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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8-5); 서울歷史博物館(4-1)
서울歷史博物館은 由緖 깊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理解와 認識을 높여주고, 서울시민 및 서울을 찾는 內∙外國人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서울의 대표적 문화중심이 되고자 2002. 05. 21 개관하였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과 寄贈遺物展示室, 뮤지엄 샵 등이 있으며, 3층에는 옛 서울과
서울사람들의 생활, 문화, 서울의 발달 등 서울을 4개의 주제로 나누어 구분 전시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朝鮮時代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歷史와 文化를 정리하여
(1) 朝鮮時代의 서울(1392~1863)
(2) 開港, 大韓帝國期의 서울(1863~1910)
(3) 日帝强占期의 서울(1910~1945)
(4) 高度成長期의 서울(19455~2002) 등
4개 期間으로 나누어 전시하는 室內 상설전시장과 野外展示場으로 구성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分館으로 漢陽都城博物館, 東大門歷史館, 京橋莊, 淸溪川博物館 등이 있다.
1존(구역) 朝鮮時代의 서울(1392~1863), 서울역사박물관
(01) 서울역사박물관 前景
(02) 慶熙宮 禁川橋
禁川橋는 慶熙宮의 정문인 興化門 안에 있는 禁川에 놓여 있던 다리로 光海君 10년(1618)
慶熙宮을 조성하면서 架設하였다.
금천교는 두 개의 虹霓橋 아치로 구성되었다.
禁川橋는 원래 현 위치에서 光化門 쪽으로 조금 가 현재 救世軍會館자리에 있었으나
日帝가 京城中學校를 설립하면서 땅에 묻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을 설립하면서 발견된
石造物을 바탕으로 2001년에 復元하였다.
난간의 돌 짐승이나 虹霓 사이에 새긴 도깨비얼굴은 大闕 바깥의 나쁜 氣運이
宮闕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大闕의 正門을 들어서면 바로 건너야 하는 禁川은 明堂水, 防火水와 淨化水의 象徵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禁川 위에 架設된 禁川橋는 임금을 만나러 가면서 井華水에
마음을 씻으라는 象徵性이 있는 다리이다.
그런 금천교가 궁궐마다 명칭이나 漢字 表記法이 조금씩 다르다.
慶熙宮은 禁川橋인데 景福宮은 永濟橋, 昌德宮은 錦川橋, 昌慶宮은 玉泉橋, 德壽宮은
禁川橋이다.
(03) 朝鮮時代의 서울, 3층 常設展示場
1구역; 朝鮮時代의 서울(1392~1863), 500년 王都를 세우다.
朝鮮建國 後 漢陽 定都로부터 開港 이전까지 朝鮮時代의 漢陽[서울]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漢陽都城 안의 雲從街와 六曹거리, 北村에서 都城 밖 城底十里에 이르는 서울의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았던 서울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다.
*성저십리[城底十里]
조선시대 漢陽의 행정구역 중 都城 밖 10里 이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초기에 서울[漢陽]은 五部와 城底十里로 이루어졌으며, 그 경계는 동쪽으로
楊州 松溪院 및 大峴, 서쪽으로는 楊化津 및 高陽 德水院, 남쪽으로는 漢江渡 및 露渡였다.
(04) 조선시대의 서울, 500년 王都를 세우다.
(05) 무릇 首都는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太祖 李成桂는 1392년 7월 19일 建國 後 바로 首都를 漢陽으로 移轉하려 했으나 臣下들의
반대가 심하고, 遷都地域도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太祖 2년(1393) 2월 門下府判事 東皐 權仲和의 건의로 鷄龍山의 주변을 살펴보고 나서
山 남쪽기슭을 새 都邑地로 정하고 건설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그 해 12월 京畿道觀察使
浩亭 河崙이 ‘무릇 나라의 首都는 그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한다’면서 반대하여 수도건설은
중단되었다. (*皐: 언덕 고)
太祖 3년(1394) 8월 11일 太祖는 서울의 毋岳 주변을 살펴보고 다음 날 白岳山(北岳山)
아래에서 地勢를 살폈으며, 13일에는 三峰 鄭道傳 등 여러 신하들과 無學大師의 의견을
수렴하여 漢陽을 都邑地로 정하였다.
