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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로 밀려 들어오는 독일군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파리 시민들
[ 2차세계대전 초기, 어처구니없는 프랑스의 패망, 독일의 전격전과 낫질작전]
“현대사에서 1940년 6월 프랑스의 패배와 몰락 같은 충역적인 사건은 찾아보기 힘들다. 1806년 프로이센을 상대로 승리한 나폴레옹의 속전속결 이후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패권국가가 이토록 빠르고 무자비하게 붕괴된 예는 없었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패권국가 중 하나가 단 6주를 못 넘기고 말 그대로 국제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미국의 역사가 랭거
“기적이다, 이것은 분명 기적이다!”-아돌프 히틀러
“나에게 이러한 성공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다.”-독일 기갑군단장 구데리안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에서 개시된 독일군의 진격은 불과 6주 만에 연합군을 붕괴시키면서 군사대국이라고 일컬어지던 프랑스가 항복을 했습니다. 세계는 경악했고 패전한 프랑스는 망연자실했고 독일 스스로도 도저히 이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이런 믿을 수 없는 독일의 승리는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른바 전격전(Blitzkrieg,블리츠크리크)과 낫질작전(Sichelschnitt,지헬슈니트)으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 전격전은 독일군이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전차와 기계화 보병, 급강하 폭격기를 활용하여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성을 살리는 작전을 말합니다. 독일어로 ‘번쩍이다’라는 뜻의 ‘블리츠크리크(Blitzkrieg)’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전격전(電擊戰)’으로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 것이죠.
두 번째, 낫질작전은 독일의 대전략가 만슈타인이 입안한 것으로 기동력이 뛰어난 기갑사단을 주공으로 삼아 프랑스의 마지노선과 벨기에 방어선의 연결지점인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재빠르게 치고 나와 대서양 해안으로 진격하여 영불 연합군을 포위한다는 작전을 말합니다.
* 대전략가 만슈타인, 나중에 원수로 진급합니다
이 낫질작전이라는 말은 윈스턴 처칠이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진출 궤적인 낫의 모양과 비슷하다고 표현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아래에서 2차대전 초기 독일이 위에서 얘기한 전격전과 낫질작전으로 프랑스를 어떻게 패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는지를 살펴봅니다.
*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 구데리안
구데리안 장군은 전격전을 개발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터지자 기갑군단을 이끌고 아르덴느 숲을 뚫고 뫼즈강을 도하, 스당으로 치고 들어가면서 독일의 결정 적인 승기를 잡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 낫질 작전, 맨아래 독일군(A집단군)의 진격모습이 낫질같다고 해서...
* 너무 뻔했던 양측의 작전
1940년 봄, 그 전 해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선전포고를 한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이 독일과 대치한 지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9개월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전쟁이 터지면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지노선으로 독일이 정면 돌파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으므로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일 경우, 군사전략상 양측이 선택할 방법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노선은 독불국경을 따라 연결되었지만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서부터는 끊겨있었습니다. 따라서 슐리펜 계획(1차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에 의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25년(1차 대전 당시) 전처럼 벨기에 평원이 다시 독일의 침공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는 1차대전 같은 지구전으로 다시 한 번 독일을 주저앉혀 버릴 작정이었습니다. 연합군은 침공로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기에 대응이 오히려 수월해 보였습니다. ‘다일-브레다 계획(Plan Dyle-Breda)’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작전은 연합국 주력을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 인근에 배치하고 있다가 독일이 침공을 개시하면, 벨기에의 다일 강과 브레다 강까지 이동하여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한 후 여기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저지대 국가를 통하여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계획된 독일의 ‘황색 작전’은 슐리펜(1차 대전 전 독일의 장군)계획을 명칭만 바꿔 단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와 굳이 차이가 있다면 돌파를 담당할 주역으로 기계화부대를 동원할 수 있었고 공군이 하늘에서 지상군을 엄호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처럼 독일의 예상 침공로가 피아 모두에게 뻔히 노출되어 있다 보니 양측은 서로의 전략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벨기에는 본인들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20년 만에 또 다시 원하지 않는 전쟁에 끌려 들어가야 할 운명이었는데, 이들도 상당히 안이하였습니다.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자신의 영토로 독일이 진격하여 올 것이고 또한 그들을 도울 유일한 우군이 20년 전에도 함께 싸운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벨기에는 연합군의 사전 진주는 고사하고 정찰대가 벨기에 국내로 들어와 방어선을 점검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 판을 뒤엎는 새로운 주장 - 낫질작전(지헬슈니트)
이듬해 발발한 독소전쟁으로 인하여 1년 만에 기록이 갱신되긴 했지만, 1940년 독일군과 영불연합군의 대결은 당시까지 물량만으로만 본다면 역사상 최대의 규모였습니다. 양측 합쳐 동원된 병력만도 약 600만에 이르렀고 2만 문의 야포와 6,000대의 전차 그리고 8,000여 기의 군용기가 준비되었습니다. 연합국은 실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비는 하고 있었고 독일은 군부가 작전 연기를 원하였지만 히틀러의 명령이 떨어지면 진격을 하여야 했습니다.
특히 가공할 점은, 이미 오래 전에 선전포고를 한 상황이어서 양측이 이러한 거대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일 만반의 준비를 마쳐 놓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여기에 비한다면 이듬해 발발한 독소전쟁이나 태평양전쟁은 상대가 대응할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과 일본의 기습으로 벌어진 전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준비를 완료한 팽팽한 상황에서라면 기습의 이점이 없을뿐더러 싸움이 벌어진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방어계획을 철저히 신봉한 연합군과 달리, 독일군 내에서는 엄청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보다 혁신적인 공격 방법을 주장한 소장파 장군들이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A집단군 참모장이었던 만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상대방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지점으로 아군을 몰아넣는 황색 작전을 강력히 비판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작전을 제시했습니다.
만슈타인은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주공을 진격시켜 연합군 주력의 배후를 절단한 후 일거에 섬멸하자는 이른바 ‘낫질 작전(Sichelschnitt)’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독일군 주력이 통과할 회심의 돌파구로 구릉지대인 아르덴느 숲을 지목했고 사전에 정지만 하여 놓으면 기갑부대가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곳을 최대한 빨리 통과한 후 스당)을 지나 대서양까지 신속히 내달리자는 구체적인 각론도 제시했습니다.
* 낫질 작전의 극적인 채택
독일군 지휘부도 황색 작전에 따라 프랑스를 침공한다면 많은 아군의 희생이 불가피하며, 최악의 경우 1차대전 같은 지옥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대규모 기갑부대가 어떻게 좁디좁은 산림지대를 통과할 수 있느냐면서 만슈타인의 제안을 기각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 10일,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던 전쟁이 개시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선택한 침공방법은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이었습니다. 실현 불가능하다고 거부되었던 이 계획이 채택된 과정은 상당히 극적이었습니다. 수차례의 기각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이 황색 작전을 비판하고 계속 성가시게 굴자 이를 항명으로 판단한 참모총장 할더가 그를 후방의 제38군단장으로 좌천시켜 버렸습니다. 그런데 만슈타인이 군단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가 이 부대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때 만슈타인은 총통에게 낫질 작전을 소상히 설명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히틀러가 전격 채택함으로써 작전이 극적으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에 서부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던 히틀러는 참호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황색 작전대로 작전을 펼치다가는 자칫 벨기에 평원에서 전선이 정체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심 우려하고 있었던 차에 만슈타인의 아이디어는 히틀러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묘책이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권력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독일 군부는 히틀러로부터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침공 계획을 변경하고 부대를 신속히 재배치했습니다.
