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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철썩, 쏴……! 철썩, 쏴……! 무심하게 서 있는 바위를 희롱한 대가로 포말(泡沫)이 되어 산산이 부서지는 형벌을 받건만 쉬임없이 바위를 덮치는 파도의 움직임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아득히 보이는 수평선 너머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게 옷자락을 펄럭이게 하는 바닷가 절벽 위. 망연히 북쪽을 바라보는 여인의 굴곡이 완연한 몸매가 드러난 것은 순전히 부 드러운 비단옷을 휘감아 놓는 바람의 심술 탓이었다. 그러나, 젊은 여인의 아름다운 육신을 탐한 바람도 여인의 살결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남국(南國)의 강렬한 태양과 어우러진 해풍(海風)은 남녀를 막론하고 검게 그 을린 구릿빛의 피부를 지니게 만들건만 여인의 살갗은 눈부시게 맑고 깨끗했 다. "아……!" 하얀 눈 위에 피어난 동백(冬柏)인 양 선연(鮮姸)한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나 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결국 가야 하는가?" 가물가물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에 수심(愁心)이 드리운 것 처럼 여인의 음성에는 엷은 탄식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하염없이 바라보는 북쪽 수평선 너머에는 태어난 후 이십 년의 세월동 안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은 물론, 아무런 연고(緣故)도 없는 미지(未知) 의 땅에서 이제는 운명으로 다가선 중원(中原)이 있었다.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만감이 서린 탄식을 거센 바람이 날려 버린 그 때였다. "군주님, 작은 군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발랄한 남국의 소녀답게 가무잡잡한 피부에 초롱하게 빛나는 눈망울을 반짝이 며 절벽가로 다가선 계집아이가 그녀를 부른 것이다. "운교(雲矯)가 날 찾는다고?" 운경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만약 누가 그녀에게 중원으로 따나는 데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이유를 대라면 무엇보다 동생과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할만큼 정이 깊은 동생이었다. 계집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까 도주님의 처소에 다녀오신 뒤로 계속 울고만 계시더니 빨리 군주님 을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운경(雲瓊)은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자신 못지 않게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동생이 아마도 아버지를 찾아가서 또 다 시 떼를 쓰다가 꾸지람을 듣고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래, 어서 가자꾸나." 어느새 자신의 상심은 바람결에 날려 버리고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만 가득해 진 운경의 발걸음이 절벽가로 펼쳐진 드넓은 초지(草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해남 칠십여 섬의 지배자요, 십만여 바다사내들 중 골라 뽑은 해남신풍군(海 南神風軍) 사천오백 용사들에게 신(神)으로 추앙 받는 봉래도주(蓬萊島主) 설 태천(薛太天)의 처소 신풍각(神風閣)에는 긴장이 흘렀다.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천년금구(千年金龜)의 박제(剝製)와 곳곳에 놓인 형형 색색의 산호(珊瑚)가 바다를 다스리는 절대자의 처소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 는 대전에 모인 다섯 명의 인물들은 모두가 봉래도의 핵심들이었다. 활짝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소금기 배인 바닷바람마저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조심스럽게 스러지는 듯했다. "그깟 표행료 때문에 지체 될 수는 없는 일이오." 서릿발같은 위엄이 느껴지는 도주의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제일 앞에 서 있던 청수(淸秀)한 용모의 중년 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봉래도의 살림을 책임지는 집사(執事)요, 해남신풍군의 군사(軍師)를 맡고 있 는 귀제갈(鬼諸葛) 최상몽(崔常夢)이었다. 남다른 학식과 지혜로 설태천의 신임이 두터운 그는 현기가 느껴지는 두 눈을 빛내며 보고를 올렸다. "안 그래도 세권표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전갈을 무적세가로 보냈습니다 ." 