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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호난장기(糞胡亂場記)
이 문 열
그 귀향을 얘기하면서 전해 겨울에 있었던 첫 번째 통대(統代) 선거를 빼놓을 수 없다. 내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는 이미 선거가 끝난 지도 반년이나 되었건만 그 선거의 경과는 바로 전날 밤에 본 텔레비전의 희극물처럼 재미있는 화젯거리로 고향 마을을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새삼 그 애기를 옮기는 것은 사랑하는 고향의 또 다른 모습을 그려 보려는 것일 뿐 별다른 정치적인 저의가 없음을 미리 밝혀 두고 싶다.
선거의 풍설이 나돌면서 고향 사람들은 벌써 흥분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현을 따르면, ‘실로 오랜만에 선거다운 선거’를 하게 된 까닭이었다.
물론 전에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를 해 왔지 만, 대통령은 그들의 일상과는 너무 까마득했고, 국회의원은 중선거구 때문에 항상 군세(郡勢)가 강한 이웃 군 출신의 선량(選良)이 차지해 버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면 단위가 선거를 하게 됨으로써 그들은 저 도의원선거 이래 거의 10여 년 만에 피부로 실감이 되는 선거를 치르게 된 셈이었다. 이 경우 입후보자가 누구이건 유권자들 중 적어도 몇몇은 그의 불알 밑에 있는 점이나 썩은 이의 개수까지도 알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직 공식적인 선거 일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고향 사람들은 예상되는 입후보자를 놓고 의논들이 구구했다. 어떤 지방 어느 산골에도 때를 기다리는 정치적 야심가와 실력자는 있는 법이고, 내 고향도 예외는 아니어서 ― 그 무렵 주로 물망에 오른 사람은 세 명이었다.
그 하나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치부에 성공한 사람으로 도회지에 몇 개의 공장과 극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옛 집터에 웅장한 저택을 세워 막대한 부(富)를 과시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어떤 권력기관의 고위직으로 정치적 배경과 권력을 겸비한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지금까지의 여러 선거에 지구당의 선전부장으로 활약해 조직력과 대중 연설에서 뛰어난 중력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거 일정이 확정되고 입후보자 등록 마감이 가까워도 어떤 판단에선지 그들 세 사람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서 파란 많은 그 선거의 막은 열렸다. 그들 셋의 동정을 살피며 마감 며칠 전까지도 자중하고 있던 고향 정치판의 이류급 인사들이 며칠 새에 열셋이나 무더기로 입후보자 등록을 한 게 그랬다. 당선 후의 자신들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해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풍문에는 당국의 조정이 없었더라면 서른 명도 넘었을 거란 얘기였다. 실제로 마감 전날 저녁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앉았다가 물망에 올랐던 세 사람의 실력자가 아무도 입후보하지 않았다는 것을 술자리에서 듣고서 부랴부랴 서둘러 이튿날 마감 직전에 겨우 등록을 마친 사람도 있었다.
유권자 오천도 못 되는 면에 열세 명의 입후보자 ― 혼란은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족인(族人)이 여섯이나 되어 문중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아무리 문중이 해체되고 문회(門會)의 구속력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문중의 공론은 문회를 열어 입후보자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유권자의 삼 분의 일 가까운 표를 가지고서도 타성에게 통대(統代) 의원 자리를 빼앗기겠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로 몇 해 만에 문회다운 문회가 열렸지만 조정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몇 어른 분네의 간곡한 분부도, 식견 있는 숙항(叔行) 들의 설득도 나름대로의 논리와 승산으로 무장된 그들 여섯의 입후보자에게는 무력하였다.
어디나 동족 부락의 경우면 매한가지겠지만 고향에서 문중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능력과 자질은 대체로 우수한 편이 못 된다. 향토를 위해서란 갸륵한 뜻을 품은 사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나, 조그만 능력이라도 있으면 저마다 도회로, 도회로, 하는 마당에 굳이 궁벽한 산촌에 남아 있는 데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들이 있었다. 좀 야박한 말로 바꾸면 도회로 나가 보았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문중의 입후보자들도 그 점에서는 대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똑똑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라는 식이지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평가는 못 되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지혜로운 판단이나 명예로운 진퇴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무리였다.
