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에곤 실레, 캔버스에 유채 80cm X 80.5cm
전영관
나, 일인용 지옥 하나 만들려네
빈터에 사랑하는 여자를 심겠네 한 번이라도 내가 눈 마주치면 동백처럼
그 여자 목 끊어져도 좋다고 악마와 내기하겠네
이기면 바위도 뚫을 문장 한 줄 받기로 하네
문장도 사랑도 다 잃으면 구름의 비웃음을 필사(筆寫)하겠네
노을이 마를 때까지 붓으로 찍어내겠네
출발하려면 끝장 먼저 보여주는 길을 둘러놓겠네
발목부터 굳도록 혈관엔 석회를 채워 넣겠네.
흑양나무 위패에 이름 없는 것들의 이름을 적어 땅에 심은 뒤
꽃 필 때까지 굳은 발목으로 천리 밖에서 물 길어 오겠네
아버지 옆구리를 파내어 문장을 채우곤 했네 잊지 않으려
만년설에 음각하겠네 냉기만 무성한 극한의 땅
겨우살이 씨앗이 내 등에 뿌리내려 폐부를 점령할 것이네
쇄골을 분지르고 목을 휘감을 때까지
내부에 남은 은유로 그 빚을 갚아야 하네
얼음칼로 대퇴골을 파내야겠네 피리 하나 만들어야겠네
타락한 단어들이 따라오면 그것들과 함께 벼랑으로 투신하겠네
유서도 단조(短調)로 미리 써두고
내가 허비한 노을이 채워질 때까지 소지(掃紙)로 올리며
흩어진 재를 삼켜야겠네 운율이 맞을 때까지 반복해야만 하네
초대도 방문도 못하는 일인용 지옥 하나 만들려네
절경에 나를 가두고 대퇴골 피리나 불면서
내가 쓴 문장들 행간 사이 허방을 겅중거리며 후회하겠네
추락할 때마다 참혹하게, 행복하겠네
출처. 『젊은 시』( 2012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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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하나에는 또하나의 상처가 있다,
열매가 열매를 낳는다는 것은 뿌리를 심어
산 숲을 가꾸는 것이리라
누워서 하늘을 처다보아도 가뭄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비가 오지앟는다
갈증의 폭발에는 그것들이 추구하는 땀의 목숨에 한계치를 극복 하려는
온몸의 저항이 있었다
사방 가득 면벽의 공간에는 소리의 투시는 더 더욱 없다
부딛혀서 갈고 닦아온 공명의 속삭임이 그대의 공간을 지배하는
외침이란 것을 면벽은 모른다
아픔마다 숨겨진 인내가 속을 앓듯 곪아가는 동안
열매는 쨍쨍 내리 쬐는 햇살 아래서
익는다
상처는 토실토실한 제몸을 익혀
미래의 열매를 익히는 것이다, ..............이민영(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