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5.1.19. ) 말씀/ 요한복음 1: 14
말씀을 몸으로 증명하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이 얼마나 큰 은혜요 감사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왜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나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이며 그것은 곧 생명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계시록에서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10)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아먹을 때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는데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씀이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에 이르기까지는 너무나 좋고 행복하지만 그것이 삶 속에서 소화되기까지는 쓰다고합니다. 그러나 쓰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쓴 것이 오히려 교훈이 되고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커피도 처음 마시는 사람은 설탕을 많이 타서 마시지만 나중에 익숙해지면 씁쓸해야 제 맛이 나지 않습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성경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어떤 지식이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수많은 성인 군자의 좋은 말들이 있지만 근본 하나님 말씀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슴을 받을 때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듣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131에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에스겔 3:1에서는 “사람아, 너에게 보여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려 주어라.” 이렇게 성경 속에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 말씀을 헐떡이며 받아먹었고, 다음에는 그 말씀을 다시 소화해서 삶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말씀은 머리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배로 들어가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행실로 나타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먹은 말씀이 생명 양식이 되고, 젖이 되어 또 나눌 수 있어야 진짜 말슴인 것입니다. 그리고 양식의 특징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매이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꾸준한 섭취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삶의 지표가 되고, 교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신명기 17장을 보면 왕이 오를 때에 그 왕은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 세끼 양식 먹듯이 평생에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던, 공부를 하던, 책을 읽던, 등산을 가던, 친구들과 놀이를 하던 말씀은 언제나 옆에 두고 함께 동반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시간은 다 다르겠지만 말씀으로 시작하여 말씀으로 하루를 마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매주 수요독서모임도 기본 성경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새벽 4시 눈을 뜨고 제중 집사님은 3시에 눈을 뜹니다.여러분들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어떤 사람은 성경말씀을 100번도 읽고, 어떤 사람은 천번 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필사해서 쓰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성경을 전권 암송하는 이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붓으로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가까이하고 은혜를 받고 힘을 얻고, 세상을 대처할 지혜도 얻을 수 있고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결국은 그렇게 알고 깨달은 말씀을 소화해서 몸의 실천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주변에 많이 읽고 안다는 것으로 교만한 사람, 그것으로 남을 정죄 판단하는 사람. 그리고 마치 자신은 다 된 것같잉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있는데 ... 말씀 증명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자칫 이렇게 우리는 내가 읽고 듣고 배운 말씀을 알고 깨닫고 은혜 받고 혹은 다른 사람을 정죄 판단하는데 머물러 버릴 수 있는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여러 말로 풀어 주석하고, 읽고, 듣고 해도 거기에 그친다면 아직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을 암송하고 끊임없이 말씀을 중얼거리며 작은 소리로 읍조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는 말씀은 단지 관념이었습니다. 관념! 여러분, 관념의 말씀을 주의 하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 대해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3:4). 알고 안 움직이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쉽게 말해서 성경을 읽고 성경 공부할 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호크마 주석 설명을 들어야 알 수 있습니까? 이론적 논리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머리로도 성령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은 숨겨진 보물이요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풀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기도하며 성령으로 풀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실행으로서 풀어야 합니다. 두 번째가 실제적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실행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 가까이에 따라다니면서도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안다는 것입니다(요한 7:17). 결국 실천하는 자만이 말씀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뿐만이 아닙니다. 인문고전지시고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용이 온전히 깨달아지려면 결국 읽고 또 읽고 마침내는 삶속에서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월북 학자 윤노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철학은 서재 또는 강의실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피와 땀과 한숨이 뒤범벅이 된 생존 현장에서 탄생한다. 삶의 현장에서 땀흘려 부딪히면서 그렇게 실천되어질 때 깨달을 수 있다는 말,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한공기 인문학에서 김선우 시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혼은 행위이다. 몸이 없는 성자들을 믿지 말라. 말씀으로 아름다워진 세상은 없다 백번 옳은 말, 김선우 시인은 어떻게 이런 것을 깨닫고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성 속에 기독교인들이 떠 올랐고, 동시에 요한복음 1: 14이 떠 올랐습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몸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장 1절과 짝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그분의 풀이한 강해서를 보면 요한 1:14절의 말씀을 ‘길 도’로 풀이를 하였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말씀(word)이 맞습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예수님이 육식을 입고 삶의 현장에 낮아져 오신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말씀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이 하나님 이심을 알 수 없고, 찾았어도 만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말씀이 단지 관념이 아닌 육신의 실체로 오셨기에 우리는 삶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보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지며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한 1서:1:1). 할렐루야!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붙들고 살아가는 모든 말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풀이 되고 증거될 수 있겠습니까? 