오히려 그 조정은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으니 ― 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사퇴한 두 사람은 문중 대부분이 가장 많이 기대를 걸던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당선의 가능성이 가장 높던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대학 재학 중에 결혼을 하고 졸업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와 쓰러져 가는 가업 인술도가를 윗대보다 키운 숙항이었는데, 모든 입후보자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데다 그 정도의 선거를 치르기에는 충분한 재력도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일제 때에 전문학교를 나오고 여러 차례 민선(民選) 면장을 지낸 50대 막바지의 조항(袒行)이었는데 경력으로 보나 선거 기반으로 보나 마땅히 기대를 걸어 봄 직한 쪽이었다. 그러나 둘 다 그리 정치적인 인물은 못 되는 듯 그들은 조정이 시작된 지 이틀 만에 아웅다웅 다투던 나머지 족인 넷에게 입후보를 맡기고 스스로 사퇴해 버렸다
그나마 기대되던 그 두 사람이 떠나 버리자 조정의 문회는 이전투구(泥田鬪狗) ―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문중의 비난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은 넷은 도무지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주일 만에야 다시 두 사람이 극적인 사퇴를 했다. 술을 좋아하고 인심이 좋아 술친구들의 부추김 때문에 입후보했던 한 족인은 그 약점을 이용한 다른 입후보자에게 간단히 설득되고 말았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보다 약고 악착스러운 데가 있는 조카뻘 후보가 푸짐하게 마련한 술자리에서 인정과 눈물로 양보를 구하자 그만 허허거리며 사퇴해 버렸다는 후문이었다. 처음부터 입후보자 중의 하나가 미워서 전문적으로 그의 표를 깨기 위해 입후보했던 다른 하나도 뒤늦게 낌새를 알아차린 상대방이 지난 잘못을 간곡히 사과하자 깨끗이 사퇴를 해 주었다.
문중은 놀라움과 기쁨 속에서 다시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의 타협을 기다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문중은 문중대로, 두 사람은 두 사람끼리 한 사람의 후보만을 내기 위해 온갖 노력 ― 그들 나름대로지만 ― 을 했지만 허사였다.
“에잇, 아망스러운 놈들.”
조정하던 어른 분네의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문중은 결국 두 사람의 후보자를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실망한 다수의 문중표가 타성他姓)으로 흘러 나갔다. 파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한편 타성 쪽의 일곱 명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돈 간이 나란히 입후보해서 딸이 울며 친정으로 달려가는가 하면, 처남 매부 간이 함께 나와 화투 끗발로 사퇴 결정을 보았다는 풍문도 돌았다. 며칠 만에 급히 서둘러 한 등록인 데다 상대다운 상대가 없어 입후보만 하면 당선될 가능성은 비슷하리라는 데서 빚어진 통대열(統代熱)의 결과였다.
그러나 타성 쪽도 결국은 조금씩 정리되어 갔으니 끗발 나쁜 매부 외에도 사돈 간은 딸 둔 쪽이 양보했고 하나는 제 풀에 기가 죽어 사퇴했다. 또 몇몇 입후보자는 남은 사람에게서 얼마간의 돈을 받고 사퇴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리하여 대략 문중의 입후보자가 둘만 남게 되었을 때쯤 타성 쪽도 두 사람으로 압축되었다. 선거는 사파전으로 결정이 난 셈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마지막까지 남은 네 사람을 잠시 살펴보자. 그 무렵 나는 학업 때문에 십수 년 내 거의 타향살이에 가까운 생활을 해 왔고, 그래서 고향이란 내가 좌절당하고 상처 입었을 때, 또는 삶이 권태롭고 피곤할 때, 잠시 돌아와 쉬는 곳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네 사람은 모두 내게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우선 문중의 두 사람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인 데가 많았다.
