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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 가족 23-8, 지원 계획 의논 ② 차곡차곡 준비하니
사회사업가로 일하며 즐거운 일 중 하나는
시기마다 반복하는 일을 거듭할 때마다 느끼고 깨닫는 점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처음 일을 접하면 새로 배워 알게 되고, 다음번엔 조금 더 원활하게 마칠 수 있고,
일과 일 사이 흐름과 관계를 깨닫게 되고,
완수와 연결을 거쳐 본질을 깨닫는 것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제 다 파악했다 싶은 일도 본질을 생각하면
자신의 정도가 한없이 부족하고 얕게 느껴져 겸손해지고,
그런 인식이 곧 경험했던 일도 신중하게,
이미 알고 있는 일도 새롭게 하고 싶은 마음을 먹게 한다.
사회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뭘까?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다면 조금 더 좁혀 보자.
시설 사회사업가의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뭘까?
‘가장 중요한 일’이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면, 대답하기 쉽게 질문을 바꾸면 어떨까?
이렇게 묻는다면?
‘시설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의 업무 중 이 시기에 중요한 일은 뭘까?’
이제 대답할 수 있겠다.
적어도 이 시기, 한 해를 시작하며 사는 동시에 준비하는 때,
중요한 업무는 ‘개인별 지원 계획’이지 않을까?
우리 일에 기본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본은 언제나 엄격하고 도달하기 쉽지 않다.
골치 아픈 동시에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입주자와 동료가 누구랄 것 없이 바쁘게 월평빌라 안팎을 오간다.
때로 입주자 그 사람의 집 같은 조용한 공간을 찾아 진중하게 대화하기도 한다.
저마다 개인별 지원 계획을 의논하고 세우기 바쁜 시기다.
때로는 동료의 열정이 조바심이 되어 돌아오고,
그 조바심이 곧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변환되어 각자 일에 쓰이기도 한다.
그렇게 나아가는 걸까?
은이가 구미 부모님 댁에 가서 비교적 손이 남는 오후,
책상 앞에 앉아 지원 계획 의논을 준비한다.
다음 주 월요일, 은이 귀가를 도우러 구미에 갈 때,
부모님과 만나면 마주 앉아 차분히 올해 지원 계획을 의논하려 한다.
차곡차곡 준비하니 조급하지 않다.
어려운 것도 없다.
이렇게 하면 잘될 것을 알기에,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오후의 공백을 가득 메운다.
지난해 의논한 기록을 찾아 읽으며 돌아본다.
‘하은 군 귀가 도우러 구미 다녀오겠습니다. 방학하고 부모님 댁 간 지 9일 만이네요.
아쉽지만 다음은 더 수월할 거라 믿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출발한다.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목적지는 구미 황상동 아파트, 은이 부모님 댁이다.
은이가 구미로 갈 때는 이것저것 은이 짐으로 가득했는데, 데리러 가는 길은 공간이 한결 넉넉하다.
대신 지난해 은이를 지원하면서 기록한 일지를 보관한 파일철과 『2021년 개인별 지원 계획서』,
올해 구상한 은이 지원 계획을 간략하게 적은 메모를 챙겼다.
메모에는 이렇게 썼다.
[메모 1]
<부모님과 의논할 것>
하은 2021년 개인 파일(일지 원본)
하은 2021년 개인별 지원 계획서
→ 보면서 의논
(개인별 지원 계획서의) 입주 전·소개 글·둘레 사람·지원 요령·표현 추가할 것?
(과업) <가족>, <학교>, <신앙>, <재활> ‘부모님과 의논’ + 기타 의논할 것 있다면 추가
[메모 2]
(과업 목록)
<2021년>: 1. 가족, 2. 학교(나래중), 3. 여가, 4. 재활 + 지원 요령(샤워, 양치&세수, 식사, 누울 때, 휠체어)
<2022년>: 1. 가족, 2. 학교(나래중), 3. 신앙, 4. 여가, 5. 재활 + 지원 요령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은이 부모님 댁 초인종을 누른다.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장 문이 열린다.
맞이하는 부모님 인사를 들으며 집으로 들어선다.
어머니가 내어 준 주스를 앞에 두고 그동안 은이 안부를 묻는다.
“메시지로 말씀드린 것처럼 코로나 때문에 어디 가지를 못했습니다.
생각해 둔 곳은 많았는데 한두 번 나간 것 말고는 은이 엄마랑 은이랑 집에 있었습니다.”
“그렇죠. 코로나 때문에 어디 편하게 다니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은이는 구미 집에 와서 가족들이랑 있으니 좋았겠습니다.
부모님이 보내 주신 사진이랑 어머니 프로필 사진 보니 은이가 활짝 웃고 있더라고요.”
“맞아요, 선생님. 은이 여기 있으면서 계속 기분이 좋았습니다. 밥도 잘 먹었고요.”
