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령의 은사란 이런 것입니다(고전12장 1-11)
성경본문:고린도전서12: 1-11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신령한 것들에 대하여 알기를…
오늘 본문은 크게 3개의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3절까지 ‘신령한 지식’에 대하여,
두 번째는 4~7절까지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세 번째는 8~11절까지 ‘구체적인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참 어렵게 써 놓았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만은 꼭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반어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신령한 것’에 대한 존재의 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일어난 이유가 ‘신령한 것’ 때문입니다. 분명히 교회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분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다툼과 분쟁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자신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들을 보면서 누가 잘났는지 다투고 있을 때, 정작 잃어버린 것은 그들의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도우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우리가 은사 없이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부족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부족하니까,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부족하니까, 기적이 필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Pretty Woman’이란 영화를 아시나요? 로맨스 코미디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했던 영화입니다. 매력적인 사업가와 콜걸의 만남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너무나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 둘의 사랑을 진정으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같은 환경에서 당연한 사랑을 했다면 갈등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얼마 전 배용준과 한참 연하인 배우와의 결혼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어느 방송에서 그러더군요. 대스타와 돈 많은 사람 그리고 젊은 여자와의 만남.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조건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연인이니 그 사랑을 순수하게 봐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 화려한 조건이 호감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진실한 사랑을 왜곡하게 만든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신 화려한 은사들로 인해 진정한 사랑을 오해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인도했던 은사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면, 은사 공동체인 교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참 마음 답답한 것은 “신령한 것들”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조차도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죠. 이런 신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은사가 많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우리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어느 은사가 더 큰지, 그래서 어떤 은사를 가진 사람이 더 중요한지와 같은 것 말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8~42절에 보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사실 우리에게 나타나는 표적은 마귀들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를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 가지 파장과 교만으로 인해 문제를 일으킨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미 명백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만일 사도 바울에게 영적은사가 없었다면 이 말에 대하여 무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많은 영적은사를 체험했고, 그의 사역에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그런데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는 많은 영적은사로 인해 단지 패역한 세대로 변해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여러 가지 은사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신 것은 몸을 위한 것입니다. 열광적인 분위기나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적은 없지만 묵묵히 바보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주로 믿고 가는 것이 참으로 신령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결국 다음 장의 고린도전서 13장과 연결이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난 변화산을 통해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부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강해를 하면서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죠?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몸을 내어줘서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한 성령! 다른 은사!
아무리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바라는 것들, 성령의 은사들이 있습니다. 아니, 바라는 것만 있으면 괜찮은데, 남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 없음을 한탄하거나, 혹은 나에게 있는 것으로 남을 업신여길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과 교회론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일관성, 그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맥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 다른 계층, 다른 전통보다 앞서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분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하시게 하는 일이 있는데, ‘유익’을 위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죠.
본문 4~7절을 보겠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유익’이라는 말이 NIV 성경에는 ‘common good’이라고 표현하는데, 메시지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귀중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은사들은 ‘한 성령’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직분’이란 섬기는 일을 말하는데, 우리는 모두 ‘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사역’이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인데 그 뒤에는 ‘한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읽었던 [노스포인트 교회 이야기]에 나오는 글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참 이상하다, 교회의 리더십에 관한 한 우리는 대개 교육과 은사 같은 것의 중요성을 쉽게 무시한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은 ‘소명’과 ‘기름부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당신은 잠시 멈추어 다음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데 어떤 것이 필요 없다고 사람들에게 힘주어 말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다 갖추었다. 예컨대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말을 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다. 그냥 시간을 드리면 된다!”
정말 그런가? 당신이라면 수술을 맡길 의사를 정할 때 그런 기준으로 정하겠는가?
“당신이 시간이 있으니 내 맹장을 좀 절제해주시오!”
물론 하나님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쓰셔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지가 덕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한 순간에 성령께서 꼭 맞는 말을 입에 넣어주실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정말 그런가?
예외를 규범으로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아무나 택하여 쓰실 수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성경에서 예외가 아니라 규범을 밝혀놓은 본문들에 의지하는 게 좋다. 바울이 그것을 더없이 분명히 밝혔다. 누가 무슨 일을 맡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지침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
우리가 가진 은사는 모두 성령께로부터 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능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준비되었는가에 따라 은사도 다르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임하는 은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에 저는 아주 인상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특전 사령부’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 부대의 군목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왔습니다.
부대원들에게 아버지학교 교육을 시키려고 하는데 예산이 조금 부족하다고 말이죠.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부대원들에게 아버지학교 교육을 시킬까? 조금은 의아하지만 그 뜻이 좋아 부족한 부분을 후원하게 되었고, 어느 날 그 부대 사령관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부대로 오기 전, 한 사단의 근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부대원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먹을 것과 선물을 해 줄 돈으로 아버지 학교를 열어주었고, 사람들의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특전사령부에서도 같을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부대원들의 대부분이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어 주말에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많은 사람의 생활이 불규칙하고, 술로 인해 깨어진 가정들을 보았고, 그래서 이 부대에서도 부대원들을 아버지 학교에 넣기 시작했다고.