* 아르덴느 숲을 지나 뫼즈강으로...
* 아르덴느를 뚫고 거침없이 진격하라!
독일은 침공군을 A, B, C의 3개 집단군으로 나누었습니다. 최초 계획에서 북부의 B집단군이 네덜란드, 벨기에를 통과하여 프랑스로 쇄도하는 주공을 담당하고 중앙의 A집단군은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그리고 남부의 C집단군이 마지노선의 프랑스군을 견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낫질 작전으로 인해 주공이 아르덴느를 통과하기로 변경되면서 기갑부대를 비롯한 모든 예비대가 이곳을 담당한 A집단군으로 집중되었습니다.
룬트슈테트 원수가 지휘하는 A집단군에는 침공군의 절반 가까이 되는 총 45개 사단이 증강 편성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독일이 보유한 10개 기갑사단 중 7개 사단을 하나로 모아 최초의 야전군 급 기갑부대인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창설하여 기갑부대를 최대한 집단화하였습니다. 아직 실험적인 요소가 강했지만 이러한 혁신적인 모습은 구태의연한 전술을 고수하고 있던 프랑스와 확연히 딴판이었습니다.
* 아르덴느 숲을 뚫고...
흔히 전격전의 상징으로 압도적인 독일의 전차부대를 상기하지만 당시 양측이 동원한 전차는 독일군이 2,400여 대, 연합군은 3,000여 대 수준이었고 개별 전차의 성능도 연합군 측의 전차가 약간 더 우세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다만 프랑스가 전차들을 보병부대에 분산시켜 운용하였던 데 비하여, 독일은 여러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이를 집단화하여 전선을 가르고 종심을 신속 타격할 충격군으로 삼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독일군이 새로운 전략을 처음부터 맹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일군의 최고 지휘부도 보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와 달리 소장파의 주장에 그래도 귀를 기울이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폴란드 침공전에서 시험 삼아 편제했던 집단화 된 기갑부대가 가능성을 보이자 이를 대폭 확대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독일은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여기에 모든 운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 잠망경 없는 잠수함 속의 총사령관-프랑스의 한심한 가믈랭 장군
미리 개척된 숲 속의 좁은 통로를 헤쳐 나가던 A집단군은 개전 당일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서전을 통렬하게 장식한 것은 원래 황색 작전에서 주공으로 예정되었다가 지금은 조공으로 임무를 변경한 북부의 B집단군이었습니다. 낫질 작전에서도 이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연합군 주력인 프랑스 제1집단군이 자신들을 독일군 주력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한 후, 최대한 저지대 국가 지역으로 끌어당겨서 배후를 길게 노출시키도록 미끼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면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향하는 대규모의 독일군이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연합군 최고 수뇌부에 긴급하게 보고되었습니다. 영국 원정군을 포함하여 연합군을 책임진 인물은 가믈랭이었습니다. 그는 1939년에 실시된 자를란트 진공(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가 독일의 자를란트를 점령하고 다시 슬그머니 빠져나온 사건)을 어이없는 쇼로 만들어 버리며 전쟁의 증폭을 막을 수 있던 천추의 기회를 날려버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이 거대한 300만 명의 연합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자체가 어쩌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가믈랭의 사령부에는 무전기는 물론 단 한 마리의 문서 전달용 비둘기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북동부전선 사령관 조르주 장군을 접촉할 때도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주로 관용 차량을 타고 그의 숙소로 찾아갔습니다. 한시가 다급한 이 상황에서 그 먼 곳을, 그것도 후퇴하는 병사들과 피난민들 때문에 북새통인 거리를 비집고 직접 찾아갔다는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가믈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무장된 300만 대군을 가지고도 허무하게 패전한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장군으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B집단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유린하자 자신의 계획대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주력인 프랑스 제1집단군에게 다일-브레다 계획에 의거해서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대안이나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강력한 3개 집단군이 전선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본토 전력의 9할에 이르는 규모였습니다. 이들 3개 집단군은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제1, 2, 3집단군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핵심은 벨기에로 진입할 예정인 제1집단군으로 여기에는 30만의 영국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1집단군은 약 150만 규모였는데 병력이나 장비가 여타 집단군에 비해 앞서는 최정예였습니다.
* 뫼즈강 도하
* 미끼를 덥석 물은 프랑스군, 독일군의 올가미 속으로...
이보다 전력이 뒤지는 2선급 부대로 구성된 제2, 3집단군은 마지노선 벙커 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프랑스는 제1집단군에게 전쟁의 모든 것을 건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독일 B집단군을 응징하기 위해 연합군 주공인 프랑스 제1집단군이 벨기에로 진입하였고 이러한 소식은 시시각각 독일군 지휘부에 보고되었습니다. 프랑스는 26년 전에 있었던 마른의 기적(1차 대전 초기 독일군의 주력을 마른 강 지역에서 방어한 사건)을 벨기에에서 재현하고자 하였지만 독일에게 속아 서서히 함정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프랑스 전역에서 가장 운명적인 순간은 바로 독일의 침공 당일인 5월 10일이었습니다. 9개월 전에 먼저 선전포고를 하였음에도 공격은 포기하고 스스로 방어자의 입장을 선택한 프랑스였지만 독일의 도발을 충분히 예견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개전 당일 독일의 기습이 프랑스군을 향한 것이 아니라 길목이라 할 수 있는 저지대 국가로 향하였기 때문에 초전에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 가믈랭의 전략, 주력부대를 북동쪽으로...
이처럼 장기간의 경계에 지쳐있긴 하였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춘 150만의 프랑스 제1집단군은 다일-브레다 계획에서 설정한 예정 방어선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우익을 담당하는 제9군과 제2군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해안선을 따라 동진하는 제7군과 모든 부대가 차량화된 영국군의 전개는 흠잡을 데 없이 빨랐습니다. 이들이 예정선에 이동 완료하면 현지에서 벨기에군까지 합세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완성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겉으로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던 전선 중앙의 아르덴 숲 속에서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대규모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 독일의 주공인 A집단군 예하 부대들이 사전에 은밀히 개척된 험로를 차례차례 돌파하여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슈타인이 아르덴느를 돌파구로 지목한 이유는 프랑스가 이곳을 침공로로 전혀 예상하지 않았을 만큼 기습의 효과가 컸기 때문입니다.
