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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
오늘은 제1장 일원상에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6절 게송입니다.
게송(偈頌) 범어게, 칭송할송 : 싼스끄리뜨 가타(gāthā)의 음사(音寫)인 게타(偈佗)의 게와 풍송(諷頌)의 송을 합하여 쓴 말. 가타(伽陀)ㆍ가타(伽他)라 음역하고, 풍송(諷誦)조ㆍ송(造頌)ㆍ게송(偈頌)ㆍ송(頌)고기송(孤起頌)부ㆍ중송게(不重頌偈)라 번역한다. 경론(經論) 가운데 운문의 글귀(句)로써 부처님의 공덕을 찬미한 노래 또는 교리를 요약해서 기록한 것. 조사나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평생을 수행 정진한 끝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한 불교의 진리를 요약 표현해서 후학(後學)들에게 법을 전해 준 것. 오도송, 전법게송, 열반송 등이 있다. |
게송에서 ‘게(偈)’는 산스크리트어 가타(gāthā)의 음사인 게타의 게입니다. ‘송(頌)’은 ‘읊다’는 의미의 풍송에서 ‘송’입니다. 대종사님은 원기 28년 6월 1일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2년 반전 원기 26년 1월 28일에 게송을 내셨죠.
[과거 7불]
과거 7불(過去七佛) : 과거 장엄겁(莊嚴劫)의 부처님(3), 현재 현겁(賢劫)의 부처님(4) ① 비바시불(毘婆尸佛) ② 시기불(尸棄佛) ③ 비사부불 (毘舍浮佛) ④ 구류손불(拘留孫佛) ⑤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⑥ 가섭불(迦葉佛) ⑦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게송은 대종사님 전에도 있었습니다. 역대 부처님들께서 모두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7번째 부처님이라 하여, 서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있던 부처님부터 서가모니 부처님까지를 7불이라 부릅니다. 7불이 다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성리품 30장 대종사 선원에서 송 도성에게 [과거 칠불(七佛)의 전법게송을 해석하라.] 하시니, 도성이 칠불의 게송을 차례로 해석하여 제칠 서가모니불에 이르러 [법은 본래 무법(無法)에 법하였고 무법이란 법도 또한 법이로다. 이제 무법을 부촉할 때에 법을 법하려 하니 일찌기 무엇을 법할꼬.] 하거늘, 대종사 [그 새김을 그치라.]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본래에 한 법이라고 이름지을 것도 없지마는 하열한 근기를 위하사 한 법을 일렀으나, 그 한 법도 참 법은 아니니 이 게송의 참 뜻만 깨치면 천만 경전을 다 볼 것이 없으리라.] |
대종사님, 대산종사님들은 과거 7불 게송을 다 공부하셨습니다. 성리품 30장에 대종사님이 제자들과 과거 7불 게송 공부하는 일화가 나오지요.
서가모님 부처님 게송에 대한 해설은 아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게송에 대한 해설은 유위법(有爲法)에 불과하고, 이를 통해 무위(無爲)로 들어가야한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한 법도 설한 바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한 법은 유위법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유위법을 통해 무위로 들어갈 줄은 모르고 유위법이 법인 줄 오해할까봐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하가섭부터 달마까지]
서천 28조사 ① 마하가섭(摩訶迦葉) ② 아난존자(阿難尊者) ③ 상나화수(商那和修) ④ 우바국다(優婆毛菊多) ⑤ 제다가(提多加) ⑥ 미차가(彌遮迦) ⑦ 바수밀(婆須蜜) ⑧ 불타난제(佛陀難提) ⑨ 복타밀다(伏駝蜜多) ⑩ 협존자(脇尊者) ⑪ 부나야사(富那耶舍) ⑫ 마명대사(馬鳴大士) ⑬ 가비말라(迦毘摩羅) ⑭ 용수존자(龍樹尊者) ⑮ 가나제바(迦那提波) ⑯ 라후라다(羅睺羅多) ⑰ 승가난제(僧伽難提) ⑱ 가야사다(伽耶舍多) ⑲ 구마라다(鳩摩羅多) ⑳ 암야다(闇夜多) ㉑ 바수반두(婆修盤頭) ㉒ 마라라(摩拏羅) ㉓ 학늑나(鶴勒那) ㉔ 사자존자(獅子尊者) ㉕ 바사사다(波舍斯多) ㉖ 불여밀다(不如蜜多) ㉗ 반야다라(般若多羅) ㉘① 보리달마(菩提達磨) |
서가모니 부처님의 수제자가 마하가섭이었죠. 마하가섭에서 아난존자로 내려오다가, 달마에 이릅니다. 이분들도 다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아셔야 합니다. 원불교만 아셔서는 안 됩니다. 국어학자가 한국어만 잘 하면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외국어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한국어도 잘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원불교인이 원불교만 잘 안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불교는 원불교와 이어진 종교니까 불교에 대해서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오늘 불교에 대해 설명드리는 이유입니다.
