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네팔에서는 한 주일에 45시간 정전이 된다. 공지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실제는 그보다 더 많이 전기가 나간다. 건기인 지금은 10월 중순이후 한 번도 비가 오지 않았는데, 수력에 의존하는 발전량이 점점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비실비실하는 전압에 형광등은 아예 불이 켜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니 전기를 쓸 수 있을 때도 마음이 편치 않다. 궁리하던 끝에 며칠 전에 재활용 스탠드를 만들었다. 주워두었던 고장난 전기 소켓, 어딘가 쓸 거라고 챙겨둔 전깃줄을 감았던 원통, 쓸모없이 된 멀티탭의 플러그, 여기에다 창고가 너무 어두워 교체했던 5촉짜리 전구, 이것들을 고치고 조합하니까 한 개 스탠드가 되었다.
이야, 이런 행운이, 한 푼도 들이지 않고 멋진 스탠드가 생겼다.
이곳은 내게 일종의 ‘유리(羑里)’이다. ‘유리’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나오는 소설 속의 한 공간이자, 구도자의 이름이다. 유리는 원래, 은대(殷代)의 감옥 이름이자 그 땅 이름으로, 하남성(河南城) 탕음현(湯陰縣) 북쪽에 있는 유성(牖城)을 이른다. 은의 주(紂)가 주(周)의 문왕(文王)을 그곳에 가두었는데, 그 유배지에서 문왕은 복희씨가 그린 괘(卦)에 대해 총설하여 「괘사(卦辭)」를 완성했다고 한다. ‘유(羑)’자는 사람을 선(善)에 나아가게 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우주의 생성 원리와 자연의 이치를 밝히는 역(易)의 음양사상이 나온 산실이었던 바, 죽음 같은 유형지이자 생성의 땅이라는 양면성, 즉 음과 양, 죽음과 삶을 하나에 품은 양성성을 상징한다.
유리는 “마른 늪에서 고기 낚기”라는 화두를 가지고 황무지 유리를 살았다. 나는 부처님이 태어난 땅이 왜 이렇게 모순이 많을까 하는 단순한 의문을 가지고 지냈다. 모순이 답이다 보니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이런 말이 통할 수 있는 곳이다.
하루는 양라쉬에서 산보를 했다. 다 익은 배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같은 나무에 배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또 11월에 벚꽃이 만발했는데 북쪽의 랑탕은 설산이다. 이런 자연 현상은 말할 것 없고, 사람 사는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네팔 사람 이름은 모두 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노천 마구간에 놓인 신상(神像) 돌조각에조차도 날마다 뿌자(힌두교 예배)를 한다. 깨끗함과 더러움을 초탈한 모습이라 보기도 어렵고…좀 깨끗한 자리에나 놓고 절을 하지, 그건 내 생각이다.
백성은 반(半) 문명의 흙투성이로 살아가야 하는데, 관료들은 자기 이속을 챙기기 바쁘다. 그러니 제도권의 교육 내용이 제대로 되어 있을 수 없다. 내가 있는 사회교육센터의 유치원 아이들이 꿈나무로 자랄 수 있는 길,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금, 10개월 가까이 살면서 조금씩 진행된 것이 싹이 트고 있다.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를 보고, 등장인물 가면을 만들어 게임을 하면서 놀이와 학습을 결합시켰다.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 똥」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을 몇 차례 보면서 힌트를 얻었다. 번역이 안 된 자료이지만 교사가 아이들에게 변사처럼 설명하면서 뜻을 전달하게 했다. 그 다음에는 논바닥 흙을 퍼다 아이들에게 ‘똥’을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찰흙이 따로 필요치 않았다. 그 동안 영어, 네팔어, 산수 등 읽고 쓰기 중심으로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이 숨통이 트였다.
‘클린 네팔’을 모토로 해서, 자연, 몸, 마음의 청정을 하나하나 이해해 가는 특별 교육프로그램을 지금까지 14차례 진행했다. 지난주에는 ‘나누는 마음’을 게임으로 했다. 장난감을 차지하려고만 하는 것을 서로 주고받아 놀기, 꽃을 선물하기, 어머니에게 드리는 그림편지 만들기 등을 하고 난 다음, 한 아이가 라면과자를 나에게 선물했다. 그것을 다시 모든 아이들에게 나누게 했다. ‘쿠시 라교’(행복하다)가 터져 나왔다.
교사들과 토론을 하면서 재활용전기스탠드를 예로 들어 무엇이든지 교육교재가 될 수 있으니, 생각하면서 주위를 살피라고 했다. 그것이 또한 궁극적 교육목적 ‘클린 네팔’을 향한 희망이 된다고. 강아지 똥에서 민들레꽃이 피고, 네팔의 아름다운 자연의 가치가 만발하는 희망이 부처님 탄생의 땅을 새롭게 보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우리 센터의 개 ‘새해’는 다섯 마리 새끼를 낳아서 눈을 뜨는 것을 보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