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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1896년 10월 인천감리서에 수감된 황해도 해주 출신 20세 청년이 사형을 확정받는다. 그의 사형소식에 젊은이를 흠모해 오던 인천 사람들은 저마다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정작 청년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같지 않게 평소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을 대한다.
그가 바로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김구다. 김구와 인천의 질긴 인연은 여기서 출발한다.
1896년 9월22일자 독립신문은 당시 인천감리서 이재정이 ‘치하포 사건’의 주범 ‘김창수’를 붙잡아두었다고 법부(현 법무부)에 보고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치하포 사건’은 1986년 3월 청년 김창수가 일본인 밀정 스치다를 때려죽인 사건이다. 김구의 청년기 ‘김창수’가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國母報讐)”며 벌인 사건이다.
당시 조선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그 이후 정권을 잡은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리면서 민심이 흉흉할대로 흉흉해진 상황.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나고 반일감정이 극도로 높아지고 있었다.
동학에 적극 가담했던 김창수는 그 때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현 집에 머물고 있었다. 김창수는 안태현과 유학자 고능선에게 의병을 일으키자는 뜻을 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만주로 떠날 것을 결심한다.
안태현의 집을 떠나오던 중 김창수는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같이 배를 탄 일본인이 조선인 행세를 하며 칼을 숨기고 있던 것에 의심, 그를 살해할 결심을 하게 된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주막에서 죽인 일본인은 ‘스치다로, 일본 육군 중위였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기록에는 스치다가 단순한 상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창수는 주막의 주인 이화보에게 스치다의 품에서 빼낸 돈 800냥을 동민에게 나눠주라하며 안악 군수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라고 이른다.
김창수는 황해도 해주의 집에 머물다, 사건 발생 2개월만에 붙잡혀, 해주감옥에 수감된다. 이후 김창수는 그해 7월27일 인천감리서로 이관된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인천 내동에 통상사무를 위한 인천감리서가 설치된다. 인천감리서에서는 외국 영사와의 여러가지 교섭권을 갖고 있었으며, 개항장에 거류하는 외국인과 내국인 간에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고, 개항장의 치안을 유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항구에 경무관을 두었는데, 경무관은 인천감리서의 장인 감리의 지휘와 감독을 받고 있었다. 감리는 부윤(府尹)을 겸하고 있었다.
개항장의 사법업무는 개항장 재판소에서 담당했는데, 김창수가 해주에서 인천으로 이송된 것은 치하포 사건이 일본인과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일본 영사관은 치하포 사건이 자신들의 뜻대로 처리되길 바랐을 터. 김창수에 대한 재판권이 인천감리서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압력은 컸을 것으로 가히 짐작된다. 결국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인천감리서는 김창수에 대한 교수형을 확정한다. 이 소식은 1896년 11월7일자 독립신문(김구는 백범일지에서 ‘황성신문’으로 착오하고 있다)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김창수에 대한 교수형 집행은 극적으로 연기된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당시 대군주(고종)가 전화를 걸어 감리에게 “김창수의 사형을 중지하라”는 친칙(親勅)이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후에 고종이 아닌 법부가, 전화가 아닌 전보였음이 밝혀졌다. 여하튼 사형 집행을 몇시간 앞두고 김구는 고종의 재가로 극적으로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 영사관측은 조선 정부에 김창수에 대한 형집행을 계속 요구했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선 정부가 김창수에 대한 구명활동에 적극 나선 것은 아니다. 그저 형집행을 차일피일 미뤘을 뿐이다. 김주경이란 강화 사람을 비롯해 인천의 물상객주 등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김창수에 대한 구명활동에 나섰지만 그 때마다 조선 관리들은 책임을 미루기에 급급했다.
첫 공판날 심한 고문으로 간수의 등에 엎혀 재판정에 선 김창수가 개판장을 향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 명을 때려죽였다”고 자신있게 대답한 일이나, 옆에 앉아있던 일본 순사에게 “이 개 같은 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 죽으면 귀신이 되어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고 일갈한 일은 당시 우유부단한 조선 정부 관리들의 모습과 사뭇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2년간 인천재판소에 갇혀 있던 김창수는 김주경의 권유로 탈옥을 결심한다. 여러가지 꾀를 내어 감방의 바닥을 뜯어내고 흙을 파 탈옥한 김창수는 이후 서울을 거쳐 삼남지방을 떠돌아다니다, 그해 공주 마곡사에서 중이 된다. 김창수의 탈옥으로 그의 부모는 체포되고, 부친이 1년여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1899년 환속한 뒤 해주로 귀향, 1903년 기독교에 입문 애국계몽활동을 펼친다. 1907년 신민회에 들어가 활동하던 중 1911년 1월 ‘105인 사건’의 발단이 된 ‘안악 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른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일본인 관리와 싸움을 벌여 잔기를 2년 남겨두고 인천으로 이감된다. 인천재판소를 탈옥한 지 17년만이다.
당시 인천감옥은 고역이 심한 곳을 알려져 있었다. 인천항 축항 공사가 한창이던 때라, 축항공사에 죄수를 동원했던 것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아침 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묶고 축항공사장으로 출역을 나간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10여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여기서 서대문감옥 생활을 회고하면 속담에 ‘누워서 팥떡 먹기’다”라고 회고했다.
등창이 나고 팔다리가 부어서 운신을 못할 정도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결심을 했지만, 함께 쇠사슬로 묶인 동료를 생각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형기를 마친 그는 고향에 돌아가 농촌계몽운동을 펼쳤고, 이후 1919년 3월29일 3·1만세 운동이 한창이던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때도 백범은 인천에 은신해 있다가 망명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는 중국 중경에서 미군과 함께 국내 집입작전을 준비하다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1월5일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다. 좌절된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백범은 1946년 전국 순회길에 오른다.
그 첫번째 행선지가 바로 인천이었다. /김주희기자 blog.itimes.co.kr/kimju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