* 프랑스의 이기적인 생각
독일 A집단군은 사전에 공병대가 닦아 놓은 구릉지대의 소로를 따라 종대로 전진하고 있었는데, 워낙 많은 부대들이 집중하면서 병목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이때의 상황은 프랑스가 방어에 상당히 유리할 수 있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우회로도 없는 산악지대의 한정된 통로를 따라 보병도 아닌 거대한 기갑부대가 움직이다 보니 출구만 틀어막으면 독일의 진공을 손쉽게 꺾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가믈랭은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귀중한 항공 전력을 보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독일군 예상 집결지에 대한 폭격을 금지한 것이었습니다. 설령 아무리 비싸고 중요한 장비라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과감히 소모시켜야 하는 것이 전쟁인데, 가믈랭은 독일 공군에게 격추될 것을 두려워하여 최대한 보존하려고만 들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바라는 것이 애당초 무리였습니다.
반면 독일의 조공이자 연합군을 안으로 유인할 미끼로써의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독일 B집단군의 활약은 대단하였습니다. 많은 예하부대를 A집단군으로 이전시켜 축소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전략 지점을 차례차례 선점하여 나가는 B집단군의 초기 진격 모습은 연합군 측에게 이들이 주공임을 의심치 않도록 만들어 버렸을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시선은 아르덴에서 더욱 멀어져 갔습니다.
이처럼 예상을 뛰어 넘는 B집단군의 선전은 은밀히 돌파를 시도하고 있던 A집단군의 안전을 더욱 보장해주었습니다. B집단군의 속도에 놀란 프랑스군은 다일-브레다 계획대로 부대 배치가 제시간에 완료되지 않을까 오히려 조바심을 내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가믈랭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제1집단군의 이동을 재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다시는 자국 영토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벨기에에서만 전쟁을 치르겠다는 프랑스의 이기적인 단견이기도 했습니다.
* 숲 속을 빠져 나온 괴물
내 땅에서 전쟁은 안 된다는 프랑스의 편협한 사고방식은 결국 커다란 전략적 실수를 가져왔습니다. 주력부대가 벨기에의 예정 방어선까지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여야 했는데, 사실 영국군을 제외한다면 기동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분산되어 집결지로 향하기 일쑤였고 많게는 100킬로미터 이상을 행군하여 전투 전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쳤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강력함은 독일의 의도대로 전쟁이 흘러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만일 육군끼리만 충돌한다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처럼 전선이 고착화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독일 공군은 하늘에서 프랑스군의 이동을 강력하게 제어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B집단군이 선전을 벌이며 프랑스 제1집단군을 완벽하게 잡아놓고 있는 사이에 주공인 A집단군은 예정대로 숲 속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5월 11일, 아르덴 정면을 담당하던 프랑스 제2군 사령관 욍치제르는 숲 속에서 독일군의 이동이 목격된다는 보고를 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별거 아닌거라고 깔아뭉개고 좌측에 있던 제9군과의 연결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기갑부대를 앞세운 대규모 부대가 그런 험한 산악지대를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한 프랑스는 여전히 저지대 국가를 종횡무진 휘젓는 독일 B집단군에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 아르덴느 숲 전투 상보
연합군의 주력부대가 벨기에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베를린으로 전해졌을 때, 그 소식에 접한 히틀러는 너무나 기뻐서 펄펄 뛰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놈들이 우리가 쳐둔 올가미에 고스란히 걸려든 것이다!” 놈들은 우리가 아직도 그 뻔한 계획에 매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히틀러가 말한 ‘뻔한 계획’이란 독일군이 네델란드와 벨기에를 먼저 점령하고 거기서부터 프랑스를 향해 올 것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난공불락의 마지노선과 울창한 아르덴느의 숲, 그리고 뫼즈 강을 도하하는 난관을 피하기 위해서는 거의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진격루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일군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연합군의 주력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그 시각, 룬트슈테트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육군 A집단군의 결정적인 일격이 그보다 훨씬 도 남쪽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양동작전이었으며, 독일군 지휘부가 오래전부터 계획해 온 회심의 역작이기도 했습니다.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을 이루는 이 수풀은 수목이 너무나도 빽빽하게 밀생하여 도저히 전차와 같은 기계화부대의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믿어지고 있었고, 또 우방국인 벨기에와의 국경인만큼 마지노선이 연장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만일의 사태를 염려한 프랑스군은 이 지역에다 상당한 양의 지뢰를 매설해 두었지만, 이 지뢰밭은 이미 공격이 시작되기 전인 5월 9일 밤에 은밀히 침투한 독일군 공병대에 의해 통로가 뚫려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5월 10일 새벽 4시경
벨기에 국경 아르덴느 숲속의 플로렌빌 초소를 경비하던 프랑스 제2 기병사단 소속의 피에르 상병은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위해 크게 기지개를 켰습니다. 그의 소대는 벌써 몇 달째 이 지역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 조용하고 깊은 숲속에서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중대의 장교들이 서부전선 전체가 불바다가 되더라도 이곳만큼은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수근대는 얘기를 여러번 들었고, 독일놈들의 전차가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이처럼 깊은 숲속을 뚫고 들어올 수 없다는 것쯤은 말단 졸병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피에르 상병은 이 위험한 시기에 이렇게 안전한 곳에 배치된 자신이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보초 교대자가 나올 것이고, 그러면 따뜻한 와인 한잔을 마시고 잠을 자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바로 그때 그는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피에르는 주의를 집중하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분명히 맑은 새벽공기를 가르고 자동차 엔진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고 있었습니다. 초소에는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르네는 그 사실을 중대본부에 보고하기 위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같은 시각
아르덴느 상공을 비행하던 프랑스 공군 제6 비행사단의 정찰기 조종사는 끝없이 줄을 지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차량 행렬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엄격한 통화관제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달빛에 반사되어 희게 빛나는 도로를 따라 검은 뱀처럼 굼실굼실 움직이고 있는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습니다.
조종사는 즉시 그 사실을 상부로 보고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날이 밝으면 다시한번 확인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날 새벽, 아르덴느 숲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프랑스 제2군 예하의 각 부대는 갑자가 숲속에서 튀어나온 독일전차 부대의 일제 기습을 받았습니다.
제2 기병사단은 말 한 마리 없는 이름뿐인 기병사단이었지만, 설사 그들이 완전편제된 정예의 부대였다 하더라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플로렌빌의 제2 기병사단과 알롱의 제5 기병사단은 문자 그대로 변변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 버렸습니다.
일찍이 샤를르 드골 같은 프랑스 기계화 부대의 선각자들이 수차례 그 위험성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덴느의 숲으로는 전차부대가 통과할 수 없거니와, 설사 통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9~10일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프랑스군은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모든 전차가 프랑스군의 르노나 소뮤아 같은 구식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던 것이지만, 높은 기동력을 가진 독일군의 신형 3호, 4호 전차는 프랑스군의 상식을 보기좋게 뒤엎어 버린 것입니다.
* 독일군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
* 뫼즈강의 뱃놀이
단 이틀만에 아르덴느를 돌파한 독일군의 7개 기갑사단은 5월 12일에는 뫼즈 강변에 이르렀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이 강의 프랑스쪽 대안에는 수백문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는데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기 때뭄에 여전히 어려운 상황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럴때 등장하는 것이 역시 독일 공군입니다. 13일 이른 아침부터 저 빛나는 독일군의 장기-절묘한 공,지 입체작전이 되살아났습니다. 편대를 지어 날아온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와 하인켈 폭격기들이 차례로 프랑스군 진지를 강타했고, 오후 4시에 이르자 프랑스군 포좌는 완전히 침묵 속에 빠져 들었습니다.
