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 수녀님과 보낸 한나절
2024. 10.11
오늘 휴가차 제주에 오신 두 분 수녀님과 만났습니다.
엘리사벳 수녀님과 고로나 수녀님입니다.
며칠 전 오셨지만 여러 사정상 오늘에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숙소가 표선이라 우리집에서는 자동차로 2시간 걸리는 길입니다.
그래서 의논한 결과 서귀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오늘 제주대학 병원에 가는 날이나 부지런히 일을 마치고
서귀포에 도착하니 10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전화를 드리니 외돌개에서 올래길 산책을 하신다고 하여
외돌개로 향했습니다.
조금 기다리다가 주차장에서 10시 30분 경 만났습니다.
내일 가신다고 하여 오늘 오후 정도 즉 한나절만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효율적으로 보낼 계획을
새미은총의 동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대충 새미은총의 동산, 점심식사, 추사관(적거지), 정난주 마리아 묘,
수월봉, 김대건 신부 표착관, 우리 집 방문으로 생각했습니다.
요즘 해가 짧아져 빠뜻한 일정이지만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0시 30분 경 외돌개 주차장에서 만났습니다.
수녀님이 아이스크림을 사 주셔서
차 안에서 함께 먹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차 안에서 여주 도전리에서 10년 간 함께 했던 지난 이야기,
그 후 9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지냈던 수녀님들의 근황,
여주 도전리 마을의 소식 등을 이야기 하고나니
11시 경 새미은총의 동산(이시돌 목장)에 도착했습니다.
두 분 수녀님 모두 처음 방문하신다고 하여 천천히
이곳 저곳을 산책하며 묵상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 새미은총의 동산
▼ 테시폰
국가등록문화재로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소재 성이시돌목장 내 테시폰식 주택.
1960년대 초 패트릭 제임슨 맥그린치(한국 이름 임피제) 신부에 의해
국내 최초로 제주에 도입된 건축물.
테시폰은 건축학적으로 물결모양의 아치(arch)가 연속된 형태의 쉘 구조 건축공법으로,
아치 형틀 비계 위에 가마니 등의 섬유 거푸집을 펼쳐 깐 다음
기둥과 철근 없이 시멘트 회반죽만을 덧발라 만든 건축물이다.
▼ 점심식사(13시)
점심을 모슬포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수녀님 한 분이 생선은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여
메뉴를 무엇으로 할 까 고민하면서 모슬포로 가는 도중에
짝궁인 바울리나가 제안을 하여
우리가 자주 고기를 사러 들리는 집에서 불고기로 하기로 했습니다.
조금 늦은 점심이라 정말로 혀로 핥은 듯이 냄비를
비우고 든든하게 배를 채웠습니다.
물론 식사 중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만큼 오래고 친한 친구인 듯 했습니다.
▼ 김정희 추사관 및 적거지(14시 30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김정희(金正喜)가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이다.
김정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 정난주 마리아 묘(15시)
정난주(마리아)는 1773년 유명한 남인이요,
신자 가문인 정약현의 맏딸로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조카고,
천주교 103 성인 중의 한분인 정하상의 누이이다.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66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그는 대역 죄인으로
사지가 찢어지는 형벌을 받고 숨진다.
이때 그의 나이가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 이윤혜는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를 각각 유배된다.
정 마리아는 두 살 난 아들을 품고 귀양을 가게 되는데,
추자도에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경한이 죽어서 바다에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부탁한다.
사공들은 추자도에 이르자,
해변 언덕배기에 어린 경한을 내려놓는다.
소를 뜯기던 부인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아기가 있어 집으로 데려와 기르는데,
저고리 동정에 부모와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가 바로 뱃사공 오(吳)씨 였다.
지금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도 생겨났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이곳에 묻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보이는 바다로 튀어나온 바위가 바로
두 살 아기가 버려져 울던 장소이다.
제주교구에서는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했다.
한편 제주도에 도착한 정마리아는
관비라는 쓰라린 유배 생활이 시작된다.