순간, 창노한 음성이 대전에 울렸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외다." 최상몽의 말에 이의(異意)를 제기한 것은 삼십 년 전 선대도주가 무적세가를 방문했을 때 함께 동행했던 유일한 인물이며, 이번 일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추진한 봉래도의 원로 봉래신장(蓬萊神將)이었다. 누구보다 봉래도를 위하는 충정(衷情)이 깊고 삼십만 해남 도민 모두를 혈족( 血族)처럼 여기는 그는 세권표국에서 요구한 과도한 표행료를 걱정했다. "장사꾼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자칫 독점적인 교역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 해남의 살림이 어려워지지는 않을까 걱정이오." 현존하는 봉래도의 인물 중 유일하게 파풍해천공(破風海天功)이라는 개세의 무공을 대성한 인물답게 두 눈에서 발해지는 안광은 형형했고, 전신에서 흐르 는 기도는 마치 거센 폭풍우에도 의연한 거암(巨巖)같은 것이 세사(世事)를 초탈한 선인(仙人)을 보는 듯 했다. 하나, 어찌 보면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표행료까지 걱정하는 그의 태 도는 진정 봉래도의 어른다웠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상몽을 거든 것은 봉래도주 설태천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숙부(叔父)인 봉래신장이 유일한 집안의 어른인지라 도주라 해 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최종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본 도주가 허락한 일입니다. 그리고, 세권표국의 석백송이라는 자가 장사꾼 이긴 해도 그리 이악스럽지 않다고 하니 숙부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좋 으실 듯 합니다. 오히려 그자라면 삼십 년 전의 사건 이후 소원해진 대륙과의 교역을 활발하게 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주가 직접 해명을 하는 데야 봉래신장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 다. "도주께서 좀스런 늙은이의 걱정을 헤아려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다니 고마울 따름이오." 조카이자 도주인 설태천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봉래신장은 좌중을 둘러보 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아무래도 내전에 들어가 봐야겠소. 어린것들이 헤어지기 싫어서 잔뜩 속이 상해있는 모양인데 시집갈 새색시가 잔뜩 찌푸린 얼굴이어서야 곤란하지 않겠소?" 구체적이고 세세한 의논은 그가 없어도 무방했으니 어쩌면 도주의 두 딸을 달 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두 군주(郡主)님이 모두 어르신을 잘 따르니 부디 웃는 얼굴로 떠날 수 있도록 잘 설득해 주십시오." 최상몽이 반색을 하며 봉래신장의 말에 화답했다. 봉래신장이 있어서는 곤란한, 정작 중요한 의논이 남아 있는 것이다. 대전을 벗어난 봉래신장의 발자국 소리가 아득히 멀어지자 대전의 인물들은 의미있는 눈길을 교환하며 그들만의 의논을 시작했다. 낮고 조심스런 목소리로……. "언니, 난 도저히 언니와 헤어질 수 없어!" 도주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라는 신분에 맞게 우아하고 정숙하기보다는 한 떨기 야생화(野生花)같이 생기 있고 발랄한 분위기를 풍기던 설운교였지만 지 금은 아니었다. 해남신풍군의 고수들도 당해내지 못하는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억센 기질을 지닌 그녀라 해도 아버지의 엄명(嚴命)을 거역할 수 는 없는 것이다. 운경은 동생을 달랬다. 그녀 역시 동생과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건 우리 뜻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야." 동생과 달리 일초반식(一招半式)의 무공도 익히지 않았을 뿐더러 늘 차분하고 조용해서 연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이번 혼사(婚事)가 잘돼야 중원과 우리 봉래도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니." 설운교는 언니의 담담함이 더욱 서러웠다. 차라리 자기처럼 아버지에게 떼를 쓰던가, 앙탈을 부리기라도 하면 속이라도 후련할 텐데 그저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언니의 태도가 속상한 것 이다. "그깟 무적세가 따위가 두려워서 언니를 볼모로 보낸다는 건 말도 안돼! 제 아무리 중원이 넓고 인물이 많다해도 해남신풍군을 앞세우고 진격하면 감히 맞설 자가 없을 거야."