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타이완에 진도7.6 강진 발생. 2,400여명 사망
리히터 규모 7.3~7.6도의 강진이 1999년 9월 21일 대만 중부지역을 강타, 2400여명이 사망하고 8600여명이 부상했다. 지진은 주로 타이중, 타이베이 등 2개 시와 대만 중부의 난터우, 원린 등 4개 현을 뒤흔들어 놓아 건물 1만5000여 동이 붕괴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지진은 타이베이 남서쪽 150km, 화리엔 서남쪽 50km 지점의 난터우현을 진앙으로 1분쯤 계속됐으며 진도 6.8과 5.9 등의 여진이 30분동안 200여차례 이어졌다. 주로 반도체와 PC를 생산하는 대만의 `실리콘벨리` 신주도 큰 피해를 입어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가격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한국의 119구조대 15명도 현지에 급파돼 무너진 12층짜리 아파트 건물 잔해 속에 갖혀있던 6세 소년을 87시간 만에 무사히 구해내고 사체 20여구를 발굴해 현지 매스컴의 찬사를 받았다. 700여차례의 여진과 6차례의 강진이 연말까지 계속 이어져 타이완은 공포에 떨어야했다. /조선
[1990년] 이호왕박사, 세계최초로 유행성출혈열 예방 백신 개발
← 1990년 9월 21일 세계 최초로 유행성 출혈열 예방 백신을 개발한 당시 고려대 의대 이호왕교수(가운데)가 연구실에서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말라리아 및 간염과 더불어 세계 3대 전염병으로 불리던 유행성출혈열의 예방백신이 1990년 9월 21일 세계 최초로 국내에서 개발됐다. 유행성출혈열 백신은 그동안 선진 각국에서 여러차례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해왔는데, 국내 고려대 의대 이호왕 교수팀이 개발에 착수한지 10년 만에 성공한 것이다.
보사부는 이날 유행성출혈열의 예방백신이 고려대의대 이 교수팀과 ㈜녹십자의 공동 연구로 개발됐다고 밝히고, ㈜녹십자가 국립보건안전원의 국가검정을 받아 유행성출혈열 백신인 한타박스를 이날부터 의료계에 공급한다고 밝혔다. 임상실험한 결과 항체양성률 97%의 높은 효과를 낸 이 백신은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등에 특허출원됐다.
유행성출혈열은 들쥐와 집쥐 등의 배설물에 있는 바이러스가 호흡기를 통해 감염돼 나타나는 병으로 치사율이 10%에 이르며 주로 한국, 중국 북동지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에서 주로 발견된다.
1976년 세계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한탄강 유역에서 채집한 등줄쥐에서 발견한 이 교수는 한탄강의 이름을 따 한탄바이러스라 명명하고 이에 대한 예방접종약을 개발, 실용화하는데 노력해왔다. 이 과정에서 수명의 연구진이 유행성 출혈열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이 교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연구에 정진해 유행성 출혈열의 퇴치를 위한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수행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다. 1991년부터 이 백신은 아시아 전역에서 사용되었고, 그 결과 최근 한국에서의 출혈열 환자수가 2000명에서 500명으로 감소했다./조선
[1985년] 남북이산가족,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상봉
← 판문점 자유의 집
1985년 9월 21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1984년 9월 북한측의 대남 수재(水災)물자 제공 제의와 남한측의 수락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재개되면서 남북적십자회담이 12년 만에 다시 열렸다. 1985년 5월 27~30일 서울에서 개최된 남북적십자회담 제8차 본회담에서 남북한은 "8·15해방 40주년을 전후해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3차례의 예비접촉에서 방문단 규모를 단장 1명, 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 기자단 30명, 지원인원 20명 등 151명으로 하고, 방문 지역은 서울과 평양으로 국한하며 방문기간은 9월 20~23일로 한다는 구체적 사항들이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방문단이 9월 20일 판문점을 경유해 각각 서울과 평양에 도착함으로써 3박 4일간의 방문일정에 들어갔다. 이산가족 상봉은 9월 21~22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평양에서는 한국측 방문단 중 35명이 41명의 가족·친척들과, 서울에서는 북한측 방문단 중 30명이 51명의 일가친척과 재회했다. 이는 남북 당국자들의 공식적 합의 도출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민족통일의 염원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브리태니커
[1964년] 몰타, 영국으로부터 독립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몰타(Malta)가 1964년 오늘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연방으로 가입한다.
