 배치의 한 (시간적) 단면, 또는 그 위에서 마름질되는 場이다.
2) 기호체제의 형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으로 보고 자연과학자들이 자연
법칙을 탐구하듯이 탐구하는 것은 정치의 차원을 망각하는 것이다.
언표행위의 고정된 집합적 배치는 간접 담론의 형태를 띤다.
그리고 그로부터의 일탈이 직접 담론의 형태를 띤다.
직접 담론에 입각해 간접 담론이 만들어진다기보다는 간접 담론으로부터의 탈주가 직접 담론을 만든다.
이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직접 담론을 분자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대중들의 웅얼거림과도 같다.
그러나 그 웅얼거림도 무수한 간접 담론들의 교차로에서 형성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 탈주의 잠재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내용과 표현
들뢰즈와 가타리는 내용(contenu)과 표현(expression)을 구분한다.
이 말은 옐름슬레우에게서 유래하지만 늘 그렇듯이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말을 보다 일반화된, 존재론적인 지평으로
가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두 개의 층이 있을 때 그 하나는 내용을 구성하고 다른 하나는 표현을 구성한다.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이 표현이라면 사진에 찍히는 것은 내용이다.
내용/표현의 구분과 실체/형식의 구분은 구분되어야 한다.
내용도 실체(substance)와 형식(forme)을 가지고 표현도 실체와 형식을 가진다.
나무라는 내용은 실체(질료)와 형식(나무라는 조직화)을 가진다.
그러나 나무를 찍은 사진도 자체의 실체(종이)와 형식(사진 찍기의 형식)을 가진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내용의 실체, 내용의 형식, 표현의 실체, 표현의 형식을 구분하는 셈이다.
내용의 실체·형식과 표현의 실체·형식은 전혀 다르다.
나무의 실체와 사진의 실체는 다르며, 나무의 조직화 형식과 사진의 예술 형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내용과 표현의 관계를 표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내용과 표현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감옥이라는 건축물과 범죄학이라는 담론은 그 실체 및 형식에서 전혀 다르다.
그러나 감옥이라는 볼 수 있는 것과 범죄학이라는 말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병원과 의학, 수목원과 식물학, ... )
매우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기계적 배치가 내용을, 언표적 배치가 표현을 구성한다.
눈이 내리는 것은 기계적 배치이고, "눈이 내린다"는 것은 언표적 배치이다.
언표적 배치는 기계적 배치를 표현한다.
정확히 말해 기계적 배치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표현한다.
언표는 표현하는 것(exprimant)이고 사건/비물체적 변환은 표현되는 것(exprim )이다.
내용이 스토아 학파의 s mata를 형성한다면, 표현은 as mata를 표현한다.
인간의 신체에서 기계적 배치, 내용과 연관되는 것은 손이며 언표적 배치, 표현과 연관되는 것은 얼굴이다.
손은 기계적 배치들과 능동-수동의 관계를 맺지만, 얼굴은 그런 관계를 맺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머리로 싸움을 하거나 때로 문을 열거나 하지만, 얼굴 자체를 가지고서 기계적 배치에 관련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얼굴은 언표와, 의미와 연관된다.
비신체적 변환이 언어로 표현될 때, 그리고 그것을 신체에 귀속시킬 때 -- 사건은 물체에 귀속된다(sattribu )며 그래서
물체의 부대물(attribut)이다 -- 우리는 표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것(intervenir)이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지금부터 당신들을 인질로 잡는다"고 말하는 것은 비물체적 변환이다.
이 말들은 기계적 배치의 변화에 삽입된다.
즉 개입된다.
표현이 내용에 삽입되는 것이다.(때로 삽입이 모호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언제 대머리가 되는가)
동일한 존재가 내용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표현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가속기의 입자는 기계적 배치의 형식을 띨 수도 있고 입자물리학 논문의 형식을 띨 수도 있다.
그 두 형식은 전혀 다르다. 두 형식은 상호 전제 및 상호 이행의 관계를 맺는다.
내용도 탈영토화의 과정을 겪고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속도가 문제가 된다.
수학은 대개 실험 결과들보다 먼저 탈영토화되지만, 때로 새로운 실험 결과가 기존의 공식을 넘어 탈영토화되기도 한다.
내용의 변인(變因)들이 있는가 하면 표현의 변인들이 있다.
내용과 표현은 나란히 가면서 상호 전제와 상호 이행, 그리고 상대적 탈영토화의 관계를 맺는다.
