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우 金容友 (1885 ~ 미상)】 "1919년 을사 5적 및 정미 7적 처단 시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출신이다. 188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1월 만주 봉천(奉天, 현 심양[(瀋陽)]() 서탑(西塔)에서 결성된 27결사대에 대원으로 가입하였다. 1920년 8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7결사대 대원들에 대한 예심이 행해질 때, 거주지가 서간도(西間島) 안동현(安東縣, 현 단동시[(丹東市)]() 3번통(番通) 6정목(丁目)이었으므로 1919년 3월 만세운동 이전에 이미 만주로 망명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압록강을 사이에 둔 신의주 대안인 안동현은 1910, 20년대 수많은 한국독립운동가들의 망명 통로이자 독립운동 본거지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해 활동했던 27결사대는 경술국치 이후로 안동현을 빈번히 왕래하며 관전현에 근거지를 구축했던 동우(東愚) 이탁(李鐸)이 이끌었다.
27결사대의 시작은 1918년 (음)11월 14일, 봉천 서탑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의 집에서 이탁·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안태국(安泰國) 등이 만나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면서 비롯되었다. 첫 번째 만남 이후 이듬해 1월까지 3차례 모임을 갖고, 나라를 팔아먹고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까지 방해하는 매국노들을 처단할 결사체의 구성을 합의하여 27결사대를 탄생시켰다.
27결사대는 단장 이탁의 주도하에 안경식(安景植)·주병웅(朱秉雄)·김용우·이종욱(李鍾郁)·차병제(車秉濟)·손창준(孫昌俊)·박진태(朴鎭台)·나경호(羅景鎬) 등 26명의 단원을 가입시켜 27명의 구성원으로 결성한 의열투쟁 단체였다. 거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원들이 서울로 들어 왔을 때 몇 명이 추가되었지만, 처음 결성 당시의 인원은 27명이었다.
27결사대의 첫 번째 거사 대상은 1905년 나라를 소위 ‘보호국화’한 문서인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찬성한 5적과 1907년 광무황제(光武皇帝) 퇴위에 적극적으로 앞장 선 7명의 친일 매국노들이었다. 즉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 등과 임선준(任善準)·고영희(高永喜)·이병무(李秉武)·조중응(趙重應)·이재곤(李載崐)·송병준(宋秉畯) 등 대신(大臣)들이었다. 결사대가 결정한 이들 매국노들의 처단 시기는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국장일이었다.
3개 조로 나뉘어 편성한 결사대는 각 조마다 임무를 부여받고, 1919년 2월 24일 봉천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 3월 1일 전민족적인 만세시위가 시작되고, 이틀 후 광무황제의 국장이 거행되었다. 국장이 거행되는 동안 대원들의 예측대로 매국노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봉천에서 무기를 받아다 서울에서 전달하기로 했던 운반조가 3월 3일을 넘기고 10일과 15일 두 번에 걸쳐 무기를 운반해 왔기 때문에 거사를 실행할 수 없었다.
매국노들을 처단하기로 한 처음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27결사대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외세의 압박을 이겨내고 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에서 건립한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의 빛바랜 태극기에 다시 색을 입히고, 매국노들의 행태를 고발하고 성토하는 성토문과 경고장, 민중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일깨우는 격문 등을 종각·독립문 등에 부착하였다. 일부 대원들과 함께 장차 더 활기찬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자금 모집에 나섰다. 서울 시내에서의 이같은 활동이 일본경찰에 포착되어, 5월 5일 동지 차병제·손창준·박기한(朴基寒)·주병웅·이우영(李宇榮)등과 함께 붙잡혔다.
예심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활동상을 극히 일부만 진술해 투옥되지 않고 풀려나 서간도로 돌아갔다.
대한민국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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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암살단 사건 관련 보도기사(『동아일보』 1920. 9. 3)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