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닌 고수라 해도, 남 다른 정을 나누는 언니와의 이별 이 슬프다 해도 꽃같이 아름다운 처녀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하나, 어쩌면 그녀의 말은 불가능한 게 아닐지도 몰랐다. 천오백여 년 전, 연(燕)나라의 귀족이었으나 진시황(秦始皇)의 폭정(暴政)을 피해 바다를 건너다 봉래도에 정착했다는 선조 때부터 전해진 무공은 더욱 발 전을 거듭하여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고, 사천 오백 해남신풍군 모두가 중원 에 나가면 일류고수의 수준이라는 것은 자타(自他)가 공인(公認)하는 사실이 었다. 삼 년 전이던가, 중원에서 살수노릇으로 거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해 온 동영(東瀛)출신의 무사가 해남신풍군의 용사와 무공을 겨루다 삼 초 만에 패하고 떠든 소리를 설운교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 정도의 무공이면 구파일방(九派一 )의 장로(長老)와 겨루어도 지지 않는다. 한데, 그 동영무사를 삼 초 만에 무릎 꿇린 자의 신분은 해남신풍군의 순무( 旬武) 즉, 열 명의 무사를 이끄는 직책에 불과했고 해남신풍군에는 사백오십 명의 순무가 있었다. 설운경이 너무도 엄청난 동생의 말에 정색을 하고 야단을 치려 할 때, 갑자기 노기 띤 음성이 들렸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아, 할아버지……." 어느새 방으로 들어선 봉래신장이 굳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자 설운교는 움 찔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누구보다 그들 자매(姉妹)를 아끼고 사랑하는 인자한 할아버지였지만 지금의 모습에서는 추상(秋霜)같은 엄격함만 찾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눈에 드러난 것만이 중원의 힘이 아니다. 그들의 잠재된 저력은 어설픈 계산 으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이거늘……!" 봉래신장은 철없는 조카 손녀에게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비단 설운교 뿐이 아니라 삼십여 만에 달하는 해남 사람들의 가슴에 무적세가와 화평을 도 모하는 일 자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답답한 것이다. "설혹, 봉래도의 힘이 중원무림을 능가한다 해도 그들과 싸움을 시작하면 해 남의 무수한 인명이 머나먼 대륙에서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겠느냐!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봉래도와 중원을 피로 물들이고 천하무림의 패자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봉래도의 힘으로 얼마동안이나 천하의 주인 노릇을 할 것 같으냐?" 절절한 진심을 담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죄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설 운교는 이내 애교스런 웃음을 머금고 할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아이, 제가 잘못했어요. 그저 언니와 헤어지는 것이 속상해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네?" 누가 뭐래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손녀였다. 쪼르르 달려와 팔을 감싸쥐며 어리광을 부리는 손녀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 도 없는지라 봉래신장은 슬며시 얼굴을 허물어뜨렸다. "허허, 그놈 참!" 사랑스러운 손녀들의 편치 않은 심사를 달래려 찾아온 봉래신장으로서도 더 이상 화를 내기가 마땅치 않았기에 못이기는 척 설운교의 어리광을 받아들인 것이다. 철 이른 해당화(海棠花) 봉우리로 장식된 탁자에 자리한 봉래신장은 설운경을 향해 다정하게 말문을 열었다. "경아야, 무적세가는 중원을 다스리는 영웅의 가문이고, 네 신랑이 될 소가주 금사익(金獅翼) 역시, 무공와 인품이 남다른 훌륭한 젊은이라고 들었다. 고 향을 떠나는 것이 당장은 서럽겠지만 어차피 가야할 시집이라면 그 이상 좋은 혼처(婚處)도 없다는 게 이 할아비의 생각이다." 설운경은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애초에 무적세가와 약조한 대로라면 도주의 친딸인 설운교가 신부(新婦)가 돼 야 했다. 하나, 무슨 까닭인지 도주는 신부를 바꾸겠다고 결정했고, 만만치 않은 성미 로 행여 분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설운교보다는 침착하고 조신한 설운경이 이번 혼사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역시 동의했던 것이다. 비록 양녀라 해도 설운경 역시 도주의 딸임에는 틀림없지 않은가. 