[달마부터 혜능까지]
중국 5조사 ②㉙ 신광혜가(神光慧可) ③㉚ 완공승찬(山完公僧璨) ④㉛ 쌍봉도신(雙峰道信) ⑤㉜ 황매홍인(黃梅弘忍) ⑥㉝ 대감혜능(大鑑慧能, 638-713) |
달마대사가 ‘인도에 법기가 없다’고 해서 중국 양나라로 갔습니다. 달마대사는 석가모니 이후 28대 조사이면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됩니다.
당시 중국에는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던 상황입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도 있었고요. 달마대사는 양나라 무제를 만났다고 하는데, 양무제는 불심이 깊어 각지에 절을 짓고 탑을 지었던 사람입니다. 양무제가 달마에게 물었습니다. “조불조탑(造佛造塔, 불상을 만들고 탑을 지음)의 공덕이 어떻습니까?” 달마가 대답했습니다. “소무공덕(所無功德),” 즉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요. 이는 무위 자리를 설명한 말씀이었습니다. 양무제가 알아듣지 못했지요. 달마는 아직 불법을 펼 때가 아니라 생각해서, 면벽수행에 들어갔습니다.
면벽수행을 9년했을 무렵, 혜가(慧可)가 찾아와 뵙기를 청했습니다. 달마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혜가가 하염없이 기다리는데도 달마는 만나주지 않자, 혜가가 자신의 왼쪽팔을 절단해버렸습니다. ‘법을 구하는 내 마음을 이래도 못 알아주겠냐’는 마음이었지요. 그러자 달마가 혜가를 만나주었고, 결국 혜가에게 법을 전했습니다. 혜가가 중국 선종의 2조가 됩니다.
3조는 승찬(僧璨)입니다. 신심명(信心銘)이란 책을 지었는데, 아주 좋은 책입니다. 위작이라는 논란도 있지만, 위작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내용이 아주 좋습니다. 4조는 도신(道信)이고, 5조는 홍인(弘忍)입니다.
6조가 그 유명한 혜능입니다. 원불교와도 인연이 깊지요. 정전을 보면, 대종사님께서 육조 혜능의 사상을 공유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6조 혜능이 5조 홍인을 처음 만났을 때, 홍인이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왔느냐?” “남방에서 왔습니다.” “남방은 오랑캐가 사는 곳 아니냐?” 혜능이 답했습니다. “불성에 오랑캐가 어디 있겠습니까?” 혜능은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홍인은 혜능의 답을 듣고 혜능을 알아보았습니다. 홍인은 혜능에게 방앗간 일을 시켰습니다. ‘자중하고 보림공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홍인이 죽을 무렵 제자들에게 게를 지어다 바칠 것을 명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우두머리인 수상좌는 신수였습니다. 신수가 지은 게(“몸은 이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은지라, 때때로 부지런히 떨고 닦아서, 티끌을 일으키지 말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는 점진적 수행법이었습니다. 혜능이 다른 제자가 글을 읽어주어 그 내용을 들은 뒤 게를 지었습니다. 혜능은 글자를 모르니, 다른 제자에게 부탁해서 게를 적어 바쳤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또한 대가 아니다. 본래에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서 티끌을 일으키리요(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홍인이 밤에 혜능을 몰래 불러, 발우와 장삼을 건네며 법을 전한 뒤 혜능에게 멀리 도망가도록 시켰습니다. 혜능이 도망가던 중 자신을 죽이러 쫓아오던 혜명 상좌 ‘불사선 불사악 (不思善 不思惡)’ 법문을 하였다는 일화는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선/악의 구별을 하며 살아가지면, 마음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 ‘불사선 불사악 (不思善 不思惡)’의 내용입니다. 환자들이 아파서 의사에게 찾아 간다 칩시다. 늙어서 어쩔 수 없이 병이 든 환자도 있지만, 어리석어서 병에 걸린 환자도 있습니다. 어리석어서 병에 걸린 환자를 도덕관념으로 악한 사람이라 비유합시다. 의사가 그런 환자들을 혼내야겠습니까? 의사는 선/악 자리를 떠나 그 아픈 곳만 치유하면 될 뿐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품에는 본래 선/악이 없습니다. 경계 따라 업력 따라 욕심 따라 있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성품 자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혜능이 홍인에게 법을 받고 도망친 뒤 16년간 보림했습니다. 깨치고 나서도 보림한 거죠. 천태지의가 쓴 《마하지관》에는 깨치고 나서 30년은 수행해야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3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돈오하고 나서도 점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종사님 표현대로 말하자면, 견성했으면 양성과 솔성을 해야 하는 겁니다. 혜능은 깨친 뒤에도 보림함축하신 것이지요.
