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탄생은 작은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숲은 거대합니다. 비단 숲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정원도 생태계 사슬로 보자면 매일매일 굉장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풀과 나무, 작은 생명이 동떨어진 개체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에게 의미를 주고, 서로에게 생명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황금 왕관을 쓴 랑이〉는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보잘것없는 지렁이 한 마리가 5월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장미를 키워내기까지의 긴 여정, 망설이고 괴로워하고 후회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사랑을 내어준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작가가 지렁이 랑이에 주목한 이유는, 그만큼 작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눈여겨볼 일 없을 만큼 작은, 땅속에 살아서 거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한 지렁이를 통해 지상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장미를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렁이, 개미, 돌 하나까지 생태계라는 톱니바퀴가 작동해야만 우리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덤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미련 없이 주는 사랑이 거듭되어야 온전한 사회가 됩니다 자연의 자람을 우리는 통상 본능으로 취급합니다. 나무가 자라고, 꽃을 피우고, 다시 가지를 뻗어내고 열매를 맺는 걸 우리는 특별한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연은 자연만의 본능이 있기에 그야말로 자연이기에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김은숙 작가는 이 대수롭지 않은 일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형체를 부여합니다. 책머리에 이 책을 어머니께 바치겠다고 언급한 것 역시 단지 지렁이를 통해 작은 생명에 관심을 투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황금 왕관을 쓴 랑이〉를 통해 어머니에게서 받아온 사랑과 따뜻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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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빚은 구슬로 탑을 쌓았어요. 아래는 넓고 둥글게, 위는 좁고 뾰족하게. 한 개, 두 개, 세 개, 탑이 늘어났어요. 랑이에게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어요. ‘탑은 왕국에 있어. 그렇다면 이곳은 왕국이야. 그럼 나는?’ 근사한 생각 덕분에 랑이는 금세 왕이 되었어요.
_본문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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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로 내리쬐는 햇빛과도 같은 사랑. 어린 시절 이 사랑을 작가는 부모의 책임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랑이처럼 자신이 일군 수십 개의 탑(성과)을 자신의 노력과 영광으로 빚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땅에 장미가 들어서면서부터 이 생각에 금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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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옛집에 갔어요. 튼튼한 입으로 피스 주변에 길을 내주고 포슬포슬 흙을 헤뜨려 주었지요. 랑이의 입이 몹시 헐었어요. 그래도 랑이는 꾹 참았어요. 스스로 택한 일이니까요.
_본문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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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하염없이 쏟아졌던 사랑은 평생을 헌신하신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성공과 영광 역시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성장한 것이었습니다. 또 이 사랑은 세대를 이어서 간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지렁이 랑이의 헌신으로 장미가 가시를 이겨내는 고통 속에서 꽃을 피운 결과, 장미가 랑이에게 황금빛 왕관을 선물합니다. 결국 우리는 고통과 사랑으로 잉태된 작은 존재라는 걸 의미합니다. 이 책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 그림책입니다. 싱그러운 5월에 부모님과 아이들이 읽으며 사랑이라는 따뜻함을 느껴보길 바랍니다.
첫댓글 발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