자신도 속이 편치 않으련만 다소곳하게 귀를 기울이는 설운경을 대하자 옳은 결정이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마음 한 구석에 애틋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이었다. "이번 혼사로 인해 무적세가와 우리 봉래도는 지난 세월의 갈등을 씻고 한 집 안이 되는 것이다. 작게 보면 집안끼리의 혼사이나 결국, 천하의 평화를 이루 는 일이니 네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어른들께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봉래신장이 설운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설운교가 호기심에 가득한 표정으로 평소에 품고있던 의문을 드러낸 것은 그 때였다. "한데, 할아버지. 삼십 년 전에 도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정말 사고였 나요?" 순간, 봉래신장은 참으로 질긴 업보(業報)를 느꼈다. 삼십 년 전. 그의 형이자 도주(島主)였던 설장경(薛長敬)이 무적세가로 찾아가 비무(比武) 를 청한 것도 사실이었고, 비무 끝에 죽게된 것도 사실이었다. 현 무적세가주 금천후의 아버지이자 당대 천하제일인이었던 금추흔(金秋欣)은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바다건너 신비세력의 주인, 설장경의 비무 요청을 흔쾌 히 받아들였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자부심(自負心)을 지녔으며 자신과 무공을 겨 룰만한 상대를 중원에서 찾지 못해 고독감마저 느끼고 있던 그가 마다할 이유 가 없었던 것이리라. 결국, 무적세가의 연무장에서 펼쳐진 두 사람의 비무는 무려 사흘밤낮을 이어 졌고 전력을 다한 비무가 계속됨에 따라 두 사람이 평정심(平靜心)을 잃고 오 직 필승의 집념에 사로잡힌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가히, 무신(武神)이라 할만한 두 사람의 손과 발에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신공이초(神功異招)가 쉴새없이 쏟아지던 세 번의 낮과 밤. 양측에서 한 사람씩만 증인으로 참관하던 비무장에 무적세가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첫 번째 화근이었다. 당시 중병을 앓던 금추흔의 부인이 운명(殞命)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 가의 총관이 연무장에 들어서는 순간, 하필 설장경이 문을 등지고 서 있었던 것이다. 난데없는 급박한 인기척은 생사의 일전을 벌이고 있던 설장경의 정신을 분산 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이미 발출된 금추흔의 공세는 여지없이 설장경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순간,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총관은 그 자리에서 천령개(天靈蓋)를 내리쳐 자결(自 決)하는 것으로 죗값을 치렀고, 금추흔 역시 설장경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으나 그런다고 죽은 사람의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두 번째 화근은 도주의 시신을 수습해 봉래도로 돌아온 봉래신장이 무심결에 내뱉은 한 마디 말이었다. 비통함을 참지 못한 그가 그만 도주의 죽음은 무적세가의 계략 때문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도주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공공연히 복수를 외치는 도민들의 분노를 보고 봉 래신장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후, 수도 없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도주의 죽음이 사고였음을 강변하자 점차 도민들의 분노는 진정되는 듯 했다. 하나, 말이라는 것은 일단 입 밖으로 내뱉어지면 스스로가 생명력(生命力)을 갖게 되는 법. 봉래신장이 무심코 흘린 말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입에서 입으로 건너며 제 멋대로 은밀한 번식을 거듭했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도민들의 가슴 한 구석에 도주의 죽음에 관한 의 혹과 무적세가에 대한 껄끄러운 감정이 은연중 깊은 뿌리를 내렸으며, 언제든 불똥만 튀면 폭발할 수 있는 불신의 화약을 쌓아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의 심중에는 단순한 진실(眞實)보다는 극적이고 과장된 계략(計 略)과 음모(陰謀)를 선호하는 속성이 있는 탓이었고, 봉래도의 힘이 중원을 상대로 한 전면전(全面戰)도 감당할 만큼 너무도 막강한 것이 원인일지도 몰 랐다. 이러한 연유로 봉래도는 무적세가를 비롯한 중원에 대해 결코 우호적일 수 없 고, 무적세가는 그들대로 막강한 힘을 지닌 봉래도의 움직임에 촉각(觸覺)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결국, 그가 앞장서서 삼십 년을 이어온 미묘한 갈등을 씻고 봉래도와 무적세 가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 두 집안간의 혼사를 치르게 된 것인데……. "흐으음……." 