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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석백송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선대(先代)의 가업(家業)을 이어 표국을 운영한지 십오 년.
바다와 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자 오랜 고도(古都)답게 문물이 번성한
항주의 오대표국(五大 局)중 하나로 근근히 명맥만 유지하던 세권표국을 대
륙에서 손꼽히도록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애쓴 세월이었다.
말단 표사 하나를 뽑더라도 철저히 내력을 조사한 후 직접 무공을 시험하였고
, 표물을 분실하거나 강탈당하면 열 배로 변상한다는 약속은 다른 표국에 비
해 가히 파격적인 조건이었으나 손해를 감수할 망정 반드시 엄수해왔다.
뿐인가, 불과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중요한 표물이 있으면 그 자신이 직접 표
사들을 이끌고 표행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표물을 노리는 각지의 녹림당(綠林黨)과 토호(土豪)들에게 적지 않은 예물(禮
物)을 바치며 필요한 만큼의 친선을 유지하는 한편, 타협이 되지 않는 자들은
기필코 응징(膺懲)하는 강온(强穩) 양면전략을 꿋꿋하게 지켜온 지 십오 년.
이제, 붉은 바탕에 한 자루의 철검(鐵劍)을 수놓은 세권표국의 기치(旗幟)는
천하 녹림도들 간에 불가침의 상징이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어쩌다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모험을 하는 자들이나 세권표국의 위명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도적 떼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표국을 맡은 이후 한 번
도 화주(貨主)와의 약속을 어긴 적은 없었다.
근래 들어서는 황실(皇室)에 사적으로 올리는 공물(貢物)의 호송을 의뢰 받는
일조차 드물지 않으니 그 자신은 물론이요 세권표국의 성가(聲價)는 가히 하
늘에 찬란한 일월(日月)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한데, 오늘 낮에 그를 찾아온 방문객이 돌아간 후 석백송의 심사가 어지러워
진 것이다.
"흐음…….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침중한 안색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드넓은 표국의 경내를 서성이던 석백송
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가꾸는 손길은 물론, 찾는 이조차 없는 후원(後園)
으로 향했다.
이따금 꽃향기 그윽한 밤 공기를 흩트리며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위
로 하얗게 부서지는 교교한 달빛이 때 이른 봄밤의 정취(情趣)를 한껏 돋우건
만, 어쩌면 표국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를 중대사를 고민하는 석백송의 눈에
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 석백송이 시(時) 한 수로 봄밤의 정취를 즐기는 한가한 풍류객(風流客)
은 아니더라도 절정(絶頂)의 무인(武人)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가산(假山)으로 가려진 후원의 구석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파공성(破空聲)이
귓전을 스치는 순간, 일시에 그의 전신에서 칼날 같은 예기(銳氣)가 피어난
것이다.
"누가 이 밤중에……?"
공력을 일으켜 동정을 살핀 석백송은 이내 적(敵)은 아니라는 판단에 긴장을
풀었다.
노릴만한 물건도 사람도 없는 후미진 곳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한 사람의 것이
고, 예리한 파공성이 규칙적으로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누군가 홀로
연무(練武)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호오, 제법 기세가 날카롭구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석백송의 얼굴에 호기심이 스쳤다.
표사들에게 최상의 대우를 하는 세권표국에는 언제라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연무장(練武場)이 마련되어 있는 터라 표사라면 굳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야밤에 연무를 할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파공성으로 미루어 검(劍)을 연마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의
무공은 석백송이 느끼기에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운검(運劍)이 서툴면 격(擊)과 지(止)의 간극(間隙)이 거칠고 파공성도 흐트
러지기 마련이었다.
한데, 짧고 날카로우면서도 그 시작과 끝이 부드럽게 연결되는 파공성은 검의
수발(收發)이 자유롭다는 말이고 저렇듯 힘차게 검을 휘두르건만 그의 예민
한 청력(聽力)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숨소리가 고르다면 내공 또한 정심(精
深)하다는 증거였다.
적도 아니고, 표사도 아닌 것이 확실한 자에 대한 궁금증을 품은 석백송은 기
척을 감추고 은밀히 접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을 못 이루게 하는 근심에 시달리던 석백송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비록 일년에 수만 금을 벌어들이는 세권표국의 주인이라 해도 소림의 속가제
자로 무공에 입문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는 여전히 무인(武人)이었다. 그
런 그가 만만치 않은 무공을 지닌 미지(未知)의 상대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분명 적은 아니지 않은가.