먼 집안 지손(支孫)으로 내게는 동항(同行)이 되는 한 사람은 장터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었다. 학력은 고졸, 특별히 고향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으나 평생 직장은 가져 본 적이 없는 부잣집 둘째로서 정미소는 살림 날 때 본가에서 타 온 몫이었다. 해방 직후에 세운 낡은 것이긴 해도 부근에는 하나뿐이다 보니 수입도 괜찮은 편이고 태반이 그의 고객들인 지방민들에게는 지명도(知名度)도 높은 편이었다. 장터거리에서 흔히 있을 법한 성적(性的) 추문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사람도 좀 막힌 데가 있기는 하지만 인정이 있고 경위가 밝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해 주는 조직은 전혀 없고 일관된 정치적 식견이나 뱃심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에게 강점이 있다면 그저 언덕 위의 문중 출신이라는 것과 고졸의 학력 정도일까. 그런 그에 비해 다른 하나는 일찍 몰락해서 인근 민촌으로 밀려난 원(源) 종가의 후손으로 항렬은 질항(姪行),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집의 장남이었다. 학력은 중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그쳤고, 고향에 뜻을 두고는 있어도 ‘문중’이라는 개념보다는 ‘향토’라는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너무 따지고 드는 버릇과 함께 약간 과대망상적인 데가 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남에게는 예절 발라 그의 동네 부근에서는 상당한 신망도 얻고 있었다. 거기다가 일찍부터 4H나 새마을운동에 관여해서 그에게 우호적 인 약간의 조직이 있고 나름대로 정치적 신념과 투지도 있었다.
사실 이 둘의 경합적 관계는 처음부터 그렇게 적대적으로 굳어있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약간 달린다는 걸 느낀 새마을 지도자에게는 웬만한 명분과 실리만 있다면 양보할 마음도 있었던 것인데 융통성 없는 정미소 주인이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설득이라고 한답시고 그를 부른 정미소 주인이 곧이곧대로 그의 약점인 집안과 학력, 지명도, 재력 따위를 들먹이며 사퇴를 종용한 탓이었다.
누군들 자기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데야 발끈하지 않겠는가. 집안이 몰락했다고 해 봤자 같은 형주 이씨고, 학력이라고 해 봤자 고등학교와 중학교는 오십보백보였다. 지명도에 늘리는 건 사실이나 대신 그에게는 4H와 새마을 계통의 지지 조직이 있었다. 재력도 낡은 정미소로 얼마나 모아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도 논 몇 마지기만 내놓으면 정미소 주인만큼의 자금은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은 계산이었다. 거기서 하등의 이유 없이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든 그는 이를 오히려 악물고 정미소 주인에게 덤벼들게 되었다.
그런 사정은 타성 쪽의 입후보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했다. 남은 둘 중 하나는 바로 양보받은 ‘사돈’이었고 또 하나는 좀 떨어진 개골짝 마을의 잎담배 조합 총대(總代)였는데, 그 둘도 어지간히 대조가 되었다.
사돈은 옛 농막(農幕)의 후예로 일제 때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면사무소에 소사(小使)로 들어가 거기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스무 살 때 해방을 맞아 면서기로 일하게 되면서 그에게도 오랜 가난과 굴욕에서 벗어날 기회가 왔다. 바로 토지개혁의 ㅍᅟᅮᆼ문이었다. 문중이 전전긍긍 헐값으로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떠맡기는 동안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 그것들을 사들였다. 어찌 된 셈인지 그는 그 토지개혁이란 것이 두려워하는 것 만큼 철저하지도 않고, 오래가지도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과연 모든 것은 그의 예측대로 맞아떨어져 전쟁이 끝난 후 그가 여러 가지 편법으로 분산해 놓았던 토지들을 다시 끌어모았을 때는 미곡만 백여 석이 넘는 지주가 되어 있었다. 그걸 기반 삼아 장터로 진출한 그는 장사에도 상당한 수완을 보여 ― 그 무렵에는 농협 연쇄점과 맞먹는 규모의 상점을 부근에 셋이나 가지고 있었다.