사랑스런 손녀의 말에서 자신의 업보가 끝나지 않았음을 또 다시 확인한 봉래 신장은 침음성을 흘렸다. 수천 수만 번이라도 성심껏 답변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 자신 의 의무라고 다짐한 봉래신장은 설운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는 이 할아비의 말보다 떠도는 소문을 더 믿느냐?" "그런 건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정색을 하자 설운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이 할애비가 힘없는 겁쟁이라고 생각하느냐?" 설운교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삼십 년 전의 사건으로 중원의 무학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실감한 이후 더욱 각고정진(刻苦精進)한 봉래신장의 무공이 봉래도에서 제일 강하다는 것을 그 녀는 알고 있었다. 또한, 봉래도 제일의 고수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천하 제일의 고수라는 것과 크게 다른 의미가 아니었다. "아니오! 전 할아버지를 당해낼 적수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푸훗, 사실이야 어떻든 이 할아비를 그리 대단하게 여긴다니 고마운 일이구 나……." 봉래신장은 철없는 손녀의 말에 씁쓸히 웃었다. 형이 사고를 당한 후 중원의 역사와 실정을 알기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 인 그는 '천하'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고 헛된 자부심의 위험성을 느낀 것이 다. "그럼, 거짓말쟁이도 아니고 네 말대로 무서울 것도 없는 할애비가 무엇 때문 에 이미 지나 버린 옛일을 사실과 다르게 얘기하겠느냐?" "……." 금새 고개를 떨구고 죄 없는 옷자락만 만지작거리는 손녀를 향해 봉래신장의 다정한 음성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어여쁜 손녀들이 이 할아비의 마음을 몰라준다면 정녕 섭섭한 일이지." "저희들이 비록 불민하나 어찌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교아 역시 단순한 호기심에서 여쭤봤을 뿐 다른 뜻은 없을 것입니다." 불과 한 살 차이였지만 설운경은 의젓한 언니였다. 동생의 허물까지 감싸고 할아버지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그녀의 고운 마음결을 읽은 봉래신장의 얼굴은 한결 밝아졌다. 이런 손녀라면 능히 봉래도와 무적세가간의 해묵은 갈등을 날려 버리고 따사 로운 평화의 기운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일은 그의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았으니……. 그가 평화의 다리가 될 손녀를 보며 미소짓는 이 시간 신풍각에서는 전혀 엉 뚱한 의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설태천은 최상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항주에 도착한 이후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무적세가에 일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순순히 동의할까?" "애초에 본 도로 오는 것을 꺼려 무적세가에서 혼례를 치르자고 주장한 것은 그들입니다." 최상몽의 말에 초로의 사내가 굵은 목소리로 동의를 표했다. "그렇습니다! 봉래도에서 자칫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긴 했어도 놈 들에겐 중원의 패자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신부가 대륙에 발을 딛는 순간부 터 책임지라는 제의를 거부할 리 없습니다." 해남신풍군의 연무를 책임진 총교두(總敎頭)로 봉래신장과 도주에 이어 세 번 째로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알려진 창해룡(滄海龍) 하진악(夏秦岳)이었다. "하긴, 천하제일 가라는 체면 때문에라도 거부하지 못하리라." 설태천은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봉래도의 무공이 중원보다 못하지 않음을 만천하에 증명하겠다고 섬을 떠난 그의 아버지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힘을 길러 온 세월이 삼십 년이었다. 이제 놈들을 칠 명분만 있으면 됐고,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 친딸처럼 아끼던 설운경을 제물로 바칠 결심을 굳힌 그였다. 작은 차질도 용납할 수 없는 그 로서는 모든 일을 재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세권표국의 능력이 만만치 않다던데 그들이 표행에 성공할 가능성도 있지 않 은가?" 