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진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단편소설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2013)을 받은 작품이다.
표제작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비롯하여 「작업실」, 「나비의 나날」,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 「태워줘서 고마워」, 「일요일 오후」, 「어떤 바닷가 여행」 등 총 열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태워줘서 고마워」를 제외한 다른 모든 단편은 모두 여성 시점이며 그중 대부분이 10대 소녀들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렵거나, 계집으로 태어난 것이 아쉬운 소녀, 아니면 부잣집 하녀일을 해야 하는 아이, 댄스파티를 앞두고 파트너를 구하지 못할까 걱정인 소녀까지.
이야기는 그들의 일상을 조용히 조망한다. 소설들은 요란하지도, 어떤 사건의 조짐도 보이지 않은채 가만히 시작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묵직한 울림과 함께 앞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내밀한 표현들이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상을 통해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인 것 같다.
길지 않은 단편으로 그 모든 걸 해낸다는게 놀랍기만 하다.
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 걸어도 무방하다. 방문이 닫혀 있고 그 방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해 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왜냐,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건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짓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테니까.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작업실」 p.13
아버지는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건만,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이토록 짧구나 싶어서 나는 선뜩 놀란다. 내게는 때때로 아버지가 이 세상이 생겨나면서부터 내내 살아온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그 모든 시간에 견주어보면 아버지도 사실 이 땅에서 나보다 아주 쪼금 더 오래 살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자동차나 전깃불이 없던 시절로 말하자면 아버지라고 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없을 거였다. 이 세기가 끝날 즈음이면 나는 늙고 늙어, 가까스로 살아 있을 테지. 그 생각은 하지 싫다. 나는 저 호수가 그저 호수로, 안전하게 수영할 곳을 표시해 둔 부표와 방파제와 터퍼타운 시의 불빛들과 함께 길이길이 남아 있기를 바라본다.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 p.63
그 무모한 여정. 처음이라서였을까?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서였을까? 아니다. 그건 로이스 때문이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나아가도 어떤 사람들은 꽤 멀리까지 가서 신비주의자처럼 아주 많은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 사랑의 신비주의자, 로이스가 이제는 꼬깃꼬깃 구겨지고 추운 모습으로 완전히 자기 안에 갇힌 사람처럼 자동차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내가 로이스에게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머릿속에서만 요란하게 헛돌고 있었다. 널 보러 또 올게. 기억해. 사랑해. 이런 말들을 나는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공간을 절반조차도 제대로 건너지르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다음번 나무 앞에서, 다음번 전신주 앞에서는 말하리라 나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번번이 못했다. 다만 도시에 더 빨리 닿도록 속력을 높여 무섭도록 빨리 차를 몰았을 뿐이다.
「태워줘서 고마워」 p.159
예전에는 계집애라는 말이 아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하도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 같았다. 계집애는, 내가 지금껏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냥 본디부터 타고난 내가 아니라 어떠어떠하게 되어야 마땅한 존재였다. 계집아이를 규정하는 말은 언제나 강다짐과 꾸지람과 실망의 뜻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p.221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라고 마살레스 선생님이 대답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이가 없도록 당스 데 옹부레 외뢰즈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붉은 벽돌집이 늘어선 무더운 거리를 빠져나오고 시내를 벗어나 마살레스 선생님과, 이제 두 번 다시 못할, 앞으로 영영 못할 게 거의 확실한 선생님의 파티를 뒤로 하고 집으로 차를 몰로 가면서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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