(06) 조선 태조 어진[朝鮮 太祖 御眞]
全北 全州市 完山區 慶基殿 境內에 있는 御眞博物館 소장 朝鮮太祖御眞(國寶 317호) (複製)
(07) 조선팔도 고금총람도[朝鮮八道 古今摠覽圖] -보물 1602호-
-金壽弘 작 -1673년
각 지역의 중요한 遺蹟과 人物 등을 기록한 人文地理 地圖이다.
*顯宗 14년(1673) 戶曹參判 金壽弘이 간행한 木版本 朝鮮全圖로,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수록하여
古今을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중간에 都城을 크게 그리고 그 안에 景福宮, 光化門, 光化門 네거리의
議政府와 六曹, 南別宮 등즐 표시하였다.
또 鬱陵島 윗부분에 于山島(獨島의 옛이름)가 표시되어 있어 당시에도
獨島를 나라 땅으로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지도발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으며,
製作 年代 및 製作者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古地圖로 學術的·歷史的
가치가 크다.
(08) 주례[周禮] -17세기
周 나라의 制度를 기록한 책으로 <周禮經圖>에는 首都建設의 理念이 나타나 있다.
*周禮: 중국 周 時代에 王室의 官職制度와 戰國時代 各國의 제도를 기록한 책으로,
원래는 周官 또는 周官經이라고 했으나 儒敎經典의 하나가 되어 儀禮, 禮記와
합쳐 ‘三禮’라고 하며 가장 기본적인 禮를 설명한 것으로 天地四季를 天官∙地官∙春官∙
夏官∙秋官∙冬官으로 職制를 나누었다.
(09) 경국대전[經國大典] -보물 제1521호- -1609년
世祖 때 발행한 조선시대의 基本法典으로, 漢城府는 서울의 人口, 土地, 道路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10) 테라코타 한양도[漢陽圖]
서울의 옛 지도를 바탕으로 만든 테라코타 작품에 太祖~世宗 때까지 漢陽建設의
역사적 사실을 연출하였다.
赤褐色의 粘土 浮彫 위에 3D影像을 加味하여 生動感 넘치는 장면이 펼쳐진다.
*漢陽圖
漢陽의 都市城郭 내부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를 漢陽圖 또는 都城圖라고 한다.
王權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王宮과 宗廟∙社稷 등을 威嚴 있게 그렸으며,
王都를 하나의 小宇宙的 공간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주변의 四山을 이어 그리고 山地의
표현도 繪畵的 技法을 활용하여 實感나게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漢陽 四山(內四山)
漢陽 都城의 城基가 연결되는 네 개의 산으로 白岳山(北岳山)∙仁王山∙木覓山(南山)∙
駱山을 이르는 말로, 太祖 4년(1395) 潤 9월 都城을 쌓기 위하여 三峰 鄭道傳이 四山에
올라 城基를 實測한 데서 연유된 말이다. 이때 실측하여 四山을 연결한 城基의 총 연장은
5만 9,500자였다.
*漢陽 外四山: 北漢山(北), 冠岳山(南), 阿遮山(龍馬山)(東), 德陽山(西)
① 首都 漢陽의 建設
(11) 首都 漢陽의 建設
(12) 太祖~世宗에 이르는 都城 建設
太祖 3년(1394) 8월 25일 太祖는 開京을 출발, 28일 漢陽에 도착하여
옛 漢陽府 官舍를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宮闕建設에 박차를 가하여
太祖 4년(1395) 9월 宮闕과 함께 宗廟와 社稷體制를 완성하였다.
이듬해에는 49일씩 2차에 걸쳐 전국에서 약 20만명을 동원하여
18.6km에 이르는 漢陽都城을 築城하였다.