* 구데리안, 최전방에서 지휘를...
이제 강 건너편에서 이 멋진 구경거리를 즐기고 있던 독일 지상군이 나설 차례입니다. 뫼즈강은 순식간에 고무보트와 상륙용 주정들이 내지르는 소음으로 가득찼고, 그 위에 올라탄 독일 병사들은 흡사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라기보다는 소풍을 떠나는 어린 소년들마냥 들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구데리안 장군은 그런 장병들의 태도가 좀 못마땅했습니다. 용감하고 쾌활한 성격의 제1저격 연대장 발크 중령이 장군의 표정을 얼핏 곁눈질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부하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희들, 지금 뱃놀이하는 줄 아나?” 그것은 바로 몇 달 전에 도강 훈련 시범을 할때 젊은 장교들이 신바람이 나서 떠들어대자 구데리안 장군이 그들을 나무라던 말투를 똑같이 흉내낸 것입니다. 발크중령이 장군을 향해 한 눈을 찡긋했고, 이 믿음직한 부하의 자신만만한 유머에 한 대 얻어맞은 장군의 얼굴에 쓴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구데리안을 비롯한 독일군의 고위 지휘관들은 이제 더 이상 부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내릴 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 젊은 부하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병사들이 고무보트와 상륙정으로 강을 건너고 있는 동안 공병대가 가설한 목제 가교를 통해 전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프랑스 영내로 쏟아져 들어갔고, 강의 남쪽 대안에 이르자 처음으로 프랑스군의 전차와 마주쳤습니다.
프랑스군의 싸아르 B1 전차는 알려진 것처럼 성능이 형편없는 그런 고물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주포가 회전포탑이 아니라 차체에 고정되어 있어 조준범위가 좁긴 하지만 독일군의 주력 3호전차보다 훨씬 위력적인 75mm 대구경주포를 장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행속도도 시속 28km로서 독일 전차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차체 장갑은 60mm에 달해 독일전차에 비해 거의 갑절에 해당하는 강력한 전차인 것입니다. 하지만 샤를를 드골 대령이 지휘하는 이 프랑스 육군 제4 기갑사단의 전차들은 한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 항복하는 프랑스 전차병
그때까지도 전차는 어디까지나 보병전투를 지원하는 움직이는 포대 쯤으로 간주되고 있던 프랑스제 전차에는 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찍부터 전차야말로 장차 지상전력의 핵심을 이루게 될 것이란 사실을 예견해 온 선각자 드골대령이지만 무전기가 없는 상태로는 도저히 독일군과 같은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지휘가 불가능했고, 더구나 난생 처음으로 전차대 전차의 기갑전투를 경험해보는 프랑스군이 폴란드에서의 실전경험을 쌓은 독일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불과 2~3시간 동안 계속된 이 최초의 전차전에서 50대 이상의 프랑스군 전차가 파괴되었습니다. 다급해진 연합군은 공군을 출동시켜 독일전차를 막아보려 했지만 이들 역시 이 무렵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독일 공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지상에서 마구 쏘아 올리는 88mm 고사포와 날렵한 메사슈미트 전투기의 요격을 받은 프랑스 공군의 드보아틴과 영국 공군의 구식 데파이언트 전투기들은 실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버렸습니다. 5월 14일까지 프랑스에 파견되어 있던 영국공군기 474대 중 70% 이상이 손실을 입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너무나도 수월하게 시시각각 확대되어 나가는 대승리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독일군 지휘부였습니다. 독일군 상황분석 장교는 전 전선으로부터 시시각각 날아드는 승전보를 집계하기에만도 쩔쩔매고 있었고, 전선의 각 부대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프랑스군 포로들을 처리하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 롬멜
워낙 신출귀몰,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바람에 개전 불과 나흘만에 유령사단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던 독일의 제7기갑사단장 롬멜 소장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공포로 일그러진 프랑스군과 민간인들이 널려있다. 길옆 도랑이나 울타리, 수풀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줄줄이 손을 들고 걸어나와 자비를 애걸하는 그들은 도저히 대육군국 프랑스의 군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고위 지휘관들의 졸렬한 작전과 지휘가 죄없는 병사들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연합군은 에이스의 카드패를 쥐고서도 단 한번의 실수로 그것을 모두 날려버린 도박사와 같았다.“
* 최전선의 롬멜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남쪽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프랑스군의 긴 철수행렬을 헤치고 독일전차부대들이 질풍처럼 내달렸습니다. 한무리의 독일군이 그들을 추월해 갈 때마다 프랑스군은 번번히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지만, 독일군은 숫제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쳐 가는 웃지 못할 광경이 속출되었습니다.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무장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프랑스군 1개 중대가 독일군의 대열을 가로막고 항복을 애걸하자 전차위의 독일군 장교가 유창한 불어로 소리쳤습니다.
“총을 버려라. 그리고 너희들 마음대로 꺼져버려! 우린 너희들을 붙들고 씨름할 시간이 없다.”
5월 20일
구데리안의 선봉 전차부대는 아미엥과 아브빌까지 진출했습니다. 지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부대가 4년에 걸쳐 진격했던 것보다 더 먼 거리를 단 열흘만에 주파해내는 눈부신 성과를 거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발빠른 진격으로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에 고립된 연합군의 병력은 거의 100만에 달했고, 그 중에는 벨기에군 전체와 영국의 대륙파견군 3개 사단, 프랑스가 자랑하던 최정예 2개 사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면으로부터 보크장군의 독일 B집단군의 맹공에 직면하고 측면과 배후로부터는 룬트슈테트의 A집단군 전차에 짓밟힐 판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지를 벗어나자면 어떻케든 솜므 강 남쪽의 프랑스군 주력과 합류해야 하고, 그러자면 벨기에의 오스땅드나 프랑스의 블로뉴, 깔레, 덩케르크 항구를 통한 해상보급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배를 타고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또한 바로 이 항구들이었습니다.
