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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정치 생각
1. 드라마 [봄날]의 고현정 생각
섬마을 처녀는 짧았던 순간을 사무치게 아파하도록,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버린 남자는 크게 다쳤다. 이런 법은 없는 거에요. 오랫동안 우물에 갇힌 언어를 되뇌이던 그녀를 깨워준 남자가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게 되자 내뱉는 표현. 고현정은 드라마 [모래 시계]에서 59년생 박상원과 62년생 최민수 사이에서 보여주었다면, 72년생 지진희와 80년생 조인성 사이에서 71년생으로 주연급 제일 연장자로서, 드라마에 마법을 부여하고 있다. 극중에서 ‘수도꼭지’ 조인성은 연기력이라 하더라도, 수도꼭지 고현정은 연기력으로만 그러하겠느냐는 대중들의 기대감도 있다.
일본 예술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일본 예술작품 특유의 애틋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것은, 대중들은 영화 [파이란]에서 보았다. 일본은 칼의 나라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외로움과 고독감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정서를 그리는 것에서는, 내가 체험하는 미국 영화나 한국 예술 작품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한다. 칼의 문화에서 백에 아흔아홉, 천에 구백 구십 구는, 패배자의 정서에 먼저 가깝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허진호 감독은 한국에서 가장 외로움과 고독감에 기반된 인간정서를 잘 표현하는 예술가이다. 고현정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 ‘욘사마’와 더불어 캐스팅 되었었다가, [봄날]로 취소한 바 있다. 제2의 [모래 시계]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드라마 [봄날]은 사실상 ‘고현정 원톱’ 드라마로, 허진호 감독이 그렸던 영상 세계 스타일의 티브이 드라마화이며 정치물과 완벽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사랑에 대하여 시청자들의 마음 한켠에 남은 ‘낭만적 상상력’을 이끌어내면서 주말마다, 20대 30대 40대등에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봄날]을 보면서 문득 ‘아날로그정치’란 단어가 떠올랐다. 인간 없는 수치와 계측 논리로서의 ‘디지탈정치’에 대한 대칭항으로서일 것이다.
2. 공인중개사 수험생. 아직도 데모하는 진짜 이유.
재시험을 본다. 사법시험 수준에 가깝도록 하는 방식을 완전히 벗어나려 한다. 그래도, 아직도 데모는 계속 되고 있다.
일반인들의 생각으로는 납득 하기 어렵다. 모의고사 성적으로 일관되게 고공행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입 수능 한번만 봐본 사람이라면 말이 안된다고 알 수 있는 주장만을 골라서 하는 차원이 답답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대상에 몰입해서 그 몰입이 좌절당했을 때의 느낌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아직도 성이 안 풀린 수험생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서비스’(?)라고는 변별력을 상실하게 출제한 이들에 대하여 상징적인 벌을 가할 것이란 수준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여인을 사랑하여 연애사건과 상관없는 불의의 사건으로 헤어지게 되었던 이의 상처와 연민의 마음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 무엇을 남긴다.
자기 인생에서 잠긴 시간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비용이 크게 지불되면 그러할 수록, 그 대상은 자기에게 절대절명으로 소중하게 된다. 이것은 이승환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나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말해준다.
내가 인터넷에서 글을 자꾸 끄적이게 했던 힘의 원동력은, 중개사 시험생의 울분 비슷한 것이 백곱절 천곱절 만곱절 더해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나는 단 한번도 ‘정치’개념으로 발언 한 적 없다.
3. 이북 실향민을 싸잡아 매도하는 지식으로 포위된 대학 인문 지식 속에서,
다음 인터넷 광고에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어피니언 리더’란 표현이 적혀 있다. 그것은 [조선일보]에서 90년대 초중반에 가장 많이 쓰인 표현이다. 박사모 게시판에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 낙서를 적자 마자, 1시간만에 동아일보 어느 신문 기자님이 그 낙서글을 바로 인용하는 기사를 써주셔서, 많이 당황스러웠다. 인터넷 게시글이 얼마나 빨리 신문 기사에 반영되는가 하며, 디지털 시대의 속도에 넋이 조금 나갔었다.