대정 관노로 유배된 그녀는
38년간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정마리아는 김 씨 자손들에게
‘한양 유모, 한양 할머니’로 불리며, 점차 자유로운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관비인지라 죽을 때까지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1838년에 선종하여 대정성지에 묻혀 있다.
▼ 수월봉(15시 30분)
옛날 고산리에 수월이라는 처녀와 녹고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몸져눕자 수월봉 절벽에 자생하는
오갈피를 캐어 약을 달여 먹이기로 하였다.
오갈피를 캐러 내려갔던 수월은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녹고는 슬픔에 겨워 한없이 울었으며 그 눈물이 샘이 되어 흘렀다.
그 이후 사람들은 수월봉 절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불렀고 남매의 효심을 기려
이 언덕을 "녹고물오름"이라 불렀다.
▼ 자구내 포구(15시 50분)
차귀도(遮歸島)
중국 송나라 시절, 제주섬은 풍수지리가 출중하여
유능한 인재가 많이 태어나리란 점괘가 나왔다.
이를 시기한 중국 조정은 압승술에 능한 호종단에게
제주의 지맥과 혈맥을 끊으라는 명을 내린다.
제주에 온 호종단은 여기저기에서 지맥과 수맥을 끊곤 산방산에 도착한다.
산방산 아래의 와룡 형상이 바로 왕의 기운이 배어 있는 명당이라 여긴 그는,
예리한 무쇠침으로 용의 가슴임직한 곳을 찌른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구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승천을 기다리던 와룡은 그만 화산과 같은 피를 토하며 명을 마친다.
와룡의 몸에서 솟구치던 피는 원혼을 간직한 채 바위로 굳어져,
안덕면 사계리 바닷가의 용머리 바위가 되었다.
제주 도처에서 혈맥을 끓은 호종단의 만행을 뒤늦게 안
한라산신령이 매로 변장하여 날아가,
호종단 일행의 탄 배를 차귀도 주변 바다에서 난파시켰단다.
차귀도(遮歸島)는 호종단의 귀국을 차단한 섬이라는 의미이다.
▼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16시)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김대건 신부 일행은 8월 31일 상해를 출발, 조선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28일간 표류 끝에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한 것을 기념하고
조선 땅인 제주에서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첫미사의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것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은 대지 4,300평, 건평 168평의 2층 건물로써
2004년 10월 24일 착공하여 개관하게 되었다.
▼ 우리집 방문(16시 40 ~17시)
편안한 마음으로 식혜 한 잔씩 마시면서
집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엘리사벳 수녀님이 가지고 오신 책 몇 권과
여주에서 직접 가지고 오신 밤을 배낭에서 꺼내셨다.
이 무거운 것을 메고 다니신 것이다.
밤은 며칠 되었기에 벌레가 날 수 있으니 빨리 먹으라고 하셨다.
저희는 드릴 것이 없어 집에 있는 강정 몇 개와 방울도마토를 드리고
갈길이 멀다고 재촉하시는 수녀님들을 모시고
서귀포 터미널까지 가서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아내 바울리나가 숙소인 표선까지 모시겠다고 했지만
앞으로 한 시간을 더 가야하는데 우리가 너무 힘드니
이곳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다고 완강히 거절하셨기 때문이다.
▼ 헤어짐(서귀포 버스 터미널) 18시
표선행 버스를 기다리며
한 시간 걸려 집에 7시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있는데
수녀님들도 잘 도착하셨다고 안부를 전해오셨다.
저녁을 먹고나서 찍은 사진을 수녀님들께 보내드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쉽게도 짧은 만남이었지만
은혜롭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기도 속에 아름다운 우정을 기억하며~~
첫댓글
세잎 클로버 님
진정 아름답습니다
감히 댓글의 마음도 우째 놓아야 할지요
특히 수녀님의 사진 촬영하시는 모습이 귀여우셔요 ㅎ
두분의 안내 하신 작품 사랑이 넘치시는 뒷면을 잘 봅니다
강추 드립니다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