석백송은 가산의 매화(梅花)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파공성의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
순간, 석백송은 하마터면 잡고있던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뻔했다.
두 가지 이유였다.
우선, 연무에 몰두하고 있는 사내의 손에서 바람을 가르고 달빛을 베는 검이
놀랍게도 투박한 목검(木劍)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날이 예리한 진검(眞劍)도 아니고 어린아이 손목만큼이나 두꺼운 목검으로 짧
고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검을 휘두르고 있는 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라는 사
실이었다.
늘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마구간의 심부름꾼
.
가끔씩, 말을 대령시키다가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쑥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
면서도 깊게 빛나던 맑은 눈망울의 주인.
십오 년 전. 그가 표국을 맡던 해에 오갈 데 없는 고아라며 밥만 먹여달라고
찾아왔던 그 꼬마, 사군명이 틀림없었다.
석백송은 격동을 누르고 사군명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사방 일장 남짓한 공간 속에서 전후좌우로 발걸음을 옮기며 검을 휘두르고 찌
르는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거침이 없었다.
뿐인가? 쉬임없이 움직이며 든든하게 중심을 받치는 발 밑에서는 먼지조차 일
지 않건만 몸놀림은 바람처럼 신속했고 투박한 목검이 일으키는 기세는 만근
거석(萬斤巨石)이라도 가를 만 했다.
석백송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사군명의 실력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소리 없이 후원의 담으로 신형을 솟구친 그는 갑자기 사군명의 전면으로 뛰어
내렸다.
파르륵.
요란하게 옷자락을 펄럭이며 난데없이 괴한이 나타나자 정신없이 목검을 휘두
르던 사군명은 흠칫했다.
"허엇! 누구냐?"
하나, 달빛을 등지고 선 괴한은 아무 말 없이 괴소만 흘릴 뿐이었다.
"프흐흐흐……."
사군명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목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표사들의 연무장을 기웃거리며 남몰래 훔쳐 배운 무공을 익힌 지 십 년이 넘
었지만 직접 사람을 상대하기는 처음인지라 목검을 움켜쥔 손에 저절로 땀이
배었다.
하나, 담을 넘어 온 것으로 보아 좋은 뜻을 지니고 온 인물은 틀림없이 아니
었고, 비록 마구간지기일 망정 그는 분명한 세권표국의 식솔이었다.
사군명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본 표국에는 이름높은 고수들이 즐비하다. 무슨 이유로 담을 넘었는지 모르
나 목숨을 보존하려면 당장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게다!"
제법 위엄을 갖춘 사군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한은 아무 말도 없이 다짜
고짜 주먹을 날렸다.
휘익!
바람을 가르며 가슴을 노리고 쇄도하는 주먹을 재빨리 허리를 틀어 피한 사군
명은 허리의 탄력(彈力)을 이용해 지체없이 목검을 휘둘렀다.
"받아랏!"
팔과 목검의 길이를 생각하면 이미 근접한 상대를 치기에는 적절치 않은 대응
이었으나 검을 당기는 속도가 빠르고 체중을 받치는 허리의 탄력이 강했기에
상대의 허리에서 가슴으로 올려치는 목검의 기세는 섬전(閃電)처럼 날카로웠
다.
"이런!"
파르르륵.
십중팔구 사군명이 발을 움직여 피하리라고 예상했던 석백송은 의외의 반격이
신속히 전개되자 경호성을 발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간, 목표를 놓친 사군명이 주춤하는가 싶더니 뒤따라 땅을 박차고 도약하면
서 올려치는 기세를 멈추지 않고 목검을 횡(橫)으로 쓸었다.
"파아핫!"
솟구친 몸이 떨어지는 속도에 따라 다르긴 해도 허리든 다리든 여지없이 격중
될 상황이었다.
기세를 유지하며 검의 방향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허공에서 떨어지는
신형을 트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석백송은 내심 한 자락 깔고 있던 여유를 버리고 황급히 공력을 모아 떨어지
는 속도를 늦추고 발을 당겨 사군명의 검 끝을 찍었다.
공력을 일으켜 새털같이 가벼워진 석백송 정도의 고수가 몸을 의지하기엔 힘
차게 내뻗은 검 끝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휘리릭.
석백송은 검 끝을 찍는 것과 동시에 공중제비를 돌아 사군명의 등뒤로 떨어져
내렸다.
회심의 일격을 가볍게 무산시킨 상대가 의외로 막강한 고수라는 것을 깨닫고
일순 두려움이 일기도 했으나 사군명의 심중에는 질 수 없다는 오기가 치밀었
다.
