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863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0-24 01:08
제 목 : [F/W] 글 쓰려 하오.
F/W의 타자 20˚입니다.
Future Walker 라는 요상한 제목의 환타지 하나 두드리려 합니다.
한 때 시리얼란에 D/R 이라는 해괴한 글이 올라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별로 재미도 없었습니다만, 감사하게도 적지 않은 분들이 애호해주셨던
글이었습니다. (그 때 그분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F/W 는 D/R 의 후속편이라 하겠습니다. 시점도 바뀌었고 주제도 다르
긴 합니다만 옛날의 그 인물들이며 옛날의 그 장소입니다. 그래서 처음
보시는 분들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되도록 설
명하겠습니다만 아마도 많이 모자랄 것입니다.
으윽. 무게 잡으며 말하긴 역시 힘들군요. 하하. 시리얼 여러분! 반갑
습니다. 작년에 두드리던 타자가 죽지도 않고 또 왔습니다. 재미도 없
는 글 또다시 지겹도록 올리는 거죠, 뭐.
어려운 시기에 같이 즐길 수 있는, 두드리는 타자와 읽는 독자가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만 총총.
번 호 : 8633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0-24 01:12
제 목 : [F/W] 그녀는 날지 않는다.....1
Future Walker
0. 그녀는 날지 않는다…………1.
회색산맥의 최고봉 미쥬르는 고집센 늙은이처럼 북방의 하늘을 노려보
고 있었다.
미쥬르가 뿜어내는 둔중한 은광은 대륙의 북쪽 끝, 산들의 고향 드라
일 산맥에 대한 그리움처럼 북방의 넓은 하늘을 가로질러 은은히 뻗어
가고 있었다. 미쥬르에서 뿜어진 은광은 북녘의 하늘을 온통 실버 비리
디언으로 물들이다가 오로라와 망각의 이사의 처녀들의 베틀에 걸려 극
광의 천을 짜는 씨실로 바뀐다.
그 은광이 시작되는 장소, 미쥬르의 희푸른 산자락 아래, 세 명의 기
수들이 서있었다.
두꺼운 구름을 힘겹게 뚫고 내려온 햇살이 세 명의 기수들에게 떨어졌
다.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악몽인 미쥬르산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도 세
명의 기수에게 햇살의 축복은 넘칠만큼 쏟아져도 좋을 것이다.
선두에 선 남자는 얼어붙은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어깨에 남아있는 눈
을 털어내었다. 눈은 대개 부드러운 것이었고 남자의 손결도 가볍게 시
작되었다. 하지만 곧 남자는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
흘 동안 어깨에 쌓여온 눈은 얼음덩이나 다름없었다. 어깨에 쌓인 다음
체온에 녹아 옷감으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얼어붙은 눈인 것이다. 남자
는 더 거센 동작으로 자신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퍽. 눈송이가 아니라 얼음가루가 비산한다.
제정신을 가진 자가 보았다면 자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친
동작이었지만 얼어붙은 손에도, 얼어붙은 어깨에도 별다른 감각을 느끼
지 못한 사내는 그 단조로운 동작을 계속하며 눈 아래 넓은 선상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자는 선상지 왼쪽의 언덕 위에
외로이 서서 회색빛 하늘을 이고 있는 오래된 석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재미있나, 그란?"
자신의 몸을 후려치고 있던 그란은 고개를 조금 돌렸다.
등 뒤에는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말에 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쭉 찢어진 눈꺼풀의 남자는 조금
마른 체격에 초췌한 표정이었지만 어깨를 편 자세로 당당하게 앉아있었
다. 하지만 그 옆의 붉은 머릿결을 찰랑거리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말
이 아니었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떨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
도로 맹렬하게 떨고 있었다. 그란은 잠시 측은한 눈초리로 여자를 바라
보았다.
"그렇게 껴입었으면서 얼어죽는 시늉을 하나."
여자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우흐히흐……고양이가 껴, 껴입었다고 추위, 추위 안타는 거, 거……
우에이!"
"우에이? 허헛."
그란은 여자의 괴이한 기침소리에 잠시 실소하고는 고개를 들어 회색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흘에 걸쳐 회색산맥을 돌파했다. 그들의 모든 추억과 지나온
날들의 아름답고 슬픈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지난
나흘 동안 이룩한 일만으로도 많은 찬사와 감탄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
다. 그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석비를 바라보았다.
즐겁다고는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흘에 걸쳐 가장 야만스러운 자연의 횡포 속을 묵묵히 걸어온 끝인지
라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교수대조차도 반갑게 보여야 할 처지였다. 설
령 그 끝에 시체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하더라도, 그란은 인간이 만들
었다는 것 때문에 교수대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
다. 하지만 저 석비는…… 인간을 넘어선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비의 거대한 위용은 그
대로였다. 차라리 석탑처럼 보일 지경이다. 까마득한 높이로 꼿꼿하게
서 있는 석비는 대지를 문자판으로 삼은 해시계의 시침처럼 보였다. 그
란은 대지에 그려지는 석비의 그림자를 보며 조금 아연한 기분을 느꼈
다. 세월의 손가락이 얼마나 스쳤을까. 미쥬르에서 불어온 눈보라와 폭
풍은 석비의 모서리를 모질게 깎아놓았다. 하지만 50 큐빗에 달하는 높
이의 석비는 세월보다 더 오래 간직되기를 열망하는 내용을 담은 채 꼿
꼿이 서있었다. 회색 바위들 사이에 서서 회색의 얼굴로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휘우웅. 산바람이 그란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바위틈에 쌓
였던 눈가루들이 휘날려 올라 잠시 주위가 어지럽다. 바람은 그란의 주
의를 끌어보려는 듯 그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그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석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곧 흥미를 잃고서는 위로 살짝 날아
올랐다.
거대한 석비를 바라보고 있던 그란은 텁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쓰여있는 거지?"
다시 약간 날카로운 그 목소리가 대답했다.
"Hegemonia di reacrize guef forew-laer."
곧이어 여자가 반쯤 졸도할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말 좋은 말, 말이야! 가슴 깊이, 가슴 깊이 새겨두고 시, 싶
어. 그런데 그게, 그게 무슨 뜻인데, 운차이?"
선두에 섰던 그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운명의 변화를 공언하고
있는 석비를 바라보았다. 석비는 마치 자라나는 것처럼 보였다. 바라보
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자라나 마침내 하늘을 찔러버릴 듯한 모습. 멀
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안도감을 느끼게 해 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란
은 싸늘하게 말했다.
"다시 쓰여진다고? 만일 처음부터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다면 어떻
게 되지?"
붉은 머리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때 운차이가 조용히 말했
다.
"다시 쓰여질 것도 없겠지."
운차이의 말을 마지막으로, 바람은 그들의 대화를 더 듣지 못했다. 인
간에게 있어 본능과 유사한 무엇이 바람으로 하여금 남으로 불게 만들
었다. 바람은 한쪽 지평선에서 반대쪽 지평선까지 이르는 그 거대한 망
토를 펄럭이며 조용히 남으로 날기 시작했다.
그녀는 북풍이 되었다.
저 먼 회색산맥의 짙은 우수를 담은 날씨는 남쪽의 바이서스 임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바이서스의 수도 바이서스 임펠의 하늘은 인간
의 표정에 비교해보자면 주변의 친구들이 모조리 무슨 일이 있냐고 물
어볼만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 사람들의 얼굴도 그러했다.
