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제2회 기사에서 이어짐)
▣ 伽倻 전성기의 지배층의 무덤―大成洞 고분
다시 김해 시가지로 되돌아와 아파트 숲 사이에 위치한 사적 제341호 대성동 고분군(대성동 434번지)을 살폈다. 1990년에서 1991년까지 3차에 걸쳐 경성大 박물관이 발굴한 떼무덤이다.
특히 이곳 목곽무덤에선 풍성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유했던 가야문화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後漢代의 거울을 비롯하여 일본의 고분에서 보이는 통형동기·파형동기 등도 출토되어 古代 김해가 韓·中·日 삼국 간 문물교류의 중심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구릉 위에 설치되어 있는 露出(노출) 전시관에 올랐다. 노출 전시관 안에는 대성동 고분군에서 최초의 王墓라 할 수 있는 「29호 목곽묘」와 이것을 파괴하면서 설치된 「39호 목곽묘」가 발굴 당시의 상태로 복원·전시되고 있다.
무덤 파괴를 둘러싼 논쟁
다시 김해 시가지로 되돌아와 아파트 숲 사이에 위치한 사적 제341호 대성동 고분군(대성동 434번지)을 살폈다. 1990년에서 1991년까지 3차에 걸쳐 경성大 박물관이 발굴한 떼무덤이다.
특히 이곳 목곽무덤에선 풍성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유했던 가야문화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後漢代의 거울을 비롯하여 일본의 고분에서 보이는 통형동기·파형동기 등도 출토되어 古代 김해가 韓·中·日 삼국 간 문물교류의 중심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구릉 위에 설치되어 있는 露出(노출) 전시관에 올랐다. 노출 전시관 안에는 대성동 고분군에서 최초의 王墓라 할 수 있는 「29호 목곽묘」와 이것을 파괴하면서 설치된 「39호 목곽묘」가 발굴 당시의 상태로 복원·전시되고 있다.
무덤 파괴를 둘러싼 논쟁
아요디아의 雙魚(쌍어). 印度 갠지스 강변의 옛 왕국 아요디아는 「三國遺事」 가락국記에 등장하는 아유타國인데, 이곳에 있는 수백 개의 힌두교 사원 정문 위에 빠짐없이 쌍어문이 있다. 이 쌍어문이 가락국 國章의 원형이다(한양大 金秉模 교수 제공). |
申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3세기 말 이전의 대성동 무덤 유물이 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고, 무기류가 빈약해 대체로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狗耶韓國(구야한국)」 사람들일 기능성이 높은 데 비해 3세기 말 이후 무덤에서는 철제 창검·철제 갑옷·기마용 馬具·청동솥(기마민족 특유의 취사도구) 등이 나온 데다, 무기를 구부려서 매장하고 습속 등으로 보아 북방계 사람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세기 말, 김해 지역으로 「갑자기 남하해 온 기마민족」의 정체는 무엇일까. 申교수가 주목한 집단은 滿洲(만주)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夫餘族(부여족)이다.
사적 제2호 김해 회현리 貝塚(패총). 세계에서 가장 깊게 조성된 패총이라고 한다. 현재 발굴현장 주위엔 패총에서 파낸 팔뚝만 한 굴 껍데기, 주먹 크기의 백합·소라 껍데기, 생선뼈와 토기·철기의 파편 등이 수북이 쌓여 있다. |
申교수의 주장은 1948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京大 교수)의 「기마민족 정복설」의 논리구조와 유사하다는 국내 학계의 공박을 받았다. 「기마민족 정복설」의 골자는 부여족이 남하하여 가야를 거쳐 일본 규슈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와 규슈에 걸친 倭韓연합왕국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 정복설」은 일본에서는 明治維新(명치유신) 이래의 「皇國史觀(황국사관)」을 부정한 획기적인 학설로 자리매김되었지만, 우리 학계에선 「제2의 任那日本府說(임나일본부설)」로 비판받았다.
任那日本府說은 고고학 차원에선 이미 虛構로 판명 나
김해 봉황동에 복원되어 있는 高床가옥. 고상가옥은 습기와 쥐 피해의 방지를 위해 높은 기둥 위에 지은 창고 건물이다. |
왜국이 4세기 말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근 200년 동안 가야 지역을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일본 학계에서도 믿지 않는 분위기가 主流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 고교 교과서에는 고구려 廣開土王의 공적을 찬양하는 丙申(396년)條의 碑文을 「근거」로 내세워 『4세기 말 倭(왜)의 韓國 진출의 반증으로 되어 왔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林孝澤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게임 끝」이다』라고 말했다.