소설이나 영화에서 견성을 묘사하는 것이 문제가 많습니다. 깨치면 ‘짠~’하고 끝나는 것처럼 묘사한 경우가 많아요요. 그런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니까,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깨쳐서 ‘짠~’하고 끝나는 걸 바라거든요. 영화를 잘 찍고 소설을 잘 쓰면 큰 복이지만, 잘못하면 이거 참 업이 크겠구나 싶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갖도록 유도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이 혜능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혜능은 상근기이고, 여러분은 하근기인가요? 여러분과 혜능의 성품 자리는 둘이 아니거든요.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이 원불교의 신앙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날 때부터 나와 다른 사람이고, 육조혜능은 글도 모르는 데 깨친 사람이어서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여러분이나 혜능이나 똑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혜능은 계속 수행하셨던 것이고, 여러분은 조금 수행하다가 말아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다섯 생 동안 정남정녀로 출가해서 수행해서 안 깨치는 사람이 없다고 하거든요.
2~3생 동안만 수행해도 그 복혜가 무량한데요, 문제는 복이 있어서 인물 좋고 머리 좋게 태어났다가 다른 곳에 끌리게 되는 게 문제지요. 힘이 있는 사람이 부잣집에서 인물 좋게 태어나면 좋겠지만, 힘이 아직 없다면 가난한 집에서 좀 못나게 태어나는 게 낫거든요. 대행스님이 쓴 《한마음요전》이란 책을 읽었는데, 확실히 깨치신 분이더라고요. 깨쳤는지 여부는 그 사람의 실행과 법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행스님은 확실히 깨치신 분이에요. 대행스님께서 ‘조금 못나게 태어나서 오히려 성불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어요.
⑦ 남악회양 ⑧ 마조도일 ⑨백장회해 ⑩ 황벽희운 ⑪ 임제의현 ⑫ 흥화존장 ⑬ 남원혜옹 ⑭ 풍혈연소 ⑮ 수산성념 ⑯ 분양선소 ⑰ 자명초원 ⑱ 양기방회......㊽ 백파긍선(1768-1822)... |
마하가섭부터 혜능까지를 33조사라 합니다. 혜능 이후로는 혜능의 남종선, 신수의 북종선이 갈라집니다. 남종선은 48조 백파긍선으로 이어집니다.