햇살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날씨였지만 봄철 특유의 약간 미지근한 듯
한 바람이 흐느적거린다. 북풍은 이 돌의 도시에 들어와서 주춤할 수밖
에 없었다. 그리고 북녘에서 태어난 이 점잖은 바람은 바이서스 임펠의
골목골목에서 불고 있는 보다 더 인상적인 바람에 놀랐다.
엄숙한 부인네들은 아침식사를 끝낸 개구장이들이 밖으로 돌진하려는
것을 붙잡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부
인네들에게 귀를 붙잡힌 개구장이들은 그들의 짧은 생애 동안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굉장한 구경거리를 놓치게 되어 극도로 절망한 표정이었
다. 그런 점에서 귀를 붙잡아줄 어머니가 없는 성인 남자들은 약간의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 의해 그 구경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바이서스 임펠의 칼브린로(路).
바이서스의 제 3 대 국왕이자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은 네 명의 왕 중
가장 빈약한 체구를 자랑했다는, 그래서 훗날 그의 동상이나 초상화를
바라보는 후대인들로 하여금 당혹감을 감추기 어렵게 만든 에리네드 대
왕의 오른팔 칼브린 장군의 이름이 붙은 대로다. 사두 마차 여섯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무지막지하게 넓은 대로였지만 오늘은 그렇게
넓어보이지 않는다. 누구든지 그 숫자를 세어보려고 들었다가는 두통을
느끼기 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칼브린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
다.
북풍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억제는 충분히 길었고, 마침내 군중 속
에서 씩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서커스는 시민의 것이다!"
긴장된 얼굴로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던 수도경비대원들의 얼굴에서 핏
기가 사르르 빠져나갔다. 군중들은 일제히 준비된 흥분 속으로 돌입했
다.
"서커스는 시민의 것이다!"
"서커스는 시민의 것이다!"
두번째 외침과 세번째 외침까지는 구분이 되지만 그 이후부터는 그저
끔찍스럽게 거대한 포효소리로 뭉쳐졌다. 시민들은 악다구니를 쓰듯이
외쳤고 주위에 늘어선 지붕은 들썩들썩, 새들은 포로롱포로롱 날아올랐
고 집안에서 어머니에게 붙잡혀 산수공부를 하고 있거나 혹은 탈출계획
을 짜고 있던 아이들은 더 못참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놈아! 어딜
가!" "으아아, 10분만! 5분만 보고 올게요!" "고맙구나, 아들아. 나를
웃기려는 거지?" "으아아! 나 엄마 자식 아니죠?" "어머나! 그걸 누가
말해줬지?" "엄마아악!"
대로에 운집한 사람들은 관습이 요구하는 죄의식과 이성이 요구하는
흥분감 속에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관습 : 그들은 귀족의 사
유재산에 대해 침을 흘릴 수 없다. 이성 : 서커스는 시민들의 그렇게
많지 않은 위락물 중 대표적인 것이다.
바이서스에서 서커스는 대대로 문화귀족의 소유물이다. 귀족들은 자신
의 사냥개나 말, 사냠매, 전속 악단 등을 육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
도에서 서커스단을 육성한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서커스단은 귀족의
재력과 품위, 그리고 사교활동에 지대한 도움을 준다. 트리키 서커스단
의 광대는 모둘빼기로 일곱을 넘는다더라. 핫하! 조스마인 서커스단의
광대는 아홉을 넘는다구! 금번 저희 여식아이의 결혼식에 백작님의 서
커스단을 보내주셔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오, 자네의 아들
이 드디어 어전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내게 작은 서커스단이 있으니 자
네 아들에게 축하연을 해주고 싶군. 기타 등등, 다종 다양. 그리고 귀
족가의 집사들은 년말 회계정리에서 서커스단의 명목으로 된 수입금을
보며 흐뭇해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의 품위를 수준높게 유지하고,
광대들은 귀족가에 고용됨으로써 생계를 수준높게 유지하고, 시민들은
서커스를 보면서 마음의 안정감을 수준높게 유지하고, 그리고 귀족가의
집사들은 행복하게 장부를 덮는다. 바이서스의 서커스는 모두를 즐겁게
만든다.
어제까지는 그러했다는 말이다.
오늘 아침 이 유서깊은 칼브린로에 사람들이 한둘 모여들기 시작할 때
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원래 교통량이 많은 길이
었으니까. 그러나 모여든 사람들이 질서있게 줄을 맞춰서자 경비대원들
은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 정말 느닷없이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 서커스단의 민영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불거
져나오자 이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게 되었다.
경비대원들은 발빠르게 시위대 앞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는 돌발행동
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들 자신이
먼저 돌발행동을 일으켜버릴 정도로 혼란에 빠져버린 얼굴들이었다.
각계의 반응 : 먼저 아직 이 소식을 전해듣지 못한 몇몇 귀족을 제외
하고 나머지 귀족들의 경우에는 모두들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아니, 도
대체 귀족이 아니라면 누가 서커스단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
고 광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거취에 대해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도대체 서커스단이 민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렇다면 그 때
의 생활수준은 귀족가에 매어있었을 때보다 더 높아질 수 있는가? 그리
고 집사들은 기민하게 시위 주동자를 찾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느 벼락
맞을 녀석이 귀족의 재산을 깎아먹겠다는 시도를 벌이고 있는 거야! 그
리고 시위대의 앞을 막아선 수도경비대원들은 5분에 한 명꼴로 미친듯
이 상부에 연락병을 보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리고 법조계 인사들은 근엄한 얼굴로 서커스단의 소유권이 귀족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은 법률적으로 하등 지지받지 못하는 일이며 오로지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 그러나 관습은 퍽 소중한 것이므로 함부로
평가내릴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논평을 거부했다.
이 일대 소란과 혼란 가운데서, 그러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
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사람은 북풍의 주의를 끌었
다. 북풍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날아올랐다.
지금 칼브린로 옆에 있는 작은 펍의 이층 발코니에서 커피잔을 앞에
둔 채 꾸벅꾸벅 조는 척하면서 아래를 훔쳐보고 있는 중년 사내는 히죽
이 미소짓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 사내는 중간 정도의 체구였지만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편
한 옷을 입고 있어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에게서는 황야의 향
취가 느껴진다. 약간 쇠락한 듯하지만 분연히 일어서면 만인이 겁에 질
리고 말 잠재된 힘의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겨나왔다. 하지만 지금 현재
그의 모습은 봄철의 온기 속에 조용히 잠들어있는 듯한 자세였고 그래
서 북풍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 펄럭거리는 망토를 살짝 틀어쥐
었다.
그 때 아래에서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서커스는 시민의 것이다! 귀족은 서커스를 해방하라!"
"서커스를 해방하라! 서커스를 해방하라!"
"귀족들은 광대들에 대한 착취를 중지하라! 광대들을 해방하라!"
"광대들을 해방하라! 광대들을 해방하라!"
중년 사내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시위는 인간미에 호소하는 방향으
로 전개되는 것이었다. 귀족가의 압제에 시달려 자신의 자유를 잃은 채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며 강요된 노동에 시달리는 광대들을 시민의 품
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실제로 양식있는 광대라면 이 말에
어이없어할 것이다.)
그 때 중년 사내의 뒤쪽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꽤 시끄럽군요. 안으로 옮기시겠습니까, 카알 씨?"