‘사돈’이 오랜 세월 자기의 재산을 힘들여 쌓아 올린 데 비해 ‘총대’는 그들 타성들 간에는 신ᅟᅳᆼㅎ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옛 산지기의 아들인 그는 그로부터 10년 전만 해도 주막거리나 노름방 뒷전에서 개평술이나 마시면서 돌아다니던 건달이었다. 그러다가 서른 살에 접어들던 해 고향에 개간바람이 불어닥치자 그는 그 생활을 청산하고 건장한 두 명의 아우들과 함께 면소재지에서 30리쯤 떨어진 오지(奧地)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만 평의 국유림을 개간해
잎담배 농사를 시작했다.
그후 무려 다섯 해에 결쳐 그들 형제는 줄곧 면내에서 가장 많은 잎담배 수납자들이었다. 원래 담배는 비옥한 기존 경작지보다는 새로운 경작지에서 더 좋은 색이 나왔는데 그들 형제가 개간한 땅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리한 땅이었다. 거기다가 그들이 있던 곳은 너무도 오지여서 소같이 일하는 그들 삼 형제의 소비는 저절로 최소한으로 억제되었다. 그리하여 꼭 6년 만에 그들 삼 형제가 다시 전에 살던 마을로 내려왔을 때는 모두 한 살림 톡톡히 장만하고 있었다. 맏형인 그가 특히 많은 몫을 차지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는 당연히 그 마을의 유지가 됐고 이어 잎담배 조합의 총대직도 맡게 됐다. 그리고 슬슬 장터거리 출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런 그의 사교술이나 처세 방법은 정적(政敵)인 ‘사돈’조차도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장터로 돌아온 지 한 해도 안 돼 그는 술도가 사장이나 정류소장과는 너나들이를 했고, 면장 지서장과는 ‘형님’, ‘아우’ 하면서 지냈다. 술잔깨나 산 덕분이었지만 여당의 지방 조직과도 선이 닿았고 농협에도 손을 뻗쳐 어찌어찌 이사 자리도 꿰어찼다.
처음 타성 쪽에서 입후보자 단일화에 손을 댄 것은 사돈 쪽이었다. 별다른 언변이나 정치 기술이 없는 사돈의 무기는 그의 든든한 재력이었다. 대부분 즉흥적 입후보자였던 나머지 다섯은 기껏해야 몇 십만 원의 공돈으로 사퇴를 해 주었다.
사돈은 총대도 당연히 사퇴해 줄 것으로 믿었다. 제일 먼저 사돈의 돈을 받아들인 것도 그였고, 나머지도 계속 돈으로 잡으라고 암시한 것도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돈을 받고도 까닭 없이 사퇴를 미루던 그는 나머지 다섯이 등록을 취소하자마자 받은 돈을 냉정히 ‘사돈’에게 돌려보냈다.
첫 회전(會戰)에서 돈만 믿던 사돈은 멋지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결국 그는 많은 돈을 들여 상대의 경쟁자를 모조리 제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선전거리까지 장만해 준 셈이 되었다. 실제로 그 선거가 끝날 때까지 총대는 몇 번이고 금품으로 자기를 매수하려던 사돈의 비열한 음모를 폭로하고 그 유혹을 깨끗이 거절한 자기의 결백함을 과장하였다.
투표일이 가까워 오면서 그들 네 입후보자들의 공방은 점차 치열해졌다. 연일 대소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가장 철저하고 흥미 있는 것은 문중의 입후보자와 타성의 입후보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각 진영 내부에서 벌어지는 전투였다.
“조상도 몰라보는 못된 놈.”
“종가 몰라주는 지손(支孫)은 크게 잘났고?”
“무식한 것이.”
“고등학교 나왔다고 박사 학위 주나?”
“땅이나 열심히 파야 할 놈이.”
“피댓줄 갈고 발동기 기름이나 치지 않고.”
이것이 일가 간인 정미소 주인과 새마을 지도자가 유권자들 앞에서 얼굴만 맞대면 주고받는 독기 어린 응수였고,
“새파란 놈이 버르장머리 없이.”
“벼람빡(벽)에 똥칠하도록 살면 대통령 되겠네.”
“뒤지기(두더지) 같은 놈이 돈푼이나 모았다고.”
“남의 땅 뺏어 모은 것보다는 낫소.”
