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반도와 히스파니올라섬이 있다.
지형은 닮았으나 그 땅 위를 흐르는 역사의 결은 전혀 다르다. 이 다름은 단순히 통계의 수치가 아니라, 삶과 죽음, 그리고 문명과 야만의 경계이다.
인공위성이 찍은 한반도의 밤은 침묵 속에 울부짖고 있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남쪽은 거대한 빛의 바다처럼 넘실대지만, 북쪽은 몇 점의 희미한 불빛을 제외하고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다.
이 극단의 대비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서글픈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만일 하느님께서 밤이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북한 땅을 내려다보신다면, 그곳에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줄 아시지는 않을까?”
남쪽의 빛이 누군가의 꿈과 희망이 타오르는 숨길이라면, 북쪽의 어둠은 억압된 영혼들이 내뱉는 긴 한숨이리라. 하느님조차 북녘 동포들을 잊으실까 두려운 저 어둠은 인간의 존엄이 거세된 체제의 민낯이다.
이 비극적인 대비는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섬에서도 반복된다.
공중에서 찍은 국경선은 기괴할 정도로 선명하다. 서쪽 아이티는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황폐한 맨땅이지만, 동쪽 도미니카는 울창한 초록의 숲으로 뒤덮여 있다. 똑같은 햇살과 비가 내리는 한 섬에서 벌어지는 이 차이는 우리에게 엄중한 진실을 웅변한다. 풀과 나무 같은 식물조차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번성한다는 사실을.
왜 기후와 토질, 역사와 인종마저 똑같은 땅에서 이토록 다른 결과가 나오는가?
그 답은 자원이나 혈통이 아닌 정치 체제와 경제 제도에 있다.
한반도의 북쪽은 3대 세습의 사회주의 왕정 독재 조선(GNI 1,200달러)이며, 남쪽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GNI 37,000달러)이다.
히스파니올라섬의 서쪽은 군부 정권과 부패에 시달린 아이티(GNI 2,670달러)이고, 동쪽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도미니카(GNI 12,452달러)이다.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는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이를 '포용하는 제도(Inclusive Institutions)'와 '착취하는 제도(Extractive Institutions)'의 차이로 설명한다.
포용하는 제도는 사유재산을 보장하고 공정한 경쟁을 허용하며, 모든 사람, 즉 국민에게 권력을 나누어준다. 이는 혁신을 깨우고 문명을 진보시킨다. 반면, 착취하는 제도는 권력이 소수의 군부, 왕실에게 집중되어 대중의 자원을 빼앗고 시장의 역동성을 짓밟고 목을 조른다. 사회주의 왕정 독재와 군부 정권의 끝은 언제나 국가의 파멸과 생태계의 몰락을 불렀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원동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이다. 이것은 결코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킨 것이며, 또 지켜나가야 할 생명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기본소득이나 무분별한 보조금 살포 같은 '달콤한 독약'으로 실패한 사회주의를 불러내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이는 국가 시스템을 다시금 '착취하는 구조'로 되돌리려는 위험한 자폭 정치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과거의 망령들—레닌, 스탈린, 김일성 부자—의 뒤를 쫓으며 자녀들의 앞날을 캄캄한 어둠으로 몰아넣을 것인가, 아니면 튼튼한 자유의 토대 위에 번영을 이어갈 것인가.
"우리는 과연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어쩌면 하느님조차 잊으실지 모를 칠흑 같은 어둠을 물려줄 것인가, 아니면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찬란하게 빛나는 문화 문명한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이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녀들과 역사 앞에 씻지 못할 죄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이 나이에도 이렇게 글을 쓴다.
* 이게 내 시대 내 식의 독립운동이다. 태어나지도 않은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는 척하는 위선자들보다야 내가 더 떳떳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