카알이라 불렸던 중년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는 펍
의 주인장이 겨드랑이에 소반을 낀 채 걱정스러운 태도로 물어오고 있
었다. 하지만 그 태도와 달리 그 얼굴은 아래의 시위대에서 뿜어져나오
는 흥분에 도취해서 벌겋게 변해있었다. 카알은 그 얼굴을 보고서는 다
시 히죽 웃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리테들 씨. 그런데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떠드
는 거지요?"
카알은 마치 그가 이 시위를 배후주동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질문했
다. 점잖은 카알 헬턴트 씨가 이 시위를 배후에서 주동한 사람일 거라
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리테들은 흥분해서 말했다.
"아, 그야 광대들을 귀족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지요."
"광대들을 해방시킨다고요? 왜죠?"
"아니, 모르십니까? 귀족들의 광대들이 무슨 취급을 당하는지?"
"글쎄요. 아시다시피 저는 수도의 사정에 밝지 못합니다만."
"아니, 그럼 정말로 귀족들의 서커스단에서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끌
어모아 강제로 물 대신 식초를 먹게 하고 침대 대신 상자곽에 쳐넣어
자게 하고 말을 안들으면 굶기며 채찍으로 때리곤 한다는 것을 모르십
니까? 이 시위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요."
카알은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 몹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그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카알은 전혀 모르는 척, 그러니까 식초를 먹이는 거야 뼈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것이고 상자에 들어가는 것은 마술의 속임수 연습이고 굶는
것은 체중을 줄이기 위한 것이고 채찍은 밧줄 묘기의 연습이라는 사실
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경악에 찬 표정을 지어보였다. 리테들은 더욱
흥분해서 갖가지 기괴한 소문들을 들려주었고 - 모서커스단의 여자 곡
예사는 아이를 셋이나 지웠다더라, 모서커스단은 장의사의 단골이라더
라, 다리를 부러뜨린 곡예사는 마법사에게 연구재료로 팔린다더라, 더
라, 더라. - 카알은 졸도할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그 헛소문
들이 전적으로 카알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리테들도, 그리
고 숨어서 듣고 있던 북풍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때 다시 우렁찬 목소리가 선창했다.
"광대도 사람이다! 귀족의 노리개가 아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우리들
의 아이들도 우리가 죽고나면 그런 취급을 할 것인가! 그럴 것인가! 우
리는 그렇게 내버려둘 것인가!"
"으아아!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시위대는 극도의 흥분 상태로 빠져들어갔고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
도 경비대원들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즉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것이다. 겁에 질린 상대의 모습은 시위대를 억누르고 있던 마지
막 장애물을 치워버리는 역할을 했고 시위대는 곧장 앞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서커스를 해방하라! 광대를 해방하라!"
용맹한 수도경비대원들은 줄행랑을 칠 때도 민첩했다. 시위대는 무서
운 기세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카알의 옆에 있던 리테들씨는 실례하겠습
니다…… 어쩌고 웅얼거린 다음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시위대의 다
음 행동을 구경하기 위해서 내려간 것이리라. 카알은 싱긋 웃으며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카알은 다시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자세로 돌아가버렸고 북풍은 그
천성대로 빠르게 흥미를 잃어갔다. 북풍은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갖추
었다. 남쪽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커피잔이 다 비워졌을 때 쯤, 발코니로 통하는 문을 통해 거대한 체구
의 남자가 들어섰다. 날아오르려던 북풍은 남자를 보고서 주춤했고 카
알은 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퍼시발 군."
퍼시발 군이라 불리는 이 사내의 체구는 정말 대단했다. 북풍을 붙잡
아둘 정도로. 그러나 그 오우거를 연상시키는 얼굴 위로 칭찬에 당혹해
하는 순진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은 카알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샌슨 퍼
시발은 머쓱한 표정으로 히죽 웃고서는 카알의 맞은 편에 앉았다. 막대
한 엉덩이에 짓눌린 의자가 불길한 신음을 내뱉었지만 샌슨은 아랑곳하
지 않고 말했다.
"아이고, 이 짓 두번은 못하겠습니다."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북풍은 조금 전 대로에서 고래고래 선창
하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샌슨은 이마에서
땀을 훔치며 말했다.
"자, 이제 끝난 것입니까?"
"그런 것 같네."
"그럼 말씀해주실 차례군요. 켁켁! 아이고, 목이야."
"말씀이라니?"
"도대체 왜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야 되는 겁니까? 원. 이런 짓이
라면 후치 녀석에게 맡기면 더 잘할 텐데. 도대체 그 굉장하다는 이유
가 뭡니까?"
"글쎄…… 음. 퍼시발군. 자네가 탑을 쓰러트려야 될 일이 있다고 생
각해보게. 즉각 탑으로 달려가 부딪히겠는가?"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대답했다.
"그 탑의 재질이 뭐냐에 달린 문제군요. 일반적인 탑이라면, 그럴 필
요를 느끼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귀족들을 무너뜨려야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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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작했습니다.
밤은 새벽으로 날아가고 환타지의 뮤즈는 여러분들에게로.번 호 : 863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0-24 01:14
제 목 : [F/W] 그녀는 날지 않는다.....2
Future Walker
0. 그녀는 날지 않는다…………2.
"글쎄요? 조나단 아프나이델씨가 말씀하시길 반역 혐의를 뒤집어씌우
거나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다더군요. 아,
그렇잖아도 그 분께서 왜 이런 해괴한 짓을 하시는지 여쭤보라고 하시
더군요."
지금 바이서스 임펠의 한적한 펍에서 바이서스의 귀족계 전체를 무너
뜨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당사자들은 태연한 태도들이었다. 대
단한 자신감들. 카알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음. 그런가. 자네는 그 분 때문에 질문하는 것이었군. 어쩐지 이상하
다 했지."
"음? 그 말의 의미가 뭐죠?"
"아, 아닐세. 어쨌든 그런 방법도 있지. 하지만 그런 방법은 부작용도
크네. 귀족들에게 위기의식을 줘서 오히려 그들을 단결시키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좀 돌아가는 방법이지만 부작용이 없는 수단을 강
구하는 거라네."
"음. 기억하기 좋게 요약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러지. 나는 지금 탑의 작은 기와를 들어내고 있네. 기와를 들
어낸다고 해서 탑이 무너질 리는 없지. 그 다음에는 천천히 서까래를
들어내고 기둥에 조금씩 흠집을 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격을 가
해서 탑을 쓰러트릴 생각이네."
샌슨은 잠시 멍한 얼굴로 카알을 마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약이 너무 심하게 된 겁니까, 아니면 제가 좀 모자라는 겁니까?"
"하하…… 글쎄. 음. 자네가 귀족이라고 생각해보게. 보잘것없는 광대
들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불미스러운 소문의 원흉이 된 귀족 말
일세."
샌슨은 자신의 이마를 딱 치며 말했다.
"아아! 조금 이해하겠습니다."
카알의 계획은 단순했다. 귀족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랑거리인 서커스
단을 오히려 부담스러운 짐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은 높
은 서커스 관람료에 불평을 터뜨리는 서민들의 속마음과 맞아떨어지며
조금 전과 같은 시위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었다. (물론 바이서스 임펠
의 시민들은 그들이 고통받는 광대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고 생각하
고 있 지만.) 카알은 싱긋 웃었다.