불교가 ①동남아시아로 퍼진 남방불교, ②중국을 거쳐 한국에서 일본으로까지 간 대승불교, ③티벳불교 세 가지 갈래가 있는데, 그중 중국 대승불교로 이어진 과정에 대해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원불교의 게송]
이제 원불교 게송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산 5집 제2부 연도수덕(硏道水德) 3.과거칠불 7.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法本法無法 법본법무법 법은 본래 무법에 법하였고 無法法亦法 무법법역법 무법이란 법도 또한 법이로다. 今付無法時 금부무법시 이제 무법을 부촉할 때에 法法何曾法 법법하증법 법을 법하려 하니 일찍이 무엇을 법할꼬. 대종사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본래에 한 법이라고 이름지을 것도 없지마는 하열한 근기를 위하사 한 법을 일렀으나 그 한 법도 참 법은 아니니 이 게송의 참뜻을 깨치면 천만 경전을 다 볼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도가에서 무엇을 받았니 받았니 해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고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말로 마음으로 받아 다시 전함이다. 그래서 정법 천년은 구전심수가 되고 상법 시대는 글과 경전에 의지하고 계법 시대는 형식과 의식에 의지한다. 옛날 스님들은 법문 하나 들으러 몇 달을 걸어서 중국에 가지 않았느냐. 그런데 우리는 가만히 앉아 법문 듣고 공부하니 얼마나 좋으냐. 주세성자도 당신이 나와서 주세불(主世佛)이라고 하지 못한다. 지낸 뒤에 후래인이 주세불로 받드는 것이다. 법을 전할 때 과거에는 단전(單傳)으로 했기 때문에 싸움을 했다. 그러나 우리 회상은 공전(公傳)이다. 누구든지 공부하고 적공하고 정진하면 다 여래위(如來位)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당대에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이 아니다. 대종사님께서도 {너희들이 나를 몰라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천년 후에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나를 모른다고 내가 근심도 않고 좋아도 안한다} 하고 자주 말씀을 하셨다. 큰 성현은 몇 백년 지낸 뒤에야 아는 것이다. |
과거에는 단전(單傳)이라고 해서, 당신이 깨닫고 지으신 게송을 당신의 수제자에게만 전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열반 2년 전에 게송을 공전(公傳)으로 주셨습니다.누구나 이 자리를 깨쳐서 쓸 것 같으면, 자신의 대를 잇는 제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종사님께서 게송의 문화를 바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불교의 게송 원불교의 게송은 교조와 역대 종법사의 전법게송이 단전(單傳)이 아닌 공전(公傳)으로 발표되어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1941년(원기26) 1월에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라’는 일원상 게송을 전법게송으로 내리고, 정산 종사는 1962년(원기47) 1월 열반에 당하여 ‘동원도리(同源道理) 동기연계(同氣連契) 동척사업(同拓事業)’의 삼동윤리(三同倫理),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대산 종사는 1998년(원기83)에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는 ‘하나의 세계’ 법문을 전법게송으로 내렸다. - 원불교 대사전 - |
대종사님 게송은 ‘일원상 게송’입니다. 정산종사님 게송은 ‘삼동윤리 게송’입니다. 대산종사님 게송은 ‘하나의 세계 게송’입니다.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 모두 게송에서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닙니다. 나는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입니다.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소우주라고 합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나/너를 구별하고, 약자/강자를 구별하지요.
한울안 한이치에 제1편 법문(法門)과 일화(逸話) 3.일원의 진리 108절 철학 박사 박 종홍(朴鐘鴻)이 대종사의 게송을 보고 감탄하였다는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그 분은 철학자이니 게송을 보고 감탄한 것이나 앞으로 윤리학자는 4은을 보고 감탄할 것이요, 사회학자는 4요를 보고 감탄할 것이며, 종교가의 수행인은 3학과 8조를 보고 감탄할 것이다." |
과거 종교는 우리는 다 중생이거나 죄인이라고 보고, 우리와는 따로 저 대단한 존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대종사님은 이런 생각을 혁신하셨습니다. 모두 각각이 다 신(神)이고, 다 부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원남교당 부직자로 있으면서 교도회장으로 모신 분이 있습니다. 수산 조정제 님이라고, 해양수산부 장관도 하신 분인데,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교도회장님이 원래 성당을 다니셨는데, 서울대 철학과 박종홍 교수가 종로교당에서 게송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들으러 갔다고 합니다. 그때 “구공 역시 구족이라”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성당에서는 저 존귀하신 하나님 앞 작은 어린 양이었는데, 원불교에서는 내가 확 커지더라는 것입니다.