제 마음에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전도하기도 참 힘든 시대에 사는데, 누군가의 멋진 전략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합시다!’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기도가 능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진정한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무언가 ‘일’이 만들어질 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일들이 일어날 때입니다.
제가 군에 있던 시절 전방에 있는 많은 부대가 땅굴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땅굴을 발견하면 진급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믿음이 좋은 부대장들이 소위 ‘기도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었습니다.
기도하고 땅굴이 어디 있는지 ‘시추’하는 것이죠. 많은 기도하는 사람, 신앙인이 실망했습니다. 분명히 믿음으로 한 일인데 땅굴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을 치는 사람, 뭔가 신령한 능력이 있다는 사람들을 데려다 물어 보았겠지요. 마찬가지의 실망을 경험하고 말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뭔가를 열심히 했지만 근본적인 물음이 없었습니다.
땅굴을 찾는 것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땅굴을 발견하고 진급을 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단지 그 당시의 많은 기독교인이 ‘기도’와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없는 영성과 열심 그리고 능력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열심은 있는데 비인격적이고, 은사는 있는데 교만하고 다툼이 있는 모습, 별로 덕스럽지 않은 모습이 나타나죠.
한 성령 안에서 다른 섬김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군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매년 11월에 있는 군대 진급 시즌이 생각이 납니다. 진급이 발표되기 전까지 참 많은 사람이 열심히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날이 지나면 새벽예배 숫자가 줄어듭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믿음 좋은 사람은 많은데, 기독교인들만 모아놔도 예정된 진급자의 몇 배가 됩니다. 그러니 성공보다는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이 많고,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진실한 기도를 한다면, 진급을 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급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만일 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휘관이 된다면, 그 지휘관이 지휘를 하되 믿음으로 하기는 하는데 실력이 없어 문제를 일으킨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덕’이 될 수 있을까요?
진정한 섬김과 은사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섬기는 것은 모두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같은 분량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70문도, 500명의 제자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있었던 5천 명의 대중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주님을 섬기는 일이지만 그들의 헌신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같은 것이 있다면 모두 한 주님을 섬기는 일이기에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에 대하여 싸우지 말고 자신에게 맡겨진 대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자에 대한 질책임과 동시에 주제넘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든 빛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빛을 재는 단위가 ‘lux’입니다.
예를 들어 건물 화장실이나 복도 등의 밝기는 100 lux 정도면 됩니다. 하지만 미세 결함의 판명 등이 필요한 공정이나 특정 검사대는 1000 lux 정도의 밝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표현을 하자면 촛불 1개 밝기를 1 lux라고 하는데, 여름날 쨍쨍한 날씨의 밝기를 10만 lux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을 하지만 동일하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동일한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이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 우리가 ‘동일한 분량으로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분을 섬긴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지만’ ‘동일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은 8절부터 성령이 주시는 다양한 은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성령의 은사로 아홉 가지를 구분하는데, 확정된 것이라기보다는 고린도 교회에 주신 것, 아니,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은사의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유익을 위한 기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만나교회 사역을 하면서 사도 바울이 열거한 은사를 가지고 ‘은사발견’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제일 강조했던 부분이 ‘재능’과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재능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거나 즐기는 데 사용할 수 있으나,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고 다른 사람을 드러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체가 드러날 때,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활용한다고 하면서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면 올바른 은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재능은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때로 자신의 ‘호’ ‘불호’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의 순종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드는 예이기도 합니다.
주부들에게는 자신들이 잘 하는 특기들이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것과 지겨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 못해도, 즐겁지 않아도 가족을 위해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기에 자신을 부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8~10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9가지 은사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혹시 이런 은사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우리가 흔히 지혜와 지식을 구분합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지식은 우리가 배워서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둘이 다 한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배움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순간순간의 지혜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와 상담할 때,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죠. 말씀을 전할 때, 그 상황에 적절한 말씀이 떠오르는 것이죠. 이러한 은사를 통해 잘 할 수 있는 일이 심방과 상담일 것 같고요.
지식의 은사 역시 모든 사람이 배운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경우에 은혜를 받고 난 후에 성경을 읽는 눈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볼 수 있도록 말이죠.
하지만 이런 은사를 같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제 바탕에 신학적인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죠. 상담과 심방이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지혜의 은사로 임하듯이, 지식의 은사는 지식적 토양을 갖춘 사람과 논리적인 사람을 통해 오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은사는 교회학교 교사나 성경공부, 혹은 설교자로서 불림을 받기에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믿음
아주 흥미롭죠? 믿음도 같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은사라는 것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가진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은 때론 ‘특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데도 늘 겁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올 때마다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담대합니다. 선포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권면하는 일, 혹은 선교사로서 부르심을 받아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faith’를 ‘simple trust’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데 보통의 사람들은 참 복잡합니다. 흔히 MBTI 검사를 통해 ESTJ의 유형들은 따지기를 좋아하죠. 너무 감성적이라는 흠이 있지만, 단순하게 믿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예기치 않은 일을 하시게 됩니다.