太祖 7년(1398) 王子의 亂 이후 卽位한 定宗은 漢陽이 不吉하다고
開京으로 돌아갔으나 다음에 즉위한 太宗은 다시 漢陽으로 遷都를 결정하고
昌德宮을 새로 건설, 太宗 5년(1405) 다시 漢陽으로 돌아 왔다.
1412년 惠政橋에서 東大門, 鐘樓에서 南大門에 이르는 구간에 약 2천칸의
市廛을 완성하였다. (*市廛: 시장 거리의 가게 *廛: 가게 전)
世宗은 세종 4년(1422) 다시 32만명을 동원하여 38일에 걸쳐 都城을
보수하고 都心地域의 도로를 정비하여 王朝國家 首都의 威容을 과시하게
되었다.
*惠政橋: 종로구 종로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에 있던 다리.
(13) 東方 第一의 吉地-外廓을 지키는 外四山
(14) 鄭道傳의 <새 都邑地 八景[新都八景]> 중에서
畿甸山下(기전산하) / 기전의 산하 (*甸: 경기 전)
沃饒畿甸千里(옥요기전천리) / 비옥하고 풍요로운 경기 천리
表裏山河百二(표리산하백이) / 안 밖의 산하가 백배의 요새로다!
德敎得兼形勢(덕교득겸형세) / 德스런 가르침은 형세를 겸하니,
歷年可卜千紀(역년가복천기) / 왕업의 햇수는 천 년을 점칠 수 있다.
都城宮苑(도성궁원) / 도성과 궁원
城高鐵甕千尋(성고철옹천심) / 성은 철옹성에 천 길이나 되고 (*甕: 독 옹)
運繞蓬萊五色(운요봉래오색) / 봉래산 오색 구름이 둘렀도다! (*繞: 두를 요)
年年上苑鶯花(연년상원앵화) / 해마다 궁궐 후원의 꾀꼬리와 꽃
歲歲都人遊樂(세세도인유락) / 세세토록 도성사람 놀며 즐기도다!
列署星拱(열서성공) / 늘어선 관청 북극을 호위하다! (*拱: 팔짱 낄 공)
列署岧嶢相向(열서초요상향)/늘어선 관청은 높고 우뚝하며 서로 향하니
(*岧: 높을 초 *嶢: 높을 요)
有如星拱北辰(유여성공북진) /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둘러싼듯하다.
月曉官家如水(월효관가여수) / 새벽달에 관가는 물빛 같은데
鳴珂不動纖塵(명가부동섬진) / 말굴레 장식 울리나 티끌 한 점 일지 않도다! (*珂: 마노 가)
諸坊碁布(제방기포) / 마을들이 포진함 (*坊: 동네 방)
第宅凌雲屹立(제택능운흘립) / 집들은 구름을 범하여 우뚝 서있고 (*屹: 우뚝 솟을 흘)
閭閻撲地相連(여염박지상련) / 여염집은 땅을 치고 서로 연하였으니
(*閭: 마을 여 *閻: 마을 염 *撲: 칠 박)
朝朝暮暮煙火(조조모모연화) / 아침저녁으로 피어 오르는 불 때는 연기
一代繁華晏然(일대번화안연) / 한 세대의 번성과 화려함에 평화롭구나! (*晏: 늦을 안)
(15) 三峰 鄭道傳(1342~1398)
(16) 친림 광화문내 근정전정시시도[親臨 光化門內 勤政殿庭試時圖]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38호- -1747년 작
비단천에 채색하여 그린 8폭의 병풍형태의 記錄畵로 英祖 23년(1747) 9월 19일에
시행한 庭試에 왕이 親臨하여 신하들에게 詩의 제목을 내려 詩를 짓도록 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병풍이다.