"자랑스럽네. 귀족들은 보잘 것 없는 서커스를 버리겠지. 그리고 자네
가 열심히 살핀다면 귀족들의 재산들이 하나씩 하나씩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걸세. 귀족 소유의 서커스?
시민에게 돌려줄 것. 귀족 소유의 사냥터? 농사꾼에게 돌려줄 것. 귀
족 소유의 공방? 공인들에게 돌려줄 것. 귀족 소유의 도서관? 그건……
돈은 없으면서 책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돌려주면 좋겠는데. 하
하."
샌슨은 빙긋 웃으며 동시에 감탄했다.
"그렇군요. 카알은 귀족들의 발 밑을 조금씩 파낼 생각이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좀 이상한데요?"
"뭐가 말인가?"
샌슨은 목을 좀 가다듬은 다음 주의깊은 태도로 질문했다.
"저, 엇그제 귀족원에서 모직 길드의 전매권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습
니까? 귀족들은 길드장에 피선임될 수 없다는 전통이 위법이라는 결정
말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카알이 그 결정이 통과되도록 한 거지요?"
"그렇지."
"왜 그렇게 한 거죠? 모직 길드는 돈을 갈퀴로 긁어들이는 곳입니다.
바이서스의 모든 모직제품을 그곳에서 다룬다고요. 귀족들의 기반을 무
너뜨릴 생각이시라면, 왜 귀족이 길드장이 될 길을 열어주신 겁니까?"
샌슨의 질문이 끝나자 카알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은 질문일세. 자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지극히 깊어 졸도할 지경
일세, 하하하!"
샌슨은 웃고있는 카알의 얼굴을 불안하게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칭찬하신 거죠?'
"하하. 퍼시발군. 모직제품은 지금으로서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 하지
만 그건 조만간 끝장이야."
"예?"
카알은 샌슨의 질문을 못들은 척하며 나직한 어조로 혼잣말하듯이 말
했다.
"자네 말마따나 모직 길드는 돈을 갈퀴로 긁어들이는 곳이지. 그리고
위법결정이 난 이상 많은 귀족들이 모직 산업에 뛰어들겠지. 그리고 모
직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게 될 때, 귀족들은 모직 산업과 함께 석양
으로 물러난 노인네 신세가 될 거야…… 하하……"
샌슨은 눈을 커다랗게 꿈벅거리다가 간신히 해답을 떠올렸다.
"모직 산업이 망한다고요?"
카알은 여전히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양은 끝이야. 앞으로 10년 이상은 절대로 못가. 그리고 면직 제품이
그 뒤를 잇게 되겠지…… 모든 전쟁에는 공통점이 있는 법. 전쟁이 끝
나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는
경지면적의 부족을 야기하게 될 테고 양모산업은 자연히 위축되게 될
터…… 양모 산업은 귀족들의 참여 덕분에 마지막으로 한번 빛나게 된
다음 급격히 몰락하게 될 테고, 전재산을 양모에 투자한 많은 귀족들은
연쇄도산하게 되겠지. 그런 종류의 비극에는 비장미도 없지만, 황혼의
빛을 띄는 것들이 대부분 가지는…… 메마른 슬픔은 충분하겠지……."
카알은 꿈꾸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거의 졸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듣고 있던 샌슨은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그의 눈 앞
에 있는 그의 좋은 친구 카알은 옹색한 모습으로 허름한 펍의 발코니에
앉아 10년의 미래를 담담한 자신을 담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웅얼거리던 카알은 갑자기 기지개를 폈다.
"으음. 졸리는데."
샌슨은 조금 전에 느꼈던 약간의 오싹함을 잊고서는 대신 측은함을 느
꼈다. 카알은 요며칠 제대로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귀족원의 모직길드
장건과 이 시위를 준비했었다. 샌슨은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잖습니까. 이제 뒷처리는 제
게 맡기시고 들어가 쉬시지요."
카알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로넨 휴리첼씨는 시위대에 그대로 있겠지?"
"예."
"그럼 휴리첼씨께는 사태의 추이를 살피다가 오후 적당한 시간에 어제
알려준 서커스단 중에서 자의로 하나를 골라서 공격하라고 전하게. 많
은 수를 공격할 필요는 없네. 하나만 공격하면 돼. 귀족 녀석들, 조금
오싹하겠지."
"그건 어제도 말씀하셨던 겁니다."
"중요하니까 또 말하는 거잖나. 그래. 음…… 그리고 또 뭐가 있더
라……"
카알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어서 샌슨은 그
가 잠든 줄 알고는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카알은
천천히 일어났다.
"아, 그래. 논문이 있었지."
"예? 논문이오?"
카알은 일어나서는 다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서는 말했다.
"으아하하암. 쩝, 그래. 논문 하나를 써야돼. 우생학에 대해. 근친교
배는 열성인자의 대량발생을 야기시키므로 우생학적으로 불리함. 어쩌
구 저쩌구. 오크 산수공부하는 소리를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야
돼지. 참 재미없는 일이지만."
"아니, 뜬금없이 논문이라니오?"
카알은 씩 웃으며 샌슨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응. 한 두어달 뒤에 귀족들의 사촌간 결혼을 금하는 법률을 귀족원에
서 통과시킬 생각이네. 그 때 참고자료랍시고 제시할 것이 필요하거
든."
"예? 아니……"
카알은 그야말로 해맑게 웃었고 그래서 샌슨은 다시 오싹함을 느꼈다.
"아, 기대해도 좋네. 귀족들의 피를 좀 흐려줄 생각이네. 그리고 근친
간의 결혼을 통해 가문의 재산을 계속 보존하는 것도 방해해주고."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귀족들은 대개 같은 귀족들이나 사촌간에 결혼한다. 그것은 품위의 문
제도 있지만 실속의 문제도 있다. 같은 가문 내의 남녀끼리 결혼하는
것은 가문의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보호하는 의미가
있다. 카알은 바로 그것을 깨트릴 의도임을 고백한 것이다. 샌슨은 떨
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카알이 그런 논문을 쓰면 누구나……"
"물론 내 이름으로 발표할 리는 없지."
"그러면?"
카알의 눈에 갑자기 빛이 번득였고 샌슨은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
았다. 카알은 샌슨의 곁을 지나치며 한가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기억해두게. 저 용맹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동
시에 갖춘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공의 이름으로 발표할 생각이
네. 나는 그런 글 쓴 적이 없다는 식으로 말해서 산통 다 깨서는 안
돼."
수식어가 지나치게 길었기 때문에 샌슨은 조금 후에서야 그게 무슨 말
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맙소사, 카아아알!" 조금 전에 고함을 너무
많이 지른 덕분에 샌슨의 비명소리는 대단히 듣기 거북했다. 카알은 낄
낄거리다가 갑자기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북풍을 놀라게 만들었다.
"바람이 남으로 부는군……."
북풍은 훔쳐듣고 있던 것을 들키고 말았다는 말도 안되는 당혹감을 느
끼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빠른 속력으로 남으로
날기 시작했다.
북풍의 자유로운 비행은 갈색산맥에 접어들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
다.