“산지기 자식 주제에.”
“농막은 큰 벼슬이던가베.”
이것이 사돈과 총대 간의 설전이었다.
대외적인 경쟁도 그 못지않게 치열했다. 사돈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풍금을 한 대씩 기증했고, 어디서 배운 수법인지 다리가 아쉬운 소하천에 금세라도 다리를 놓을 듯 측량을 한다 어쩐다 수선을 떨었다. 정미소 주인은 어려운 살림에도 객지에 자식들을 유학 보낸 몇몇 집에 갑작스러운 장학금 봉투를 내밀고, 노인들이 잘 모이는 정자나 동네의 사랑방에 반들반들한 바둑판과 장기판을 전달했다. 새마을 지도자는 청년 회의소 면지부 결성 대회와 4H 경연대회를 열어 군수 영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총대는 총대대로 ‘총대 친목회 및 잎담배 경작 촉진 대회’를 핑계로 공공연한 술잔치를 벌였다. 그 모든 일들은 그들의 빈약한 사회 활동 경력란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합동 유세 때의 자기 선전 자료로 쓰기 위함이었다.
더욱 재미난 것은 입후보자 부인들의 선거운동이었다.
“아메(아마) 되기는 꼭 될 낍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이 한 표 보태 주소.”
남편의 허세를 그대로 믿고 있는 정미소 안주인이 유권자를 붙들고 하는 말이었다.
“떡 쥔 놈 따라다니다 보면 고물이라도 흘린다꼬, 먼 일을 하디라도 가진 게 있어야제.”
돈을 앞세운 안사돈은 그렇게 말했고,
“지금도 장터에 가서 사는데, 당선되면 아사리(아예) 서울 가 안 살겠나? 글치만 우야노? 그 사람밖에 누구 통대의원 할 만한 사람이 있어야제.”
그게 총대 부인의 희생적인 결론이었다. 새마을 지도자 부인이라고 해서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 있으랴.
“뭣보다도 그런 자리는 남 앞에 서 본 경험이 제일인기라. 그 사람들 중에 열 명이나 제대로 모아 놓고 말해 본 사람 있는가 몰라. 아(아이) 아부지라꼬 말하는 거는 아이지만, 남 앞에 세우기야 그 사람 덮을 사람은 없을끼라…….”
그러나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처음의 팽팽하던 세력 균형은 서서히 깨어지 기 시작했다.
먼저 우위가 결정된 것은 문중 쪽의 입후보자들이었다. 새마을 지도자의 결기가 크게 일을 그르쳐 버린 탓이었다. 어느 날 마지막 조정을 시도하는 몇몇 족인들 앞에서 자기 주장을 꺾지 않는 새마을 지도자에게 정미소 주인이 먼저 분통을 터뜨렸다.
“다시는 너 같은 놈과 상종을 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이 짐승만도 못한 인종지말(人重之末) 아.”
지금이라도 사퇴해 주면 자신의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인데 같은 족인이면서도 기어이 아득바득 달려드는 새마을 지도자에게 내쏟은 격분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기분은 새마을 지도자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가만히 참고만 있어도 일은 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을 터였는데 새마을 지도자는 한술 더 떴다. 그 자리에서 똑바로 지서로 달려간 그는 한방에 앉았던 족인들을 증인 삼아 정미소 주인을 모욕죄로 고소하고 말았다. 어떤 계산에서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결정적인 실수였다. 오래잖아 그 경박한 행동이 문중뿐만 아니라 타성들의 여론까지도 심하게 악화시켰다는 걸 알아차린 새마을 지도자는 황급히 고소를 취하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뒤였다.
어떤 우연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 비슷한 일은 타성의 후보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역시 어느 날 연초 조합장의 생일 잔치에서 맞닥뜨리게 된 그들 둘은 또 예의 그 입씨름을 벌였다. 그러다가 벌써 어디선가 거나하게 취해서 온 사돈이 먼저 일을 냈다.
“승갱이(승냥이) 꼬리 3년을 묻어 놔도 개 꼬리 안 된다더니, 예끼!”