『임나일본부설이 성립하려면 가야의 중심이었던 김해 지역의 어딘가에, 특히 양동리·대성동 고분군에서 당시 왜국의 墓制(묘제)인 前方後圓墳(전방후원분)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김해 지역 어디에서도 전방후원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더 이상 논쟁의 가치가 없는 완전한 허구입니다』
「임나일본부 유적 찾기」는 패망(1945년) 前 일본학계의 큰 과제가 되었다. 東京大의 구로이다(黑板勝美) 교수는 합병 초기부터 김해의 會峴里·參山里·內東里 고분군과 酒村面·長有面 일대를 조사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1917년부터는 경상도 전역으로 조사대상을 넓혔다. 이 조사에 일본의 대표적 학자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참가했다. 그 결과보고서 格인 1921년의 「조선의 古蹟조사」(민족과 역사 제6권)에서 요코다(濱田耕作) 교수는 『저 任那라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先入見(선입견)은 즉각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金海에서 나타난 기마민족의 풍습─殉葬
양동리 304호에서 발굴된 작은 항아리 붙은 角杯. |
39호 목곽묘는 主槨(주곽)과 독립된 副槨(부곽)을 갖추고 있다. 주곽에는 남쪽과 서쪽 편으로 토기를 투구 2점과 갑옷이, 주검이 놓인 중앙에는 목가리개·허리가리개 등 갑옷 부속구와 대도 등이 놓여 있다. 그 밖에 통형동기와 철창, 2구의 殉葬人骨(순장인골) 등이 발견되었다.
殉葬(순장)은 북방 유목민족들이 행하던 장례풍습이다. 申敬澈 교수는 한국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古代 종족들 중 당시까지 순장 습속을 유지했던 것은 夫餘族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三國志 위지 동이전에는 서기 285년 夫餘族이 鮮卑族(선비족)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沃沮(옥저: 함경도)로 피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부여족 主力의 근거지 이동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사료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즉, 옥저로 피란했던 부여족들이 해상 루트를 통해 김해 지역으로 再이동을 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어떻든 대성동의 많은 목곽묘에서는 주인공의 주위나 발치에 배치된 3~5구의 순장인골이 확인되었다. 그 부곽에는 토기를 가득 채웠고, 토기 사이에 정교한 철제 말 재갈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가락국의 지배층이 북방 기마민족 출신이었음을 말해 주는 물증이다.
1993년 이 구릉 기슭에 대성동고분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박물관 관람은 「내일의 일」로 미루고 곧장 서상동 수로왕릉으로 발길을 돌렸다.
首露王陵을 장식하는 아요디아 王國의 國章― 神魚像
구지봉 기슭에 서 있는‘「迎大王歌碑(영대왕가비)」. |
수로왕릉 대문은 2층 누각의 모습이다.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면 수로왕의 신위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숭선전이 보인다.
마당 끝에 또 하나의 문이 막아선다. 지붕 하나에 문 세 개가 나란히 달려 있다. 가운데 문 위에 「納陵正門」(납릉정문)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수로왕릉는 「納陵」으로 불린다.
납릉정문의 문설주 위에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 코끼리의 긴 코와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며 그 사이에 있는 탑을 보호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許왕후에 의해 가야에 전해졌다는 유명한 雙魚文(쌍어문)이다.
쌍어문은 古代 인도 동북부에 존재했던 아유타국(아요디아 王國)의 國葬이었으며, 지금도 그 지역의 상징적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1975년 아동문학가 이종기씨의 현지답사로 처음 확인되었다.