복잡한 것이 싫다면 단순히 산맥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갈
색산맥은 단순히 산맥이라 불리워질만한 지형을 넘어서는 무엇임은 분
명했다. 지리학자들의 말로는 대륙중앙조산대에 해당하며 마법사들의
말로는 마나 월에 해당하는 이 갈색산맥은, 바람에게는 그녀의 습기를
모조리 빨아내는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흡수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북쪽
에서 불어오는 습기찬 바람은 갈색산맥에 부딪히며 일종의 휀 현상을
일으킨다. 높은 고도로 올라가며 바람 속의 습기는 모두 빗방울로 응결
되어 떨어지며, 따라서 갈색산맥을 넘은 바람은 건조하고 메마른 바람
이 되어 갈색산맥의 남쪽 사우스 그레이드의 대기를 바스락거리는 것처
럼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지금 갈색산맥을 넘어서는 북풍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휘우우웅.
휘우우웅.
갈색산맥은 요지부동이었고 그 이마를 감도는 산폭풍은 가혹했다. 사
용될 수 없는 언어들로 이루어진 역경을 거친 끝에, 북풍은 간신히 갈
색산맥을 넘어섰다. 갈색산맥을 넘기 위해 가혹한 댓가를 치러야했던
그녀는 기진맥진한 채 숨을 돌렸다.
북풍은 습기를 머금기 위해 낮게 날기 시작했다.
이파실시의 상공을 날고 있던 그녀는 무언가가 자신의 주의를 끄는 것
을 느꼈다. 정신을 수습한 다음 주위를 돌아본 북풍은 이 메마른 대기
속에 울리는 맑은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저쪽이다! 잡아!"
상당히 다급한 어투였지만 북풍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다급한 어투
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맑고 명랑했던 것이다. 마치 재미있는 일이
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북풍을 움찔하
게 만들었다.
두개골이 쪼개지기 전에는 두뇌에 바람이 닿기는 어렵다. 북풍은 이
해괴한 협박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둘러보기 시작했고, 곧 이파실 시
의 넓은 길을 달려가고 있는 두 개의 크고 작은 형체를 발견했다. 펑퍼
짐한 로브자락을 양손으로 들어올린 채 달려가고 있는 젊은이는 아무리
보아도 프리스트의 모습이다. 첨언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프리스트답지
못한 동작으로 달려가고 있는 프리스트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거대한
배틀 엑스를 마치 지휘봉 휘두르듯이 휘두르며 달려가는 드워프의 모습
은 북풍에게 꽤나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파
실 시의 시민들도 꽤나 감명받은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인간과 드워프는 지금 무언가를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북
풍은 그들을 앞질러 나아갔고, 곧이어 그들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 깨닫
고는 아연해졌다. 그러나 그녀가 아연함을 표현하기도 전에 젊은 프리
스트가 여전히 쾌활한 어투로 외쳤다.
"하하하! 이 녀석! 드디어 잡혔다. 나와요, 아프나이델!"
북풍은 추격대상의 앞쪽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나오는 하얀 로브의 젊
은이를 볼 수 있었다. 젊은이는 광대뼈가 약간 도드라진 근엄할 듯한
얼굴의 마법사였지만 지금은 전혀 근엄하지 않았다. 아프나이델이라 불
린 그 마법사는 두 팔을 벌려 길을 막듯히 하기는 했지만 그 얼굴에는
걱정과 불안, 그리고 위기의식을 넘치도록 담고 있었다. 그는 프리스트
와 드워프의 추격대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자. 이제 막혔단다. 그러니 그만 달아나는게 어떻겠니…… 오지
마! 젠장!"
추격대상은 두 팔을 벌려 앞을 막아선 아프나이델을 보더니 주춤하며
달리던 것을 멈췄다. '그것'은 긴 목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고, 뒤를 쫓
아오는 프리스트와 드워프의 모습은 북풍이 보기에도 끔찍스러웠다. 프
리스트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는 않았지만 그 옆의 드워프의
경우에는 오거라도 잠시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는 반응
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심을
굳혔다. 재빨리 몸을 돌린 '그것'은 앞을 막아선 아프나이델에게 달려
들었고 아프나이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대해졌다. '그것'은
물리면 꽤 아플 듯한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캬아아악!"
겁에 질린 아프나이델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올리고 말았다.
"오우, 안돼. 파이어볼!"
"히익! 파이어볼이라고!"
추격하던 드워프는 기겁하며 땅으로 몸을 날렸다. 파우우욱! 아프나이
델이 쏘아낸 거대한 불의 공은 비록 발악하듯 발사한 것이지만 목표물
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숙달된 솜씨. 하지만 '그것'은 가볍게 날
개를 퍼득여 옆으로 몸을 피했고 그러자 불의 공은 그 뒤의 젊은 프리
스트와 땅에 쓰러진 드워프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드워프는 미친 듯
이 외쳤다.
"제레인트! 막아라! 안돼면 몸으로라도 막아!"
화르르르! 공기를 불태우며 무섭게 날아드는 파이어볼에도 불구하고
제레인트라 불린 프리스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드워프를 바라보며 말
했다.
"엑셀핸드! 그런 식으로 속마음을 노출시키는 것은 노련하지 못하다는
증거라구요."
제레인트의 눈은 드워프를 보고 있었지만 날렵하게 움직인 그의 손은
그의 품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휘황찬란한 디바인 마크를 꺼내었다. 제
레인트는 허리를 크게 뒤틀며 팔을 당겼다. "으아아압!" 기합과 함께
제레인트는 디바인 마크를 쥔 손을 힘껏 앞으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아프나이델이 쏘아낸 파이어볼은 제레인트의 손에 부딪히며 맹렬한 폭
음을 내었다. "오, 맙소사. 유피넬이여!" 이파실 시의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 한가운데서 일어난 이 전대미문의 광경에 기겁했다. 제레인트는
파이어볼을 튕겨낸 것이다. 제레인트가 튕겨낸 파이어볼은 허공을 향해
끝없이 쏘아져올라가 잠시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뜨는 듯했다. 제레
인트는 고개를 휙 쳐들어 하늘을 보더니 자신의 위업에 감탄하며 외쳤
다.
"테페리, 좋았어요!"
훗날 이파실 시에는 그들의 도시를 지나던 한 프리스트의 믿기 어려운
전설적 위업에서 유래된 독특한 구기 종목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날아드는 공을 손에 쥔 채로 쳐내는 그 구기 종목의 이름은 그 놀라운
전설에서 테페리, 좋았어요(It's nice)! 라고 외친 프리스트의 고함소
리에서 유래되게 되었고, 테페리나이스라는 긴 이름은 게으른 후손들
에 의해 축약되어 다른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어쨌든 당장 목숨의 구원을 받게 된 엑셀핸드라는 이름의 드워
프는 한숨으로도 땅을 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듯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뻔했네…… 으아아악! 저 빌어먹을 녀석, 붙잡아!"
제레인트는 잠시 이 호칭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혼동을 일
으켰다.
"누구요? 아프나이델? 아니면……"
"물론 저 조상 망신 혼자 다 시키는 녀석!"
=================================================================
음… D/R을 읽으셨던 분은 아시겠지만 제레인트가 지니고 있는 디바인
마크는 테페리의 교단에서 보물로 취급하는 아티팩트입니다. 그리고 제
레인트는 흔히들 죽어봐야 제정신을 차린다고 말하는 그 유명한 성격이
지요. 즉 앞뒤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일이 가능했습니다.
아, 무단도용을 금한다는 말 해두렵니다. D/R 연재 당시 그 일 때문에
속 좀 상했거든요. 그러시지 말아주세요. 예에? (누가 가져가고 싶기나
한다던? …음.)번 호 : 863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0-24 01:14
제 목 : [F/W] 그녀는 날지 않는다.....3
Future Walker
0. 그녀는 날지 않는다…………3.