박지만님이 부친의 명예에 대해서 울분을 가지는 차원은, 10여년 전쯤 이북 실향민을 싸잡아 매도하는 지식의 포위에서 내가 가졌던 울분 속에서 이해가 너끈히 되고도 남았다. 나는 늘 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존중해야 한다는 역사가의 포폄의식을 別論으로 하는 차원에서, 영웅주의적 시각에 대해서 비판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상인으로서 살아간 단지 ‘공산당’이 나쁘고 사악하다고 아는 수준의 소시민들의, 현재 주류 우파들 선배 세대들이 싸잡아 비난당하고 나서, 박대통령이 정조준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권 여학생과 짧았던 추억 긴 여운을 가진 속에서, 운동권 여학생의 부친 이야기에서 대학가에서 입을 열기가 두려울 정도로 비난의 딱지로 범벅되는 역사지식이 자리했다는 것에서 많은 한스러움을 가졌었다.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나는 독자적 작업을 통해서 그러한 좌익 지식의 포위 속에서도 나만의 과제를 이행하려 했다. 修身을 아무리 해도, 넘을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면, 나는 어설픈 기대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북 실향민 2세로서 자의식을 분명히 느꼈다. 그러니, 좌파 지식에 대해서 학문논리로서 가능한 ‘크로스체킹’을 통해서, 좌파 지식의 사악성을 지적하려 했다. 펄 벅의 [대지]를 봐도 그러하다. 세대가 바뀌면 다음 세대만의 독자적 사명이 있다. 이북 실향민 산소가 중요하며 사료로서 확인되고 기억되고 전수되어야 할 내용의 인식이 중요할 뿐이라고 나는 본다.
4. 저학력자=박근혜지지? 화이트칼러=열린당지지?
내가 뉴라이트가 마르크스주의 이념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진정한 사고의 전향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내가 뉴라이트를 조금도 신뢰할 수 없다고 확신한 것은, 나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라면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로 포위된 이념 판 속에서 제발 아닌 이야기하면서 대학에서 진리연구를 하고 싶어! 제발! 이런 법은 없는 거야! 라고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가? 그런데, 홍진표위원이 반김정일 논리를 세워준 것은 고맙지만, 우파 내부로 와서 전통적 우파 가치의 단절을 주장하는 모습은, 정말 과거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자기 편의에 맞추어서 사고 변화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변증법적인 논리로 ‘제3의 길’을 주장하는 그들의 타령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왜 그렇게 당당하게 드러난 현실에 대해서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대한민국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마오쩌뚱 노선에서 새로워 보였던 등소평의 노선도 결국은 공산당 노선이고, 제3의 길을 주장한 앤터니 기든스의 노선도 결국은 권력화된 유럽 좌파들의 발언일 뿐이다. 등소평 노선은 레닌공산당이 자본주의 노선을 처음부터 배척한 바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요소로 떡칠을 해도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일부에서 중국이 자본주의 요소가 있다고 하며 칭찬하는 모습은 온당하지 못하다. 중국의 세계 공장 흡수 원동력은 ‘공안’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 공산정치의 존재로 일어나는 저렴한 노동력 형성일 것이다.
나는 대학시절 내내 박정희 대통령이라 하면 맨날 욕을 해대는 대학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다. 정치적 주제에 동의하지 않아서 정치내용을 많이 넣어서 강의하는 강의시간에는 딴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버릇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 그들은 그때 그렇게 아팠을 것이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나는 나만의 자유가 거절되지 않는 한 그들이 그렇게 사고할 자유를 막을 이유도 없겠지.
나는 ‘뉴라이트’가 공산주의 서적을 보았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고, 반김정일노선에서 앞장 서는 것에 고마워 안하는 게 아니다. 다만, 마르크스 책 아니면 대학가에 발도 못붙이도록 설정된 속에서 자라난 이들을 대표하려 ‘자유주의’란 말을 앞세운다면, 인간의 양심으로서 해야될 수준과 하지 말아야 될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박대통령 시대에 왜 강한 검열관이 있었는가?
그것은 정반대의 의미가 달성되니 알 것 같았다. 글은 읽는 사람들을 묘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래서, 격변의 시대에 말과 글로 꼬여내는 것이 많을 때에 자기로 돌아가서 본질적인 것들로 기둥을 세우고, 달관의 경지로 살아가는 차원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대다수는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다. 언론이 주입한 틀을 배경으로 자기 생각을 집어넣을 뿐이다. 어느 언론에서 어피니언 리더는 마땅히 박정희대통령이 나쁜 넘임을 알아야 하고, 박근혜대표를 지지하는 것은 모자라는 일이라고 노골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어난다는 식으로, 똑똑한 이는 좌파가 되고 꼴통은 우파가 된다는 식의 논리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차원은 논리 세우기의 허울좋은 문제만으로 반박이 온전하지 않다. 도대체, 좌파들의 인문 사회학 물량공세가 어떠한 지경인가?
진정 인터넷에서 게시글 하나를 올리는 것을 ‘전쟁 단위’로 부를 수 있다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文弱이론은 좌파들에 감성영역 전쟁에서 ‘땡크’를 무제한 헌사하고, 우파들에겐 ‘새총’갖고 잘해보라고 하는 닦달에 다름 없다고 본다.