배치의 측면들
배치는 이렇게 수평적으로는 내용과 형식을, 수직적으로는 영토화/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포함한다.
이를 배치의 사가성(四價性=t travalance)이라 부른다.
언표적 배치를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는 맑시즘(알튀세)은 표현이 독립적이며 내용에 반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언표를 생산이라는 차원에로 환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있다.
언표적 배치는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기호체제로서 또는 표현기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의 운동은 갈등이나 모순보다는 탈영토화 운동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내용과 표현은 일방적인 또는 쌍방적인 인과관계를 맺기보다는 상호 전제나 상호 삽입의 관계를 맺는다.
즉 내용과 표현은 공재면(共在面=plan de consistance) 위에 존재한다.
또 언표적 배치를 따로 떼어서 독립성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적 발상 또한 불충분하다.
언어라는 추상기계를 생각하고 내용은 지시대상으로(더구나 자의적인) 화용론은 언어 외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아직 덜 추상적이기 때문에 문제이다.
진정한 추상기계는 기계적 배치의 형식과 언표적 배치의 형식 그 전체의 추상기계이다.
추상기계는 배치의 디아그람이다.
즉 배치의 형식들 -- 벡터들의 장 -- 의 디아그람이다.
언표적 기계는 선형성에 머물지만, 배치의 디아그람은 초선형적=리좀적이다.(벡터들의 장이므로)
『천의 고원』에 등장하는 여러 그림들은 다름 아닌 디아그람을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즉 추상기계가 언어로부터 추상되는 것이 아니라 추상기계로부터 언어가 가능하게 된다.
추상기계는 공재면에서 성립하며, 이 추상기계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절속하고(articuler) 있는 그 전체 기계
이며 그 디아그람이 그것의 구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연속적 변이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보와 소통으로서의 언어 개념을 비판하고 대신 배치를 사유하고자 하며, 언어를 자족적으로 다루
려는 입장을 비판하고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를 함께 사유하고자 한다.
이제 세 번째로 이들은 언어를 등질성, 보편성, 항상성에서 사유하려는 과학적 입장을 비판하고 언어를 다질성(多質性),
특이성, 연속적 변이의 측면에서 사유하고자 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들의 생각은 베르그송에 기반한다.
실재는 연속적이고 고 창조적이다.
그러나 인간 오성(entendement)/지능(intelligence)의 과학적 사유는 연속성을 절단하고(분석), 다질성을 등질화하고(양화), 시간 속에서의 창조에 눈을 돌린다(시간의 제거).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이 가지는 한계를 베르그송 식으로 비판한다.
언어는 늘 연속적 변이(variation)를 겪는다(variation을 음악에서의 변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때 변주는 원래의 멜로디는 없으며 오로지 변주들만이 있는 상사성(similitude)의 맥락에서의 변주이다).
언어 안에는 잠재성이 내재한다.
이것은 푸코에서의 언표장(champs d nonc s) 개념과도 통하며, 라보프의 내재적 변이라는 개념과도 통한다.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상적인 언어라는 동일성과 그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구도가 아니라 무한한 차이의 운동(주파수의 점진적 변양)과 그 속에서의 반복이라는 구도를 제시한다.
하나의 말이 여러 언표장들을 계속 돌아다닌다.
더 정확히 말해, 하나의 말은 여러 언표장들에서의 차이들에서 추출된 반복으로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언어를 잉여성에서 보는 첫 번째 논의와 전체 배치에서 보는 두 번째 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언어에 대한 이런 시각은 현대 음악의 발전을 통해 깨닫게 된 소리의 이해와 나란히 간다.
음악은 장조(majeur, 다수의 뜻도 됨), 단조(mineur, 소수의 뜻도 됨), 무조음악을 거쳐 계속 연속적 변이의 차원을 드러
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신들의 언어철학을 일반화된 반음계주의(chromatisme)에 비유한다.
기존의 언어철학이 장조적이고 온음계적이라면, 그리고 지배적인 것, 항상적인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애호를 가지고
있다면, 이들은 연속적 변이, 반음계주의를 강조한다.
이것은 글쓰기에서의 문체(style)와도 관련된다.
문체는 심리학적 창조물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배치이다(한 개인이 추상기계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라는 중심에서 나오는 산물이기보다는 언표장에서의 저자의 운동이 그려내는 흔적들과 기억들의 산물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 베케트, 루카, 고다르 등에게 흥미를 표한다.
