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호의 공주중학교 스승 오영세씨가 이날 청주 한화-두산전 시구자로 나섰다. 이날 국내 공식 데뷔전을 치른 박찬호가 의미있는 시구자를 원하며 구단에 요청해 직접 스승을 초청했다. 오영세 감독은 3루수였던 박찬호를 중학교 2학년 때 투수로 전향시킨 주인공으로 공주고 시절 김경문 감독과 배터리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는 지금의 ‘박찬호’를 만들어준 소중한 인연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본격적인 투수의 길을 걷게 해준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존경하는 오영세 감독님과 인연을 맺은 중학교 시절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때 처음으로 야구와 관련된 지독한 훈련을 시작했거든요. 주변 일대의 산이라는 산은 죄다 뛰어다니는 맹훈련을 연일 지속했죠. 그 시절 오 감독님께서 저의 재능을 알아보시고 중 2때부터 투수훈련을 시켜주셨어요. 제 투구 폼을 많이 고쳐주시기도 했고요. 오 감독님 개인적으로는 제 포지션을 바꾸는 일로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하셨지만 제 미래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죠. 지금의 박찬호는 오 감독님의 이러한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박찬호의 투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한국무대에서 첫승을 거뒀습니다.
1982년생인 제가 10대 시절 본 그의 빛나는 모습을 기억하며, 20대 시절 본 그의 노력하는 모습을 기억합니다.
30대 나이를 먹고 그가 프로야구에서 뛰는 모습, 그것도 제가 응원하는 한화이글스에서 뛰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될줄이야!
충남 공주고 출신인 박찬호 투수가 국내에 돌아오면
한화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했으면 간절히 바랬던 그 10대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박찬호는 1991년에 빙글레이글스의 계약금 3천만원 입단제의를 받았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입단하지 않고 한양대로 진학하였습니다.)
10대 시절 항상 꿈꿔왔던 그 무대가 어제 현실에서 펼쳐졌고 그 첫 시작은 팀의 연패를 끊는 달콤한 첫승이었습니다.
박찬호의 한국무대 첫승을 기념하며 그의 17년간의 전설적인 이야기중 가장 빛났던 데뷔때부터 2001년까지의 순간을 기록해봅니다.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교 신입생 시절과 일치합니다.
IMF를 비롯 경제적 상황등 여러가지 여건으로 인해 국내프로야구의 인기는 저조해지고
국내에서 메이저리그의 인기가 치솟았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KBS - iTV - MBC의 메이저리그 중계 다들 기억나시죠?)
- 데뷔 ~ 1995년
박찬호는 1993년 유니버시아드 대회(93.7.8~18 미국 뉴욕주 버팔로 개최)에서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1994년 1월 11일 LA다저스와 120만 달러 계약에 성공하며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않고 직행한 선수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단 2경기 출전만에 마이너리그로 강등되어 2년간 메이저리그 재승격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995년 9월 1일, 메이저리그에 복귀하게 됩니다.
- 1996년
1996년 시즌 시작부터 메이저리그 엔트리에 합류한 박찬호는
LA다저스의 중간계투 요원으로 활약하여 그해 5승 5패(방어율 3.64)를 기록하였습니다.
1996년 4월 7일은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박찬호 투수가 메이저리그 첫 승리를 기록한 날입니다.
2회말부터 햄스트링 부상으로 실려나간 라몬 마르티네즈에 이어 구원등판하여 4이닝동안 안타 3개 볼넷 4개 삼진 7개를 기록하였고
팀이 3-1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역사적인 첫 승리를 기록하게 됩니다.
- 1997년
1997년 LA다저스의 5선발로 출발한 박찬호는 그해 14승 8패(방어율 3.38)를 기록하였습니다.
선발투수 가운데 노모 히데오(14승 12패 방어율 4.25)를 제치고 다저스에서 최고 성적을 거둔 투수가 됩니다.
박찬호를 제외한 LA다저스의 당시 선발진은 라몬 마르티네즈, 이스마엘 발데스, 노모 히데오, 페드로 아스타시오였습니다.