뉴라이트는 이념의 기본 골간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김정일을 반대하는 차원의 ‘좌익’을 기대한다는 것이, 중심 주체들의 운동 이념이면서 ‘원판불변론’으로 바뀌지 않는 성채일 것이다. 새는 고향에서 나서 어디를 거쳐서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간다. 헌법을 지키는 변호사 모임이 우리 헌법을 지켜야 하고 북한 헌법이 무서운 이유를 책을 낸 이외에 움직임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념화되었다고 하며 ‘시민을 위한 변호사’모임을 만들어서 뉴라이트 운동에 접속 운운하는 것은 전부 부질 없는 일이다. 우파를 말하기보다는 에둘러 비겁하게 ‘3의 길’을 말하고, 결국은 주된 관심영역을 ‘좌파’에 두고, 마르크스주의 이념 테이블을 조금도 안 벗어난다는 고백속에 반공에 대한 폄하는, 더 이상 볼 것 없이 완전히 속내를 본 상황이라 보면 적절하다. ‘反김정일좌익모임’이라고 했다면 아무런 불만이 없었을 수 있다.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의 사고를 국민국가적으로 이끄는 데는 일정한 수의 문화인들의 능력이 필요하다. 고립적이고 고답적인 신선놀음의 그것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전축에서 나온 클래식 음반이 마음에 감각의 골을 넣어주는 것은, 자기의 취향과 음감이 맞았을 때만 그러하다. 박대통령 시대에 박대통령의 근대화정치에 걸맞는 시대정신을 조합하고자 최선을 다했던 문화인들-우리는 그들을 ‘순수문학’인이라고 부른다. 근대화국가의 발전은 하나님의 의지와 같다는 차원일 것으로 본다-을 생각한다. 좌익의 이념 폭포수나 우파 이념을 병적으로 혐오하며 좌파 옷을 걸치되 김정일만 반대하는 문화 속에 떠 있다.
이러한 이념 테두리 속에서 진정으로 스스로 생각해서 독자적이고 개인적으로 사고하는 숫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요즘 들어서, 많이 배울 수록 필요 없다고 하며 적당히 다음 세대를 가르치면 책임 다하는 것이라고 하는 과거 시대에 많이 배운 엘리트들의 울분이 깊게 다가온다.
나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과거사법’을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에 터잡아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뉴라이트 같은 좌익의 옷을 입고 김정일을 반대해서 우파로 잘못 불려질 수 있는 차원에 대해서, 항변하여 지적할 수 있는 것이 헌법에 기초된 ‘평등권’으로 옹호될 수 있는 차원을 말한다. 나는 헌법에 기초된 평등권을 사용하면서 대학가에서 학문의 자유를 주장하며, 대한민국에서 꼭 필요한 연구를 하는 젊은 세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기를 포기하는 기성세대들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네트워크 만들어서 오래 걸려야 실제로 써먹는다는 말은 잘못이다. 우파 세력이 결국 대한민국을 회복 시키고 강대국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면, 미래의 씨를 언제든지 뿌려야 마땅한 것이다.
헌법에 기초된 평등권으로 좌파지식을 학문의 자유 차원에서 공격하면, 우파 아닌 이념을 가지고 우파라고 우기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더불어서 해야만 순수하게 합리적 논리일 것이다.
5. 좌파들의 디지털 경제 육성을 통한 박대통령 근대화정치 흉내. 직장 숫자의 절대적 상실로 아파하는 이들을 제대로 알았다면, 직장 숫자를 더욱 줄여야 하는 디지털 경제만 ‘올인’하는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
나는 후배들이 무리 지워서 둘러싸고, 선배인 나에게 안되면 책임을 넘기고 잘되면 그들이 잘난 것으로 하는 시스템에 꼬여서 꽤 많이 눈물을 흘렸었다. 박근혜 대표는 우파 시민단체에 내가 당했던 그 시스템에 걸린 듯 하다. 오히려, 이제 진짜 필요한 것은 차기의 경쟁력 있는 대권 주자를 보호하는 시간이 맞을 것 같다. 학교를 제대로 못 맞치고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주렁주렁 달린 사람들을 부양하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때 정서로 본다면, 후배들이 무리지워 안될 경우만 책임을 떠넘기는 차원은 나쁜 게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나는 단 한번도 대학 사회에서 대학 선배로서 누릴 상징적 입장을 누린 바 없게 되었다.
좌파들은 박근혜 대표가 전공이 공과대학 쪽임이 꽤 신경 쓰인 듯 하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근대화 정치에서 국민소득 기준으로 국민 단합을 이룬 방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런데, 진짜 박대통령을 닮고자 했다면 ‘아날로그’마인드를 알아야 했을 것이다.
직장 숫자의 절대적 감소로 아파하는 이들이 다수인데, 직장 수의 더욱 더 감소를 추구하되 장부상의 수치상의 성장만을 도모하는 ‘국민소득’타령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바가 아닌 것이겠다.