총 8폭 중 맨 우측 한 폭에만 그림을 그렸는데, 壬辰倭亂 때 화재로 폐허가 된 勤政殿을
표현한 그림은 당시 폐허가 된 景福宮의 모습과 朝廷의 文風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제2면에는 英祖의 詩題 ‘創業中興萬世法(창업중흥만세법), 龍蹲虎踞漢陽城(용준호거한양성)
/창업하고 중흥하여 만세의 법이 되고,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듯한 수려한 한양이
도성이다’를 적었다. (*蹲: 쭈그릴 준 *踞: 걸터앉을 거)
제3면~8면에는 臣下 50명의 詩句를 各 面 9句씩 6면에 걸쳐 적었다.
*庭試: 조선시대에 나라에 慶事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보이던 科擧試驗.
(17) 영조 어진[英祖 御眞] -보물 제932호(복제)- -光武 4년(1900)
–趙錫晉, 蔡龍臣 등이 제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英祖 51세 때의 모습으로 가로 68㎝, 세로 110㎝ 크기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오른쪽을 바라 보고 있는 모습이며, 翼善冠을 쓰고, 양 어깨와 가슴에는
龍을 수놓은 붉은색의 袞龍袍를 입고 있다. (*袞: 곤룡포 곤)
이 초상화는 英祖 20년(1744) 초상화의 高手 張景周, 金斗樑이 그린
原本은 毓祥宮에 奉安했다가 6·25戰爭 때 燒失되고 지금은 그 移模本만
남아 있다. (*樑: 들보 량)
1900년 趙錫晉, 蔡龍臣 등 當代의 일급 肖像畵家가 原本을 보고 충실하게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王의 影幀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18) 수선전도[首善全圖] -서울유형문화재 제296호- -1864년
-가로 70cm, 세로 99cm -甲子(1864년) 完山 重刊
漢陽의 행정구역, 官廳, 교량 등을 자세하게 그려 木板으로 인쇄한 후
山과 하천, 주요궁궐 등을 엷게 채색하였다.
*首善全圖
古山子 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木版本 <首善全圖>를
펜으로 模寫하고 地名 표기를 한글로 바꾼 지도로, 19세기 말에
제작되었다.
‘首善’이란 ‘首都’라는 의미로, 首善全圖는 곧 漢陽地圖(서울地圖)를
가리킨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廣惠院(濟衆院)의 2대 院長으로 高宗의
主治醫였던 英國人 醫師 겸 宣敎師 존 헤론의 遺品으로, 조선에
체류하던 외국인들을 위하여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요 장소는 지도에 符號를 표시하고, 지도 아래쪽 여백에 그 부호에
해당하는 장소의 명칭과 설명을 英文으로 적었다.
현재까지 전해진 한글本 서울 古地圖가 드물 뿐만 아니라 朝鮮 末
서울의 순 우리말 地名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19) 해설하는 白九 동문과 경청하는 회원들
(20) 총통[銃筒] -16세기 –世宗路 出土
16세기 말에 제작된 銃筒으로 화살을 여러 발 裝塡하고 한 발씩 發射하도록 만들었다.
(*塡: 메울 전)
(21) 총통[銃筒] -16세기 –軍器寺 터 출토 (*寺: 관청 시)
宣祖 때 제작된 勝字系 銃筒으로 裝塡과 휴대가 편리하도록 개량한 個人火器이다.
(22) 북한지[北漢誌]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01호- -聖能 -조선후기
肅宗 37년(1711) 北漢山城 築城工事 책임자였던 八道都摠攝 僧侶 聖能이 山城記事를
편집하여 題名을 <北漢誌>라고 붙여 간행한 책이다.
*책 머리에 지도를 붙이고, 道里·沿革·山谿·城池·事實·官員·將校·宮殿·寺刹·樓觀·橋梁·
倉廩·定界·古蹟 등 14개 항목으로 나누어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책 끝에 著者 聖能의
跋文이 있다. (*谿: 시내 계 *廩: 곳집 름)
*樓觀: 樓閣/四方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
*倉廩: 곳집/ 예전에, 곳간으로 쓰려고 지은 집.