* 파죽지세의 독일군
5월 15일, 최악의 사태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다오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레노 수상으로부터 패전의 비보를 전해들은 처칠 영국수상이 급히 파리로 날아왔습니다. 파리는 온통 쑥대밭이었습니다. 중앙정부청사가 모여있는 케이도르세 거리는 기밀문서를 소각하는 연기로 자욱했고, 일종의 발작적인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가믈랭 장군의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전황을 설명받은 처칠을 기가 막혔습니다. 가믈랭 원수는 실제로 독일군을 능가하는 대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후의 반격에 사용할 예비병력마저 여기저기 흩뿌려 놓는 바람에 영불해협의 해안선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진격해 오고 있는 독일군을 저지할 연합군 부대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잠망경 없는 잠수함’이라고 수군거리던 일부 장교들의 얘기가 정확한 진실이었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굴속같이 깊은 지하호 안에 들어앉아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전략게임을 되풀이하는 가믈랭의 지휘 스타일을 비꼬는 말이었지만, 그의 이런 무기력함은 정작 전쟁이 개시된 지난 아흐레 동안 더욱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68세의 노인은 통신망이 완전히 두절되어 그의 휘하부대들이 어디서 어떤 꼴로 찢기우고 있는지 조차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이 잠망경 없는 잠수함 속에 혼자 틀어박혀 마침내 결정적인 반격계획이란 걸 완성시켰지만 그 내용은 실로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미 독일 전차의 캐터필러에 깔려 소멸해 버린 부대가 반격의 주력으로 선정되어 있었고, 그나마 그 부대에 작전계획을 하달할 수단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레노 수상은 가믈랭 원수를 경질시키고 베이강 원수를 후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은 이 73세의 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베이강
그러는 사이 롬멜이 이끄는 독일 제7기갑사단이 최초로 아르덴느 숲을 튀어나와 뫼즈 강을 향하여 돌격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믈랭은 크게 놀랐으나 여전히 다일 강과 브레다 강에 구축하기로 예정한 방어선에만 매몰되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어디가 독일의 주공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5월 13일이 되었을 때 대부분의 A집단군 예하 부대들이 아르덴느를 빠져 나와 신속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완성된 거대한 포위망
프랑스는 경악하였으나 홀연히 등 뒤에 등장한 엄청난 독일군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프랑스 제1집단군이 벨기에로 이동하면서 생긴 텅 빈 후방에 예비군으로 구성된 2선급 부대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독일 기갑부대에 놀라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독일군 전차들이 차례대로 강을 건너오자 방어를 포기하고 뒤로 돌아 후퇴에 나섰습니다. 프랑스군은 사실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그들이 뭔가 크게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주력은 너무 앞에 나가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다일-브레다 방어선에 겨우 도착한 제1집단군은 독일 B집단군과 전면적인 교전을 벌이고 있어서 뒤로 방향을 돌려 빠져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독일군이 뒤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즉각 대처할 방법이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5월 15일, 스당을 돌파한 독일 A집단군이 놀랄 만한 속도로 영불해협을 향하여 달려가자 지금까지 앞만 보고 저지대 국가를 향하여 몰려가 있던 프랑스 제1집단군은 순식간에 배후가 차단되면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혀 버렸습니다. 5월 20일이 되었을 때 상황은 극명해졌습니다. 독일 A집단군 선도 부대가 영불해협에 다다랐고 동시에 독일 B집단군도 전면을 압박하여 들어오면서 연합군 주력은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일부에서 단말마적 저항이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기적을 만든 마른 전투 같은 극적인 반격을 재현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은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군의 행태였습니다. 아무리 회피하였어도 전쟁이 발발하였다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프랑스군은 싸우려 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은 1차대전 당시의 아버지 세대처럼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독일군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손을 들어버렸습니다.
* 패주의 물결
* 전격전 수행 중 유일하게 독일군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아라스 전차전
독일군의 쾌속 전진 중에 한차례 대규모 전차들끼리의 전투가 한차례 벌어졌는데 바로 아라스 전차전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독일이 승리하였지만 이 때문에 나중에 연합군의 덩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히틀러가 연합군 유린 직전에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키는 효과도 가져왔던 전투였습니다.
아라스에 있던 고트장군의 영국 대륙파견군 대부분은 아직도 거의 말짱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장군은 휘하의 2개 사단과 본국에서 실어온 74대의 마틸다 전차를 사용하여 독일군의 전차대를 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다 프랑스군도 제3 경기병사단늬 전차 60대를 증파해 주기로 약속되었으므로 이제 개전 이래 최대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질 판이었지만 이들이 상대해야 할 적은 훗날 북아프리카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용명을 떨치게 되는 롬멜소장이 이끄는 독일 제7기갑사단이었습니다.
5월 20일 하루내내 고트장군은 눈이 빠지도록 동쪽에서 협공을 개시하기로 한 프랑스군 전차부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영 감감 무소식이었으므로, 마침내 영국군 단독으로 반격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5월 21일 오후
아라스 교외에서 영국군 제1 전차여단의 선봉 마틸다 전차 58대가 독일군 제3 SS기갑사단의 뒤를 따르던 보병부대의 측면을 들이치는 것을 시작으로 개전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의 반격다운 반격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영국제 마틸다 전차는 독일 전차에 비해 기동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독일군의 37mm 대전차포에는 끄덕도 않는 중장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영국제 마틸다 전차
순식간에 독일군의 2개 보병연대를 궤멸시킨 영국 전차대는 방향을 전환하여 독일 제7 기갑사단의 주력부대에 달려 들었고, 뒤늦게 전열에 합세한 프랑스군의 60대의 소뮤아 전차가 후위를 엄호하는 가운데 74대의 영국전차와 독일군 전차가 아라스 평원에서 뒤엉켰습니다.
특히 눈부신 전과를 올린 것은 영국군의 25파운드 대전차포였습니다. 레이 아치볼드 병장이 지휘하는 대전차포 팀은 이날 침착한 사격으로 4대의 독일 전차를 격파했습니다. 이 모처럼의 반격은 냉정, 침착한 야전지휘관 롬멜소장마저 한때 ‘적전차 최소한 수백대 출현’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타전했을만큼 독일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 이것이 덩케르크 점령 직전에 히틀러의 자국군의 정지명령을 내리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기계화 부대간의 전투에서는 역시 장비 그 자체의 성능적 우열이 승패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연합군의 통신은 더 효율이 좋은 독일군의 무선장비에 의해 낱낱이 도청되고 있었고, 독일군이 일단 전열을 수습하자 켄투주(영국)의 평원에서 기동연습만을 반복해 오던 부대와 폴란드에서의 눈부신 실전 경험을 가진 부대의 격차가 점점 더 뚜렷하게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라스의 전투는 이틀간 계속되었지만 독일군이 전차 14대라는 경미한 피해를 입은데 비해 연합군은 40대 이상의 전차를 잃었고, 그 기간에도 독일군의 주력부대는 전혀 방해를 받지않고 진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라스 전투를 고비로 프랑스 북부의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5월 28일,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은 항복했습니다. 이제 프랑스땅 안에는 질주하는 독일 전차와 하늘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급강하 폭격기인 슈투카를 견제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베네룩스 3국은 물론, 영프 연합군도 각지에서 참패와 후퇴만을 거듭했으며, 독일군이 아르덴 산림지대를 돌파하고 뫼즈 강을 넘으며 연합국이 예측치 못한 대규모 우회포위기동으로 주력부대가 모조리 포위섬멸 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연합국은 아라스에서 간신히 반격을 개시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독일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맙니다. 독일군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퇴로가 없는 연합군을 짓밟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포위망에는,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계속되는 연전연패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영국·프랑스·벨기에의 군인 수십만 명이 갇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군 지휘부는 포위망 내부와 외부에서의 동시반격으로 이들을 구원한다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으나 사실상 불가능한 계획이었습니다.
* 히틀러의 최대의 실책-덩케르크 철수
그 시점에서 연합군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였습니다. 영국 대륙 파견군 사령관 고트 장군은 벌써 며칠째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미 처칠 수상으로부터 대륙파견군 전 병력을 프랑스로부터 철수시켜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진 상태였지만, 또 한편 현재의 직속 상관격인 프랑스의 베이강 원수로부터는 롬멜의 전차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상태였죠.
