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로수도 개성時代 |
글 : 김민철 / 조선일보 기자 |
한때 은행·버즘나무가 90% 육박… 단점 탓에 90년대 느티·벚나무 심어 최근 이팝·회화·메타세쿼이아 증가… 소나무 가로수는 찬반 논란 여전 가로수 보면 거리 형성시기 알아… 수종 다양화로 개성 있는 거리 늘 듯
광화문 네거리에 서면 다섯 가지 가로수를 볼 수 있다. 세종대로는 은행나무, 종로는 버즘나무(플라타너스)가 기본 가로수다. 광화문빌딩 앞에선 느티나무잎이 흩날리고, 청계천 쪽으로는 칠엽수(마로니에)가 몇 그루 보이면서 이팝나무 가로수가 길게 이어져 있다.
가로수로 쓰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나무가 아름다우면서 사람에게 해롭지 않아야 하고, 도시 매연과 병충해를 잘 견뎌야 한다. 또 가지가 간판을 가리지 않고, 나뭇잎이 넓어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면 더욱 좋다. 주로 나무 직경 10~12㎝ 이상, 높이 3.5m 이상인 나무를 쓰고 있다.
은행나무와 버즘나무는 비교적 이 조건에 잘 맞는 나무였다. 창경궁 주변 버즘나무는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의 영욕을 지켜보았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플라타너스'로 시작하는 김현승 시인의 시 '플라타너스'가 나온 것은 1953년이다. 80년대 초엔 버즘나무가 서울 가로수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으나, 88올림픽을 앞두고 가을 단풍이 좋다고 은행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으면서 은행나무가 1위에 올랐다. 올림픽 시설이 많은 송파구는 지금도 가로수 57%가 은행나무다.
90년대 초반 두 나무의 비중은 90%에 육박했다. 보통 사람들이 가을 하면 붉은 단풍과 함께 노란 은행잎, 거리에 흩날리는 플라타너스 잎을 연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두 나무는 삭막한 서울 경관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요즘 뜬 신사동 가로수길도 은행나무 가로수다.
그러나 두 나무는 조금씩 문제가 있었다. 은행나무는 열매가 떨어지면 지저분해지고 악취가 났다. 수나무만 심으면 문제없지만 15~20년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암수를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임신부 배를 보고 아들딸 구분하듯, 가지가 위로 뻗으면 수나무, 아래로 뻗으면 암나무라는 속설에 따라 수나무를 골랐지만, 지금도 서울 은행나무 11만6000여 그루 중 2만 그루는 암나무다. 국립산림과학원이 2011년 DNA 성감별법을 개발해 지금은 수나무만 골라 심을 수 있다. 서울시는 연차적으로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할 방침이다.
버즘나무는 성장이 빨라 가지치기를 자주 해야 하는 데다, 봄에 꽃가루가 날리고 흰불나방 등 벌레가 꼬이는 편이다. 이에 따라 90년대 들어서면서 이 같은 단점이 적은 느티나무와 벚나무가 대체 수종으로 많이 심어졌다.
이들 4대 가로수가 '훈구파'라면, 2000년대 들어 '사림파' 가로수들이 본격적으로 한양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팝나무·회화나무·메타세쿼이아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4월 남산에 이팝나무를 기념식수했다. 서울시는 이때 처음 이팝나무에 주목하고, 청계천을 복원할 때 가로수로 이팝나무를 선택했다. 이팝나무는 꽃이 피면 꼭 이밥(쌀밥)을 얹어놓은 모양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팝나무는 개화 기간도 긴 편이고 봄꽃이 들어가는 초여름에 꽃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가 있는 경북 구미 '박정희로'의 가로수도 이팝나무다.
회화나무는 서원을 열면 임금이 하사한 나무로, 학자나무라고도 불렀다. 올림픽대로를 건설할 때 강변에 회화나무를 심었더니 모래땅인 데도 잘 자랐다. 그 후 강남구 압구정역~갤러리아백화점, 서초구 반포대로와 사평대로, 마포구 서강로에도 이 나무를 심었다. 압구정로 회화나무는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에 선비들이 자주 모인 것을 감안해 심은 것이다.
▲ 조선일보 DB. 메타세쿼이아가 늘어난 것은 고건 서울시장 때였다. 키가 큰(180㎝) 고 시장은 시원하게 뻗는 메타세쿼이아를 좋아했다. 그는 "난지도 쓰레기장이 안 보이도록 키가 큰 메타세쿼이아를 심으라"고 지시하고 본인이 직접 심기도 했다. 이 메타세쿼이아 숲은 현재 난지도공원의 명소로 떠올랐다. 강서구청 앞 화곡로, 양재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도 유명하다.
이렇게 해서 현재 서울 가로수는 은행나무(40.3%)·버즘나무(25.7%)·느티나무(11.3%)·벚나무(9.2%)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이팝나무·회화나무·메타세쿼이아가 2~3%씩을 차지해 '7대 가로수'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나무 가로수길도 생겼다. 정동일 중구청장은 재임 시 "소나무는 민족 정서를 잘 대변해주는 나무"라며 명동역~광희문길, 롯데백화점 앞길 등에 소나무 가로수길을 조성했다. 다만 소나무는 관리 비용이 많이 들고 공기정화 능력이 좀 떨어져 가로수로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오세훈 시장은 여름 내내 꽃이 피는 배롱나무를 좋아해 공원에 많이 심도록 했다. 서울에선 주로 화단에 심지만, 전남 담양 등 남부지방에서는 가로수로도 쓰고 있다. 이처럼 가로수 종류와 그 굵기를 보면 거리 조성 시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서울시는 2009년부터 서울 환경에 적합한 21개 가로수를 선정하고 은행나무와 버즘나무 비중을 점차 줄여가는 수종 다양화 정책을 펴고 있다. 다양한 가로수길이 생기면 그만큼 서울에 개성 넘치는 거리도 많아질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