7월과 8월에만 8승 1패를 기록하며 이때부터 여름 사나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죠.
1997년 8월 11일은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박찬호 투수가 메이저리그 첫 완투승을 기록한 날입니다.
- 1998년
1998년 박찬호는 그해 15승 9패(방어율 3.71)을 기록하였습니다.
1997년에 이어 2년 연속 LA다저스 팀내 최다승 투수가 됩니다.
7월 한달동안 6경기에 선발 등판, 42와 2/3이닝동안 던져 4승 무패 방어율 1.05 삼진 34개로 메이저리그 이달의 투수로 선정되며
여름 사나이라는 별칭을 이어가게 됩니다.
12월에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출전하였고 금메달을 획득하여 병역을 면제받게 됩니다.
- 1999년
1999년 박찬호는 그해 13승 11패(방어율 5.23)을 기록하였습니다.
6월 6일 박찬호는 타석에 들어와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키며 1루로 뛰는 도중에 상대투수인 팀 벨처의 욕설도발을 받았고
이단 옆차기로 상대를 가격했습니다.
이는 곧 팀간의 집단난투극으로 이어졌고 난투극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심판진에 의해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진출 이래 첫 퇴장을 명령받았습니다.
0-4로 뒤져있던 LA다저스는 박찬호의 퇴장이후 6회에 데본 화이트가 만루홈런, 게리 셰필드가 2점 홈런을 날리며
7-4로 통쾌하게 역전승했습니다.
- 2000년
2000년 박찬호는 그해 18승 10패(방어율 3.27)을 기록하였습니다.
8월 25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3회 1사후 타석에 나와 메이저리그 진출이래 첫 홈런을 기록하였습니다.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트리스와의 경기에서 삼진 13개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첫 완봉승을 기록하였고
8회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와 상대 선발투수 우디 윌리엄스를 상대로 시즌 2번째 홈런을 기록하였습니다.
- 2001년
2001년 박찬호는 그해 15승 11패(방어율 3.50)을 기록하였습니다.
7월 11일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한 박찬호는 3회 랜디존슨에 이어 내셔널리그의 2번째 투수로 등판하였고
은퇴를 앞둔 칼 립켄 주니어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했고,
이반 로드리게스와 스즈키 이치로를 내야땅볼로 처리,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삼진처리한후 이닝을 마쳤습니다.
그 이후는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묵묵하게 메이저리그에서 10년동안 활약해온 박찬호 투수,
20대 시절의 화려한 모습, 30대 시절의 꾸준한 모습,
이제 한국에서 활약하게 될 40대의 박찬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합니다.
10대 시절 박찬호 투수를 보며 힘을 얻었던 저로서는 이제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박찬호 투수를 응원합니다! 힘내요! 영웅!

첫댓글 역시 찬호형님 멋있으삼~~
역시 훌륭한 선수는 자기 혼자만 잘한다고 이루어지는게 아니군요,,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해하는 박찬호도 멋지네요
당시 홍원기와 손혁이 투수였는데 홍원기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서 3루수로 가게 되었죠. 홍원기 코치님도 인상 좋고 고교시절에는 엄청난 거포였는데 ㅎㅎ
투수 오영세
지금은 박찬호의 스승으로 불리지만 제게는 공주고 우승의 주역이란 말이 먼저 생각 납니다.
제가 중3때인가 대통령기고교 야구대회, 포수 김경문과 베터리를 이루고 던지던 모습 ㅡ ㅡ
투수에만 전념해서 대통령배 결승에 오르기까지 오영세씨가 타석에 서면 아나운서 맨트가 ㅡ
(투수 오영세 타율 ㅡ잠시 머뭇거리다가 ㅡ 작년에 안타 하나)
아마도 77년인가 충청권 최초의 우승을 이끈 공주고 에이스 ㅡ 오영세,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라디오 갖고 다니면서 많이 들었는데.....
대통령배에서 첫우승하고 나니 그해 내내 공주고 경기 중계했었지요.
잊을수 없는 이름이지요. 오영세. 그가 박찬호의 스승이었군요.
힘내요 영웅!!!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