*定界: 일정한 한계나 경계를 정함. 또는 그 한계나 경계.
*跋文: 책 끝에 本文 내용의 대강이나 刊行 經緯, 날짜, 저자, 기타 관계되는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
(23) 서울 漢陽都城 城壁
*工事實名制를 기록한 刻字 城石[성돌].
漢陽都城의 성돌[城石]에는 太祖 5년 처음 築城할 때부터 전체 59,500尺(약 18.2km)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나누어 97개 구간으로 區劃하고, 시계방향으로, 千字文의
순서대로 白岳에서 동쪽으로 ‘天’으로 시작하여 白岳 서쪽에서 ‘弔’로 끝났는데 성돌에는
전국 각 지역의 道∙縣의 공사 담당지역의 始∙終點을 새겼으며 後代에는 감독관의 직책,
이름, 날짜 등을 刻字하였다.
(24) 漢陽의 再 整備
(25) 首都防衛體制의 整備
(26) 한양도[漢陽圖] -19세기 -허영환 기증
存齋 魏伯珪의 <寰瀛誌>에 실린 지도를 模本으로 제작한 것으로 宮闕, 城郭, 門樓, T字로
표현한 市廛 行廊 등이 있다. (*寰: 경기 고을 환 *瀛: 바다 영 *廛: 가게 전)
*환영지(寰瀛誌): 湖南 三大實學者의 한 사람인 存齋 魏伯珪(1727~1798)가 1770년에
편찬한 대표적인 저서 < 寰瀛誌>를 筆寫한 책으로, 朝鮮 八道 및 中國, 日本, 琉球의
지도와 地誌, 天文, 制度 등을 기록한 일종의 百科事典이다.
(27) 도성삼군문 분계지도[都城三軍門 分界之圖] -1751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복제)
조선시대의 首都 漢陽의 警備를 담당한 三軍의 警備區域을 표시한 地圖로
<御製守城綸音>에 실린 지도를 母本으로 제작하였다.
*英祖 27년(1751) 都城을 지키는 법률인 <守城節目>을 반포할 때 책자의 첫머리에
싣기 위해 洪啓禧(1703~1771)가 제작한 목판본 지도이다.
風水的으로 중요한 산과 산줄기가 강조된 서울 古地圖의 일반적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 중 하나이다.
三軍門은 漢陽 北西쪽은 訓練都監, 南西쪽은 禁衛營, 동쪽은 御營廳 등 都城防禦를
책임지던 세 軍營의 防禦區域을 표시한 都城三軍門分界之圖는 三軍을 통할하는
兵曹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地名과 건축물로 미루어보아 1750년~1754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구성과 내용은 英祖 때 제작된 <都城圖>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제 수성윤음(御製 守城綸音) (*綸: 벼리 윤)
國王 스스로 都城民과 함께 都城을 死守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守城綸音’은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의 兩亂 이후 윤곽을 갖추기 시작한 都城防衛體制가
확립되었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英祖 때 守城節目이나 守城綸音이 반포되기 전까지, 都城과 都城民은 방어의
主 對象이 아니었다.
外敵이 침입할 경우, 邊境이나 각 지방의 군사들이 힘껏 그들을 격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일단 外敵이 都城에 접근하면 王은 都城을 벗어나 蒙塵하는 것이
관례였다.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
(28) 도성연융 북한합도[都城鍊戎 北漢合圖] -19세기 전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복제)
都城, 鍊戎臺(蕩春臺), 北漢山城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 지도이다.
(29) 병학지남[兵學指南] -1787년 간행
正祖의 命으로 壯勇營(國王 護衛軍隊)에서 간행하여 17세기 이후 군사훈련의
기본지침서로 활용하였다.