어머니가 맞장구치며 대화에 함께한다.
그사이에도 어머니는 은이 간식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어머니 품에 안긴 은이는 역시 편안해 보인다.
“은이 방학하고 구미 오던 날은 즐겁게 왔는데, 오늘은 참 오기가 싫더라고요.”
부모님이 흠칫 놀라며 시선을 맞춘다.
“은이 만나러 오는 일이 싫은 게 아니라 아쉬웠다는 뜻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오고 싶어서 일부러 시간도 약속한 때에 딱 맞춰 왔습니다.
저도 그런데 은이랑 부모님은 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렇죠. 저희도 참 아쉽습니다. 은이 엄마가 쉴 때 맞춰서 은이가 오기는 했지만, 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한 달에 한 번이나 언제마다 한 번, 이렇게 구미에 오기로 약속하면 좋겠지만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다 출근하시니 시간 내기가 어려우시죠.
그래도 이렇게 은이가 집에 다녀가니 앞으로 명절마다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명절마다 꼭 와야 한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은이가 다녀갈 수 있을지 시간 살펴 주시면 좋겠다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요. 상황만 맞으면 은이가 오면 좋죠. 저희도 바라는 일이고요.”
구미 오가는 은이가 새롭지 않고 오히려 익숙하기 바라는 마음은 부모님도 직원도 다르지 않다.
그러기 바라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잠깐 은이 계획 이야기 나눠도 괜찮을까요? 오래 걸리지 않고 10분에서 20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요. 부모님 보여드리려고 이거 다 준비해 왔습니다.”
테이블 위로 지원 계획 의논을 위해 준비한 자료를 올려놓는다.
부모님에게 하나하나 설명한다.
“이건 작년 한 해 동안 제가 은이 지원하면서 쓴 일지를 철한 파일입니다. 일지 원본은 처음 보시죠?
은이에게, 또 제가 하는 일에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이렇게 글로 기록합니다.
제출하면 여기 보시는 것처럼 결재하는 팀장, 국장, 소장님이 보시고 손으로 피드백을 써 주세요.
작년 것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은이가 이사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록이 다 있습니다.
2018년 11월부터 쭉 있겠네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설명을 들으며 은이 파일을 이리저리 넘겨 본다.
어느 장에 다다라 글을 읽듯 잠깐 멈추기를 반복한다.
“이건 작년 『개인별 지원 계획서』입니다.
월평빌라에 사는 입주자 한 분 한 분이 각자 다른 계획을 세우고 한 해를 삽니다.
여기 목차가 입주자 한 분 한 분 성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은이는 266쪽이네요.”
포스트잇으로 미리 표시해 둔 266쪽을 펼친다.
‘하은’ 두 글자가 눈에 바로 들어온다.
“순서를 하나씩 소개해드리면 ‘월평빌라 입주 전’이 먼저 나옵니다.
은이가 이사 오기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 이렇게 한쪽에 설명합니다.
읽어 보시고 혹시 제가 쓴 내용이랑 다르거나 추가할 것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이 ‘소개 글’이랑 ‘둘레 사람 소개’인데요.
‘소개 글’에서는 이 계획서를 쓰는 당시에 은이를 잘 나타낼 수 있는 문장을 모아 소개합니다.
마찬가지로 계획서를 쓰는 시점에 은이가 어울려 지내는 분들을 ‘둘레 사람 소개’에 기록합니다.
지난번에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에 은이가 교회에 다니게 된다면
거기에서 만나는 분들이 내년 계획서에는 은이 둘레 사람으로 추가될 수도 있겠네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표와 글을 눈으로 보고, 부모님이 구상한 계획을 예로 들어 설명하니 쉽게 이해하시는 듯하다.
“그 다음이 과업인데요.
은이가 올해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잘 지내면 좋겠다,
제가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잘 도우면 좋겠다 하는 것들을 한 해 과업으로 세웁니다.
이 과업은 입주자마다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습니다.
각자 계획을 세웁니다.
은이는 작년에 ‘가족, 학교, 여가, 재활’ 이렇게 네 개를 세웠습니다.
과업마다 아래 ‘부모님과 의논’에 계획을 세우면서
제가 은이랑 같이 부모님에게 여쭈고 의논했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올해 계획서에도 지금 의논하는 내용이 ‘부모님과 의논’으로 실리게 될 겁니다.”
과업마다 중심 내용과 왜 그 과업을 세웠는지,
은이를 돕는 사람으로서 어떤 마음이었는지 부모님에게 하나하나 설명한다.
“그다음이 ‘지원 요령’이네요. 은이를 도울 때, 특히 더 주의할 것,
더 자세히 알고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을 여기에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작년에는 ‘샤워, 양치와 세수, 식사, 자리에 누울 때, 휠체어에 앉을 때’ 이렇게 다섯 가지를 썼습니다.