도주의 심중을 헤아린 최상몽의 총기 있는 눈이 반짝였다. "무적세가에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흑마방과의 시비를 피하기 위해 신부를 표 물로 위장할 만큼 흑마방의 위세는 대단합니다. 세권표국의 석백송이 소림의 속가제자 출신으로 제법 뛰어난 인물이오. 수하에 거느린 수많은 표사들을 고 수라고는 하나 일개 표국의 힘으로 흑마방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정체를 감추고 흑마방에 정보를 흘리는 일인데 중원 천지에 흑마방의 이목이 없는 곳이 없으니 그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판단됩니다. "흐음, 흑마방이라……." 흑마방은 중요했다. 사천 오백 해남신풍군의 막강한 힘이 있다 해도 근래에 급부상한 흑마방이 무 적세가를 견제하고 그들을 위축시켜 중원을 분열시키지 않았다면 대륙침공계 획(大陸侵攻計劃)은 조금 더 연기했어야 될지도 몰랐다. 결국, 그들의 계획대로 대륙침공이 시작되면 흑마방 역시 해남신풍군의 해일( 海溢)같은 힘에 쓸려 버릴 운명이었지만 침공의 명분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들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무적세가로 가는 표행을 털 생각을 하겠는가. 대해(大海)의 기상을 담고있는 설태천의 호목(虎目)이 최상몽을 향했다. "군선(軍船)의 준비는 차질이 없겠지?" 일이 벌어지는 즉시 해남신풍군의 용사들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물론, 육지로 상륙할 용사들을 내려주고 장강(長江)을 거슬러 운하(運河)를 타고 삽 시간에 북경까지 도달할 배를 만드는 일 역시 최상몽의 책임이었다. "열 척의 배가 모두 완성되었고 화포(火砲)를 장착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바람이 있으면 돛을 달고 바람이 잦아들면 노를 젓도록 하여 바다와 운하에서 모두 놀라운 속도를 내도록 만든 쾌속선이야말로 봉래도의 뛰어난 조선술(造 船術)의 정화(精華)였다. 봉래신풍선(蓬萊神風船)이라 이름지은 열 척의 쾌속선의 선체(船體)는 쇠보다 단단하면서도 대나무보다 가벼운 해남 특산의 강운목(剛雲木)이었고, 강모( 鋼毛)와 마(麻)를 섞어서 짠 능라철포(綾羅鐵布)로 만든 돛은 제 아무리 거센 바람도 능히 감당 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각기 열 문(門)씩의 화포를 달고 강철같이 단련된 해남신풍군의 용사 들이 노를 젓는다면 가히 질풍처럼 물위를 달리는 철옹성(鐵甕城)이라 할만 했다. 최상몽의 뒤를 이어 하진악이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남신풍군의 사천오백 용사들 역시 언제라도 출전할 태세를 갖추고 대륙진 군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륙침공의 계획은 아직 그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지만 전에 없는 강한 훈 련을 거뜬히 감당해내는 해남신풍군의 사기가 충천한 것은 사실이었고, 넘치 는 힘을 주체 못하는 그들에게 대륙침공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쌍수를 들어 환 영할 것은 분명했다. 은연중 가슴에 치미는 호기를 억누르느라 용교의(龍交椅)에 앉아 있는 설태천 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대륙의 무림을 정벌하여 무적세가를 필두로 천하무림인을 봉래도의 발아래 무 릎 꿇게 할 그 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것이다. 설태천은 최상몽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정은?" 최상몽이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신부의 출발은 사월 초닷새, 열흘 후면 항주에 도착합니다. 표행이 시작되고 이십일 안에 사고가 날 것이고, 소식이 전해진 후 닷새면 사천오백 해남신풍 군을 태운 봉래신풍선이 중원에 닻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격동을 더 이상 참기가 힘든지, 설태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발해지는 웅혼한 기상이 그의 충직한 수하들의 가슴에 강한 파장을 일으켰고, 넓은 대전을 가득 메웠다. 그는 북쪽으로 열린 창문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창문 밖에는 대륙과 연결된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추호의 소홀함도 없이 만전을 기해라. 본 도가 천하에 군림하는 그 날이 멀 지 않았다!" 멀리 남쪽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바다를 건너 대륙을 향하듯, 대륙침공의 그 날을 준비하는 봉래도 사내들의 마음은 넘실대는 물결을 타고 이미 중원 십팔만 리를 질타하고 있는 듯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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