* 영국 대륙원정군 사령관 고트, 얼굴이 죽을상입니다
그는 영국의 역대 어느 지휘관보다도 곤혹스런 선택을 내려야하는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습니다. “내가 처음 청년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하던 그때, 오늘 이처럼 처참한 패배 속에 빠진 우리 영국군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마침내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는 영국으로 돌아간다.”
철수 항구로 선정된 덩케르크에서 배를 타고 반나절 남짓이면 영불 해협을 건너 영국의 남단 <도버> 항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전선에서 만신창이로 찢어진 영국군은 자력으로 전선을 탈출하여 덩케르크에 집결해야 하지만, 당장 그 부대들에게 철수명령을 전달하는 것도 큰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이 영국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덩케르크를 행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군 최선봉인 구데리안의 전차부대가 덩케르크로부터 불과 20km 앞둔 <아>운하에 도착한 5월 24일에는 철수명령을 받은 영국군 부대들이 덩케르크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전차병들도 지금 자신들의 손에 영국대륙 파견군 잔존 병력 전체의 목에 걸린 밧줄의 한 끄트머리가 쥐어져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그들은 이제 힘껏 그 밧줄을 잡아 당기기만 하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25일 아침, <아> 운하에 임시 가교가 설치되고 첫 전차가 굉음을 울리며 그것을 통과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한통의 전문이 날아 들었습니다. “귀관의 부대는 일단 현 위치에 정지하고 추후명령을 기다릴 것”
구데리안은 기가 막혔습니다. 무기조차 집어던진 적의 철수병력이 집결해 있는 덩케르크에 전차를 몰고 달려가 완전히 일방적인 집단학살을 감행 할 수 있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기하라니...!
절대로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명령을 내릴 턱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고, 더구나 히틀러 총통이 직접 내란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 전날 오후에 룬트슈테트 원수의 A집단군 사령부를 예고없이 방문한 히틀러가 난데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2차대전의 전 기간을 통하여 독일군이 저지른 가장 큰 작전상의 실패 중 하나이며 이 뜻밖의 행운으로 목숨을 건진 수십만명의 연합군 장병들조차 끝내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많은 역사가와 전술가들이 그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 고심해야 했던 것과는 달리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전쟁이 터지고 난 지난 보름간 너무나도 수월하게 얻어온 손쉬운 승리가 히틀러로 하여금 새삼스런 조심성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전차부대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전선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자 히틀러는 일말의 불안을 느꼈던 것입니다. 보급로가 길게 연장되고 취약한 옆구리가 노출됨으로써 금쪽처럼 아끼는 전차대가 적의 포위망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새삼스러운 조심성이 일어났던 겁니다.
히틀러의 머리 속에 5월 21일 벌어졌던 영국 전차대가 롬멜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온 아라스 전차전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더도 말고 딱 반나절만 더 전차부대를 돌진시켰더라면 덩케르크 백사장은 영국군의 집단묘지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었지만 하여간 구데리안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덩케르크 시내의 지붕들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쌍안경으로 해안을 살펴 본 구데리안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철수하는 영국군이 개미떼처럼 새카맣게 항구의 백사장을 뒤덮은 채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접 총통에게 전화를 걸어 전차의 캐터필러로 영국군을 깔아 뭉개는 것쯤은 아주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재차 설득했지만 히틀러는 결정을 번복하려 들이 않았습니다.
“걱정 말아, 자네들의 전차는 파리를 함락시키는 더 큰 할 일이 남아있어. 그까짓 영국군 패잔병들 쯤이야 우리 공군이 토끼사냥하듯 쓸어 버릴 수 있을거야”
각 전선에 분산되어 있던 영국군이 덩케르크를 향해 퇴각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상당수의 프랑스군까지 뒤따라왔고, 철수작전을 알게 된 네델란드,벨기에군 병사들까지 꾸역꾸역 덩케르크로 몰려들었습니다.
* 파리로, 파리로...파죽지세의 독일군
덩케르크의 철수가 곧바로 프랑스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가 정식으로 항복한 것은 다이나모 작전이 종결 된지도 보름이나 지난 1940년 6월 17일이었습니다. 이 보름 동안 프랑스는 나름대로 분연히 저항을 계속했고 유럽 최강의 육군국답게 65개 사단이라는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영국군 2개사단이 프랑스 땅에 남아 있었고, 그중 하나는 전차사단-제1 기계화사단-이었으므로, 이들이 능력있는 지휘관에 제대로 지휘되기만 했더라도 전쟁의 양상은 사뭇 다른 방향으로 굴러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임 육군 참모총장 베이강 원수는 73세의 고령에다 1차대전의 영웅 포슈 원수 밑에서 참모장을 지낸 경력이 있긴 하지만, 한번도 실전에서 야전군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이 프랑스 전선에 전개시킨 병력은 143개 사단에 달했고, 더구나 이 부대들은 거의 손해를 입지 않은 상태로 최상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노도와 같은 공격을 계속하여 6월 10일 저녁 무렵에는 구데리안의 선도 전차부대가 에누 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13일에는 베이강 원수가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한 마른 방어선을 돌파했습니다. 드골같은 일부 지휘관들의 용감한 분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도처에서 패퇴를 거듭했고, 독일군은 한발 한발 파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습니다.
6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남프랑스의 투르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6월 11일 오후. 파리는 비무장 도시로 선포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전투는 유럽의 심장이며 아름다운 고도(古都) 파리를 폐허로 만들 뿐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각료들이 도시를 포화에서 구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내놓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파리의 히틀러
6월 14일. 마침내 파리는 함락되었습니다. - 아니 함락이라기보다는 이미 텅 비어버린 도시에 독일군이 군화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걸어 들어왔지만, 총성 한발 울리지 않은 완벽한 무혈입성이었습니다. 이날 투르에 있던 정부는 다시 더 남쪽의 보르도로 달아났습니다.
6월 중순이 되자 프랑스의 절반이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왔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마지막 끈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1916년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었던 페탱 원수에게 위기 타개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얌전한 항복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독일의 괴뢰정권인 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매국노로 손가락질 당하고 처벌까지 받았지만 사실 페탱이 정부를 물려받았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파국 그리고 항복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918년 11월 11일 콩피에뉴 숲 속에 있던 열차의 식당 칸에서 정전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패전의 굴욕을 겪었던 독일은 바로 그 열차를 그 장소로 다시 끌고 와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히틀러가 의기양양하게 방문한 가운데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독일은 프랑스를 완전히 굴복시켜버렸다. 히틀러의 군대는 프랑스의 2/3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진격을 멈추었습니다.
[ 영화, 다키스트 아워 ]
* 처칠로 분한 게리 올드만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어둠의 시간)>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윈스턴 처칠의 행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 '어둠의 시간(Darkest Hour)'은 처칠 경이 1940년 6월 18일 연설에서 프랑스의 패망 후의 처참한 상황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 영화는 살아남는 것이 승리였던 사상 최대의 덩케르크 철수작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용기로 40만 명을 구한 윈스턴 처칠의 가장 어두웠지만 뜨거웠던 4주일을 담은 영화입니다.