[일원상 게송에 대한 풀이]
대종사님은 성리품 31장에서 게송에 대해 풀어주셨습니다. 과거 불교에서는 게송에 대해 해설하지 않았습니다. 게송만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인지가 발달해서 게송을 풀이해도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대종경 성리품 31장 원기 이십육년 일월에 대종사 게송(偈頌)을 내리신 후 말씀하시기를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
한울안 한이치에 제1편 법문(法門)과 일화(逸話) 3.일원의 진리 35절 박정훈(朴正薰)이 여쭈었다.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과 우리의 게송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는 의리선이요,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는 여래선이며, '구공 역시 구족이라'는 조사선이라 할 수 있다." |
산에 올라가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의리선은 산 밑에서 뜻을 분석하는 것이고, 여래선은 산 정상에 올라가서 공(空) 자리를 본 것이고, 조사선은 다시 산에서 내려온 것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단어를 풀이하겠습니다.
* 유(有) :끊임없이 생멸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 무상(無常). 변하는 자리. 현(顯), 색(色) * 무(無) :영원불변하는 본체의 세계. 유상(有常). 불변하는 자리. 은(隱), 공(空) * 지극(至極) 지극할지. 가운데극 : 어떠한 정도나 상태 따위가 극도로 이르러 더 할 나위 없이 다 함 * 구공(俱空) 다구. 빌공 : 모두 텅 비어 있음.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경지. * 역시(亦是) 또역. 이시 : 또한. 전에나 다름없이 * 구족(具足) 갖출구. 넉넉할족 :온전히 갖추어 있음. 유와 무를 다 갖추고 있는 경지. |
이 세상을 유(有)로 볼 수도 있고, 무(無)로 볼 수도 있습니다.
유(有)는 변하는 자리입니다. 있는 것은 모두 변하는 것이죠. 여기서 ‘있다’는 것은 유형의 것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의식작용까지 말합니다. 육신, 우주만물, 정신자리 모두를 칭합니다. 유(有)를 일원상 서원문에서는 ‘무상(無常, 항상하지 않음)’이라 표현하셨고, 일원상의 진리에서는 ‘현(顯)’이라고 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색(色)이라 표현하셨습니다.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이고, ‘유상(有常, 항상함)’이고, ‘은(隱)’입니다.
사실 유와 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유가 무처럼 보이고, 무가 유처럼 보일 뿐입니다. 대종사님께서 헬기 프로펠러로 비유하셨습니다. 프로펠러가 도는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있는 것 같지만 없고, 없는 것 같지만 있습니다.
유(有) | = | 변(變) | = | 무상(無常) | = | 색(色) | = | 현(顯) |
무(無) | = | 불변(不變) | = | 유상(有常) | = | 공(空) | = | 은(隱) |
‘지극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밤 새서 죽어라 공부하면 지극한 것일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고요. 지금 유와 무가 돌고 도는 것이 지극하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해가 계속 뜨고 지는 것이 정성이거든요. 찰나로 계속 변/불변이 맞돌아가는 것이 지극입니다.
‘구공 역시 구족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구공(俱空)은 ‘유(有)라고도 할 수 없고, 무(無)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無)만 의미한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것이, 유(有)라고 해서 찾아보자니 없고, 없다고 하자니 있지요. 있자니 없고, 없자니 있습니다. 그게 구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족(具足)입니다.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
변/불변의 유무(有無) 자리 설명으로 게송을 시작하셨습니다.