엑셀핸드가 가리키는 '그것'은 지금 주저앉은 아프나이델의 앞쪽에 주
저앉은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것' 역시 제레인트가 보여준 이
놀라운 묘기에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엑셀핸드의 고함소리에 정신
을 차린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앞에 멍청하게 앉아있는 '그것'을 보고서
는 퍼뜩 좋은 기회임을 깨달았다. 아프나이델은 조심스럽게 '그것'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것' 역시 엑셀핸드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야아
압! 잡았…… 을 수도 있었어. 으윽, 턱이야." 아프나이델의 회심의 기
습은 빗나갔고 '그것'은 땅에 턱을 박은 아프나이델의 등을 넘어 달아
났다. 황급히 달려온 제레인트는 아프나이델을 부축하며 밉살스럽다는
듯이 '그것', 그러니까 골드 드래곤의 해츨링을 노려보며 외쳤다.
"이 못된 녀석아! 돌아오기만 해봐라, 목에 개목걸이를 채울 테다!"
"캭캭!"
골드 드래곤의 해츨링은 그 품위 저조한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
개를 펄럭거리며 부지런히 달려갔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비늘은 성
체와 마찬가지였지만 덜 자란 날개는 아직은 도마뱀과의 혼동을 피할
수 있는 차이점 외의 역할은 못하고 있다. 그 머리도 다른 동물의 새끼
에 비해보자면 멋진 비율이긴 하지만 아직은 몸과의 대비에서 볼 때 좀
커다란 편에 속해서 앙증맞아 보이기도 한다. 크기는 대략 커다란 개와
송아지의 중간 정도. 설령 아프나이델이 붙잡았다손 치더라도 오랫동안
붙들어놓지는 못했을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 거대한 횡포가 달려가는
곳에서는 펄쩍 뛰어오르는 사내, 자지러지는 계집아이, 그리고 경비대
원에게 물동이를 집어던져버리는 처녀, 그리고 물동이에 맞아 기절해버
리는 경비대원 등이 발견되었다.
뒤뚱뒤뚱 달려온 엑셀핸드 역시 제레인트의 반대쪽에서 아프나이델을
부축하면서 노한 목소리로 구슬프게 중얼거렸다.
주위의 이파실 시민들은 못된 돼지나 개를 쫓는 사람의 모습과 골드
드래곤의 해츨링을 쫓는 사람의 모습에서 차이점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서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나서야 그들은 골드 드래곤의 해츨링을 마
치 못된 애완동물이나 되는 것처럼 쫓아다니는 일행의 모습이 얼마나
기괴한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감히 일행에게 다가설 엄두도 내
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간과 드워프의 일행은 대로의 저편으로
달아나며 캭캭거리는 해츨링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주위에는 신경도 쓰
지 않았다.
북풍은 이 광경의 결말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쪽으로부터의 소환은
그녀의 발길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북풍은 잠시 젊은 프리
스트의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든 다음 남으로의 발길을
재촉했다.
남녘으로 날수록, 북풍은 극도의 흥분을 느꼈다.
주위의 거대한 힘은 남으로 나는 북풍을 거칠게 방해하고 있었다. 그
것은 기상학자들이나 선원들이 말하는 편서풍으로 그녀의 진로와는 완
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사되는 힘이다. 하지만 북풍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북에서 태어난 그녀는 원래 극지 편동풍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중위도까지만 불 수 있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아랑
곳하지 않았다. 남쪽의 오팔빛 바다가, 갈매기와 희구의 그림 오세니아
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편서풍의 거대한 힘을
뚫고 제트 기류의 강력한 흐름을 피하며 남으로 치달았다.
역풍 속을 날며 북풍은 거의 소멸될 뻔했다. 그녀를 부르는 남쪽의 소
환은 한시도 끊이지 않았지만 미쥬르로부터의 기나긴 여행을 거친 그녀
로서는 편서풍의 강력한 방해를 뚫고 지나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까마
득한 하늘의 대평원을 거칠 것 없이 휩쓸고다니는 제트기류는 북풍을
갈갈이 찢을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북풍은 굽히지 않았다.
열사의 사막은 모든 것이 죽어버린 대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북풍에게
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지독한 복사열에 의해 덥혀진 뜨거운
사막의 공기는 미친듯이 상승하며, 실제로 사막은 세상의 다른 곳과 비
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풍지역이다. 저 거대한 사구와 기괴하게 조각
된 기암괴석들은 사막이 아니면, 그 위를 미친듯이 치닫는 사막의 바람
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장관이다. 광란스러운 사막의 바람은 북풍
을 혼까지 파괴시키려들었다. 그리고 그 위를 지나치는 모든 바람에게
서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수분을 빨아내는 사막의 건조한 모래들은 북풍
에게 있어 지옥이다. 그러나 북풍은 돌아가지 않는다. 그림 오세니아의
소환은 돌아가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
맹렬히 치달은 그 돌진의 끝에서, 북풍은 자신의 갈갈이 찢긴 몸을 내
려다볼 힘마저 잃은 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림 오세니아의 소환은
잔인하리만큼 선명했지만 북풍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지쳐버린
북풍의 귀에 비몽사몽간에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다.
"끼루룩. 끼루룩."
갈매기! 북풍은 정신을 번쩍 차린다. 그리고 그녀의 코를 스쳐가는 짠
내음에 놀란다.
그녀는 이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그녀의 치맛자락 아래로 바다빛은 연한 버밀리온. 한쪽 수평선에서 다
른쪽 수평선까지 펼쳐진 선홍색의 바다 위로는 투명하고 가벼운 파도가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실성할 듯한 희열을 느끼며 북풍은 진저리쳤
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한없이 넓은 해원에 터무니없이 작은 범선이
조용히 직선을 긋고 있는 것이 보인다. 버밀리온의 바다 위로 범선의
돛은 눈이 시리도록 흰 실버화이트. 바람은 기절할듯이 기뻤지만 침착
하게 먼저 그 망토를 펼쳤다.
범선은 자이펀 특유의 바컨틴(Barquentine)이다. 흔히들 자이펀 바컨
틴이라 불리는 배로서 세 개의 마스트를 가지고 있으며 포마스터에는
횡범을 달고 메인마스트와 미즌마스트에는 종범을 달고 있다. 그리고
포마스트의 거대한 횡범에는 거대한 문장이 채색되어 있었다. 이 문장
은 다른 나라에서라면 독특한 것을 좋아하는 귀족의 배나 전함 등에서
나 간혹 발견되는 것이지만 자이펀의 뱃사람들은 하나 예외없이 모조리
자신의 배에 문장을 그려넣는다. 망망한 대해에서 식별을 용이하게 하
기 위한 것으로서 선박의 안전을 기원드리는 주술적 의미도 있지만 해
상결투도 불사하는 자이펀인들의 배짱이 담겨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
하다. 나 여기 있으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은 곧장 달려오라.
지금 북풍의 발 아래로 유유히 항해하고 있는 자이펀 바컨틴의 문장은
온통 붉은 색의 돛에 희게 그려진 서펜트의 모습이었고 그래서 흥분한
북풍의 눈에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고 있었다.