보르그 몰리비에(Borg Molivier)가 초대 총리를 맡았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 여왕이 선임한 총독이 지배하는 불완전한 독립이었다.
몰타는 10년 뒤인 1974년 12월 13일에야 공화국을 선포하고 최고 지도자로서 영국 총독을 대신할 대통령을 스스로 선출하고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몰타 주둔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한 1979년 3월 31일은 ‘자유의 날’로 지정된다.
몰타는 2004년 5월 1일 EU에 가입했다. /YTN
[1953년] 노금석 북한공군 대위, 미그 15기 몰고 월남 귀순
← MIG-15기의 모습. (사진은 1970년 11월 3일 북괴군 박성구소좌가 MIG-15기를 몰고 고성군 거진면 간성 앞바다에 모래밭에 착륙하여 귀순한 것)
1953년 9월 21일 북한군 공군 대위 노금석이 소련제 MIG 15기를 몰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순했다. 노 대위는 이날 평양 동북쪽에 있는 순안비행장을 이륙, 목숨을 걸고 휴전선 상공을 넘어왔다. 철저한 보안 속에 노대위에 대한 심문을 마친 주한 미 제5공군은 사흘 후에야 노대위를 기자회견장으로 안내했다. 회견장에는 5년 전 월남해 부산피난민수용소를 전전하던 노대위의 어머니가 등장, 모자가 극적으로 상봉하는 감격에 젖기도 했다.
1953년 3월 6일 폴란드 공군중위 자렛기가 소련제 제트기를 몰고 노르웨이로 탈출한 적은 있지만 최신형 MIG 15기를 몰고 유엔군쪽으로 투항한 것은 노대위가 처음이었다. 이 사건은 미·소양국의 군사기밀작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대위는 1954년 5월 10일 워싱턴으로 떠났다./조선
[1901년] 일제강점기 암담한 현실에 놓인 민족의 설움과 고통을 노래한 시인 김동환(金東煥) 출생
← 김동환
1901. 9. 21 함북 경성~?
일제강점기 암담한 현실에 놓인 민족의 설움과 고통을 노래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인 〈국경의 밤〉을 썼다. 아명은 삼룡(三龍), 아호는 파인(巴人).
6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러시아로 장사하러 갔다는 설과 간도에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생사불명되었다는 설이 있다.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6년 서울로 와서 중동중학을 다녔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 영문과에 들어갔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함경북도 나남에 있는 〈북선일일보〉와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다. 1929년 이광수·주요한과 함께 〈삼인시가집〉을 펴냈다. 같은해 종합지 〈삼천리〉를 펴내고, 이 잡지를 통해 처음에는 민족주의 입장을 내세웠으나, 1937년 이후부터 점차 황국신민화운동을 벌이는 등 친일적인 글을 실었다. 1938년에는 순문학지 〈삼천리문학〉을 펴냈다. 해방 후 이런 친일행위가 문제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회부되어 공민권을 제한받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뒤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브리태니커
[1898년] 중국 서태후 친정(親政)선언. 광서제 유폐
함풍제의 사후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서태후(西太后)는 공친왕(恭親王)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母后)로서 동태후(東太后: 함풍제의 황후로 安皇太后라고도 한다)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에 접근, 신정을 실시[戊戌變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西安: 陝西省]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北京]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實業), 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 /naver
[1897년] 동양화가 이상범(李象範) 출생
← 이상범
1897. 9. 21 충남 공주~1972. 5. 14 서울.
