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흔하디흔해 사는 일조차 많지 않은 달력은 옛날만 하더라도 문명의 혁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날짜를 세는 법칙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 만큼 고대의 인류는 해가 뜨고 지는 과정을 수백, 수천 번 보면서 날짜의 개념을 획득했겠지요. 거기다가 계절이나 한 해의 개념까지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달력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일단 역법을 알아야 합니다.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며 그 패턴을 파악하는 거지요. 역법은 천문학과 수학 기술의 정수로써, 그야말로 과학의 총아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초기 문명에서 역법은 필수적이지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과거의 산업은 자연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농업에 있어서는 역법에 대응하여 1년의 기후를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어업 또한 조수간만의 차를 파악해야 효율적인 생산이 가능합니다. 즉, 체계적인 역법, 달력의 존재는 문명의 생산력을 결정짓지요. 물론 고대 인류 개개인이 적당히 경험과 감으로 때려맞추는 것으로 광범위한 레벨의 역법을 정립시킬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천문학자와 수학자가 따로 필요하지요. 그런데 이런 직업의 종사자는 과거 기준으로 보면 뭔가 잉여 느낌이 강하게 나는지라... 요런 사람들이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먹일 수 있는 잉여생산물이 필요합니다. 즉, 체계적인 역법은 국가의 성립 뒤에나 발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역법은 국가가 개개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기도 합니다. 방금 언급한 것처럼 개개인이 명확한 달력을 제작할 수 없는 만큼 백성들은 농사에 도움이 되는 달력을 배포하는 국가가 꼭 필요했지요. 그래서 역법을 제정하고 달력을 배포하는 일은 제왕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은 매년 동지가 되면 ‘관상감’이란 관청에서 과거의 달력인 책력을 만들어 궁중에 헌납했습니다. 이를 문무백관들과 지방의 관아에 나눠줬지요. 그리고 관아에 전달된 책력이 시골 농민들에게까지 전달됩니다. 사람들은 연말에 서로 이 책력을 주고받았지요. 이것을 ‘동지책력’이라 합니다. 지금도 연말에 달력을 주고받는 풍습은 이 동지책력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우리 기록에 남아있는 역법의 시초는 신라 문무왕 때부터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14년(674)에 당나라로부터 역법(선명력)을 배워와 신라의 상황에 맞게 고쳐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지요. 물론 역법이라는 단어가 명확히 나온 게 이때라는 거고 실제로는 훨씬 이전부터 자체적인 역법이나 달력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역법의 정립 없이는 안정적인 농경이 불가능하기에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생산력을 보유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좀 더 앞선 기록이 나타나는데 백제의 역박사 왕보손이라는 사람이 554년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602년에는 백제의 승려 관륵이 역서를 전해주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평양성에 첨성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그 외에 여러 차례 일식 관측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본다면 삼국은 오래 전부터 상당한 수준의 역법을 정립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고려 역시 신라 때 들어온 선명력을 오랫동안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원간섭기에 원나라의 역법인 수시력을 사용하였고,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던 공민왕은 수시력 대신 명나라의 대통력을 도입하지요. 조선 역시 대통력을 기본으로 삼았는데 세종 때 문제가 생깁니다. 세종 4년(1422) 1월 1일에 일식이 예정되어 있어 임금과 백관이 구식례를 올리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일식이나 월식이 재앙을 불러온다고 여겼기에 구식례라는 제사를 올려 재앙을 물리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관상감에서 예고했던 일식 시간과 실제 시간이 15분이나 차이가 나버렸습니다. 별거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앞서 언급했든 정확한 역법은 제왕의 책무였고 이 정도의 오차는 왕의 체통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일이었지요. 결국 담당자는 죽도록 곤장을 맞습니다. 일반적인 군주라면 담당자의 계산 실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세종은 일반적인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곤장을 때리기는 했으나 본질적인 문제는 중국의 역법이 조선의 실정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간파했지요. 지리적 위치 차이 때문에 정확한 수치가 계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종은 정인지, 이순지 등을 시켜 역법의 이론적 기반을 새로 세우게 하고 장영실, 이천 등을 시켜 독자적인 천문관측기구를 만들게 합니다. ‘간의’나 ‘혼천의’ 같은 천문관측기구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지요. 독자적인 관측치에 중국의 역법, 거기다 아랍의 역법까지 연구하여 세종은 비교적 정확한 역법을 개발해내었습니다. 이것을 ‘회회력’이라 합니다. 참고로 세종이 신하들한테 일시키고 손 놓고 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세종은 직접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학 능력자인 정인지에게 일일이 물어가면서 배웠지요. 이때 세종이 말하길 "산수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 하여간 공부는 참 열심히 하셨습니다. 물론 이런 행위는 통념상 시간을 지배하는 황제에게 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명분이 그렇다는 거지 현실정치에 제약을 가하면서까지 지킬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자주 강조했지만 ‘사대-책봉’의 구조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의 일환일 뿐입니다. 세종이 정립한 역법은 수백 년간 사용됩니다. 그러나 완벽한 역법은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오차가 생기지요. 그래서 효종 대에 도입한 것이 ‘시헌력’입니다. 시헌력은 청나라가 선교사인 아담 샬에게 부탁하여 만든 역법이지요. 즉, 동양의 역법을 기반으로 서양 천문학 기술을 도입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음력’의 정체지요. 그러니까 음력을 ‘우리나라 및 동양 고유의 역법’이라고 이해하면 좀 곤란합니다.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역법이며 그것도 서양기술을 도입한 결과물이지요. 실제로 시헌력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서양 오랑캐의 역법으로 여기기도 했고요. 성호 이익은 시헌력이 대통력보다 우수함을 인정하며 "천문학은 서양이 제일이고 회회(아라비아)가 버금이며, 중국은 이를 따르지 못한다."라고 단언하기까지 했지요. 이 시헌력은 갑오개혁으로 그레고리력(양력)을 도입할 때까지 조선 사회에서 통용됩니다. 그런 와중에도 시헌력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어 조정에서는 임금에게 따로 대통력으로 만든 달력을 진상했지요. 이렇게 무시 받던 시헌력이지만 지금은 음력이라는 이름으로 전통달력의 표준처럼 여겨지니 세상일이란 참 모를 일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탄생해야지만 전통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아닙니다. 선조들은 정확한 역법을 정립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고 과거 도입되고 폐기됨을 반복했던 역법들은 이런 노력들의 일환이지요. 모두 다 백성들에게 정확한 달력을 배포하여 농사에 차질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애초에 문화란 것은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일이 드문 법입니다. 상호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일이 오히려 많지요. 여기에 자주나 타율의 논리를 개입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현실의 일부분일 뿐이며 역사의 한 단면이지요.
첫댓글 정확한 시간을 위한 노력으로
달력과 역법이 있었음을 배웠고
중요한 자료를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