현대의 문체들 역시 끊임없이 새로운 잉여성의 형식들을 개발해 왔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est(= is)와 et(= and)를 대비시킨다.
이것은 실체와 그 귀속물들에서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를 구성하는) 연속적 변이로의 이행이다.
전형을 벗어나는 표현은 탈영토화의 첨점을 구성하며 텐서의 역할을 한다.
추상기계는 텐서장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특이점들의 운동을 내포한다.
이 점에서 특이적(singulier)이다(다질성 및 창조성과 통함).
다수와 소수
언어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와 연결된다.
다수어는 권력(pouvoir)의 내포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탈주하려는 소수어들은 역능(puissance)를 내포하고 있다(권력은
스피노자의 potestas에 해당하며, 역능은 potentia에 해당한다).
다수어는 연속적 변이를 거슬러 고착화된 언어를 구성하려 하고, 소수어는 연속적 변이의 선을 따라 계속 생성한다.
그러나 소수어가 이른바 방언은 아니다.
방언은 소수어의 특수한 한 양태이며, 소수어는 보다 근본적인 개념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다수어와 소수어라는 두 종류의 언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 것이다.
한국어는 다수어도 소수어도 아니다.
다만 북한에서는 평양 말이 남한에서는 서울 말이 다수어를 형성한다.
오스트리아 령 체코에서 체코어는 독일어에 대해 소수어이지만, 프라하의 독일어는 비엔나나 베를린의 그것에 대해
잠재적으로 소수어로서 이미 기능한다.
또 독일에서 활동한 체코 출신 유태인 카프카는 독일에서의 연속적 변이를 수행했다.
요컨대 다수어와 소수어는 두 언어가 아니라 언어적 운동의 두 양태인 것이다.
다수어와 소수어는 병치되는 것이 아니다.
연속적 변이를 겪는 실제 언어는 모두 소수어이다.
다수어는 소수어의 場 위에서 마름질된다.
정수가 무수한 실수들 위에서 마름질되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다수어와 소수어의 구분이라기보다는 언어의 생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특정한 방언이나 언어를 재영토화한다거나 다수어를 다른 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어를 탈영토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미국의 흑인들은 흑인과 영어를 대립시키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언어인 미국어를 흑인-영어로 만들어버린다)
다수어와 소수어는 양적 차이에 따른 구분이 아니다.
다수성으로부터 지배와 권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배와 권력으로부터 다수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소수어의 기준은 소수(小數)가 아니라 생성이다. 그것은 되기이다.
여성-되기, 소수-되기, 동물-되기, ... . 이 생성/되기는 동일자를 무너뜨리는 대(大)타자(lAutre)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수자-되기를 또한 아우토노미아(autonomia)라고도 부른다.
요컨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언어는 使行語이고, 잉여성의 풍요로운 場이며, 또 연속적 변이를 겪는 정치적 장이기도
하다.
누구도 이 장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따라서 도피는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탈주하면서 창조하는 것이다.
기호체제=기호계
기호체제는 직역하면 기호들이 일정한 정식화(定式化)를 통해서 하나의 체제(r gime)를 형성할 때 성립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또한 이를 기호계(une s miotique)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기호학(s miologie)과 대비된다.
기호체제는 서로가 서로를 지시하는 기호들의 체제이다.
나아가 기호체제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지시한다.
마치 카프카가 묘사한 관료제와도 같다. 호피 족과 크로우 족의 차이. 이 때 기의는 칸트의 물자체처럼 뒤에 불투명하게
숨어 있게 된다.(전통 사회의 예, 라캉의 예)
즉 표현만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내용은 가려진다.
기호체제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가장 외부의 원환을 벗어나서도 안 되며, 또 가장 중심에 있는 원환에 접근해서도
안 된다.
기호체제의 중심에는 군주(君主)가 있다.
그리고 기호체제는 근본적으로 속임수의 성격을 띤다.
이 속임수를 강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차적인 메커니즘은 해석화(interpr tence)과 해석작용(interpr tation)이다.
이 해석은 사제/예언자가 담당한다.
이 점에서 사제/예언자는 신-군주의 관료이다.
라캉의 팔루스 또는 실재계도 이런 성격을 띤다.
기표화의 중심, 지고한 기표는 기호의 무한한 전체가 그리로 소급되는 중심이다.