흥미로운 일은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조선의 ‘보빙사절단’이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던 중 가우처 목사를 만나게 됩니다.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방미 사절단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고,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해 11월 미국 감리회 선교위원회에 선교헌금 5천 달러를 송금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84년 중국에서 25년 선교사로 사역하다 일본에 머물던 맥클레이 박사에게 편지해 한국을 답사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그때 기차 안에서 만난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만일 민영익이 알렌에게 치료를 받은 경험이 없었다면, 가우처를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에 어떻게 공식적으로 복음이 들어왔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풍부한 유산과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던 가우처가 민영익을 만났을 때, 그가 단순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돕는 사람들을 보며 참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무모함이 놀라운 은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은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기도 합니다.
3)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
병 고침은 ‘믿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병 고침의 은사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필요에 의한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은사를 ‘능력 행함’(miraculous acts)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에 보면 즉각적인 병 고침의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에 첫 번째 기적이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을 고친 사건입니다.
특징은 즉각적이었다는 것이죠. 예수 이름으로 병 고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은 초기 기독교 역사와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복음이 강력하게 일어나도록 성령께서 길을 닦는 은사와 같은 것이죠.
지금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일어나는 하이디 베이커의 신유 역사와 같은 것이 우리나라 60년대와 70년대에도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의료시설이 열악한 곳에서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일어난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에 대하여 미국의 신사도 운동을 주도하는 랜디 클락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렇게 원하던 기적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당신의 가슴은 찢어질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어떤 감리회 소속 교회에서 존 윔버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보았다. 그가 기도해 주었을 때, 놀랍게도 거의 모든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밤, 단 한 사람도 치유 받지 못했다. 실로 지독했던 그 밤의 집회가 끝난 후, 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존 윔버에게 말했다.
"왜 이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그는 대답했다.
"이해를 못하시겠지요? 특별히 오늘 밤에 더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또 어제 밤보다 믿음이 약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제 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제 큰 손을 펴고 말했습니다. '성령님 환영합니다'!라고요. 나는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그 일들을 축복했을 뿐입니다.
어제 밤 모든 사람이 치유 받은 것을 본 후 '오! 나는 위대한 일을 했어' 혹은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나는 '오! 나는 엄청난 실패자야'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제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일도 잠자리에서 깨면 성령의 일하심을 따라 사람들을 위해 또다시 치유기도를 할 것입니다."
이런 영적 은사들은 초창기 사역에 강하게 나타나지만, 모호한 기준들로 인하여 교회가 체계화되면서 점점 약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은사가 나타나는 시기와 때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제가 만나교회 사역을 하면서도 참 신기하게 사역의 방향과 역사들이 바뀌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 BTD 사역을 하던 때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 병 고침의 역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지나자 심령의 변화가 더 중요하게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4) 예언의 은사와 영들 분별함에 대하여.
예언의 은사가 혼돈스럽지 않도록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proclamation’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언입니다.
이미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장래 일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과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결과들을 말입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에서는 예언의 은사가 무척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아직 말씀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이 은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은사들은 중요하지만 혼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하는 사람들과 미래일 들로 인해 누군가의 신앙의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은사’와 더불어 ‘영적 분별’의 은사는 같이 가야 합니다.
영적 은사가 강하게 일어났던 교회에서 혼란과 타락, 그리고 무너짐이 있었던 이유는 이것을 분별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구해야 하는 은사 중의 하나가 영적 분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분별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분명한 일일 것입니다.
5) 각종 방언과 통역의 은사
초대교회 가장 흔하게 나타났던 은사 중의 하나가 ‘방언’입니다. 그리고 현대에도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방법으로서의 방언이 아주 유익하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로 사용되는 이 방언이 좀 더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사는 참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랑’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사는 ‘선물’이기에 감사하며 받을 수 있고,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는 있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은사는 구원과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합시다. 그가 태어난 가장 근본적인 사건을 뒤집을 수 있는 선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선물은 단지 그 생명을 축하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만일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선물이 시시하다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가치 없다고 여긴다면 얼마나 무지한 일이겠습니까?
은사 역시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구절이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선물의 근원은 같습니다. 한분이신 하나님의 영이 하나씩 나눠 주시는 것들입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받게 될지는 그분께서 정하십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 ‘그의 뜻대로’ 즉, 그분이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R. T. 켄달의 [내일의 기름부음]이라는 책에 보면, 아주 중요한 insight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은사’를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본문 11절이 말씀하는 것처럼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야망’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신이 가진 은사가 사람들 앞에서 미천해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은사를 증진시키거나 발전시키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대형교회를 꿈꾸다 추락하는 목회자들을 보기도 하고, 평신도로서 열심히 사역하다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의 영향력을 상실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구별이 참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성령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님 앞에서 늘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의미가 아닐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고 마음대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지금도 그렇지만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와 달리 은사 받은 사람이 체험할 수 있고 자신이 그 은사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우위적인 은사인 줄로 알고 교만했습니다.
방언과 예언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초대 교회에 유익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은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쓰이지 않을 때 성령님이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그것이 우리에게 끝까지 쓰임 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믿는 이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끝까지 하나님의 도구로 유익하게 쓰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