주석적인 듯 풀이가 아닙니다. 모든 말씀은 손끝 발끝을 타고 삶의 자리로 내려와 사랑의 실천으로 주석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의 완성체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도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아직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주석된 말씀만이 내가 아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 말씀을 보고 성령으로 깨달아 감동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이 사랑을 병원에 입원한 환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카톡에 하트를 찍어서 보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힘내십시오” 물론 그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친다면 사랑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결국 몸이 움직여야하고, 가서 손으로 잡아주어야 하고, 기도해주어야 그 때 사랑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번째 차원으로 바빠서 몸은 못 움직이더라도 몸 대신 물질이나 선물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사랑으로 보이는 말씀의 실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말씀을 많이 잘 알고 있을까요? 많이 읽고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지 않을까요? 여러분, 사람들에게 성경의 주석 뜻풀이를 가르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말씀을 행하고 실천할 것인가 본을 보이며 가르치는 자 디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전서 5:3절에서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한 것도 그런 뜻입니다. 말로 가르치지 말고 행실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욱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울 청계천에서 '홍익인간'을 설파하며 매일밤 8시 이후 쓰레기를 줍는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양대에서 실용영어를 가르쳤던 티모시 버드송(54)이라는 사람인데 한양대 서울 캠퍼스에서는 '파란 눈의 청소부'으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홍익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홍익인간'이상을 실천하려고 '쓰레기를 줍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머니투데이와 가진 전화 인 터뷰에서 홍익인간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함’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한국 사람이라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뜻을 아는가 모르는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외국인이 다음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무슨 뜻인지 압니다. 당신이 실천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모를거에요." 와, 정곡을 찌르는 대답입니다. 실천하는 사람은 알것이고, 알아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석하고 설교로 선포되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고, 잘 몰라도 사마리아인처럼 실천하면 잘 아는 것입니다. 김선우 시인도 한공기 인문학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몸이 없는 성자를 믿지 말라. 말씀으로 아름다워진 세상은 없다. 우리가 말씀을 아다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할까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고, 독생자를 보내주심으로 사랑이 실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체인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십자가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실천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상에서 목마르다는 말씀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의 구주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론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실천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사랑과 섬김을 보여준 친구나 이웃이나 가족, 주의 종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작은 것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피에르뎅 신부의 <단순한 기쁨> 이란 책을 보면 자살하려던 목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절망상태에 빠진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조루즈 당신의 이야기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신에게 해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죽기를 원하니 거치적거릴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집이나 지어주기만 기다리는 어머니들을 생각해서라도 집짓기가 빨리 끝날 수 있도록 죽기 전에 나를 도와주지 않겠소" 그 사람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하고, 신부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실천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죽으려던 사람을 살게 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나 집이던 어떤 일이든 그저 베풀어주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였을 것입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갈 이유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살렸습니까? 사랑의 실천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씀으로 설명을 하고, 상담을 해도 변화가 안 되었을 것인데 이웃 사랑의 말씀을 실천할 때 말씀이 살아서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자신도 변화되었습니다. 말씀은 자체가 생명이지만 실천할 때 꿈틀거리며 운동합니다. 물론 우리는 큰 것을 다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것이 모여져 큰 것을 이루고 세상을 덮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우주 교회의 실천 강령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를 지양하고, 적은 능력이라도 말씀을 지키고, 가난하지만 실상의 부자, 시골 변방에 있어도 우주적으로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청주 개척 역사를 섬기시는 김길영 목사님이 우주교회 독서모임에 참석하며 2박3일 교제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CMI 가을 목자 수양회 때 교제 중 개척 역사를 섬기면서 어렵고 힘든 점이 있지만 그러면서 또한 겸손히 듣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고 우주교회 독서모임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 먼 거리 마다않고 오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가까이에서 책을 읽고, 떡을 떼고, 함께 여행을 하며 사귀다보니 주님의 사랑과 섬김의 읜혜가 더 피부로 다가왔습니다. 지홍집사님. 재중집사님 함께 하며서 동행해주시고 식사를 섬겨주셨습니다. 덕분에 떠나는 순간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틈틈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격려와 위로와 힘을 얻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셔서도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나 힐링이 되는 시간 이었으며 목사님의 신앙과 인생에 대해서 배우고싶다고 답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사실은 저도 겸손히 어린아이처럼 배우시는 길영 목사님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깨달은 것은 은혜스러운 말씀과 아름다운 인문고전 글들이 읽는 것도 좋지만 실천 되어질 때 참 지식된다는 것, 말씀은 몸을 움직여 몸으로 증명되어야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테초에 말씀이셨지만 친히 육신이 되셔서 오심으로 죽기까지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믿음을 갖게 되고, 사랑을 깨닫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역시 모든 삶 속에서 배우는 모든 말씀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몸으로 실천하며 증명해보이는 자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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