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양분화한 이념대립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교회를 망가뜨리고 있다. 1990년 어간 신학적 보수/진보 대립이 정치적 보수/진보 대립과 맞물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출범함으로 진보적 연합기구인 한국교회협의회(NCCK)와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였으며, 2000년대 초반 ‘뉴라이트’ 운동이 주도한 햇볕정책 반대 시위를 시작점으로 신학적 보수와 정치적 보수가 맞물린 기독교 보수주의가 한국 사회 전면에 등장하였다. 최근 들어 SNS와 유튜브 등 매체의 알고리듬의 작동방식으로 분열은 가속화되어 간다. 정치적 이념과 신앙의 유착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폐해를 가져왔다.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 종교와 이념의 동일시는 대한민국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 기독교 신앙은 정치이념의 기초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념으로부터 초월한 것이다. 이념에서 초월한 신앙은 이념과 정권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이념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 통합에 기여할 수도 있다. 또한 변화된 세계에서 새로운 이념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철 지난 이념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함으로 새로운 정치이념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에 역행하는 반동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국민들은 기독교에 등을 돌려 더 이상 신뢰를 주지 않는다. 기독교가 사회에 줄 수 있는 모든 풍성한 그리스도의 선물이 전달될 통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둘째, 성도들 사이의 이념적 갈등은 공동체를 파괴한다. 매스컴의 보도만 보면 마치 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이 극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020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의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인의 정치적 성향은 진보 31.4%, 중도 39.8%, 보수 28.8%로 나타났다. 즉 일반 성도들의 이념 지형은 일반 국민과 비슷하지만, 고연령층이나 지도층은(이 둘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교인들 간에, 혹은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이념적 갈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그룹 모임에서 성도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다툼이 생기곤 한다. 목소리 큰 다수파가 대화를 지배하고 소수파는 묵묵히 듣고 있지만 다음부터는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코로나 시대 다수의 목회자는 열심 있는 성도들의 극우파 집회 참여 강권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성도는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30~40대의 경우 교회에 대한 충성도가 약하고 동시에 진보적 성향이 강한데, 이 두 요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교회를 떠나는 사례가 빈번하다. 교회를 떠난 성도는 다른 교회를 찾는 대신, 인터넷 예배에 만족하든지, 가나안 성도가 되든지 혹은 아주 신앙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학교가 약화된 중요한 원인이라고 판단된다.
셋째, 기독교인의 이념적 양극화는 신앙의 질을 떨어뜨리고 기독교적 가르침의 본질을 훼손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기초적 가르침의 하나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죄 사함을 갈망하고 십자가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의식을 가진 사람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악에 대하여 자기도 그 악의 일부임을 깨닫고 부끄러움과 겸비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념적 편향성을 가지게 되면 죄의식이 약해진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악의 원인을 현 정부나 이전 정부의 탓으로 돌린다. 서로에 대하여 험한 욕설을 퍼부으면서 비난하다 보면, 스스로에 대하여서는 자연스레 정의의 편에 선 사람으로 생각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라. 보수든 진보든 이념적 편향성을 띤 사람들의 어투는 거칠고 눈빛은 사나우며 그 행동은 오만하다. 이들의 기도는 상대를 없애달라는 간구이며, 성경 구절은 자기 이념을 정당화하는 증거로 사용되며, 설교는 상대에 대한 비난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현상이 한 세대 이상 지속되면서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은 상상 이상으로 하락하였다. 과연 이념적 양극화를 넘어설 길이 있을까? 교회의 참모습을 회복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며 사회 통합에 도움을 줄 자원이 남아 있기나 한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깊이 숙고하는 데 해답이 있다. 촛불을 든 젊은이나 태극기를 든 어르신이나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진짜로 하나님을 만나 은혜를 경험하면 모든 차별과 혐오가 설 자리가 없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동체는 이념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 로마제국 시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노예와 자유민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장벽은 대한민국의 보수/진보의 장벽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복음이 이 장벽들을 무너뜨렸음을 알았다. 교회 공동체에서 은혜받은 성도들 사이의 차별 없는 교류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그들 사이에 화해의 영이 일하시고 있다. 사도바울의 이 공동체 경험은 갈기갈기 찢어진 로마제국을 치유하는 지혜와 용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법과 질서에 의존하는 통합, 잠시 가상 세계를 꿈꾸게 하는 월드컵 의한 하나 됨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중심에 품은 통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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