허공을 가르는 검의 궤적에 따라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선 사군명은 여전히
달빛을 등지고 선 괴한을 노려보았다.
"좋다! 내 비록 세권표국의 하인에 불과하나 불칙한 뜻을 품고 담장을 넘은
자를 용서할 수 없다!"
"……."
괴한의 침묵에 더욱 자극 받은 사군명이 두 손으로 움켜쥔 검을 가슴에 모으
고 괴한의 전면으로 몸을 날렸다.
빠르게 내달리되 일정한 보폭(步幅)을 유지함으로서 중심을 든든히 하고 상대
의 대응에 따라 어느 곳으로든 검을 내뻗겠다는 의도였으나 석백송이 진지하
게 상대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석백송의 무공은 그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프흣!"
냉소를 날린 괴한이 오히려 자신이 접근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마주 다가서자
사군명은 황급히 검을 내뻗었다.
"이야압!"
미처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근접해오는 상대의 가슴을 노리고 무의식적으로 찔
러 들어간 검에 걸리는 것은 허망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
실패를 깨달은 사군명이 몸을 추스를 시간은 없었다.
파악!
"어이쿠!"
눈앞에서 사라진 괴한이 내지른 발길이 손목에 격중되자 사군명은 자기도 모
르게 고통에 찬 일성을 토하며 그만 수중의 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하나, 난감한 처지에서도 정체 모를 괴한을 잡겠다는 사군명의 의지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손목을 감싸쥐고 고개를 숙이는 동시에 재빠르게 눈을 돌린 사군명은 오른쪽
전방에 상대의 다리가 보이자 그대로 몸을 던졌다.
"에잇……!"
휘이익!
불과 일곱 자 정도 떨어진 거리를 땅을 박차고 날아가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릴 리 없었고, 아무리 석백송이라도 공력을 담은 발길에 격중된 상대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육탄을 던지리라고 예상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이런……!"
다급히 한 소리 외친 석백송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몸을 틀었지만 전력으
로 날아드는 사군명의 몸뚱이를 피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순식간에 턱밑에까지 다가선 사군명의 머리가 석백송의 가슴에 꽂히려는 순간
, 사군명의 넓은 등에 석백송의 팔꿈치가 내리 꽂혔다.
퍽!
장강(長江) 이남의 십대고수에 든다는 석백송을 상대로 한 마구간지기 사군명
의 분투는 거기까지였다.
"크허억!"
콰당.
상대의 몸뚱이가 머리에 닿는다고 느낀 것과 동시에 척추를 타고 흐르는 격렬
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진 사군명이 몸을 틀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뻗
어 버린 것이다.
"으으으……."
미약한 신음성을 길게 흘리며 땅바닥에 널브러진 사군명을 내려다보는 석백송
의 표정이 복잡했다.
'흐음, 화급지경이라 손속에 정을 두지 못했구나.'
애초에 사군명의 무공을 시험할 요량이었기에 치명적인 공세를 취할 이유가
없었건만 예상치 못한 사군명의 육탄 돌격에 그만 반사적으로 살수(殺手)를
펼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석백송의 심중에 자책감만 드는 것은 아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과 달리 입가에 맴도는 흐릿한 미소는 뜻하지 않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놈! 가르칠만한 재목이로다.'
사실, 세권표국에는 강호의 고수라 할만한 표사가 이백이 넘고 그들보다 한수
위인 표두( 頭)만도 열 명에 달했지만 석백송을 당혹하게 만들만한 인물은
그리 흔치 않았다.
"후후후……."
흡족한 웃음을 흘린 후 정신을 잃고 늘어진 사군명을 들쳐업고 나는 듯이 걸
음을 옮기던 석백송은 문득, 그와 함께 지내다 어느 날 다시 검을 세우겠다며
그의 곁을 떠난 인물의 말을 떠올렸다.
무인의 길에 들어선 이상 적도 장애도 자신뿐이니 무림의 하늘이라도 인정치
못하겠다고 도전했던 그 사람.
그후 어느 날, 술에 절은 모습으로 그에게 찾아와 좌절한 자의 아픔을 온몸으
로 전하던 그 사람.
소림과 무당으로 각기 문파는 달랐지만 그가 가장 존경했던 그 사람이 표국에
몸담고 있던 시절 술 냄새를 풍기며 그에게 흘린 말을 떠올린 것이다.