이 잉여성은 표현의 실체이며, 그것은 곧 얼굴성(visag it )이다.
얼굴은 잉여성의 총체를 응축한다.
기호체제에서의 얼굴은 곧 신-군주의 얼굴이다.
사제는 신의 표정을 관리한다.
관료들은 군주의 표정을 관리한다.
반대로 얼굴이 지워질 때 각종 되기가 가능해진다. → 파놉티콘의 예.
기계적 배치까지 생각할 때 군주-신의 얼굴/신체는 그 대응신체(contre-corps)로서 사형수의 신체 또는 배제된 자의
신체를 가진다.(푸코의 분석을 참조)
속죄양은 기호체제를 위협하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떠안게 되며 강제적인 탈주선을 그리게 된다.
탈주선은 기표화 원환의 접선이다.
서구 중세에 마술사와 사제의 투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호체제를 "사원의 중심에 자리잡은 신-군주의 편집증적 얼굴과 신체, 그 사원에서 언제나
기의를 기표로 보충하는 해석적 사제들, 빽빽한 원환을 이루며 한 원환에서 다른 원환으로 건너뛰는 군중, 중심에서
방사되며 사제에 의해 선택되고 취급되고 장식된, 원환을 가로질러 사막을 향해 필사적으로 탈주하는 얼굴 없는 우울한
속죄양"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기호체제는 제국적 전제정치 체제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나무가 지배하는 모든 곳(정당, 문학운동, 정신
분석학회, 가족, 부부, ... )에 존재한다. → 227쪽의 정리를 참조.
탈기표적 기호계
그런데 지금까지 묘사한 기호체제는 인류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중세 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기호체제, 즉
군주적 기호계일 뿐 유일한 기호체제는 아니다.
미개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전(前)기표 기호계, 유목민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대항(對抗)기표 기호계,
그리고 이 세 기표체제와 특별히 구분되는 탈(脫)기표 기호계가 있다.
전기표 기호계는 앞에서 묘사한 전형적인 기호체제=기호계가 도래하기 이전의 기호계이다.
즉 보편화하는 추상, 기표의 도래, 언표행위의 형식적-실체적 단일화, 언표의 순환성, 그리고 그 상관항인 국가장치,
군주 즉위, 사제의 카스트, 속죄양 등등이 등장하기 이전의 기호계이다.
대항기표 기호계는 군주적 기호계에 대항하는 기호계이지만 탈기표 기호계는 아닌 기호계, 즉 유목민에게서 전형적
으로 나타나는 기호계이다.
이 기호계에서는 수적 기호(signe num rique)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또 제국에서의 탈주선(속죄양의 탈주선)이
파괴선(ligne dabolition)으로 대체된다.(국가장치 대 유목적 전쟁기계)
그리고 때로는 군주적 기호계와 혼성적 기호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탈기표적 기호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기표화에 대립해 주체화를 형성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특정한 기호계와 특정한 역사를 상응시키는 것은 아니다.
각 기호계는 역사의 여기저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또 많은 경우 서로 섞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기호계들은 사유 모델들이지 구체적 실제들은 아니다.
전기표 기호계를 접어둔다 할 때, 인류 역사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유형의 기호계를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군주적-기표적-편집증적 기호계이고 다른 하나는 자작적(自作的=autoritaire)-탈기표적-주체적/열정적(passionel)
기호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기호계의 복잡한 착종을 그리는 것이다.
탈기표적 기호계는 특히 자본주의의 형성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나, 대항기표적 기호계에서도 나타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히 유태 민족의 역사를 살펴본다.
유태 민족의 역사야말로 과정/소송(proc s)과 수난/열정(passion)의 역사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유태 민족의 역사는 전통 사회에서의 탈기표적 기호계의 좋은 예이다.
언약궤(言約櫃)의 유동성과 파괴 가능성, 그리고 솔로몬에 의한 안치, 느부갓네살과 티투스 시대의 파괴(서기전 587년 및
서기 70년) 등은 히브리인들의 유목민-되기와 정주민 되기를 잘 보여준다.
히브리 민족이 탈기표적 선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신의, 그리고 그들의 얼굴-돌림(d tournement de visage) 때문이다.
얼굴 돌림을 통해서 유태인들은 계속 배신(tricherie에 대비되는 trahison의 역사를 이어가며("스스로 주체적인 운명의
형태로 사고하는 행진 중의 부족"), 그 대가로 무한한 집행유예, 무한한 연기(延期)를 떠맡게 된다.