그러면서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총대의 얼굴에다 퍼부어 버렸다.
“이놈의 영감쟁이, 낫살 처먹었으른 나(나이)값을 해라!”
총대도 지지 않고 자기 술잔을 사돈에게 끼얹어 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경로(敬老) 사상이 설득력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사돈은 총대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위였다. 그 사건이 알려지자 총대가 불리해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여기서 드러난 정치적인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차이점이다. 새마을 지도자가 자기를 지탄하는 여론에 압도되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린 데에 비해 총대는 한층 적극적이고 집요해졌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오히려 이롭게 활용하는 정치적 기술을 본능적으로 습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론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낀 총대는 남몰래 비슷한 처지인 새마을 지도자와 접촉했다. 비록 전의는 상실했지만 그 때문에 정미소 주인에게 더 격렬한 증오를 품고 있던 새마을 지도자는 총대의 달콤한 말과 몇 푼의 돈에 얼마 남지 않은 문중의 지지표를 간단히 그에게 넘겨 버렸다. 뿐만 아니라 정미소 주인의 표를 깨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거들어 주겠다는 한심한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아무도 모르게 정미소 주인의 발밑을 파는 데 성공한 총대는 이어 가장 큰 강적인 사돈을 공략하는 데 전력을 집중했다. 그가 눈독을 들인 것은 사돈의 운동원 쪽이었다. 무슨 인격적인 감화나 조직의 연계가 아니라 단순히 돈만으로 사돈과 묶여져 있는 그들 운동원들은 당연히 유혹에 약했다. 총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금을 풀고는 당선 후의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하며, 그들로 하여금 도리어 사돈의 표를 깨도록 만들었다 고향의 일반적인 추측은 그 선거에 퍼부은 자금이 적어도 천만 원은 넘으리란 것이었다. 당시로는 대구에서도 괜찮은 집 한 채를 살 만한 돈이었다.
적을 잘 안다는 점에 있어서도 총대는 네 사람의 후보 중 가장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사돈의 표를 깨는 데만 주력할 뿐 그 표를 자기가 흡수하는 데는 그리 힘을 쓰지 않았는데 그것은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돈에게서 떨어져 나온 표가 정미소 주인에게 갈 염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걱정할 만한 것은 못 되었다. 정미소 주인의 가장 중요한 평판 중의 하나는 ‘경오 바르다(경위가 밝다)’란 것인데 그 말을 다시 바꾸면 ‘냉정하다’, ‘까다롭게 따진다’는 뜻도 되어 일반의 호감과는 멀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대중 선거가 일쑤 원만한 인품의 팔방미인에게 표를 몰아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총대의 판단은 자못 정확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또 그는 새마을 지도자의 눈먼 증오를 이용해서 정미소 주인의 몇 가지 추문을 널리 폭로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고향 사람들이 결국은 사돈과 정미소 주인과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는 사이에 총대는 결정적인 우위를 구축해 나갔다. 여러 번 선거를 치러 본 사람들 중에는 선거의 불가측성과 우연성의 개재를 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확히만 살핀다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쉬운 예가 바로 총대 같은 사람의 좀 저질이지만 치밀하기 짝이 없는 선거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야깃거리로 그 선거를 본다면 역시 하이라이트는 두 번에 걸친 입후보자 합동 유세였다.
첫 번째는 면소재지 초등학교 교정에서 있었는데 입후보자들의 너무도 어마어마한 선거 공약으로 오래오래 고향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었다.
“저는 비만 오면 범람하는 아래 강변에 제방을 쌓고, 새들[新坪]과 용정을 연결하는 교량을 놓겠습니다.”
“아스팔트를 면소재지로 끌어들이고 정기 버스 노선을 늘리겠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자칫 속아 줄 만한 애교로 지나칠 수 있었다.
“다목적 댐을 유치하여 향토 발전에 이바지하겠습니다.”
“산림 자원 개발을 위해 내륙 공업단지를 조성하겠습니다.”