유는 무로 무는 유로 계속 변화합니다. 생생약동하게 변화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만물은 생로병사로 변하고, 사업은 흥망성쇠로 변화하고, 마음도 생주이멸로 변화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느 한 부분만 보곤 합니다. 이를테면, 생(生)만 보고 사(死)는 보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해 얘기하면 “분위기 깨지 말라”, “왜 무서운 소리하고 그러냐”라는 반응이 옵니다. 그렇지만 태어나면[(生) 늙고(老) 병 들고(病) 죽는 겁니다(死).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관속으로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사업에서도 그래요. 사업에서는 흥망성쇠가 순환합니다. 흥(興)이 좀 오래 가는 경우가 있고 망(亡)이 좀 빨리 오는 시일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흥망이 순환한다는 점엔 변함이 없습니다. 기업 중에 300년 넘는 기업이 몇이나 있습니까? 나라가 길어봤자 몇 년이었습니까? 대통령 권력도 길어야 5년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흥망성쇠 변화의 이치를 모르니까, 사업이 흥할 때는 자기가 특별한 사람인양 교만하고 사업이 잘 안 될 때는 때는 절망하고 심지어는 자살하기도 하는 거지요.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한다는 것’이 불변입니다. 이 이치를 모르면 ‘그 순간’이 제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을 단견이라고 합니다. 현실만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반면, 이 이치를 알면 감정의 시소를 탈 이유가 없습니다. ‘평상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원리편 35장 말씀하시기를 [유와 무가 둘 아닌 이치를 알지 못하면 고를 당하매 거기에 구애되고 낙을 당하매 거기에 집착하여 길이 고를 벗어나지 못하며, 빈천을 당하매 거기에 구애되고 부귀를 당하매 거기에 집착하여 길이 빈천을 초래하나니, 유에 처하여 무의 심경을 놓지 아니하고 무에 처하여 유의 심경을 놓지 아니하여야 능히 유무를 초월하여 고락과 화복을 임의로 수용하는 큰 도인이 되나니라.] |
도인들은 유에서 무의 심경을 놓지 않고, 무에서 유의 심경을 놓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사기치고 도망가면 여러분 심경은 어떻습니까? 찾으려 시도하긴 해야겠지만, 안되면 그냥 놔두세요. 다음 생애 두세 배로 받습니다. 걱정 마세요. 안 되는 거 하려다가 괜히 더 손해 봅니다. 사기 당해서 100만 원 잃었는데 사기친 사람 잡으려고 에너지 쓰는 것으로 200만 원어치 쓰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환경이 변화되더라도 마음은 정체여여(正體如如)하셔합니다. 회사가 부도났다고 해서 건강을 잃을 필요가 있습니까? 회사가 부도났다고 해서 마음까지 부도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극하면]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도는데, 지극하게 돕니다. 지극은 평범한 겁니다. 시계가 똑딱똑딱 도는 것이 지극입니다. 해가 매일 뜨고 지는 것이 지극입니다.
정말 공부 길은 잡은 사람은 ‘지극의 공부길’을 잡은 것입니다. 수양을 할 것 같으면, 며칠하다 말고 1년하다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몇 생 하는 거예요. 대종사님이나 정산종사님께서도 전생부터 수행하셨습니다. 반면, 여러분이 며칠 수행하다가 좀 힘들다고 말아버리거나, 예비 교무가 학기 중에서는 수행하다가 방학했다고 노는 것은 지극이 아니겠지요.
사경이든 기도든 선이든 계속하셔야 합니다. 지극과 정성 속에서 조화가 일어납니다. 끊어져 버리면 안 됩니다. 대종사님은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을 동정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수행을 10년 하면 자기 스스로 변화된 걸 알고, 20년하면 주변에서 알고, 30년하면 진리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초발심시 변정각’이라는 말도 있는데, 초발심을 끊이지 않게 돌리면 정각에 이르지 않을 수 없어요.
쉬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을 구분하셔야지요. 상시응용주의사항에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할 것이요’라는 말은 있어도 ‘쉬는 시간이 있고 보면~’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쉬라는 의미입니다. 노는 시간, 즉 허송 시간을 줄이라는 의미지요. 쉬는 시간을 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방학을 했으면 좀 쉴 수도 있지요. 퇴직을 하면 좀 쉴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이 필요하면 쉬어야지요. 그러나 쉰다고 해서, 하루 일과의 삼학 수행을 흐트러질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고요.
지극정성은 ‘순간순간 간단이 없는 것’, ‘찰나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지극한 것입니다. 찰나의 마음을 챙기는 것이 정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극의 의미가 하루 종일 꽉 붙잡고 있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기를 보는 사람이 아기를 하루종일 붙잡고 못 움직이게 하면 아기를 잘 보는 게 아니지요. 아기 키울 때는 아기를 적당히 풀어놓고 기르면서 아기가 잘못된 곳으로 갈 때 챙기면 되는 것이에요(대종경 수행품 53장). 수행을 할 때에도 마음의 중심을 잡은 상태에서 정당한 일을 하시면 돼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계문의 선, 심계의 선을 넘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지극한 것이고 정성스러운 것입니다.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은 대(大) 자리입니다.
유와 무가 본래 구공입니다.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가운데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외모가 지금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찰나찰나로 피부 세포가 떨어져나가고 새로 생기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이라 부르겠습니까, 불변이라 부르겠습니까?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가 없고, 변화가 없는 가운데 변화합니다.
[구공 역시 구족이라]
구족은 소(小) 자리입니다.