신은 유태인을 살려주며 탈주케 하지만 그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며 피조물을 영원한 유예에 처한다(카인, 요나,
예수).
이것이 소송/과정, 수난/열정의 역사를 그린다.
이 과정에서 선지자는 예언자/사제와는 다른 형태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지자는 장래(avenir)의 역능을 발견해낸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도 매우 좋은 예를 보여주며, 그리스 문화가 수치의 문화에서 죄의 문화로 넘어가는 한 예를 드러낸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의 카인이다.
그러나 기호계가 얼굴에 의해 재영토화되듯이, 탈기표 기호계는 책에 의해 재영토화된다.
주체성의 체계와 잉여성
주체화는 주체화의 점(point de subjectivation)과 더불어 시작된다.
식욕부진을 겪는 사람에게는 음식이, 페티시스트에게는 드레스, 란제리, 구도 등이, 데카르트에게는 코기토가 그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언표하는 주체는 여전히 신이라는 중심-기표에 예속되어 있지만(사유의 가능성으로서의 신), 데카르트는 언표행위의 주체를 언표의 주체로 하첩(下疊)시킴으로써(se rabattre sur) 주체화의 점을 포착했다. 한 사회에서의 교육 형태나 정상화의 형태는 주체화의 점을 변경토록 만든다. 주체화의 점으로부터 입법자-주체가 형성된다. 자신에게 복종함으로써 자신을 탈주시키는 주체. 알튀세에게서 이는 호명의 문제로 나타나며, 벤베니스트에게서는 인칭론의 문제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화 역시 곧 재영토화된다. 주체는 언어활동의 조건도, 언표의 원인도 아니다. 주체화는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의 하나일 뿐이다.
정념의 체계는 의식과 정념/사랑이라는 두 개의 축을 가진다. 의식은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로 이중화된다. 이 이중화된 의식에는 독신자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 정념적 사랑에는 짝(트리스탄과 이졸데)이 있다. 그래서 주체화의 선(ligne de subjectivation)은 두 형식을 가진다. 하나는 나 = 나라는 의식적인 이중체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 = 여성인 정념적인 이중체이다. 그러나 정념적 이중체는 부부 싸움으로 추락되며, 의식적 이중체는 관료화되며 그 결과 입법자-주체는 분열된다(즉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는 분열된다). 결국 주체화는 탈주선에 다시 절편성을 부여함으로써 재영토화된다. 주체화 역시 지층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주체화는 기표화만큼이나 지층적이다. 이런 비판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고전 철학과 근대 철학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잉여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기표 체제에서 주파수에서 최대 주파수와 비교 주파수가 있듯이, 탈기표 체제에서의 공명에서도 최대 공명과 비교 공명이 있다. 자기의식(나 = 나)이 최대 공명이라면, 이름들 사이의 비교 공명이 있다. 주파수의 체제는 벽(壁)을 형성하고, 공명의 체제는 흑공(黑空)을 형성한다. 벽과 흑공은 얼굴을 형성한다. 기표적 체제와 주체적 체제가 얼굴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재영토화의 아래에서 잉여성을 발견할 때 또 다른 탈주가 가능하다. 이것은 곧 지층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세 지층은 유기적 지층, 기표적 지층, 주체적 지층이다. 탈주는 이 지층들을 넘어 공재면, 무기관체로 향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배치를 바꾸는 일이다. 지층에 고착된 삶에서 공재면, 무기관체로 향하는 삶. 그것은 곧 무한한 생명과 잠재성을 찾아내는 삶이기도 하다.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결국 디아그람과 추상기계의 차원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의식을 생명의 실험으로 만들고, 정념을 연속적 강도의 장으로, 기호-입자의 방사로 만드는 것, 의식과 사랑의 무기관체를 만드는 것, 기표적인 잉여성과 주체적인 잉여성을 혼동하지 않는 디아그람적 잉여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나무에서 리좀으로.
그래서 탈영토화의 세 가지 수준이 있다. 상대적이고 지층에 고유한 것으로서 기표화와 더불어 정점에 이르는 탈영토화. 절대적이지만 여전히 부정적이고 지층적인 것으로서 주체화의 탈영토화. 마지막으로 공재면 내지 무기관체에서의 긍정적이고 절대적인 탈영토화의 가능성이 있다.