북풍은 범선을 향해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대한 돛에 그려진 서펜트의 모습이 더욱 위압적
으로 다가왔다. 서펜트의 모습은 거의 실물대였고 돛을 가득 메우다시
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체를 쓰다듬던 북풍은 더욱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선박의 의장은 그 배의 연륜에 비례하여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 일반
적이다. 야만의 제도와 섬들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신상이나 조각품들을
배의 선수상으로 사용하는 풍습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오랜 항
해 동안 발견되는 진귀한 물건들로 배를 장식하는 것은 그 배와 그 선
장에게 자부심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배의 의장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이물 위로 높게 하늘을 겨냥하고 있는
선수상 역시 서펜트의 모습이다. 당장이라도 꿈틀대며 배 앞으로 튕겨
져나갈듯이 긴장된 그 모습은 북풍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 배의 균형
은 도대체 어떻게 맞춰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물에서 뱃전을 따라
주욱 돋아난 것은 아무리 보아도 이빨이다. 그것도 등고래나 돌고래의
이빨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 거대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빨 역시 서펜트
의 이빨이었다.
배를 휘감아돌던 북풍은 이 배가 혹시 서펜트잡이 배가 아닌가 의심하
기 시작했다.
"이상한 바람인데."
메인 마스터 아래에 주저앉아 있던 사내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사내는 가벼운 동작으로 훌쩍 일어서서는 눈부시도록 흰 돛 사이로 보
이는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주위에 있던 선원들은 모두 사내에게 눈길
을 보내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은 순조로운 오후, 조타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선원들에게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시간이다. 그
래서 선원들은 갑판 여기저기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고
느닷없이 벌떡 일어난 사내의 모습은 선원들 모두에게 기대감을 안겨주
었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으려나?
사내는 강철막대를 연상시키는 질기고 가느다란 체격이었다. 상의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적갈색으로 그을린 상체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
었다. 강인해보이는 오른손에는 긴 검을 들고 있었는데 재질이 독특했
다. 투박하면서도 가벼워보이는 그 검은 목검이었다.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묶고 있었지만 그 턱수염의 색깔이 붉은 것을 보고서 그 머리색깔
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옆에서 한가로운 동작으로 밧줄을 감고 있던 선원 하나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시도 씨?"
이시도 씨라 불린 사내는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가볍게 어깨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바람에서 육지 냄새가 나는데."
선원은 꼬고 있던 밧줄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구가 가깝잖습니까?"
"아니. 틀리다. 이건…… 희한한데. 초원의 냄새인가."
"예?"
선원의 눈이 더욱 의아한 빛을 띄었고 이시도 사이록의 곁을 맴돌던
북풍은 저 바이서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소스라쳤다. 그녀가
태어난 미쥬르 산자락은 사이들랜드 대평원의 발치에 있는 산이었기 때
문이다. 당혹한 그녀는 이시도에게서 천천히 떨어져나왔다.
그 때 어디선가 둔중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북풍과 이시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선실로 통
하는 주승강구쪽에서 걸어나오는 또다른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내는 이시도에 못지않은 체구였는데 대략 3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게다가 눈
살을 찌푸린 채 바람을 바라보는 선원들이 대개 그러하듯 사내의 눈 주
위에는 무수한 잔주름이 새겨져있어 사내를 더욱 나이들어 보이게 만들
었다. 하지만 건강한 얼굴이었고 거동 역시 불필요한 동작은 없었지만
기운차고 절도 있었다. 가벼운 셔츠를 걸치고 있었으며 이시도와 마찬
가지로 목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경우에는 목검을 등에 장비하고
있었다.
북풍은 그의 얼굴을 보고서는 의아함을 느꼈다. '어디선가 봤어.' 바
람은 그런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북풍이었고 따라서 그녀가
보아온 모습들은 모두 바람처럼 휙 지나쳐온 광경들이었지만, 지금 갑
판에 올라오는 사내의 얼굴은 그녀의 추억 속의 어느 얼굴과 꽤나 유사
했다.
미쥬르의 아래, 그 남자.
북풍은 자신의 기억력에 뿌듯함을 느꼈다. 미쥬르의 아래에서 보았던
남자들 중 하나가 지금의 이 남자와 몹시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
다. 냉랭한 눈으로 보고 냉랭한 말투로 말하는 남자.
갑판에 올라선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시도를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인가, 이시도 군?"
"별 일 아닙니다, 선장님. 바람이 좀 이상해서."
일등 항해사 이시도는 깍듯한 예의를 담아서 선장에게 보고했다. 선장
은 의아쩍은 눈으로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바람이? 뭐가 이상하다는 말인가?"
이시도는 잠시 주춤했다. 대답을 하자니 선장의 비웃음을 사게되지 않
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장은 실없는 대답보다 더 싫어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늦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이시도의 고민은 길
지 않았다.
"아, 바람은 딱 좋습니다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
다."
선장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이상한 냄새라고?"
이시도는 곧이어 쏟아져나올 웃음에 대비했지만 선장은 웃지 않았다.
대신 선장은 팔짱을 끼더니 턱을 조금 들어올렸다. 그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나서, 그리고 선장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북풍은 그녀의 몸에 코를 들이대고 체취를 맡으려드는 선장의 행동에
당황해 얼굴을 붉혔지만 특별히 제지를 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
는 과연 선장이라 불린 이 사내가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지에 더 호기
심을 느꼈다. 그래서 북풍은 잠시 선장의 주위를 조용히 휘감아돌았다.
선장은 눈을 감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눈을 떴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러자 이시도는 발끝에
힘을 준 채 호통에 대비하기 시작했으며 주위의 선원들은 괜히 바쁜 척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장은 호통을 치지 않았다. 그는 나직한 목소
리로 말했다.
"초원의 냄새로군."
이시도는 순간 카레한 탑의 꼭대기에 서있는 기분을 느꼈다. 선장이
그의 말을 뒷받침했기에 주위의 선원들에 대한 이시도의 입지는 순간적
으로 3배쯤 상승했고, 따라서 그가 자이펀의 수도 디프유벤에서 가장
높은 카레한 탑에 서있는 기분을 맛보았다 해도 별 이상할 것은 없었
다. 주위의 선원들은 이시도에게 찬탄스러운 눈길을 보내어왔다. 그리
고 이시도의 머릿속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초
원의 냄새를 맡는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아서 긴가민가 하고 있었습니
다."
입으로는 씩씩하게 말했지만 이시도의 머릿속은 이미 항해가 끝난 후
의 조촐하면서도 뭔가 비밀스러운 술자리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그 술
자리에는 놀랍게도 선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시도로서는 단 두번밖에
본 적이 없는 선주도 동석할 것이다. 그리고 선장은 뿌듯한 목소리로
이시도를 소개한다. "상당히 유능한 친구랍니다. 이 친구는 바다 한 가
운데서 초원의 냄새를 알아차리더군요." 놀라운 눈길로 이시도를 바라
보는 선주. 그리고 선장은 피로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잖아도 은퇴
하고 싶었습니다만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서
야 안심하고 은퇴할 기회를 잡은 것 같군요." 놀랍게도 선장은 차기 선
장으로 이시도를 지명한다! 선주는 예의를 알기에 선장을 만류하려들지
만 이미 이시도에게 홀딱 반한지라 그 만류는 절실하지 못하다. 품위있
는 사양과 몇번의 거절 끝에 이시도는 선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
임인사를 위해 선주의 집에 들른 이시도는 놀랍게도 선주의 따님을 보
게 되며 그 순간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시도가 가족계획에 대한 생각까지 진행시키고 있을 무렵, 선장은 그
윽한 눈으로 이시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꽤나 개코로군, 이시도 군."
