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채 金永采 (1873 ~ 1931)】 "을사오적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처단 결사대
1873년 2월 6일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七寶面) 시산리(詩山里)에서 태어났다. 1907년 을사오적 처단 의거에 참여하였다.
1905년 11월 18일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대한제국의 강점(强占)을 노골화하자 전 국민이 대대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3월 서울에서 나철(羅喆), 오기호(吳基鎬) 등이 주도하는 을사오적 처단 의거에 참가하였다. 을사오적은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으로 이들을 처단하기 위한 동지 규합과 거사 자금 마련에 나섰다. 의거단은 을사오적을 동시에 처단하기로 하고 5개조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각조는 결사대장과 10명 내외의 결사대원으로 구성되었고, 이홍래(李鴻來), 강상원(康相元) 등과 함께 권중현 처단 결사대에 편성되었다.
1907년 3월 25일 결사대원들은 각자 정해진 장소에 분산 배치되어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동(寺洞)에서 잠복하던 중 일본군 6~7명의 경호를 받으며 인력거를 탄 권중현이 다가오자, 이홍래가 그 앞을 가로 막으며 “역적 놈아 네 죄를 아느냐”고 꾸짖으면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때 일본군이 달려들어 이홍래를 저지하자 강상원이 권총을 뽑아 권중현을 저격하였다. 그러나 총탄은 명중되지 못하였고 권중현은 민가로 달아났으며 강상원은 붙잡혔다. 이때 을사오적 처단 의거로 붙잡혀 유형(流刑) 10년을 받고 유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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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처단 의거 재판 결과 보도(『대한매일신보』 1907. 7. 5) [판형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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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평리원, 1907. 7. 3)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