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미 정상, 미·중 충돌에 끼인 한국 경제 배려책 도출해야
중앙일보
입력 2023.04.25 00:09
반도체지원법과 IRA 독소조항 시정 필요
미·중 패권 경쟁에 희생양 되는 일 없어야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미국 국빈 방문엔 풀어야 할 경제 현안이 많다. 4대 그룹 총수를 포함해 122명의 대규모 경제사절단이 동행하는 것도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미 간 경제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 주도 공급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 대한 배려책이 실효성 있게 도출돼야 한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우리 기업들은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수백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진행해 왔다. 바이든 대통령이 자랑하는 미국 내 양질의 일자리 창출엔 한국 기업들이 상당한 기여를 해 왔다.
지난해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경기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만나 웨이퍼에 서명하는 모습. 이 웨이퍼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양산 예정인 3나노미터(nm·10억 분의 1m) 공정 웨이퍼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러나 바이든 정부의 핵심 산업 전략인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우리 기업에 커다란 불확실성과 불이익을 안겨주고 있다. 반도체지원법의 경우 보조금을 받는 조건에 기밀 정보 제출, 초과이익 공유, 중국 투자 제한 등 독소조항이 들어가 있다. IRA에 따른 자동차 보조금의 경우도 북미에서 조립된 전기차가 아니라는 이유로 현대차와 기아의 전기차는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런 독소·차별 조항의 시정 없이 미국의 공급망 재편은 소기의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인식이 한·미 정상 간에 공유되길 바란다.
미·중 패권 경쟁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한국 경제의 리스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최근 백악관이 베이징과의 반도체 전쟁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참여시키려 했다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는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FT는 중국이 미국 마이크론의 반도체 판매를 금지해 중국 내 반도체가 부족해질 경우 삼성과 SK하이닉스가 그 갭을 메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미국이 한국에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마이크론 제재로 인한 손실을 피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계산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난감해지는 것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삼성은 전체 낸드플래시의 40%를, SK는 D램의 45%를 중국에서 생산 중이다. 만약 보도대로 중국이 반도체 공급 확대를 요구할 경우 두 회사는 달갑지 않은 선택의 갈림길에 처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1년 유예 조치가 올 10월이면 끝난다는 점도 두 기업의 고민이다. 중국 공장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선 미국으로부터 유예 조치의 연장을 받아야 한다.
동맹인 미국의 요구도 살펴야 하고, 시장과 공장이 있는 중국의 눈치도 봐야 하는 게 우리 기업들의 처지다. 국가적으로도 미국 주도 공급망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으면서도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관계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더욱 한국 경제가 미·중 패권 경쟁의 희생양이 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70주년의 한·미 동맹은 그러한 인식 위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