―프흣, 이보게 국주. 자네 표국에 쓸만한 보물이 있더군. 잘만 다듬는다면
자네에게 큰 힘이 될 재목일세.―
석백송은 그가 말한 보물이 사군명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
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사군명의 무공은 놀라웠고, 이대로 두면 모처럼 얻은 귀한 '
보물'이 영영 폐인(廢人)이 될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었다.
"으음……."
흐릿한 의식을 되찾은 사군명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인물을 향해 다짜고짜 손
을 내뻗었다.
그의 의식은 아직 괴한과의 싸움에 머물러 있었고 괴한을 물리쳐야 한다는 의
지는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 이놈. 받아라……."
하나, 마음뿐.
흐릿한 의식 못지 않게 목소리가 늘어지더니 내뻗은 손은 흐느적거리다가 털
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어, 그놈!"
석백송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특했다.
비록, 그가 진기(眞氣)를 주입하고 만금의 가치가 있는 선약(仙藥)을 먹여 내
상을 치료했다고 해도 아직 온전한 몸이 아니련만 초점 없는 눈을 뜨기 무섭
게 공격을 하겠다고 설치는 사군명의 의지가 가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석백송은 침상가로 맥없이 떨어진 사군명의 손을 잡고 위엄 있는 음성으로 입
을 열었다.
"안심하고 운공(運功)부터 하거라!"
"……!"
사군명은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깜짝 놀랐다.
귓가에 울리는 소리는 틀림없이 국주의 음성이 아닌가.
그가 애써 머릿속의 기억을 헤집으며 눈을 돌리려 할 때, 예의 중후하고 위엄
있는 국주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허어! 네가 감히 내 말을 무시할 셈이냐. 어서 운공하지 못할까!"
영문은 몰랐지만 국주의 음성이 틀림없는 이상 사군명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권표국 사백여 식솔중 하나인 그에게 석백송은 하늘이었고다. 표국에서 밥
을 먹은 지 십오 년이 지나도록 가까이서 직접 국주의 명을 받기는 처음이 아
니던가.
사군명은 애써 자세를 바로 하고 운공을 시작했다.
표국의 표두중 가장 나이가 많은데다 노상 술에 절어 지낸 유일한 인물이자
유달리 사군명에게 정을 주었던 상취객(常醉客) 위사무(魏査無).
그에게 십이 년 전 배운 뒤로 하루도 쉬지 않고 연마한 내공심법(內功心法)이
었다.
만약, 칠 년 전 표행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위사무가 보았다면 깜짝 놀랄
만한 성취를 이룬 사군명이었다.
몇 번의 긴 호흡을 하는 사이 하단전(下丹田)에 은은한 열기가 뭉치자 사군명
은 익숙하게 진기를 운행했다.
기경팔맥(氣經八脈)을 따라 전신의 삼백육십 대혈로 진기를 일주천(一周天)시
킨 사군명은 전과 다른 진기의 흐름에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까지 묵직하고 유장(悠長)하던 진기의 흐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강한 힘
이 더해져 마치 대해(大海)를 뒤엎는 폭풍우 같은 기세로 맹렬히 기맥(氣脈)
을 휘도는 것이 아닌가.
그의 놀라움을 알기라도 하듯 석백송의 차분한 음성이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니고 귓가에 울렸다.
"멈추지 마라. 보환신단(寶還神丹)의 효능을 완전히 체화(體化)시키려면 반
시진은 더 운공해야 한다."
사군명은 멈칫했으나 이내 정신을 집중시켰다.
국주가 말하는 게 무슨 소린지는 몰랐지만 점차로 전신의 기맥에 요동치는 진
기의 거센 흐름을 다스리는 일이 급했다.
"흐음……."
순식간에 다시 운공삼매(運功三昧)에 빠진 사군명을 보며 석백송은 의미심장
한 미소를 지었다.
"볼수록 놀라운 아이로구나……."
무인에게 있어 주위조건과 관계없이 빠르게 운공에 몰두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었다.
―운공(運功)은 몰아(沒我)에 이르기 위함이요, 몰아에 들지 않으면 진아(眞
我)를 볼 수 없다. 진아를 보아야만 공(功)을 넘어 도(道)를 이룰 수 있나니
운공이야말로 도를 이루는 바르고 유일한 길이다.
일찍이 무공에 입문하던 시절부터 운기조식(運氣調息)의 중요성에 대해 소림
의 고승(高僧)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석백송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말을 실감했다.
소림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하던 그의 사형제들을 보아도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대개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운공삼매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이었다. 그
런 사람들은 내공의 성취도 뛰어났으며 초식(招式)을 익히는 속도 역시 빨랐
다.