그러나 許왕후의 出自문제는 그 후에도 논란이 되어 왔다. 아유타국의 멸망연대(A.D. 20년)가 허황옥의 결혼연령과 맞지 않는다는 점, 아요디아에서 김해까지 5만여 리를 A.D. 48년 5월에 출발해 2개월 남짓한 7월27일에 도착한 점 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양大 金秉模 교수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명을 위해 고고학적 답사·문헌연구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A.D. 20년경에 멸망한 아요디아 왕족의 일부가 중국 양자강 상류 사천성 安岳縣(안악현) 지방에 이주해 許씨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안악현의 許씨들은 농민반란에 연루되어 탄압을 받자 양자강 중류의 武漢(무한)으로 다시 이주했어요. A.D. 48년, 許黃玉은 종자 20여 명을 이끌고 양자강을 내려와 하구에서 황해를 건너 김해에 상륙했습니다. 수로왕비릉에는 「가락국 수로왕비 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새겨져 있는데, 「普州」는 사천성 안악현에 대한 後漢 시기의 이름입니다』
수로왕릉 경내의 박물관에는 「金海府內地圖(김해부내지도)」가 걸려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조선 후기(1800년경)에 군사용으로 제작된 지도로서 당시의 김해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수로왕릉이 위치한 서상동 일대에 夫巖(부암)·姑巖(고암)·浮石(부석) 등 7개의 고인돌이 표시되어 있는 점, 봉황대와 대성동 구릉의 능선을 따라 토성이 둘러져 있는 점 등도 눈길을 끈다.
伽倻族의 이동 루트를 암시하는 神魚像
김해의 지형을 보면 神魚山地가 배후를 이루고, 前面에는 낙동강이 두 갈래로 분류해 남해로 흘러 들어간다. 강의 兩岸에는 낙동강의 퇴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넓은 삼각주가 분포한다.
하지만 이러한 삼각주는 19세기까지 서너 개 정도의 소규모 河中島(하중도)로 나뉘어 있었다. 1860년대에 金正浩(김정호)가 제작한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를 보아도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지금보다 낙동강의 강폭이 훨씬 넓었다.
지질조사에 의하면 1300년 전에는 지금의 해발 2m 이하의 육지는 모두 바다였다. 따라서 현재의 김해평야가 가야 시기에는 대부분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위지 동이전 倭人條(왜인조)를 보면 당시 낙랑·대방에서 출항한 배가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항해, 狗耶韓國(구야한국: 김해)에 기항했다가 대한해협을 건너 對馬島-이키島를 거쳐 왜국으로 갔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가락국의 선박들은 南韓 최장의 낙동강 물길을 따라 북쪽으로는 상주, 서쪽으로는 진주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의 김해는 중국 동해안, 한반도 서북지방, 경상도 내륙지방 및 왜국 등을 연결하는 동북아의 허브港이었다.
필자 일행은 古代 국제 허브항의 모습을 느끼기 위해 西낙동강을 따라 舊김해군 駕洛面(가락면: 현재 부산시 강서구 가락동)으로 내려갔다. 가락동 포구는 소형선박 몇 척이 정박하고 있고, 그 위로 겨울철새들이 한가하게 하늘을 날아다닐 뿐이었다. 가락동 포구 뒷산은 임진왜란 때 왜장 나베지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쌓은 倭城 터가 남아 있다.
가락동에서 다리를 건너 강서구 대저동(舊김해군 대저읍)으로 건너갔다. 멀리 김해국제공항 상공으로 점보 여객기 한 대가 치솟고 있었다.
필자 일행은 김해시청 앞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우리 일행 셋은 뿔뿔이 헤어졌다. 李泰勳(이태훈) 사진기자는 다른 사진 취재를 위해 전북 고창으로 떠났다. 필자는 혼자 神魚山 銀河寺(은하사)로 출발했다.
신어산 은하사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만, 10여 년 전과는 달리 이제는 자동차 도로가 잘 닦여 있다. 은하사는 許왕후가 시집올 때 동행한 오빠 長遊和尙(장유화상: 허보옥)이 창건한 절로 전해 오지만 확인할 만한 기록은 없다. 은하사 뒤편의 신어산 정상부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타고 온 승용차를 절 마당에 세워 두고 대웅전으로 올라갔다. 대웅전의 벽화 밑 須彌壇(수미단)에는 물고기 4마리가 돋을새김(양각)되어 있다. 세 마리가 東向하고 한 마리가 西向하는 구도이다.
대웅전 답사를 끝내고 내려와 「신어산 찻집」에서 곡전차를 맛보았다. 신어산의 겨울밤이 빨리 다가왔다.
대성동 고분 출토 현장. |
▣ 伽倻문화의 학습장―大成洞고분박물관
가야 무사의 두 얼굴
1월26일 오전 9시 대성동고분박물관에 입장했다. 박물관의 지붕이 매우 특이하다. 宋문화재연구원은 『지붕 모습은 여성의 性器(성기)를 묘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입장료는 무료였다.