호는 청전(靑田). 아버지 승원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서 3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10세부터 동네 노인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그후 서울 사립 보흥학교를 거쳐 1914년 계산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14년 18세 때 경성서화미술회 부설 서화미술원에 입학, 본격적인 그림수업을 받았다. 서화미술원은 조석진·안중식·강필주·김옹원·이도영·강진희 등 당시 서화계의 대가들이 강사진으로 그림을 가르쳤으며 그중에서도 이상범은 안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안중식은 그의 호를 따서 '청년 심전(心田)'이란 뜻으로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서화미술원을 졸업한 이상범은 안중식의 화실인 경묵당(慶墨堂)에서 계속 그림수업을 받았다. 이때 창덕궁 내전 벽화 작업에 서화미술원의 동문인 김은호·오일영·이용우·노수현과 함께 참여하여 그중 〈삼선관파 三仙觀波〉를 제작했고 중국 남종화법을 두루 설립하여 화필의 기초를 다졌다.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에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제3회 서화협회전에 〈하경산수 夏景山水〉와 〈해진 뒤〉를 출품했다. 1922년 일본 총독부에서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제1회 때 〈추강귀어 秋江歸漁〉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때의 작품은 남·북종의 화법과 안중식의 영향을 많이 드러냈으나 〈해진 뒤〉와 제2회 선전에 출품한 〈모연 募煙〉 등에서는 중경이 강조되고 현실감이 강화되는 등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다. 1923년 3월 노수현·변관식·이용우 등과 함께 최초의 미술동인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했다. 그러나 동연사는 재정난 등으로 그룹전과 같은 활동은 못하고 해산되었다. 1923년 노수현과 함께 보성학교에서 2인전을 열었으며 선전과 서화협회전에 계속 출품했다. 1926년 〈조선일보〉에 삽화가로 입사했으며 1928년 〈동아일보〉 학예부로 자리를 옮겨 삽화를 그렸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에서 일장기를 지운 역할로서 직접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혀 40여 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금강산 등을 여행하며 실경 스케치를 했으며 후진양성기관 '청전화숙'(靑田畵塾) 운영에 전념했다. 선전에서 1회부터 연3회 입선한 뒤 제5회 〈첩장 疊嶂〉, 제6회 〈우후 雨後〉, 제7회 〈산그늘〉, 제8회 〈만추〉, 제9회 〈귀로〉 등 10회에 걸쳐 특선을 했으며 16회부터는 그해에 신설된 전년도 특선작가에 주어지는 무감사로, 1938년부터 심사참여 자격으로 참여했다. 그의 이런 활약으로 말미암아 선전에는 청전 아류의 그림들이 속출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안중식의 영향 아래에서 세심한 필선을 중심으로 관념산수를 그렸으며 후기로 들어가면서 미점(米點)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미점법으로 부드럽고 평온한 풍경을 표현했으며 한때 습윤한 분위기의 일본화풍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미점법을 사용한 것은 1930년을 전후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한국의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리면서 중국 송대(宋代)의 화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10여 년 동안 같은 화풍을 답습적으로 반복하여 평론가들한테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8·15해방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추천작가로 활동했으며 1950년 홍익대학교 전통회화 교수로 임명되어 1961년 정년퇴임 때까지 재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국전 심사위원 등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1971년 서울신문사 주최 '전통회화6대가전'에 김은호·허백련·박승무·노수현·변관식 등과 함께 초대 출품했다. 동아일보사 주최로 신문화랑에서 회고전을 열었으며 1982년에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10주기 기념 특별전이 있었다.
8·15해방 이후 그는 '청전양식'이라 할 수 있는 미점법으로 낮은 산과 언덕을 안정된 구도로 전형화시키기 시작했다. 1950년 에 그린 <금강산 만물상>에서 실질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청전양식은 언덕을 걸어가는 촌로(村老)와 바람에 휘날리는 자잘한 잡목과 초가집을 통하여 순박한 한국적 풍경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굵고 가는 짙은 먹의 획들을 반복하기도 하고 갈필의 가는 필선으로 잔돌을 표현하기도 하면서 그의 독특한 준법(峻法)을 형성했다. 완숙기에 들어가면서 그의 작품은 외진 산골의 적막하고 소박한 풍경과 아주 낮은 언덕의 풍경 속에서 한국적 산야의 평범함을 표현했다. 그는 독자적이며 한국적인 산수화가로서 정선·장승업 이후의 최고의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그의 그림을 평하기를 "한국의 평범한 서민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이룩하고 이를 특유의 한국적 감성과 미의 세계를 정형화시킨 그의 예술적 생명력은 한국화의 한 결정체"라고 했다. 대표작품으로는 <초동 初冬>(1926)·<외금강만물상>(1950)·<모추 募秋>(1965)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881년] 한말 의병장 유지명(柳志明) 출생
1881. 9. 21 전북 전주~1909.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분격해 같은 해 9월 초순경부터 스스로 창의대장·삼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의병모집 격문을 만들어 게시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집했다. 군자금의 확보를 위해 호남의 대부호인 김진사(金進士)의 마름 이성순(李聖順) 외 수십 명에게 도조 수백 석을 보관해둔다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어 군량 징발의 준비를 하고 전라북도 용담군·고산군 및 충청남도 은진군 등지에서 활약했다. 그해 10월 3일 밤 정성일(丁成一)·김치삼(金致三) 등 수십 명을 이끌고 용담군 읍내에 들어가 일본인 2명을 살해하고 친일경찰 정상권(鄭尙權)을 쓰러뜨리고 무기를 탈취해 돌아왔다. 1908년 7월 13일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었다가 탈출했으나, 1909년 1월 23일 다시 체포되어 같은 해 3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형이 확정되어 순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74년] 한말 외교관 이한응(李漢應) 출생