추상기계와 디아그람
잉여성을 찾는 것은 결국 고착된 지층 아래에서 더 큰 역능, 잠재성, 생명을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추상기계와 디아그람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사이에는 지시나 표상, 상응 관계나 인과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두 배치는 서로를 전제하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상대적으로 추상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두 배치는 결국 동일한 배치의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스피노자와 비교) 언표적 배치만을 떼어서 추상기계를 논하는 것은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덜 추상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추상을 더 밀고 나가면 표현의 형식/기호체제와 내용의 형식/물리적 체계를 동시에 고려한 보다 근본적인 추상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이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이다. 추상기계는 배치의 모든 탈영토화의 첨점들(pointes de d territorialisation)을 구성하고 결합시킨다.(→ 각주 검토) 추상기계는 표현면과 내용면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공재면을 그린다.
추상기계는 배치의 디아그람이다. 디아그람화(diagrammatisme)를 통해 추상기계가 성립한다. 디아그람은 벡터장이다. 배치의 벡터장이 그리는 것이 추상기계이다. 추상기계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탈층화되어 있고 탈영토화되어 있다. 추상기계는 기호적인 것도 아니고 물리적인 것도 아니며 다만 디아그람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추상기계에 대해 실체와 형식이 아닌(이것들은 이미 내용과 표현이 나누어진 이후에 성립한다) 질료(mati re)와 기능/함수(fonction)으로 되어 있다. 질료는 형식화되지 않은 실체이고, 기능은 내용과 표현의 윤곽선들만을 포함할 뿐이다. 디아그람은 가장 탈영토화된 내용과 형식을 결합해서 내포한다. 디아그람은 지표도 도상도 상징도 아니다. 특히 디아그람은 관계의 도상이 아니다.
추상기계는 최종 심급으로서의 하부구조가 아니며 최고 심급으로서의 초월적 이데아도 아니다. 그것은 기계와 기호를 포괄하는(아니면 그 사이의?) 독특한 실재로서 그 각 계기에서 창조성의 점들 또는 잠재성(potentialit )의 점들을 형성한다. 그것은 추상적-실재적 존재(un Abstrait-R el)이다. 추상기계는 배치의 두 측면이 일정한 디아그람을 형성할 때 항상 존재한다.(베베른-추상기계 등) 추상기계가 이중 분절됨으로써 내용과 표현이 성립한다.(스피노자와 비교) 층들은 질료를 실체로 만들며, 내용의 형식화된 면과 표현의 형식화된 면을 분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강도의 연속체들을 마름질한다.(베르그송과 비교) 따라서 디아그람화를 공리계의 작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층의 프로그람과 공재면의 디아그람은 대립하는 것이다. 지층의 프로그람은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이후의 논의)요컨대 공재면과 지층들이, 디아그람과 프로그람이, 추상기계와 구체적 배치가 대립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날카로운 선이 그어져 있는 관계가 아니라 쌍방향적으로 유동하는 관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를 자족적으로 다루는 것을 비판하고, 그것은 기호체제로 넓혀서 다룬다. 그리고 기호체제를 다시 그 아래에 존재하는 잠재성의 장 즉 추상기계/디아그람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계적 배치에까지 연결시키게 된다. 그래서 언표들과 기호체제화들(s miotisations) 뒤에는 오로지 기계들, 배치들, 탈영토화의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화행론은 이 전체를 다루는 작업이다.
얼굴과 얼굴성
기표화와 주체화를 통해 형성되는 두 기호계, 지층은 혼성적인 기호계를 이룬다고 했다. 그런데 두 지층의 교차점에 독특한 장치(dispositif)의 몽타주가 존재한다. 그것은 곧 얼굴(visage)이다. 기표화는 기호들과 잉여성들을 기입하는 흰 벽을 필요로 하고, 주체화는 의식과 정념, 잉여성들을 살게 할 검은 구멍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흰 벽과 검은 구멍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얼굴이다. 따라서 얼굴은 기표화와 주체화가 그리로 소급되는 곳이다. 언표적 배치는 얼굴로 소급된다. 얼굴은 한편으로 주파수나 개연성의 영역을 정의하며, 다른 한편으로 공명의 장소들을 형성한다. 얼굴은 주파수, 공명, 리투르넬로 등과 더불어 잉여성을 형성한다. 그것은 벽과 구멍을 통해서 기표화와 주체화를 가능하게 한다.
