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 박연 朴然 (1378∼1458)】 「아악(雅樂) 중심으로 토대, 한국 역사상 3대 악성」
조선 세종 시기에 활동한 음악가이자 문관. 정간보 제작 등에 관여하여 조선의 궁중음악을 아악(雅樂) 중심으로 정비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공로 덕분에 왕산악과 우륵을 잇는 한국 역사상 3대 악성으로도 불린다.
1378년 8월 20일 경상도 상주목 영동현 고당리(현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서 고려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아버지 박천석(朴天錫)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오(金珸)의 딸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411년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위로 급제하였고 진사, 집현전의 교리, 사간원의 정언, 사헌부의 지평, 세자시강원의 문학을 역임하였다. 1423년 의영고 부사였다가 제생원의 의녀 중에 총명한 자를 골라 글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으며 1425년 음악에 대한 책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해주에서 발견한 기장 알갱이를 기준으로 1알을 1푼, 10알을 1촌으로 하여 9촌의 황종율관을 만들었다. 1426년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를 지냈는데 봉상시판관을 지내면서 명나라에서 보낸 악기인 소관을 사용하기를 왕께 요청하거나 음악에 대한 상소를 왕께 올렸다. 1425년의 황종율관이 중국 아악기와 음률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편종과 편경을 기준으로 1427년에 2차 황종율관을 만들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였고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지난번에 해주의 기장으로 황종율관을 제작했을 때 그 황종음이 중국 편경보다 높았는데 그 원인은 땅이 메마르고 날이 가물어서 기장 알갱이가 작았던 까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그보다 알갱이가 굵은 남쪽 지방의 기장 알갱이를 대중소(大中小) 3가지로 나누어 3가지 기장 알갱이를 사용한 세 황종율관을 만들어 그 중에서 중국의 편경과 맞는 율관을 골라서 그것을 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율관을 만드는 일이 지금 제일 급선무이오니 영단을 내리시어 곧 시행하도록 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중론이 벌떼같이 일어나면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3차 율관 제작이 결국 실행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1427년 아악기 중 하나인 석경을 제작하여 왕께 올리기도 했으며 사직단의 신위를 고쳐 만드는 것에 대해 백관들이 논의할 때 악기에 대해서는 박연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1430년 봉상시소윤을 지내면서 아악을 쓰고 향악을 쓰지 말자고 건의하였으며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자 이를 위해 힘을 쓰다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1432년 관습도감의 별감을 지낸다. 1433년 그가 건의한 아악이 처음으로 궁중에서 사용되었고 이후에도 음악에 관련된 여러 상소를 올렸다. 1439년 악학제조, 1453년 예문관의 대제학, 1455년 중추원의 제조를 역임하였다.
음악적인 재능은 뛰어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인성과 관련된 기록들은 그가 인성이 바르지 못한 인물이였음을 알게 한다. 그는 궁의 악공들을 데리고 사사롭게 영업 행위를 하는가 하면 누이가 죽은 뒤에 바쁘다는 핑계로 유산만 챙겨서 얼른 돌아오는 등의 행동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 일로 1448년 잠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복직된 후에는 단종 대까지 음악 일을 맡다가 아들인 박계우가 단종 복위 운동에 연관되어 세조에게 숙청당할 때 그도 연좌되었으나 왕이 3번 바뀌는 동안 벼슬을 하며 왕실을 보좌한 원로라는 점이 참작되어 사형은 면하고 삭탈관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 피리를 불고 자서전을 쓰며 여생을 보낸 후 1458년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세종의 눈에 들어 세종조에 조선의 음악을 정비하는데 힘썼지만 세종과는 견해가 많이 달랐다고 한다. 본류가 유학자라서 그런지 그는 아악 중심으로 궁중 음악을 재편하고자 했지만 세종은 중국인들은 생전에도 아악을 들었으니 제사에도 연주해도 무방하나 향악만 연주했다.
악기를 만드는 재료의 성질이 중국과 우리나라가 다른데 똑같은 방법으로 악기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제기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아악을 위해서 그 연주 악기는 원론대로 중국의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나라 재료로 악기를 만들고 우리가 작곡한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고 의문을 제기한다. 맹사성이나 박연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배운 대로 중국의 아악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금 《율려신서(律呂新書)》나 역대에 상고한 것도 많이 보았으나, 악기의 제도는 모두 그 정당한 것을 얻지 못하였다. 송나라의 악기도 또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악공(樂工) 황식(黃植)이 조정에 들어와 아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니, 장적(長笛)·비파(琵琶)·장고(長鼓)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또한 향악(鄕樂)을 섞어 썼던 것이다."
하니,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대답하기를, 사이사이로 속악(俗樂)을 연주한 것은 삼대(三代)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연(朴堧)이 만든 황종(黃鍾)의 관(管)은 어느 법제에 의거해 재정(裁正)한 것인가." 하니, 맹사성이 아뢰기를, "송(宋)나라와 원(元)나라의 법제에 의하여 당서(唐黍) 1천 2백 개를 속에 넣어서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세종실록》12/9/11)
마찬가지 논리로 지금 우리가 거서(柜黍, 빛깔 검은 기장)를 가지고 황종의 관을 만드는 것도 옳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거서가 그 성질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거서 1,200개로 음률을 정하는데 우리 서(黍)를 이용해 만들면 다른 악기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풍토가 다른 곳에서 자라는 재료를 써서 악기를 만들면 다른 소리가 나게 되는데 그러면 거기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향악의 의의는 거기에 있다. 박연은 세종과 함께 '보태평', '정대업' 등의 향악을 만들기도 했는데 후대 세조 이후는 아악을 대신하게 된다. 이로 궁중 음악에서도 중국 것이 아닌 우리 음악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박연이 일찍이 옥경(玉磬)을 올렸는데, 임금께서 쳐서 소리를 듣고 말씀하시기를, "이칙(夷則)의 경쇠소리가 약간 높으니, 몇 푼[分]을 감하면 조화)가 될 것이다." (《세종실록》31/12/11)
박연이 옥경을 만들었는데 가져다가 보니, 경쇠공[磬工]이 잊어버리고 쪼아서 고르게 하지 아니한 부분이 몇 푼이나 되어, 모두 세종의 말과 같았다. 세종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세자 시절 부와 태종의 분부대로 “너는 평안히 즐기기나 하여라” (《태종실록》 13/12/30) 그리하여 서화, 화석(花石), 금슬(琴瑟, 거문고) 등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자연스레 음악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소리에 대한 절대 음감을 갖고 있는 사실이 실록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첫댓글 "소리와 가락이 곱지 않습니다. 박자감도 좋지 않고, 좋지 않은 버릇이 굳어져 고치기 어렵겠습니다."세종대왕이 박연의 음악적 재능을 시험하기 위해 신분을 숨긴 채 피리를 불어 보인 후 "제 피리 소리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음악에 타협이 없던 박연이 가차 없이 직언을 날렸던 일화다. 세종은 그의 솔직함과 전문성에 감탄하여 음악 정비의 전권을 맡겼습니다. _박연
"백성들이 부모를 잃었을 때 예법을 몰라 슬퍼하기만 하니, 제사를 지내고 상례를 치르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_박연
세종실록에 수록된 수많은 상소문 중 하나로, 예악(禮樂)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교화하고 안정시켜야 한다는 유교적 신념을 피력한 어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