← 이한응
1874. 9. 21 경기 용인~1905. 5. 12.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아버지는 곤양군수 경호(璟鎬)이다. 1892년(고종 29)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897년(광무 1) 한성부주사,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을 지냈다.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런던에 부임했다. 1902년 10월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이 귀국하자 서리공사가 되었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각국에 주재하는 한국 공사들에게 연락하여 재외한국공관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주권 수호에 힘쓸 것을 호소했다. 1905년 일본의 한국에서의 지도·감독·보호를 인정하는 새로운 영일동맹(제2차 영일동맹)을 맺으려는 영국과 일본 간의 비밀외교가 진행되자, 이 조약이 동양 평화를 침해하는 것이라 하여 영국정부에 항의했으나 영국정부는 냉담했고 오히려 일본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그를 축출하려 했다. 이에 제1차 한일협약과 침략적인 영일동맹개정조약에 죽음으로써 항쟁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5월 12일 음독 자결했다. 그의 자결은 국권 박탈에 대한 최초의 자결이었으며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기관에 상세히 보도되어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고종의 특명으로 시체가 국내로 옮겨져 용인에 안장되었다. 내부협판에 추증되고,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66년] 영국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출생
← 허버트 조지 웰스
"어떤 말이 사람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면 어느덧 의미를 갖게 되고 심지어는 진실이 되어버린다." - 웰스
웰스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사회학자·역사학자이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지만 런던의 과학사범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훗날 장편소설을 집필할 때 영감의 원천이 된 낭만적인 과학 개념을 배웠다. 처음 시도한 장편소설은 남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말았지만 그는 곧 모방을 버리고 독창적인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생기 있고 해학적인 문체의 소유자라는 찬사와 함께 과학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소설로 다룬 대표적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895년에 발표한 <타임 머신 The Time Machine>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s> (1898) 등을 비롯한 유명한 공상과학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런던의 사회주의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해 조지 버나드 쇼, 시드니와 비어트리스 웨브 부부 같은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세계인들에게 인류의 문명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일깨우는 활동을 하면서 대중을 위한 역사서 <세계문화사 대계 The Outline of History>(1920)를 써내기도 했다. 그는 세계평화를 위해 인류 공동의 협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브리태니커
[1866년] 프랑스의 세균학자 니콜(Nicolle, Charles-Jules-Henri) 출생
← Charles Nicolle
1866. 9. 21 프랑스 루앙~1936. 2. 28 튀니지 튀니스.
1909년 사람의 몸에 서식하는 이(louse)가 티푸스를 전염시킨다는 것을 발견하여 192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루앙에서 개업하고 세균학을 연구한 뒤 튀니스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1902~32). 재직하는 동안 튀니스 파스퇴르 연구소의 문서보관소(Archives de l' Institut Pasteur de Tunis)를 세웠는데 이는 세균학 연구와 전염병 예방을 위한 혈청과 백신을 생산하는 이름있는 연구 센터가 되었다. 티푸스에 관한 연구영역을 넓혀 이가 전염시키는 티푸스와 쥐벼룩이 사람에게 옮기는 쥐티푸스를 구별했으며, 또한 우역(牛疫)·브루셀라병·홍역·디프테리아·결핵에 대한 연구에도 큰 기여를 했다./브리태니커
[1860년] 쇼펜하우어 타계
← 쇼펜하우어(1855)
1860년 9월 21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사망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했다. 또한 스스로 <우파니샤드>가 자신의 철학체계에서 한 축을 이룬다고 간주할 만큼 인도철학을 부각시킨 최초의 서양철학자였다. 그의 사상은 정신과 이성보다는 직관력·창조력·비합리적인 것을 강조함으로써 니체를 거쳐 물활론·생철학·실존주의·인간학 등에 영향을 끼쳤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현대 심리학 분야에서도 부분적으로 계승되었다. 주요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에서는 인식론· 자연철학· 미학· 윤리학 등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루기도 했다. 그는 독일 철학자로서는 드물게 지적인 글을 쉽고 평이하게 써서 토마스 만 같은 작가들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브리태니커
[1576년] 이탈리아 수학자 카르다노 사망
← 니콜로 타르탈리아의 3차방정식 해법을 도둑질한 오명의 위인 카르다노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 수학자 카르다노가 1576년 9월 21일 사망했다. 카르다노는 니콜로 타르탈리아의 3차방정식 해법을 무단으로 훔쳐 발표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변호사의 사생아로 파비아에서 태어나 파도바대를 졸업하고 유명대학에서 수학과 의학을 강의했으며 파비아 시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도박꾼이고 거짓말쟁이기도 했지만 대수학자였고 점성술을 연구한 자연철학자였으며 의사이기고 했다.