얼굴과 얼굴성은 다르다. 얼굴성(visag it )은 얼굴을 낳는 추상기계이다. 얼굴성은 얼굴을 낳음으로써 기표에게 흰 벽을, 주체성에게 검은 구멍을 준다. 물론 얼굴성은 단지 희미한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유전형과 표현형이 다른 것과도 같다.(카프카의 『불룸펠트』의 예. 드뷔시와 니진스키의 예)
얼굴의 탈영토화
머리와 얼굴은 다르다. 머리는 신체에 포함되지만 얼굴은 표면이다. 얼굴은 자연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접면에 존재하는 독특한 존재이다. 그것은 접면 그 자체이다. 머리를 포함하는 신체가 탈코드화되어 얼굴이라는 존재에 의해 덧코드화된다.(*초코드화와 덧코드화의 차이) 즉 얼굴화(visag ification)의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인간의 얼굴만은 아니다. 인간의 얼굴은 얼굴화의 한 경우이다. 그리고 얼굴화는 지각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의 질서에 따라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유전형-표현형과 비교).
신체-머리에서 얼굴로의 탈영토화는 진화론, 현상학, 구조주의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개체발생에 의한 설명도, 응시를 통한 현상학적 설명도, 또 거울 단계를 통한 구조주의적 설명도 이차적이다. 일차적인 것은 흰 벽-검은 구멍들이라는 추상기계이다. 응시는 검은 구멍으로부터 성립하며, 거울은 흰 벽으로부터 성립한다.(조각난 신체가 아니라 기관 없는 신체가 먼저이다)
손은 상대적 탈영토화를 가져온다. 손은 그 상관자로서 도구를 가진다. 얼굴은 절대적 탈영토화를 가져오며, 그 상관자는 풍경(paysage)이다. 자연은 얼굴의 상관자가 됨으로써 문화에로 넘어온다. 즉 풍경으로서 존재한다. 풍경은 무엇인가를 뜻하게 된다.(퍼시발의 예)
탈영토화의 네 가지 정리가 존재한다. → 텍스트
얼굴의 정치학
얼굴은 가장 개인적인 것인 듯이 생각되지만 오히려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얼굴을 일종의 역능으로서 파악했다. 그러나 얼굴은 반대 방향에서 즉 문화의 쪽에서 파악되기도 한다. 이 때 권력의 특정한 배치가 얼굴의 산출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미개인들은 얼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물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얼굴이란 미개인과 정반대에 존재하는 이미지, 즉 백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얼굴이 역사를 만든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元年을 예수를 기준으로 보는 한에서) 얼굴은 예수를 통해서 이해된다고 할 수 있다.
얼굴들은 얼굴의 단위들을 형성한다. 남자 혹은 여자, 부자 혹은 빈자, ... 와 같다. 짝을 이루고 있는 얼굴들도 있다: 노동자와 사장, 피고와 판사.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다기보다 어떤 얼굴로 틀지어진다. 즉 얼굴성은 정상성를 구조화한다. 또 얼굴성은 일탈의 추적자이다. 예수의 얼굴을 기준으로 한다면, 황인, 흑인은 두 번째 세 번째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인종주의는 백인 남자의 얼굴을 기준으로 일탈의 편차를 결정한다. 그것은 타자화를 통해서보다는 차라리 불평등한 동질화를 통해서 작동한다. 주체가 얼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그 주체를 선택하는 것이다.(주체화의 또 다른 측면)
얼굴성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구성체와 맞물려 작동한다. 기표화와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특정한 형태의 권력의 배치인 것이다. 전제적 배치가 없다면 기표화도 없으며, 권위적 배치가 없다면 주체화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얼굴을 한편으로 추상기계와 관련해서 다른 한편으로 권력의 배치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 지우기(d faire)를 언급한다. 검은 구멍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흰 벽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즉 얼굴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이것은 곧 기표화와 주체화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뜻한다. 이 논의는 후에 ...되기로 이어진다. 얼굴이 정치라면, 얼굴 지우기는 또한 청석골-되기(devenir-clandestin)이다. 그것은 곧 자기를 구성하는 기표화와 주체화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로부터 탈주하는 몸짓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기표적이고 전주체적인 기호계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어떤 형태의 회귀도 거부한다. 인간은 기표화와 주체화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기표의 흰 벽을 가로지르고, 주체의 검은 구멍에서 탈주체화될 수 있을 뿐이다
(이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