* 처칠의 타이피스트
해외 유수 매체들의 극찬 속에서 개봉했습니다. 특히 “우린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승리가 없으면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세계의 운명을 바꿔 놓은 윈스턴 처칠 역의 연기파 배우 게리 올드만의 신들린 연기가 볼 만합니다.
윈스턴 처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네 가지는 강철 같은 의지의 철인, 불독, 승리의 V, 물고 있는 시가일 겁니다. 그런데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처칠은 이런 정형화된 이미지와 달리 딴판입니다.
무모한 몽상가, 대책 없는 낙천가, (히틀러에 버금가는) 대중 연설에 능한 선동가, 아내 앞에선 꼬리를 내리는 귀여운 공처가, 알코올 중독 문제가 있는 정치적 실패자, 정당 내 지지 기반이 약한 떠돌이, 당적 변경을 밥 먹듯 일삼은 기러기 정치인 모습입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철인 정치가 처칠이 아니라 인간 윈스턴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췄습니다. 영화 속 처칠은 끝없이 갈등하고 불완전하고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분)의 입을 빌리지만 '그 마음의 갈등이 처칠을 단련시켰고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강하고 확신이 없기 때문에 현명한 것'이라 설파합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콘트라스트가 센 인간 처칠의 양면적 모습은 게리 올드만의 몸을 빌어 완벽하게 재현됩니다.
* 식구들과...수상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
윈스턴 처칠을 연기한 게리 올드만은 몇 달 동안 준비 과정 중 가장 먼저 목소리부터 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미세한 윈스턴 처칠의 콧소리와 목소리 톤은 게리 올드만이 여러 번에 걸친 청취 학습으로 찾아낸 포인트였습니다.
연설 중 어떤 시점에 이러한 포인트를 살리고 언제는 하지 말아야 하는지와 같은 자신만의 룰을 정하고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제작진은 게리 올드만의 녹음 파일을 받고 실제 윈스턴 처칠의 연설 파일과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습니다.
게리 올드만은 <다키스트 아워>를 통해 몸집과 헤어 등의 외모는 물론 목소리와 억양, 걸음걸이까지 이제까지의 게리 올드만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파격적인 변신과 열연을 선보이며 특유의 강렬한 존재감의 정점을 선보였습니다.
이미 여러 번 윈스턴 처칠 역을 제안 받았던 게리 올드만은 몇 번이고 고사했던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다키스트 아워>의 힘 있는 스토리와 진심 어린 메시지에 반해 출연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 워룸에서...
이를 위해 명배우다운 아낌없는 노력을 쏟아 부었다. 먼저 당시 윈스턴 처칠의 신념과 용기를 이해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부터 전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공부하며 캐릭터에 다가갔고, 그의 내면에 숨겨진 에너지와 파워를 찾아냈습니다.
단지 자신이 맡은 캐릭터 이상으로 윈스턴 처칠의 심리와 생각을 이해하고 싶었던 게리 올드만은 “수많은 압박과 제약 속에서 명문을 써 내려간 것 자체가 기적”이라며 실제 그의 연설문을 핸드폰에 녹음해 수없이 듣고 따라하는 방법으로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되어갔습니다.
이를 입증하듯 제75회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거의 모든 비평가 협회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게리 올드만은 “숨이 멎을 듯한 완벽한 연기”, “게리 올드만의 연기 인생을 정의하는 작품”, “이 놀라운 명연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등의 호평이 뒤따랐고 드디어 금년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이 영화엔 다섯 개의 얼굴이 더 화면을 채웁니다. 적이었다가 동지가 된 조지 6세, 정적 할리팩스와 네빌 체임벌린, 그리고 그의 지지자이자 조력자인 아내 클레멘타인과 전속 타이피스트 엘리자베스 레이튼입니다. 정치적 지지 기반도 없이 대중 연설만이 유일한 무기였던 처칠은 연설문을 작성하고 다듬는 것에 자신의 시간과 역량 대부분을 쏟아붓습니다.
그래서 전속 타이피스트 레이튼은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영국 대중/서민을 대표하는 인물이고(그녀는 처칠에게 그의 엉터리 V가 서민층에겐 '엿 먹어라'라는 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장면도 나옵니다) 영화를 처칠의 관점이 아니라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일반 대중의 눈높이로 끌고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입니다.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팔색조 매력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남다른 존재감과 카리스마를 선보여 온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처칠 부인역을 열연합니다. 세계의 운명이 걸린 작전을 앞둔 윈스턴 처칠에게 믿음이라는 가장 큰 응원을 보내며 모두의 반대에도 오직 승리만을 목표로 전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모습을 통해 묵직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덩케르크 작전은 윈스턴 처칠에게 훌륭한 정치적 지원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그 중심에 1940년 5월 10일, 윈스턴 처칠을 수상으로 임명한 영국의 왕 조지 6세가 있었습니다.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리더이자 윈스턴 처칠을 끝까지 믿고 지지하는 정치 동료로서 함께 뜻을 모으는 조지 6세(현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지난 2010년 개봉한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세상을 감동시킨 말더듬이 왕의 주인공이기도 한 조지 6세를 연기한 벤 멜덴슨은 조지 6세를 따라 하기보다는 한 명의 인물로 해석하고자 했고, 호주 출신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억양을 마스터하고 예전의 말을 더듬던 흔적을 남기는 디테일한 부분까지 소화해내며 인생 열연을 펼쳤습니다.
* 조지 6세(영화에서), 현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또한 윈스턴 처칠의 분장도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분장계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아티스트 가주히로 츠지야말로 자신을 윈스턴 처칠로 변신시켜줄 거라고 확신한 게리 올드만은 돌연 은퇴 선언을 한 그를 직접 찾아가 함께 작업할 것을 부탁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게리 올드만의 적극적인 권유로 <다키스트 아워>에 참여하게 된 가주히로 츠지는 맞추고, 조각하고, 입혀보고, 수정하고, 더하고, 빼는 과정을 거쳐 완벽한 윈스턴 처칠로의 변신을 이루어 내기까지 총 여섯 달 동안 혼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된 후에도 윈스턴 처칠로의 변신은 수고와 노력을 요구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 촬영일마다 세시간에 걸쳐 분장 작업을 거쳐야 했던 게리 올드만은 매일 새벽 3시에 촬영장에 도착해 분장과 메이크업을 받고 의상, 소품 등을 점검해 제작진이 도착하는 오전 7시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촬영이 끝난 후에는 2시간에 걸쳐 분장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가주히로 츠지는 “굉장히 복잡한 작업이긴 했지만 분장은 기술의 영역이다. 힘을 다하는 배우만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라며 게리 올드만과의 높은 신뢰를 통한 성공적인 협업을 이어갔습니다.
배우의 노력과 헌신, 아티스트의 실력과 믿음은 괄목할만한 결과를 탄생시켰고 제작진들은 “촬영하는 동안만큼은 분장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게리 올드만의 존재를 완전히 잊곤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윈스턴 처칠 의상의 관건도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가 입었던 옷들을 면밀히 분석해서 완벽하게 똑같이 만드는 것이었고 윈스턴 처칠의 양복 외의 시가, 시계, 반지, 안경, 그리고 모자까지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 하원에서...