1570년에는 자신의 점성술을 과신, 예수의 생애에 대한 별점을 발표하는 바람에 이교도로 몰려 6개월간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죽을 날을 스스로 예언 그 날짜에 맞춰 자살했던 기인이었다.
카르다노는 그 당시 제1인자 수학자였으나 대수학 저서 ‘아르스 마그나’에 발표한 3차방정식 대수적 해법이 니콜로 타르탈리아의 것을 도둑질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인격에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3차 방정식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가 3차방정식 해법을 도둑질했다는 사실도 함께 배우게 됐다. 그의 주요저서는 ‘산술’ ‘물리학’ ‘천문’ 등이 있다./조선
[1452년] 엄격한 수도사였던 이탈리아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출생
← 사보나롤라, Fra Bartolomeo가 그린 그림, 피렌체에 있는 Museo di S. Marco 소장
1452. 9. 21 페라라 공국 페라라~1498. 5. 23 피렌체.
전제군주들과 부패한 성직자들에 맞서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1494년 메디치가(家)가 몰락한 뒤 피렌체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어 민주공화정을 세웠다. 주요 정적(政敵)은 밀라노의 공작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였는데, 교황은 그를 제재하는 많은 규제조치들을 공포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초기생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페라라에서 니콜로 사보나롤라와 엘레나 보나코르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 미켈레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할아버지는 유명한 의사로서 도덕과 신앙원칙들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사보나롤라는 14세기에 공부한 이 노학자로부터 중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어린시절부터 '이탈리아 사람들의 맹목적인 사악함'을 싫어했으며, 예절·예술·시·종교마저도 타락시키는 인본주의적 이교사상을 참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부패가 널리 퍼지게 된 원인은 심지어 고위 성직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성직자들의 부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475년 4월 24일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서 교양과정 학위를 받은 후 시작했던 의학공부도 접어둔 채 볼로냐에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가입했다. 4년 뒤 페라라로 돌아와 안젤라 수녀원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그는 성서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피렌체에서의 활동
1482년 피렌체로 파견되어 산마르코 수도원의 강사직을 맡은 뒤 그는 높은 학식과 금욕생활로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설교가로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갑자기 계시를 받고 예언적인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1485, 1486년의 사순절에 산 지미냐노에서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며 벌을 받은 다음에야 쇄신될 것'이라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1487년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의 일반학교 교장이 되었고 임기가 끝난 뒤에는 여러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설교했는데, 로렌초 데 메디치는 영향력을 발휘하여 메디치가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인 그를 피렌체로 돌아가게 했다. 1490년 이 운명의 도시로 돌아온 그는 설교를 통해 정부의 폭정을 과감히 비판했다. 로렌초는 뒤늦게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보나롤라의 비판을 막아보려 했지만, 자신의 생명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던 반면 사보나롤라가 한 설교의 영향력은 차츰 커져갔다. 사보나롤라는 임종을 맞은 로렌초에게 강복을 했다. 그가 로렌초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는 문서상의 증거로 보아 사실이 아니다.
