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회 간판을 붙인 북한동 세대문집은 처마 끝에 손이 닿을 정도로 초라한 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간판은 동네 아이들이 떼어다가 놀이판으로 쓰기도 하였고반대하는 사람이 메쳐 쪼개 버려서 다시 연결해 붙이는 등 수없이 훼손당했다. 머리 숙여 세 개의 대문을 거쳐 집안에 들어서면 두세 평 넓이 마당 한구석엔 우물이 있고 그 옆으로 조그만 장독대가 있었다.
바른쪽에는 세 사람이 누우면 꽉 차고 발이 닿는 반 평가량의 안방이 있었고 왼쪽에는 한 평 못되는 사랑방이 있었다. 안방에는 남자들, 사랑방에는 여자들이 기숙했다. 낮은 천장은 머리가 닿으면 기우뚱했다. 이처럼 협회는 초막과 같은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참아버님께서는 소수가 모였어도 웃웃이 땀에 젖도록 수천 명에게 하시듯 우렁찬 목소리로 기도와 말씀을 하셨다.
어느 한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고도 한 시간 넘도록 우시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다. 모두 성령 충만한 은혜로 통곡이 벌어져 눈물로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1945년 광복 이후 준비된 기독교가 참아버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탕감노정을 거친 후 협회를 세워 세계복귀의 출발 기대를 닦으셨다. (참부모경 26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