없는 것 같지만 구족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성품도, 우주도 다 허공 안에 들어있는데, 이는 다 마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전부 다 마음입니다.
[게송의 대/소/유무]
대 : 우주만유의 본원, 제불조사 범부중생의 성품 - 돈공. 입정처. 자성회복 소 : 천지만물 허공법계, 삼라만상 - 광명. 처처불상 사사불공 유무 : 변화(진급, 개선). 인과 조화 우주-성주괴공, 만물-생노병사, 사생의 심신작용 중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 사업-흥망성쇠. 춘하추동, 음양상승 수화(상극) --> 수목화(상생) = 은생어해 공부 |
‘제1장 일원상’의 내용은 모두 대(大)/소(小)/유무(有無)로 풀 수 있습니다. 게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게송 이전 까지는 ‘대→소→유무’의 순서대로 설명하셨습니다. 게송에서는 ‘유무→대→소’의 순서입니다. 처음부터 돈공한 대(大) 자리를 설명하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가장 쉬운 것은 인과의 이치 등 유무 자리 거든요. 그래서 게송에서는 유무 자리부터 먼저 설명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일원상의 진리 · 신앙 등에서 유무 자리와 게송에서 유무 자리가 좀 다른 점이 있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게송 이전까지의 유무 자리는 ‘변화의 유무’인데, 게송의 유무는 ‘변/불변의 유무’입니다.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상생의 인연]
상생상극에 대해 소개하고 싶습니다.
수(水) 화(火) |
물과 불 두 개가 있다고 칩시다. 불에 물을 부으면 불이 꺼지지요. 상극입니다.
수(水) 목(木) 화(火) |
그런데 물과 불 사이에 나무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물이 나무를 살리고, 나무가 불을 살립니다.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인데, 나무가 들어가는 순간 상생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공부는 물과 불 사이에 나무의 마음을 챙겨서 은생어해를 만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한 마음 챙기면 해독을 은혜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정산종사님이 총부를 걷는 중 아이가 찬 돌에 정산종사님 머리가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정산종사님이 “아이 시원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유 없는 해독은 없거든요. 반드시 원인이 있음을 아시고 한마음 챙기신 겁니다. 그러면 해독이 오히려 은혜로 바뀝니다.
마음은 유무를 초월하고 고와 락도 초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상생대도로 한 마음을 내면 됩니다. 그러면 범부가 부처로 되고, 강급한 사람이 진급한 사람으로 될 수 있습니다.
양산법사님 일화인데, 옆집에서 자꾸 자기 집에 쓰레기를 버리더랍니다. 그러자 양산법사님은 옆집에 계란을 자꾸 가져다 주었대요. 결국엔 옆집에서도 쓰레기 버리는 걸 그만두고 음식을 넘기게 되었답니다. 소 자리에서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하니까, 유무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러분도 대종사님 법 만난 이 때 항마위, 출가위에 오르셔야지요. 대 자리를 깨쳐서 소 자리로 불공하고 유무 자리로 개선시킬 줄 아시면 좋겠습니다.
[게송 6단계 공부]
좌산종사님께서 6단계 공부법을 내놓으신 내용 참고하십시오.
一圓相 偈頌 6단계 공부 좌산 종사 1단계 有는 無로 현실 있는 데에서(一切善法) 열심히 활동하고 갖추고 장만하나 거기에 집착상을 다 놓아 버리고 없는 데로 돌아가 안주해 버리고
2단계 無는 有로 아무 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초연히 유유자적하다가 기틀 따라 있는 곳에 나타나 종횡무진하는 경륜을 다듬고 펼치고
3단계 돌고 돌아 그러나 그 어느 한 지점에서도 정지하지 아니하고 계속 돌려서 끝이 없게 하여가면
4단계 至極하면 그 공부는 점점 깊어져서 드디어는 지극한 자리 무등등한 자리에 도달이 되나니
5단계 有와 無가 俱空이나 비록 도달이 되었다 하나 有에서도 有가 없고 無에서도 無가 없어 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며
6단계 俱空 亦是 具足이라 모두 다 비었으되 광명수량(光明壽量)과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경륜과 여래 지혜덕상(如來智慧德相)은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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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원, 성해 교도님 타이핑 감사합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