2003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입체모형과 영상자료, 실물 크기의 무덤 복원, 가야인의 모습과 생활상의 복원, 가야무사들의 무기와 갑옷 등 다양한 보조자료를 통해 가락국의 사회와 문화를 재미있고 쉽게 전달하고 있다.
눈길을 끈 것은 금관가야 무사의 두 가지 모습이다. 高位 무사는 예안리 12호 고분에서 출토된 北方系 인골을 토대로, 下級 병사는 예안리 41호 고분의 南方系 인골을 토대로 하여 복원되어 있다.
4세기 이전의 삼한 시기의 갑옷은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었지만, 4세기 무렵부터는 철제 갑옷이 만들어졌다. 철제갑옷은 비교적 큰 철판을 재단해 만든 板甲(판갑)과 비늘 모양의 小札(소찰)로 이뤄진 비늘갑옷(掛甲·괘갑)으로 구분된다. 대성동 2호분과 양동리 78호분에서 출토된 판갑은 木甲이나 皮甲을 철제로 변화시킨 것이다. 대성동 3호분 등지에서 발굴된 비늘갑옷은 北方 기마민족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갑옷이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철제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중간소재는 鐵鋌(철정)이었다. 당시 철정은 최고의 첨단제품이었으며, 화폐로도 사용되었음은 앞에서 거론했다. 당시 금관가야製 철정의 최다량의 수입국은 왜국이었다.
그렇다면 왜국은 철정과 철기를 수입하면서 금관가야에 어떤 대가를 지급했던 것일까. 최근 역사·고고학계에서는 그 대가가 노동력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 당시 철기 제작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冶鐵(야철)·製鍊(제련)·精鍊(정련)·鍛冶(단야) 등의 여러 제작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가야史 전공의 홍익大 김태식 교수는 「後漢書」에 「倭王이 生口(생구:사람) 160명을 가락국에 보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이 왜국이 금관가야에 인력을 공급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사례라는 것이다.
이런 교역방식은 발굴유물로도 증명되고 있다. 김해 지역에는 「와지키」라고 불리는 倭系土器(왜계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왜국 서민들이 사용하던 용기로서 당시의 국제교역 품목이 아니었다. 따라서 와지키는 금관가야에 건너온 왜국의 노동자들이 사용한 생활토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 무사의 두 가지 얼굴 모습. 왼쪽의 高位 무사는 예안리 12호 고분에서 출토한 북방계 인골을 토대로, 오른쪽의 下級 병사는 예안리 41호 고분에서 출토된 남방계 인골을 토대로 복원되어 있다(대성동고분박물관). |
고구려軍에 토벌당한 倭兵은 금관가야의 傭兵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철제투구도 갑옷과 세트를 이루면서 출토되었다. 또한 말 갑옷이나 말 투구도 함께 사용되었다.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군사문화의 전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금관가야의 무기체계는 4세기에 들어 혁신적 발전을 이룩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되는 4세기의 창은 3세기의 창보다 훨씬 살상력이 높은 구조이다. 창 끝은 3세기의 것보다 훨씬 뾰족한 다이아몬드型이다. 4세기의 화살촉도 날카로운 삼각형으로 모의실험 결과 종래의 것보다 관통력이 높았다.
그렇다면 금관가야의 무기·무장 체계가 갑자기 혁신적 변화를 일으킨 까닭은 무엇일까. 4세기에 들어서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남부지역에서는 신라와 금관가야가 死活을 건 패권전을 전개한다. 대성동 고분군과 양동리 고분군을 보면 금관가야에서는 4세기 초엽에 전문 전사집단이 나타난다. 금관가야의 개마무사를 보면 철제 무기·갑옷·투구·馬具에서 신라를 압도하고 있다.
다만 금관가야는 신라에 비해 영토국가로서의 발전이 늦어 병력의 수에서 열세였다. 병력의 확보는 절박한 요구였다. 금관가야는 그 해법을 왜국의 노동인력에서 구했다. 당시 왜국은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 國防大의 스즈키 야마시로 교수는 『당시 금관가야가 철정과 철제품의 대가로 왜인들을 대거 傭兵(용병)으로 고용했던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만주 집안에 있는 광개토왕의 비문에 따르면 서기 399년 倭가 신라에 쳐들어와서 城과 저수지를 마구 무너뜨리자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광개토왕은 그 이듬해인 400년 步騎(보기) 5만 명을 보내 왜병을 소탕했다.
