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볼레로(lace bolero) /팔음
창밖엔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옷가게를 이 잡듯이 뒤졌다. 마침내 매장의 구석에 있는 하얀 레이스볼레로가 눈에 들어왔다.
"아줌마, 이건 얼마에요?"
"원래 만이천 원인데, 새댁이 예뻐서 만 원에 줍니다."
"그래요?"
"네, 정말로 잘 어울리네요."
만 원짜리 볼레로를 들고 옷가게를 나왔다. 하지만 속마음은 좀 전에 보았던 화려한 색깔의 고급 볼레로에 자꾸만 미련이 남았다.
공연 날짜는 뿌득뿌득 다가오고 걱정부터 앞섰다. 무대에서 입어야 할 옷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의상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다. 남자들은 넥타이에 정장 한 벌이면 간단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가 않다. 머리모양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신경이 쓰인다. 하다못해 조그만 장신구 하나까지도 꼼꼼하고 예리하게 살피게 된다.
정작 공연 내용보다는 치장하는 일에 더 신경이 쓰여 마음은 늘 분주하기만 하다. 원피스를 입을 것인가, 정장을 착용할 것인가 고민을 한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을 것인가, 샌들을 신을 것인가 또 고민을 한다. 검은 색으로 할까, 아니면 다른 색깔이 좋을까. 끝없이 고민하고 결정하는 가운데 나의 무대 복장이 완성되어간다. 결코 만만찮은 일이다. 전용 코디네이터라도 두고 싶은 심정이다.
‘청소년 문화존 시문학 공연’ 행사가 2.28중앙공원에서 11월까지 이어진다. 3회 공연 때 나는 첫 출연을 하고 나서 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두 번째 출연은 더 잘하고 싶고 더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공연하기 전까지 나는 평소 옷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다.
한 번은 어느 문우가 옷에 대하여 일가견이 있는 문우더러 내게 코디를 해주면 어떻겠냐고 지나가는 말로 던졌다. 나는 좀 기분이 언짢았다. 그때부터 나는 의상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쪼개고 또 쪼개가며 살고,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살 수 없는 처지기에 화가 났다. 평소 친척들에게 얻어 입고 가끔 친정어머니께 생일선물로 받았는데, 남편이 은근히 미워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원피스 한 번 사주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번 생일 때도 친정어머니가 평소 사고 싶었던 옷을 사 입으라며 남편 몰래 두둑하게 주머니에 찔러 주었다. 어머니께 늘 받기만 하는 내가 죄송스러웠다.
올 장마가 오기 전의 일이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서문시장에 가서 오전 한나절 동안 옷 구경을 했다. 평소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힘든 어머니이지만 그날은 딸과 함께 옷 구경하며 데이트하는 것을 무척 즐거워하셨다. 나도 어머니와 함께 어깨동무하고 시장구경하는 그 일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다. 어머니와 함께 오래도록 이 행복을 누리고 싶다.
서문시장을 모조리 훑어보고 난 후 '베네시움'으로 향했다. 그곳을 다 구경하고 나서 다시 대신동 지하상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시내 동성로로 향했다. '액슨밀라노'를 비롯하여 동성로에 있는 제법 그럴듯한 옷가게를 기웃거렸다. 마음에 드는 예쁜 옷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면서 나는 왕비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디자인에 슬슬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너무 무리한 탓인지 어머니는 피곤해 보였다. 한 가지만 골라서 사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도 살 수가 없었다. 나만이 입을 수 있는 개성 있는 옷은 없고, 유행을 타는 옷이 대부분이었다. 누구보다도 유행을 싫어하는 내 마음에 흡족한 옷은 없었다. 결국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이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수많은 관중을 향하여 무대에서 詩와 수필을 낭송하는 일을 하면서부터 의상에 대하여 눈을 조금씩 뜨기 시작했다. 가장 촌스러운 모습으로 살아온 나는 가장 개성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대중을 의식해야 하는 공연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낀다. 또, 어떻게 하면 관중에게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개성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대 분위기에 알맞은 코디방법을 연구하는 일이 암기하여 낭송하는 일만큼 내게는 커다란 숙제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얀 레이스볼레르를 구입하기 전에 고민했던 일이 내 가슴에 멍울진다. 상체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끈으로 된 체크무늬 원피스와 검은색 원피스를 두고 갈등을 했다. 분명 상체에 무언가를 하나 걸쳐 입어야만 했다. 그냥 입기에는 좀 야했다. 그렇다고 무대에서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거나 청바지를 입을 수는 없었다.
내게는 어머니께 받은 검은색 볼레로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검은색 원피스를 입는다면 장례식장에 가는 분위기의 코디가 될 수밖에. 나는 결국 체크무늬 원피스에 검은색 볼레로를 걸치고 첫 공연을 하였다.
이제는 하얀 볼레로를 구입했으니 까만 원피스를 입을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화려한 볼레로보다 잘 어울린다. 화려하고 값비싼 볼레로는 나에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께서 생일 선물로 주신 용돈으로 마련한 수수한 볼레로를 입고 공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공연 때 '어머니의 하얀 사랑'을 몸에 두르고 단아한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낭송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