게리 올드만은 점점 윈스턴 처칠의 모습을 갖춰가는 자신의 모습에 즐거워하며 “주먹에 천을 두르면서 싸울 준비를 하는 파이터 같았어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의식을 치루는 기분이었죠.”라고 말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사는 수상의 거처인 다우닝가 10번지는 요크셔에 있는 매우 오래된 조지왕조 시대의 건물에서 촬영되었습니다. 한편 조지 6세와 윈스턴 처칠이 만나는 버킹엄 궁전은 웬트워스 우드하우스로 대신하여 촬영했습니다.
한편 영화 속에 다뤄진 4주의 시간 동안 윈스턴 처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인 처칠 워룸은 <다키스트 아워>의 핵심이기도 했기에 더욱 심사숙고하여 세팅 되었습니다. 실제의 처칠 워룸은 박물관으로 사용, 보존되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제작진은 여러 달에 걸친 처칠 워룸 방문과 조사를 통해 마침내 낮은 천장의 지하 벙커가 환상적으로 되살아난 세트장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스튜디오인 영국의 전설적인 ‘일링스튜디오’에 세워진 처칠 워룸은 기본 구조는 물론 지도에 꽂은 핀 색깔이나 글씨,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과 신문들까지 실제와 똑같이 제작되었습니다.
미술팀은 24시간 살아 숨쉬며 활동하는 허브의 탄생을 예의주시하며 늘어선 전화기, 높이 쌓여있는 문서들, 유럽지도, 그리고 구겨진 침구까지 수많은 것들을 처칠 워룸 안에 설치했습니다. 미술팀이 만들고자 했던 것은 특정 순간에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살아 생동하는 지하 벙커였기 때문에 이 공간의 전반적인 느낌은 질서정연함과 혼돈이 공존했습니다.
여러 차례 처칠 워룸 박물관에 방문했던 게리 올드만은 처음 세트장에 방문해 오싹함을 느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키스트 아워>의 역사고문으로 활약한 23년차 처칠 워룸 큐레이터 필 리드 역시 역사 속의 공간이 현실에서 되살아난 것을 보고 큐레이터 인생 최고의 희열을 느꼈다고 회상했습니다.
덩케르크 작전에 대한 뜨거운 찬반 논의가 이뤄진 하원 의사당 역시 1940년 런던 대공습 때 폭격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이후 새로 지어진 건물에서 촬영을 할지 세트장에 당시의 하원 의사당을 재현해 낼지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더 자유로운 카메라 앵글과 역사적인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세트를 선택했고, 결국 거대한 규모의 하원 의사당이 영국 남동부 리베스덴에 있는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에 세워졌습니다.
빅토리아 양식의 느낌이 살아 숨쉬도록 지어진 하원 의사당은 너무도 사실적인 모습에 “우린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승리합시다!”를 외친 윈스턴 처칠의 명연설이 촬영되는 순간 마치 역사 속의 한 장면을 목도하는 듯한 감동을 선사했다고 합니다.
국회 의사당측은 배우들의 대사가 사전에 제시한 시나리오와 같다는 조건으로 <다키스트 아워> 촬영팀이 성 슈테판홀과 의사당 건물 내부에 진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추가적으로 윈스턴 처칠이 의사당에서 시가를 태우는 장면을 실어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자택의 내부 인테리어는 제작진이 새로 제작한 것이지만 외관은 실제 다우닝가 10번지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곳도 보안에 관한 자세한 규칙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또한 최근까지도 이곳은 다큐멘터리나 뉴스에만 촬영을 허락했기 때문에 영화로는 <다키스트 아워>가 두번째로 촬영을 허락받은 팀이라고 합니다.
* 게리 올드만, 금년도 오스카 남우상을 수상하고...
[ 간략한 줄거리 ]
* 부인과 함께...
영화는 2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40년 5월 9일, 독일의 나치군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 계속 진군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영국의 총리를 비난하는 의회의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이에 영국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로널드 픽업 역)은 이를 받아들여 총리직에서 사퇴하고 후임을 논의하기 위해서 여당 회의를 열게 됩니다.
이때 총리 후보로 가장 촉망받던 인물인 외무장관 “할리팩스”(스티븐 딜런 역)는 추천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자신보다는 야당이 수긍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며 총리자리를 거절합니다. 그렇다면 야당도 좋아할만한 총리 후보는 누가 있을까? 그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전에 모두들 그는 안된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처칠의 집에 새롭게 부임한 타이피스트인 엘리자베스 레이튼(릴리 제임스 역)은 처음 출근하자마자 통성명도 없이 처칠의 말을 받아 적는 일에 집중하지만 그의 편집증적인 성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뛰쳐나오게 됩니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려는 레이튼은 집을 나가려는 순간 영국 왕실에서 온 중요한 전보를 직접 처칠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이 전보는처칠을 별로 내켜하지 않던 조지 6세가 그를 총리로 임명할테니 바로 버킹엄 궁으로 출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처칠
사실 할리팩스와 친분이 있었던 조지 6세 국왕(벤 멘덜슨 역)은 처칠을 총리로 임명하지만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형식적인 총리 임명식만 거행한 후 그를 내보냅니다. 한편 총리로 임명된 처칠은 총리 공관에서 가족들과 함께 샴페인을 터트리며 축하하지만 세계의 정세는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곧이어 이어진 의회에서 총리 수락 연설. 수긍하거나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 흰 손수건이나 종이를 흔들며 환호하는 한편 마음에 들지 않거나 반대하는 의견에는 한없이 야유를 쏟아내는 영국 의회의 성격상 그는 오랫동안 준비한 연설을 하였지만 반응은 시큰둥 했습니다.
그렇다고 반대의 야유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그는 첫술에 배부르랴 하며 전시 정부를 편성하고 현 정세를 헤쳐 나가기 위해 차근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할리팩스를 포함한 처칠의 반대파들은 처칠을 경질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할리팩스는 처칠이 평화협상은 절대 없다는 발언을 하게 된다면 사퇴의 명분이 생기니 이때 불신임 투표를 걸겠다고 전 총리 체임벌린에게 말합니다. 총리는 그가 평화협정을 공식적으로 거부한다는 입장을 명시화 하자며 이에 동의합니다.
전쟁은 시간을 거듭하여 파리도 함락당하고 프랑스의 전 지역이 거의 함락당할 위기에 처칠은 나치에 맞서 싸워야 한다며 여러 경로를 통해 전쟁은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설득시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등 연합군은 퇴각에 퇴각을 거듭해 덩케르크 해안까지 몰렸고 그들을 도와줄 함선을 무작정 기다리는 상황으로까지 치닫습니다. 이에할리팩스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통하여 히틀러에게 평화 협정을 하자고 처칠에게 말하지만 그는 오히려 남아 있는 군대에 전언을 보내 덩케르크에서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하는 등 강경하게 나갑니다.
결국 처칠은 의원들과 국민들의 항전의지를 고취시키는데 성공하고 마침내는 국왕 조지 6세도 처칠의 전쟁의지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원에 나섭니다. 이어서 기적같은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피와 땀과 눈물이 뒤따르는 4년간의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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