이때부터 금관가야와 신라의 군사력은 역전되었다. 금관가야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은 처절했다. 그것이 대성동 57호 무덤에서 나타난다. 이 무덤에서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女戰士(여전사) 인골이 발견되었다. 병력의 열세였던 금관가야는 여성들에게도 동원령을 내렸던 것 같다.
弁韓과 伽倻 유물이 모인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에 이어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찾아갔다. 이 박물관에는 경남·부산지방의 先史(선사)시대에서 가야 성립 이전의 변한, 그리고 전기 가야를 대표하는 금관가야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적 흐름을 살필 수 있다.
고래잡이 船具(선구), 발찌와 같은 장신구, 왜국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黑曜石(흑요석)제 화살촉 등 신석기 유물과 無紋土器(무문토기), 철로 만든 무기와 농·공구류, 당시의 영혼관을 보여 주는 오리 모양 토기 등은 변한시대의 유물이다. 이와 더불어 화려하게 만들어진 철제 무기·갑옷 등 금관가야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김해 양동리에서 발견된 칼자루꾸미개(2세기), 수정목걸이(2세기), 청동세발솥(3세기)과 대성동에서 발굴된 화로 모양 토기(4세기), 김해 퇴래리에서 발견된 판갑옷(4세기) 등이 금관가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함안·고령을 중심으로 형성된 阿羅(아라)가야·大加耶 등 가야의 문화적 독창성과 변화상도 관찰할 수 있다. 아라가야 전시장에서는 새 모양 장식 미늘쇠와 阿羅토기의 특색을 보여 주는 굽다리접시 등이, 대가야 전시장에서는 금동으로 장식한 투구와 다양한 말 부속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야가 신라에 멸망당했다고 해서 군사적 약체였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가야는 뛰어난 철기문화를 보유한 국가였다. 국립김해박물관에 가보면 용솟음치는 가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가야고분에서는 유별나게 많은 철제 갑옷과 무기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전쟁도구는 신라나 백제의 그것보다 선진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사의 三國時代를 四國時代로 고쳐야
미국의 여성 동양사학자 존 코벨(1910~1996)은 그녀의 저서 「한국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에서 『한국의 삼국시대는 500년간 번영했던 가야를 포함한 四國時代로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50여 년간 일본의 古代 미술을 연구했던 코벨 박사는 「쇠의 바다」 김해에서 건너간 가야인의 일본 정벌을 고고미술학적 관점에서 강하게 주장했다. 그녀는 『가야는 東아시아 세계에서 쇠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한 선진 해양국가』였으며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나 르네상스 시대의 제노아처럼 인근의 도시국가들(제국)과 해운연맹을 맺고 있었다』고 했다.
발굴유물로 판단하면 전성기 가야연맹의 판도는 오늘날 한국 제2의 도시 부산과 제3의 도시 대구를 아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남 북부지역인 상주·영주, 서부지역인 진주·하동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왜 가야는 끝내 신라에 병합당하고 말았을까.
가야의 城邑국가들은 해양국가가 지닌 개방성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처럼 광역 영토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가야연맹체의 초·중기에는 금관가야가, 말기에는 대가야(고령-합천)가 맹주의 위치에 있었지만, 모두 강력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가야연맹체의 本家인 금관가야의 지배세력 중 상당수가 일본의 발상지인 규슈(九州)로 집단 이주했던 것이 강력한 영토국가를 이룰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인구학·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서기 700년 현재 일본인의 80~90%가 渡來人系라고 발표한 東京大 나니하라(埴原和部) 교수의 학설, 일본 天孫降臨(천손강림) 신화의 주인공이며 일본 天皇의 직계조상인 니니기가 가라구니다케(韓國嶽)에 올라 『韓國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는 「古事記」의 기록 등은 가야와 일본 황가의 혈연 관계를 암시해 주는 단서들 중 일부이다. 더욱이 니니기 탄강신화는 수로왕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며, 탄강 장소인 「쿠지후루(久土布流)」는 龜旨峯(구지봉)의 일본식 표현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호에서 거론하겠지만, 당시 일본 열도로 건너간 가야인들이 가장 선호한 출발항은 海流(해류) 관계상 김해였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古事記」에 기록된 「일본의 根國(근국: 뿌리의 나라)」은 가야일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 학계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지해 東아시아 세계로 뻗어나간 가야의 역사를 정면에서 다룰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