내[川]도 못되는 소하천에 다목적댐은 무슨 말이며 공업용수 하나 해결 안 되는 태백산맥 가운데 내륙 공업단지는 또한 어떻게 끌어들이겠다는 것인지, 경제기획원의 주무관들이 들으면 웃다가 숨넘어갈 소리들이었다.
그들의 학력 소개도 재미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유권자가 그들의 일이라면 그들이 홀랑 벗고 다니던 시절까지를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학력을 한두 등급씩 높였다. 예를 들어 정미소 주인은 어떤 삼류 대학의 야간부 중퇴로 변했고, 그 나머지는 전부 강의록으로 독학해서 고등부까지 마쳤다는 식 이었다.
지역사회에 봉사한 경력 소개도 꽤 가관이었다. 사돈이 향토 교육의 발전을 위해 진력한 내용은 입후보 등록 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풍금을 기증한 걸 말하는 것이었고, 정미소 주인이 인재 양성을 위해 사재를 털었다는 것은 바로 보름 전 향토 출신 서울 유학생들에게 급작스레 떠맡긴 장학금 약간이었다. 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잎담배 경작자들을 위해 분골쇄신 싸워 왔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총대가 지난 장날 ‘경작 촉진 대회’인가 뭔가로 벌인 술잔치에 지나지 않았으며, 영남의 북부 지방이 알아주는 청년 운동의 기수인 동시에 가장 바람직 한 농촌의 지도자상을 구현하기 위해 활동해 왔다는 것도 바로 며칠 전에 열렸던 청년 회의소 지부 결성 대회와 4H 경진 대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도 첫 번째 합동 유세는 참을 만했다. 두 번째는 바로 장마당에서 벌어졌는데, 그야말로 눈뜨고 못 볼 수라장이었다. 투표일을 이틀 앞둔 입후보자들은 모두가 눈에 띄게 안정을 잃고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정신적 소모와 겹친 피로로 눈은 한결같이 충혈되어 있었으며 감정도 조그만 일로 쉽게 폭발했다.
자연 연설도 뒤죽박죽, 터무니없는 자화자찬에 빠져 있다가도 앞뒤 없이 혹독한 인신공격으로 전환하기 일쑤였다.
“거, 뒤에 선 나이 자신 어른들, 괜히 장터서 얼찐거리며 공술 바라지 말고 장 볼일 끝났거든 빨리빨리 올라가시요잉, 내 그 놈의 술양동이를 조(쥐어) 찼쁠라 카이.”
이것이 돈은 자기만 써야 한다는 미신에 빠져 있는 사돈이 정미소 주인도 총대도 돈을 뿌리고 있다는 데에 격해서 유권자들에게 내지른 기상천외한 대갈(大喝)이었고,
“비누동가리나 수건쪼가리 주는 대로 다 뎀느아 쓰소. 막걸리도 주면 마시소. 표만 바로 찍으믄 되니께는.”
이것은 사돈의 격한 말을 능치는 총대의 응수였다.
“같은 족인으로 차마 폭로하기는 안됐으나…….” 하는 허두로 새마을 지도자가 정미소 주인의 축첩(蓄妾)과 엽색 행각을 폭로하는 대목에서는 거기 있던 문중 사람들이 귀를 막을 지경이었고,
“에이, 씨도 못 전할 놈.” 하며 정미소 주인이 연단 아래서 새마을 지도자에게 침을 뱉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모두 눈을 감았다.
총대는 30년 전 토지개혁 때에 사돈이 저지른 죄상을 일일이 열거하자
“이 아편 심어 돈 번 놈.” 하며 사돈이 연단 아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진풍경도 있었다. 총대 삼 형제가 그렇게 짧은 기간 내에 한 살림씩 장만한 것은 오지에서 잎담배 외에 아편 재배도 겸했기 때문이었으리란 일반의 수군거림을 거침없이 드럼I써 놓고 떠든 것이었다.
결국 그 시비는 연설이 끝난 후 멱살잡이로까지 발전했다가 좌우의 제지로 끝났다.
그 외에도 그 합동 유세에 관계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을 욕되게 하는 일은 그만하련다. 그 뒤 단협 조합장까지를 겸하다가 허위 보고와 횡령으로 3년을 복역한 후 고향 거리에서 사라져 버린 총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아직도 고향 거리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유지들이므로.