로렌초가 죽자 메디치가의 통치도 오래 가지 못하고 샤를 8세의 침략으로 무너졌다(1494)(→ 이탈리아 전쟁). 이보다 2년 전에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가 침략해서 쉽게 승리를 거두리라고 예언했다. 이렇게 그의 예언이 적중하자, 왕 샤를과의 몇 차례에 걸친 협상과 당파들간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보여준 눈부신 활약으로 정부가 바뀐 뒤 그의 권위는 엄청나게 커졌다. 일단 메디치가가 쫓겨나자 피렌체에는 사보나롤라 외에는 다른 군주가 없었다. 그는 이 도시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민주정부를 도입했다. 이로 인해 정치에 간섭했다는 부당한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야심도 없었으며 음모가도 아니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심장부인 피렌체에 이탈리아와 교회의 개혁을 선도할 잘 조직된 그리스도교 공화국, 즉 신국을 세우기를 원했다. 이것이 그의 모든 활동의 목적이었다. 그가 얻은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찬란하지만 부패한 르네상스의 수도(피렌체)가 기적처럼 변하여 당대 사람들에게 마치 낙원을 미리 맛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정치적 음모
사보나롤라의 승리는 너무 크고 갑작스러워서 질투와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를 반대하여 피렌체에 '아라비아티'(Arrabbiati)라는 한 당파가 형성되었다. 이들 내부 정적들은 강력한 외부세력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세력은 밀라노의 공작과 교황으로서 이들은 프랑스 왕에 맞서 신성동맹(神聖同盟 Holy League)에 가담한 상태였고, 피렌체가 이 동맹에 가담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사보나롤라라고 보았다. 피렌체가 이 동맹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확실히 선언한 뒤, 1495년 7월 21일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서한을 보내 그가 이룩한 기적적인 업적들을 칭송한 다음 로마로 와서 직접 예언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교황은 부패한 알렉산데르 6세였는데 거기에 함정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으므로, 사보나롤라는 병을 핑계로 로마 여행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납득한 듯했으나, 9월 8일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과 사보나롤라의 정적들로부터 압력을 받고 2번째 서한을 보내 이번에는 칭송 대신 비판을 퍼부었다. 그에게 볼로냐로 가라고 명령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사보나롤라는 이 기이한 문서에 대해 그 안에 나타나는 18개 이상의 오류들을 지적해가며, 예의는 갖췄지만 단호한 태도로 답장을 써 보냈다. 10월 16일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설교를 금지하는 다른 서한을 보냈다. 교황 자신도 솔직히 고백했듯이 이를 강요한 것은 신성동맹 때문이었다. 몇 달 뒤 1496년 사순절이 가까워지자 알렉산데르 6세는 피렌체 사절들에게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구두(口頭)로 설교금지령을 철회했다. 따라서 사보나롤라는 그가 남긴 설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영향력이 큰 ‘아모스’ 설교를 할 수 있었으며, 이 설교에서 새로운 열정으로 로마 교황청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구설수에 오르던 교황의 사생활을 언급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교황은 이 일로 격분했다. 신학자협의회는 이 탁발수사(사보나롤라)가 한 말 가운데 비판거리를 찾지 못했고, 따라서 사보나롤라는 사순절이 지난 뒤 로마로부터 더이상 항의를 받지 않은 채 〈룻기〉·〈미가〉에 대한 설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사보나롤라의 권위가 커지자 교황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제의함으로써 자기 밑에 두려고 했으나 그는 "빨간 모자? 나는 피의 모자를 원한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신성동맹과 아라비아티당의 압력을 받아서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1496년 11월 7일 교황은 서한을 통해 사보나롤라가 비카르(vicar)로 있는 산마르코회를 다른 단체와 통합하여 사보나롤라의 모든 권위를 잃게 만들었다. 사보나롤라의 입장에서는 만일 복종하면 모든 개혁사업이 무너지게 될 것이고, 복종하지 않으면 파문을 당하게 될 상황이었다. 결국 사보나롤라는 격렬히 항의하면서도 거역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아무도 서한의 내용을 강제로 집행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496년 강림절부터 1497년 사순절까지 방해를 받지 않고 〈에제키엘〉에 대한 연속 설교를 했다. 그해 사육제 기간에 행정당국은 개인 장신구, 음란한 그림, 카드, 도박용 탁자 등 '헛된 것들'을 불태우도록 했다. 책과 예술품은 그다지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사보나롤라에게 불리한 사건들이 벌어졌고, 피렌체에서도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나쁘게 진전되어 그의 힘이 약해졌다. 아라비아티를 지지하는 정부는 그에게 설교를 하지 못하게 했고, 승천일에는 그를 반대하여 신성모독적인 폭동이 일어나게 했다. 아라비아티당은 로마 교황청에 돈을 바쳤으며 바라던 대로 사보나롤라에 대한 파문장을 얻어냈다. 이 파문장은 비밀리에 작성되었다는 점 외에도 무효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만큼 형식과 내용에 명백한 오류들이 있었고, 교황은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피렌체 정부는 무모하게 교황이 이 파문장을 공식 철회하도록 했고, 이에 따른 정치적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한편 사보나롤라는 연구와 기도에 전념하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교황청 측에서 피렌체가 신성동맹에 가입하면 그에 대한 반대를 거두어들이겠다는 비열한 제안을 하자 1498년 사순절에 다시 연단에 서서 〈출애굽기〉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는데, 이 설교를 끝으로 그는 강단 및 인생과 작별했다. 그의 설교로 피렌체 시가 위협을 당하자 그는 곧 입을 다물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고 다만 공의회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방법을 택하려 했으나, 교회에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판단으로 제후들에게 보내려고 이미 써놓았던 편지들을 그는 불태워버렸다. 일단 이 길이 막히자 남은 것은 순교뿐이었다.