(30) 도성 대지도[都城 大地圖]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97호 -가로 213cm, 세로 180cm
*현존하는 조선시대 都城圖 중에서 가장 크고 정밀하며 繪畵性이 뛰어난 지도로,
官廳의 行政事務用으로 제작하였으며, 英祖 29년(1753)~英祖 40년(1764)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세기 서울의 주요 地名과 都城을 구획하는 행정구역의 위치를 정확하고 상세하게
표시하였다.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精巧하고 纖細하게 표현한 대표적 都城圖로, 다른 지도들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31) 漢城府의 行政區域
*지역별 하부조직은 五部(북부, 중부, 남부, 동부, 서부)로 구성되고, 5부의 하위조직으로
坊, 방의 하위조직으로 契를 두었다. (*坊: 동네 방)
太祖 때는 5부 52방, 世宗 때는 5부 49방이었고, 英祖 때에는 5부 46방 328계로
구성되었다.
五部-坊 체제에 편성된 몇 곳의 城底十里 지역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都城 내부의
행정체제로 機能하였다.
漢城府 관청은 宮闕 앞 光化門 六曹거리의 戶曹와 吏曹 중간에 있었다.
漢陽 땅에 살았던 사람들
漢陽에는 王을 비롯하여 官僚, 醫官, 譯官, 軍人, 商人 그리고 都城 밖에는 채소와 과일 등을
생산하는 農民들이 살았다.
조선시대에는 16세 이상의 남자에게는 신분증으로 성명과 태어난 해를 기록한 號(戶)牌가
발급되었다.
(32) 漢陽사람들과 한양의 人口
② 넉넉한 마을 北村
(33) 넉넉한 마을 北村
京師大路鐘閣以北(경사대로종각이북), 謂之北村(위지북촌), 老論居之(노론거지),
南曰南村(남왈남촌), 少論以下三色雜居之(소론이하삼색잡거지).
-黃玹 <梅泉野錄> [北村南村] -
(34) 漢陽의 上流階層, 京華士族
(35) 北村士大夫, 富貴와 權勢의 상징
(36) 兩班家 男子의 차림새[官服] -조선 후기 –단령 복제
官吏가 일상적인 職務를 볼 때 입는 官服으로 양반집 남자의 상징적인 차림새이다.
=단령(團領): 둥근 깃과 胸背가 달린 官服
=허리띠[帶]: 무소 뿔로 장식한 一品 관리의 犀帶 (*犀: 무소=코뿔소 서)
=사모(紗帽): 얇고 성근 비단에 옻칠하여 만든 모자
=목화(木靴): 단령을 입을 때 신는 신발로 목이 긴 半長靴형태.
(37) 兩班家 女子의 차림새[兩班 女子 服飾] –조선 후기 – 삼회장저고리, 스란치마(복제)
삼회장저고리[三回裝襦], 스란치마[膝襴裳], 당혜[唐鞋]로 구성된 양반집 여자의 禮服用
옷차림이다. (*襦: 저고리 유 * 膝: 무릎 슬 *襴: 내리닫이 란 *裳: 치마 상 *鞋: 신 혜)
=삼회장저고리: 깃, 고름, 소매 끝동을 色 비단으로 장식한 저고리.
=스란치마: 金箔으로 무늬를 둘러댄 치마.
=당혜(唐鞋): 넝쿨무늬로 장식한 양반집 여자의 고급 신발.
(38) 풍계유택[楓溪遺宅] –謙齋 鄭敾 작- (*楓: 단풍 풍)
仁王山기슭에 있던 鄭敾의 外祖父 朴自振의 집으로 二層 樓閣이
보이고 別堂도 두 채나 되는 대규모의 邸宅이다.
뒤로는 仁王山 자락이 펼쳐져 있다.
(39) 송시열 초상[宋時烈 像] -조선 후기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69호-
창의에 검은 巾을 쓴 儒學者 尤庵 宋時烈(1607~1689)의 肖像이다.