마치, 아무데서고 쉽게 숙면(熟眠)을 취하는 사람이 머리가 맑고 활력이 넘치
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였다.
그런 면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삽시간에 운공삼매에 빠
져드는 사군명은 무인에게 꼭 필요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그런 사군명
의 능력을 석백송은 기꺼이 인정했다.
자신의 부주의로 죄 없는 젊은이에게 내상(內傷)을 입혔다는 자책감과 뜻밖에
놀라운 무공을 보인 사군명이 기특한 마음에 황실(皇室)의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선물로 받아 비장(秘藏)하던 보환신단을 먹인 것이 잘한 결정이라는 생
각이 저절로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 정도였다.
게다가 젊은 시절 그의 우상이었던 위사무가 말한 보물이 사군명이 맞다면 보
환신단이라 해도 아까울 게 없었다.
석백송이 타고난 장사꾼답게 뜻하지 않게 얻은 보물을 어떻게 쓸까 즐거운 상
상을 이어갈 때, 사군명의 맑고 깊은 눈이 살며시 떠졌다.
"……!"
적어도 반 시진은 걸리리라는 석백송의 예상과 달리 보환신단을 복용하고 불
과 일각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순간, 사군명이 튕기듯 침상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눈을 뜨자마자 석백송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다.
"소인이 국주님을 뵙습니다!"
한결같이 공손한 태도였다.
석백송은 빙긋 웃음을 짓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정녕 세권표국의 인물이 맞느냐?"
사군명은 우직하게 대답했다.
"십오 년 전 오갈 데 없는 천애고아를 국주님이 거둬주신 순간부터 이 몸은
세권표국에 바쳐진 몸입니다."
한 점의 가식(假飾)도 찾아볼 수 없는 진실된 태도였다.
하나, 석백송은 대뜸 호통을 내질렀다.
"네가 정히 표국의 인물이 맞다면 어째서 표국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게냐!
"……?"
사군명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도 국주는 뛰어난 무인이면서 동시에, 수완 있는 장사꾼이었다.
돈을 쓸 곳과 아낄 곳을 철저히 구분했으며 이익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후한 보수로 유능한 표사를 쓰는 것도, 거금을 들여 명마(名馬)를 구하고 관
리하는 것도 모두 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국주였다.
그런 국주가 자신에게 표국에 손해를 끼쳤다고 호령을 해대니 그다지 말주변
이 없는 편인 사군명은 뭐라 말도 못하겠고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
짧은 시간.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자신의 잘못을 찾지 못한 사군명이 얼굴을 쳐
들고 답답함을 호소하려 할 때, 석백송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능히 표사가 되고도 남을 무공을 지녔음에도 능력을 감추고 마구간에서 말이
나 돌보고 있으니 네가 표국에 손해를 끼친 게 아니란 말이냐?"
"그, 그것이……."
사군명은 국주가 설명한 이유에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표사를 뽑는 비무에 도전해 보리라는 생각은 진작부터 품
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연무에만
전념하던 터였다.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너는 이제부터 세권표국의 표사이니 당장 마구간 일
은 그만 두고 표행에 나설 차비를 하거라. 국주의 명이니 추호도 소홀히 말아
라! 알겠느냐?"
웃는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석백송을 올려다본
사군명은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나, 석백송은 제 아무리 귀중한 보옥(寶玉)이라도 갈고 닦지 않으면 그저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군명의 감격 어린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석백송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낡은
서책을 사군명에게 던졌다.
그의 부친이 표국을 운영할 때, 몰락한 벼슬아치가 표행료를 대신해 건넨 뒤
로 서가에 보관하던 물건이었다.
정확히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는 몰랐지만 도가(道家) 계열의 범상치 않은 검
법을 담고 있는 물건이었고, 아무래도 도가 쪽의 무공을 익힌 것으로 보이는
사군명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어설피 어깨너머로 배운 무공으로는 세권표국의 표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내 틈나는 대로 확인할 터인즉 부지런히 익히도록 해라!"
눈가에 맺힌 물기 때문에 책표지의 <태극무허검보(太極無虛劍譜)>라는 흐릿한
글씨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사군명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게 외쳤다.
"표사 사군명, 국주님의 말씀대로 삼가 명심봉행(銘心奉行) 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세권표국의 표사들은 전혀 뜻밖의, 그러나 아주 낯익은 인물을 동
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세권표국주 석백송의 아낌없는 투자를 몇 백 몇 천 배로 되갚아줄 사내, 사군
명이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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