‘하은 군의 표현과 해석’에는 은이가 이렇게 웃거나 소리 낼 때는 이런 뜻이라는 걸
부모님께 들었거나 경험으로 아는 바를 살려서 씁니다.
마지막이 ‘계획표’인데요.
앞의 각 과업을 구체적으로 챙겨야 할 일,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시기를 살펴 표에 씁니다.
작년에 이렇게 계획표에 넣어 두고 잘 지킨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하거나 어떤 상황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도 있습니다.
계획대로 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많이 지킬 수 있다면 좋겠죠.”
시간을 들여 『개인별 지원 계획서』의 구성까지 부모님에게 설명한 뒤에
올해 지원 계획 구상을 이야기한다.
“이 메모 두 장이 제가 올해 구상한 은이 지원 계획입니다.
작년에는 ‘가족, 학교, 여가, 재활’ 이렇게 과업이 네 개였는데,
올해는 부모님 바람대로 은이가 교회에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가족, 학교, 신앙, 여가, 재활’ 이렇게 다섯 개 과업으로 계획을 세우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네, 선생님. 좋지요.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은이가 다닐 교회를 찾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은이가 오가기에 편리한 환경이 갖춰진 곳이면 좋겠고,
제가 생각한 것처럼 당장은 동행하더라도
아주 나중에는 교회에 있는 동안에는 믿고 은이만 다녀와도 좋을
그런 분들을 만나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요.”
“맞습니다. 그렇겠지요. 저희도 ‘은이가 바로 교회를 다녀야 한다’ 그런 건 아닙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은이한테 잘 맞는 곳을 찾는 게 제일 중요하겠죠.”
“올해 안에 좋은 분들을 만나 앞으로 꾸준히 다닐 교회를 찾으면 좋겠지만,
당장은 그런 곳을 찾을 수 있도록 한 달에 한두 곳이라도 꾸준히 다니는 걸 목표로 세우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얼른 찾으면 좋겠고요.”
“네, 선생님.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올해 은이 지원 계획에 새로 추가될 ‘신앙’에 이어 다른 과업도 하나하나 의논했다.
한참 이야기 나누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네요. 금방 끝난다고 말씀드렸는데
부모님이랑 은이 계획 이야기 나누다 보니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아이고, 그렇네요. 다시 거창 가시려면 피곤하시겠습니다.
저희도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네요. 이 메모는 제가 가지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네, 아버님. 그럼요. 저는 사진으로 다 찍어 놔서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천천히 보시고 혹시 추가로 나눌 의견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저도 올해 지원 계획서를 다 쓰고 나면 파일로 부모님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감사합니다, 정 선생님.”
‘차 안이 춥다, 이렇게 입으면 은이가 덥지 않겠냐’ 하며 실랑이하는 부모님에게
먼저 나가서 차 시동을 켜 두고 있겠다고 이야기한다.
가족끼리 나눌 인사가 있을 것 같아 먼저 일어나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
밖에서 얼마쯤 기다리자 아버지가 은이 가방이 든 캐리어를 들고나온다.
어머니 품에 은이가 안긴 채로 뒤따라 나온다.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었던 순간을 마주한다.
뒷좌석에 앉은 은이 옆 창문 너머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인사한다.
부모님 마음을 짐작하며 마지막 인사에 마지막 인사를 거듭한 후에도 아주 천천히 액셀을 밟는다.
그렇게 천천히 출발해도 야속하게도 금세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오늘 나눈 이야기로 계획을 잘 세워서 그대로 돕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잘해 보고 싶다. 정말.
2022년 1월 6일 목요일, 정진호
「하은, 가족 22-3, 부모님과 신년 계획 의논」 발췌
2023년 1월 27일 금요일, 정진호
사회사업에서 중요한 것이란? 선생님의 질문에 한참 생각했어요. ‘이 시기’를 특정하며 ‘계획’이라 결론짓고, 동료들의 계획하는 풍경을 보며 떠올리며 기뻤습니다. 고맙습니다. 월평
첫댓글 '지원 계획 의논을 준비한다.' 이 문장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준비하지 않으면 잘 물을 수 없다는 생각이 거듭 드네요. 계획은 어떤 순서로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매뉴얼을 본 느낌입니다.
이렇게 준비하면 입주자의 한 해 계획을 세우는 게 참 설레고 기대되고 무엇보다 즐겁겠어요.
이 일을 하면서 점점 더 드는 생각은 ‘공부와 여백’인데, 정진호 선생님의 글과 실천을 곁에서 보면 공부가 실천에 이어지는 그 맥이, 여백을 두고 생각하고 정리되어서 움직이는 실천이 참 탄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부한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공부하고 생각하고 그것이 내 안에서 충분히 소화되어서 내 것으로써 움직이는 느낌.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품어요, 늘.
올해는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백을 두고, 차근차근, 그렇게 하는 뜻을 두며 제가 하는 일을 대하겠습니다.
생각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