그러나 한 가지, 그날의 합동 유세에 대한 재미있는 촌평(寸評)은 옮겨야겠다.
그날 무슨 바쁜 일이 있어 유세장에 가지 못했던 한 식자(識者)가 거기서 돌아온 마을 친구에게 경과를 물었다. 그러자 질문 받은 그 친구는 혐오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통대 선거 합동 유세가 아니라 똥되놈들 난장판이었어.”
그 말을 들은 그 식자는 그 자리에서 한문으로 바꾸어 중얼거렸다.
“흠, 분(糞: 똥)호(胡: 되놈) 난장(亂場) 이라…….”
어쨌든 날짜는 어김없이 지나가고 마침내 투표일이 왔다. 네 명의 입후보자들 중 새마을 지도자를 빼놓고는 모두 안절부절못하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떨어지면 시체도 못 건질 일에 적어도 몇 백만 원씩 처넣은 데다 한 달이나 심신을 혹사한 결 생각하니 저질로도 너무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비교적 자신을 가지고 있던 총대마저도 그날만은 유권자라면 똥개에게라도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투표는 계획보다 빠른, 오후 네 시경에 완전히 끝났다. 그러나 마지막 한 표를 기다리는 입후보자들의 극성 때문에 개표는 다섯 시를 넘긴 후에야 시작됐다.
고향 사람 대부분의 예상과는 달리 ― 그러나 사실은 필연적으로 ― 결과는 처음부터 독주하는 총대 뒤를 정미소 주인과 사돈이 허둥지둥 따라가는 꼴이었다. 족인 간의 눈꼴사나운 싸움에 실망한 문중의 표가 많이 기권하거나 타성으로 흘러간 데다, 총대가 은밀히 벌인 사돈 표 깨기 작전이 제대로 맞아떨어져 준 결과였다. 사돈이나 정미소 주인은 한 번도 총대를 넘어서 보지 못한 채 시간이 갈수록 그들과 총대의 표 차이는 벌어지기만 했다.
밤 아홉 시. 이제는 더 이상 결과가 뒤집혀질 염려가 없다고 판단한 총대가 끝까지 남아서 개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차점자를 찾았을 때 차점자인 정미소 주인은 이미 개표장에 없었다. 그 시각 실망과 분노에 찬 그는 가까운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사발째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자기가 그토록 참담히 패배한 원인을 오직 족인인 새마을 지도자 탓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그는 술이 오르는 대로 그를 찾아 분을 풀 작정이었다.
총대는 확실히 정치적인 사람이었다. 차점자가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다른 입후보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정미소 주인보다도 먼저 자리를 뜬 후였다. 새마을 지도자는 자기가 한 짓이 있어 초저녁에 잠깐 얼굴을 비쳤을 뿐이었고, 삼십 분 전에야 자기가 완전히 가망이 없음을 알아차린 사돈은 어제저녁까지도 압도적인 승리를 장담하던 선거운동원 우두머리 녀석들을 찾아 나섰다.구렁이알 같은 내 돈, 내 돈 칠백이십만 원…….
그래도 총대는 단념하지 않고 다시 그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에게는 아직 실연(實演)하지 못한 각본이 한 대목 남아 있었다. 그때 그런 그의 눈에 거의 통곡하다시피 흐느끼는 정미소 안주인이 보였다. 그는 달려가듯 그 슬픔에 찬 차점자의 부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잠시 당황했다. 원래 그의 각본은 차점자를 다정하게 부둥켜안고 정중히 위로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텔레비전 중계 권투를 열심히 시청해 온 터였고, 거기서 비록 사 회전짜리 선수일지라도 승자가 패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익혀 둔 터였다. 그러나 이제 상대가 남의 아내인 여자이고 보니 함부로 부둥켜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말로 때우기로 작정한 당선자가 한동안의 온갖 궁리 끝에 차점자 부인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아이구 눈이 많이 부었네요. 찬물로 찜질이라도 한번 해야겠니더…….”
(1980년)
2016년 11월 2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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