한때, 우파 세력들조차도 디지털 경제를 박대통령의 근대화정치의 고용효과 커다란 경제로 헷갈린 바 있다. 어느 신문에서 디지털 경제의 그늘이라고 고용확장에 전혀 도움 없으며 아날로그 경제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란 주장을 생각해 봐야 된다.
대한민국 우파 정치는 본래 아날로그 정치이다. 지도자의 도덕은 얼마나 국민의 아픔을 함께 같이 느낄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고현정은 과거에 애국가 자막만 올라가면 눈물이 난다고 해서, 이홍렬쇼의 이홍렬을 감동시킨 바 있다. 정치 지도자는 마땅하게 ‘애국가’를 들으면 눈물을 흘려야 한다. 특히, ‘충성을 다하여’..... 하는 구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가며, 자기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지도자임을 알고 겸손해야 된다.
아날로그 정치는 인간의 흐름이 중심이다.
학생운동권도 아니면서 좌파보다도 더 사회과학서를 읽어보면서, 결국은 자유주의 철학 밖에 없다고 느끼면서, 이제는 운동권 경력자들에게도 진정으로 자기를 버리는 통 큰 입장을 보여주던지 솔직하고 진실되게 처신하라는 주장에서 마음의 울림이 있다면.
이북 실향민은 덮어놓고 부정되고, 대한민국우파 연구는 영웅지도자연구만 하라는 차원에서, 답답해서 내가 반드시 이 억압을 깨뜨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음에 울림이 있다면,
6. 북한 김정일의 붕괴를 기다리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
國破山下在 란 두보의 싯구가 깊게 다가온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의 확장으로만 정의한다. 이것을 따라가지 않는 어떠한 통일도 헌법에 불합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전통을 연구하게 하는데 지원이 멈춰지는 상황의 고사상태에서 벌어질 통일을 반기는 정신 나간 이들이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 전통에서 최대한 멀어질 때 사회가 바뀐다고 믿고 있기 까지 하다.
결국, 대한민국 국어국문학의 제정신과 대한민국의 제정신이 먼저 중요하다. 그 속에서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해결된다. 먹고 살기에 바쁜 이들에 세뇌시켜서 우파에 손가락질 하도록 하는 문화인 “경제적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 정치(국회)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에, 정치 아닌 차원에서 진리성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줄 문화는 어디에 있어 보았던가?
국가체제를 넘어서는 문제는 군주의 국민에 대한 의무보다는, 지도자로서 ‘내똥 굵다’하는 차원이 반드시 게재된다. 물론, 북한의 김정일 붕괴는 국제 사회에서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김정일의 붕괴를 바라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 열고 바라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제정신찾기가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중시는 반드시 완벽하게 다르게 반백년을 살아온 북한체제에 대한 경계심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눈감아야만 화해가 된다는 것은, 또라이가 되는 게 화해가 된다는 차원이란 말이 된다.
성탄절야 동남아 휴양지에서 벌어진 대재앙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지 속에 거하는 자는 안전하다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시비 걸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띄운 소란 여부가 크다. 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주일을 잘 창기라는 예시를 목적으로 했던 설교였을 뿐이다. 제3의 길 운운하면서 어중간하게 있거나 ‘통일’운운하면서 대한민국 전통에서 멀어지는 영웅심리 과시는 엿을 드셔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우하는 대한민국 의지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사실상 만들었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김윤식교수의 문학사에서부터, 한국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전통을 등지고서도 통일논리에 걸신들린 우파들이 만든 대한민국정신 오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우파 세력이 검증한다고 허락했던 좌파 지식들의 90%이상은 허위 전향이었거나, 지성의 힘이 조악하여 좌파들의 악의를 읽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 점도 파헤쳐 져야 한다.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평등권을 우파 젊은 세대들에 선물하여, 대학 사회에서는 진리 탐구의 이름으로 좌파 세뇌공작에 저항하는 성역이 형성될 수 있다면, 북한 김정일체제가 붕괴되어도 대한민국은 생동력 있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왈 맹자왈 하자는 게 아니다. 좌파들이 벌린 지식 사회의 엉터리 판을 깨는 데에서, 대중들이 인정할만큼 진지한 극복을 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우파도 어느 정도 판이 되어야 한다. 판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박근혜 대표의 지도력도 흔드는 보스적 논리의 개혁은 그래서 요구된다.
아날로그 정치가 영원히 새롭다. 인간의 감정은 수치가 아니라 흐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정치는 쉽게 낡는다. 디지털 정치란 말을 쓰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40년전 한국사회식 실증주의 신봉자이다. 지금은 하나의 단어가 만드는 상호적인 의미망의 동시이해가 필요한 때이다. 수치적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자리’확장과 국민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문화의 힘일 것이다.
김정일정권의 붕괴 이후에 중국에 복속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차원에, 우리의 현실 반성 먼저 안하는 이들이 의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