주위에서 긴장된 얼굴로 선장과 일등 항해사 이시도의 대화를 듣고 있
던 선원들은 모조리 폭소를 터뜨렸고 이시도마저도 히죽 웃고 말았다.
물론 이시도는 우스워서 웃는다기보다는 마땅한 다른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짓는 엉터리 미소였고 그 우스꽝스러운 얼굴은 북풍을
즐겁게 만들었다. 북풍은 선장의 주위를 다시 한번 돈 다음 서서히 날
아오를 채비를 갖췄다. 바로 그때였다.
"녀석을 삼킨 황야의 바람이지…… 빌어먹을!"
선장의 입에서 그 외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과격한 말이 튀어나왔
다. 북풍은 이 느닷없는 모욕에 놀라서 화를 내는 것도 잊었다. 아니,
화를 내기는커녕 겁을 집어먹고 달아날 지경이었다. 선장의 눈빛은 맹
포했다.
문득 북풍은 선장의 과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육지의 사람들은 상
상도 못할 대양의 폭풍을 가로질렀던 사나이며 빙원에서 불어오는 한파
속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남자였다. 눈 앞으로 거대하게 다가오는 해적
깃발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던 남자이며 단 한 가지 이유, 오로지
떠나기 위해 석양에 불타오르는 노을빛 항구로 들어서는 남자였다. 그
리고 북풍은 그가 마침내 파도에 삼켜져 영원히 대지에 뼈를 묻지 못할
것임을 당연하게 느꼈다.
레드 서펜트호의 선장 신차이는 모든 점에서 선장이었으며, 그리고 선
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선장 신차이는 하늘을 쏘아보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고개를
내린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선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신차이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질린 얼굴로 그를 바
라보고 있는 일등 항해사 이시도에게 낮고 강하게 외쳤다.
"풍향은 좋군, 이시도 군!"
이시도는 꿈에서 깨어나듯 움찔하며 대답했다.
"예, 예! 선장님!"
"삼각돛 모두 펴고 앞돛은 모두 접는다. 바우스프릿(Bowsplit)의 노래
가 듣고 싶군. 지금부터 최고속력으로 항구를 향한다!"
"예! 선장님!"
이시도는 씩씩하면서도 쾌활한 동작으로 경례를 붙였다. 신차이 선장
은 일등 항해사의 이 작은 장난에 대해 관대한 미소를 보내주었고 이시
도는 몸을 돌려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삼각돛을 모두 편다! 앞돛 모두 접는다! 선장님께서 바우스프릿의 노
래를 듣고 싶어하신다! 제군들, 바우스프릿이 부러질 때까지 달려보자!
삼각돛 모두 펴고 앞돛 모두 접는다!"
"예! 항해사님! 삼각돛 모두 펴고 앞돛 모두 접는다!"
선원들은 쿵쾅거리며 모두 포마스트와 바우스프릿(第一斜檣)으로 달려
갔다. 선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외쳤다.
"조타수!"
"예! 선장님!"
"진로는 북북서. 거기로 고정하라! 졸란까지 전속항해다!"
"알겠습니다! 진로 고정합니다!"
배는 그 선수를 북북서로 고정시켰다. 북풍이 불고 있었지만 포마스트
의 횡범을 모두 접은 레드 서펜트호는 바우스프릿의 삼각종범만으로 역
풍을 거스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물의 제1사장은 역풍을 향해 겨누
어진 날카로운 검처럼 곤두섰다. 바람을 가로지르는 바우스프릿에서 검
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파, 파, 파파파, 파아아아앗! 곧
이어 바우스프릿에서는 역풍의 노래, 바우스프릿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배의 가속에 따라 이물에서는 하얀 물보라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배가 그렇듯이 물보라는 모조리 좌우로 갈라져 튕
겨오를 뿐 갑판에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선원들은 환호를 올렸
다. "이이야호!" 파도를 넘나들며 선체 전체는 작지만 강력한 피치를
시작했다. 배는 용틀임하며 나아갔고 선원들은 중량감을 상실시키는 속
도감 속에 도취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이펀 선원들이고, 판자 한 장 아
래의 지옥에는 별 관심이 없는 작자들이다.
위로 날아오른 북풍은 순식간에 발 아래로 멀어져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밀리온의 바다 위로 거칠게 그어진 흰 항적이 눈부시다. 배
는 아득한 수평선을 향해 걷잡을 수 없는 속력으로 나아갔다. 예리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가는 항적은 마치 붉은 바다를 절단하는 날카로
운 검처럼 보인다.
북풍은 문득 그 배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하지만 북풍
은 북쪽으로 불 수 없다. 북쪽으로 부는 바람은 북풍이 아니다. 심지어
북풍은 멈출 수도 없다. 멈춰있는 바람은 바람이 아니다.
왜 이렇듯 끈질기게 남으로 날아왔는가?
그녀는 북풍이기 때문이다. 북풍은 '남쪽'으로 '날아가는' 바람이다.
그래서 북풍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남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이
제 얼마 남지 않았다. 대해원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익사자 그림 오세니
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한없이 펼쳐진 물결뿐이다.
물결은 잔잔히 부서지고 있었지만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다. 고요
하다. 일렁거리는 물결뿐이다.
북풍은 아직도 날고 있다.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날아야할
리가 없다. 북풍은 남쪽으로 날아가는 바람이다. 하지만 남쪽이란 무엇
인가.
그녀가 5분 전에 날고 있던 하늘은 그녀가 10분 전에 날고 있던 하늘
의 남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북쪽이다. 북풍은 고개를 돌려 남쪽이었
던 북쪽 하늘을 바라본다. 저 하늘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한 때 저 하늘
에 도달하기 위해 날아왔지만, 이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하늘이다.
그리고, 그런 비행이 계속된다.
또다시 남쪽 하늘이 북쪽 하늘로 바뀐다.
그녀는 아직도 날고 있다.
의지도 없고 희망도 없다. 잠시 찾아왔던 기쁨은 이제 돌이켜 떠올려
보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거짓된 추억으로 변질되었다. 그녀는 오직 타
성으로 날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날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
다.
그림 오세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미 수평선도 사라졌다. 북풍은 더이상 낮과 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힘들게 느꼈다. 하지만 그 느낌은 빠르게 사라졌고, 북풍은 더이상 아
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오로지 끝없이 펼쳐진 물결, 그리고 적
막.
그녀는 아직도 날고 있다.
그녀는 날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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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0 끝났습니다. 0이라는 숫자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챕터 0은 일종
의 프롤로그라 하겠습니다.
짧은 프롤로그라서 예전에 하던대로 3편 올려보았습니다만, 좀 도배처
럼 보이는군요. 요즘은 3편씩 연재하시는 의욕적인 작가분들도 많이들
계시다보니 페이지가 휙휙 넘어갑니다. 10월 23일 하루 동안 올라온 글
이 100개 가량. 놀랍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자는 끔찍하
리만큼 게으릅니다.(이게 제일 중요.) 그래서 챕터 1부터는 2편 연재나
1편 연재로 바꿔볼까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으세요? (3편 올려놓고 재밌냐고 묻다니! 퍼버벅!)
하하, 즐거운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