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춤
차성기
드넓은 미수리나 호수에 푸른 달빛이 드리웠다. 싱그러운 바람 속에 둥근달이 세 개다. 하늘과 호수, 내 마음속에도 휘영청 들어와 박혔다. 사방엔 태곳적 고요함이 자리하고 멀리 호숫가에 반짝이는 불빛이 반지의 고리처럼 빛났다. 수년 전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에 갔다. 인근 돌로미테 산악군의 위용을 보려고 스키장 곤돌라에 대기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스피커에서 <강남스타일>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음악에 맞추어 말춤을 추기 시작하는 한 무리 현지 젊은이. 그 추임새에서 시작한 흥겨운 가락이 알프스 산악 골짜기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너나없이 함께 말춤을 추었던 그 날의 감격스러웠던 <강남스타일>은 호수의 푸른 달빛 어린 은물결과 함께 아직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처음엔 국내 위주로 공연했던 가수 싸이는 유튜브의 영향을 발판으로 세계적인 대유행의 물결에 올라탔다. 당시 에펠탑 아래에서 펼쳐진 신나는 집단 군무가 파리 시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모습이 뉴스에 그대로 잡혔다. 유명인, 대통령과 수상도 말춤을 흉내 내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감격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뉴올리언스, 이스탄불, 모스크바 등 지구촌 대도시를 뒤덮은 춤사위 인파의 물결 속에 스펀지 물 스미듯 케이팝(K-Pop)이 녹아들었다. 지금까지 30억 뷰가 넘는 대기록은 처음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시나브로 한류, 한국문화에 젖어 들고 있었다.
달고나 열풍이 지구촌을 강타한다. 우산 모양의 달고나를 체면도 잊은 채 혀를 날름거리며 빨아 녹이는 모습들. 가느다란 우산 기둥 주위를 간신히 녹여 환호하는 연인의 하이파이브 모습. 그리고 막바지에 기둥목에서 녹아내려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청년들에게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즐거운 표정이 읽혔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장난이 지구촌 너머 젊은이들의 게임으로 인기 절정이다.
“잘 들어봐. 우선 제일 앞에 선 사람이 중요해. 그 사람이 약해 보이거나 기가 꺾여 보이면 그땐 이미 승부는 끝난 거야. 제일 뒤에는 마치 배의 닻처럼 듬직한 사람이 맡아줘야 해. 그리고 사람을 배치하는 게 중요한데 줄을 사이에 놓고 한 명씩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서 서는 거야.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신호가 울리고 처음 10초는 그냥 버티는 거야. 이때 자세는 눕는 자세. 그러면 웬만해서는 안 끌려가. ‘이상하다, 왜 안 끌려오지’하고 상대편이 당황하거든. 그렇게 버티다 보면 상대편 호흡이 깨지는 순간이 분명히 올 거야.”
몇 주째 지구촌 인기 최정상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 주인공의 깐부(짝꿍) 할아버지가 줄다리기에서 이기는 비책을 설명한 대사였다. 목숨을 걸고서 참가자들은 줄다리기 게임을 했다. 현실에서도 목숨을 걸만한 줄다리기가 있다. 국가 간이나 사업상 협상할 때 바로 이러한 비결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빈부격차를 기막히게 비유했다는 평도 있지만, 끊임없이 물질만을 추구하는 세태에 대해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메시지도 전해주어 지구촌의 비상한 관심을 이끈다. 깐부가 들려준 “뭘 해야 재미있을까?”가 우리네 삶에 무언가 울림을 주는 건 아닐는지.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코리안 드림을 따라 많은 젊은 외국인이 한국에 밀려온다. 250만 명을 넘어 전 국민의 5%를 차지한다. 어느덧 다문화사회가 되었다. 처음엔 <대장금>으로 케이드라마(K-Drama)가 동남아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소위 한류 1세대다. 이어진 <강남스타일>의 전 지구적 열풍, 그리고 나이, 문화, 언어를 초월한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차트 점령,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과 오스카상을 휩쓸면서 주목을 받았다. 역시 영화 <미나리>의 골든글로브상 수상, 그리고 최근 지구촌을 강타한 <오징어 게임>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에 열광한다. 이른바 케이팝(K-Pop), 케이컬처(K-Culture)가 숨 가쁘게 이어진다. 최첨단 기술국가 한국이 케이방역에 이르기까지 한류가 전 세계에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구촌 젊은이들이 이 시간, 한글 노래 그대로 즐겨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그들이 왜 우리글을 배우려 하는가? 한국의 연속극, 노래 등에서 더욱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 한글을 배운다고 한다. 방탄소년단의 히트곡, 조회 수 3억 회를 훨씬 넘는 <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은 가사가 우리글로 되어있다. 이 한글 노래가 버젓이 빌보드차트 1위로 올라 미국 대중음악 잡지 빌보드 역사상 한국이 처음이란다. <다이너마이트(Dynamite)>,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도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가사로 뒤를 잇고 있다.
더욱이 지난주 ‘2021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아시아 가수 최초로 ‘올해의 아티스트’까지 수상했다. ‘상을 탄 사실도 중요하지만,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깨준 것이 큰 상징이다’라고 교포사회에서 환호한다. 전 세계 음반 업계 최고권위의 그래미상에도 유력한 후보로 올라있다. 세계평화를 위한 메시지로 유엔총회에서 연설까지 우리의 위상을 드높였다. 팬클럽 아미와 함께 대중문화와 공익캠페인에서 영 리더로서 주목받고 있다.
세계 첨단패션쇼에 한글 디자인 옷맵시의 독창성은 어떤가? 소녀 그룹의 뮤직비디오는 1년여 만에 5억 뷰를 돌파하고 있다. 독창적인 이야기와 그림체로 우리의 웹툰도 인기를 몰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메타버스(Metaverse)가 대세로 다가온다. 세계 양대 메타버스 가운데 하나인 우리의 사이버문화 플랫폼 <제페토(Zepeto)>에 최초로 세계인 2억 명이 살고 있다. 여기에도 열성 팬이 왁자한 콘서트를 비롯한 한류가 스며 빛을 더한다.
세계 주요 외신들도 한국의 문화현상과 소프트파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독특한 우리만의 강점에 인류 보편적 공감 요소를 가미한 한국의 문화상품이 세계인의 가슴에 호소하고 있다. 이젠 문화의 변방, 서구문화의 소비자에서 오락의 거물이자 주요 문화수출국으로 변모했다는 그들의 평이다.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 신화. 달빛이 천 개의 강 위를 비춘다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 품은 넓고 깊은 소통의 뜻이 전 세계에 메아리치는 것이 아닐지. 한류를 포함한 한국문화가 만개하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자긍심과 함께 이젠 더불어 사는 문화선진국으로 발돋움해도 좋을 때가 아닐까? 호수에 어린 푸른 달빛 아래 알프스 골짜기에서 펼쳐진 현지 젊은이의 신나는 추임새를 다시 보고 싶다.
기술사
스카이엔지니어링(주) 대표이사
한국과학기술정보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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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국산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