(*尤: 더욱 우)
漢陽 士大夫 중에는 尤庵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창의(氅衣): 벼슬아치가 평상시에 입던 웃옷. 소매가 넓고
뒤솔기가 갈라져 있다. (*氅: 새털 창)
(40) 한성부 오태주 준호구[漢城府 吳泰周 準戶口] -1702년
*準戶口: 官廳에서 개인의 戶籍 事項을 증명해 준 문서로 오늘날의
戶籍謄本에 해당되며, 家族制度와 家系의 파악, 身分移動 및
奴婢 소유상황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吳泰周(1668~1716): 本貫 海州, 號 醉夢軒
肅宗 때 工曹判書를 지낸 吳斗寅의 아들로 肅宗 5년(1769) 顯宗의
셋째 딸 明安公主와 혼인하여 海昌尉에 封해지고 從一品 明德大夫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隸書에 능하였으며 詩文에도 탁월한 재주를 보여
肅宗이 寵愛하였다. 여러 개의 글씨와 金石文이 전해지고 있다.
北村의 慶幸坊(현재 樂園洞)에 海州 吳氏 吳泰周와 그 後孫들이 살았다.
*金石文: 金屬이나 돌로 만든 각종 遺物에 있는 銘文. (*銘: 새길 명)
(41) 사랑방[舍廊房] -朝鮮後期
조선시대 男性의 생활공간으로 淸齋라고도 불렀으며, 사랑방의 家具들은 氣品 있는 家具와
小品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랑방에는 經床, 文房四友(종이∙붓∙먹∙벼루)와 硯滴 등을 정리하는 硯箱, 책과 소품을
정리하는 文匣, 四方卓子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硯: 벼루 연 *滴: 물방울 적)
벽에는 고비를 걸어 장식효과와 함께 두루마리 韓紙 등을 꽂기도 했다.
사랑방에는 남성들의 생활용품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호하는 書畵나 骨董品 등을
收藏하기도 했다.
*經床: 經典이나 책을 얹어놓고 읽는 데 쓰던 책상.
*고비: 편지 따위를 꽂아 두는 물건.
(42) 천하도[天下圖](왼쪽) – 고사도[高士圖]
=천하도[天下圖] -1849년
西歐的 世界觀과 東洋的 世界觀이 결합된 지도이다.
17세기 이후부터 제작된 圓形의 天下圖는 서구식 세계지도를 朝鮮式으로 해석하였으나
中國을 중앙에 크게 그린 것으로 보아 여전히 東洋的 世界觀을 根幹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사도[高士圖] -謙齋 鄭敾 작 -18세기 전반
自然을 감상하고 있는 인물을 그린 扇面畵이다. (*扇: 부채 선)
文人들은 山水를 찾아 직접 떠나기도 했으나 때로는 書齋에서 山水畵를 鑑賞하며 자연의
情趣를 느끼기도 했다.
(43) 안방 -조선후기
兩班家 女人들의 생활공간으로 어른을 모시고 子女를 양육하는 등 가족의 衣食住를
전담하는 家庭의 중심공간이었다.
바느질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德目의 하나로 바느질에 필요한
閨中七友(바늘∙자∙가위∙인두∙다리미∙실∙골무)를 담는 반짇고리는 女性의 기본적인
婚需品이었다. (*閨: 안방 규)
閨中七友는 남성들의 文房四友와 對比되는 것으로 남녀의 역할을 상장적으로
代辯해 주고 있다.
(44) 수젓집[匙箸囊] -조선 후기 (*匙: 숟가락 시 *箸: 젓가락 저 *囊: 주머니 낭)
숟가락과 젓가락을 넣어두는 주머니이다.
결혼하는 여성들은 수젓집에 吉祥무늬를 갖는 紋樣과 文句를 수놓아 婚需品으로
가지고 갔다.
(45) 백자 청화 화장용구[白磁 靑華 化粧用具] -19세기
(46) 여성 머리 장신구[首飾]
(47) 부채장식[扇錘] (*錘: 저울 추 추)
(48) 나침반이 달린 부채장식[佩鐵 扇錘] (*佩: 찰 퍠)
- 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8-6); 서울歷史博物館(4-2)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