재판과 처형
그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다혈질이었던 프라 도메니코 다 페시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사건은 극에 치달았다. 그는 사보나롤라의 파문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불을 통한 신성재판으로 시비를 가리자'고 요구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문명화된 이 도시의 관리들과 시민 전체가 마치 이 신성재판만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잔인하게도 이 야만적인 실험을 권장했으며, 오직 사보나롤라만 반대했다. 법령이 공포되어 파라 도메니코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를 신성재판에 소환하고 누구든 재판을 받는 동안 도망치거나 몸을 비틀기만 해도 지게 될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가 나타나지 않아 신성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법령 규정에 따라 사보나롤라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다음날 아라비아티당은 폭동을 일으켜 산마르코로 몰려가서 경비병들을 물리치고 사보나롤라를 프라 도메니코와 그밖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마치 일반 범죄자처럼 끌고 갔다. 가장 악랄한 정적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그를 심문하고 혹독하게 고문했으며, 어떤 죄목이라도 뒤집어씌우기 위해 심문기록을 위조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교황청 위원들이 로마에서 '판결문을 가슴에 품고'(그 가운데 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왔다. 형식적인 종교재판이 열린 뒤 그는 세속군대에 넘겨져 두 동료들과 함께 교수형과 화형을 당했다. 그가 화형당하던 순간의 기록은 마치 교회 교부들 생애의 한 장면과 같다. 그는 처형대에 오르기 전에 교황의 사면과 전대사(全大赦)를 경건하게 받아들였다./브리태니커
[1411년] 잉글랜드 귀족 요크(York, Richard, 3rd duke of) 출생
1411. 9. 21~ 1460. 12. 30 잉글랜드 요크셔 웨이크필드 근처.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하며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 장미전쟁(1455~85)을 불러일으킨 인물.
이 분쟁의 초기 5년 동안 잠시 정부를 장악했다. 그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아버지였다.
1415년 삼촌인 에드워드를 계승해 요크 공작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1327~77 재위)의 셋째 아들인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인 그는 장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에드워드의 넷째 아들의 후손인 헨리 6세(1422 즉위)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앞섰다. 그러나 1436~37년과 1440~45년에는 프랑스와 노르망디 총독으로서 국왕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동시에 그는 헨리의 정부를 통제하고 있던 위세 높은 보퍼트 가문과 사이가 나빴다. 1447년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죽음으로써 요크가 왕위계승서열 1순위가 되었으나, 보퍼트 가문 사람들은 그를 아일랜드 총독으로 보내 사실상 추방했다. 그는 1450년 영국으로 돌아와 헨리의 정부에서 새로 총리가 된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반대파를 이끌었다.
1453년 7월 왕이 신경쇠약에 걸리자 서머싯의 지원을 받은 야심만만한 왕비 앙주의 마거릿이 섭정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는 지지를 받지 못해 1454년 3월 의회는 요크를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마거릿은 아직 어렸던 자기 아들의 왕위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요크를 증오하고 두려워했다. 1454년 12월 헨리가 건강을 회복하자 그녀는 그를 설득해 요크를 해임하고 서머싯을 권좌에 복귀시켰다. 요크는 즉시 군사를 일으켰다. 1455년 5월 22일 하트퍼드셔 세인트올번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서머싯은 전사했고, 요크는 마거릿이 1456년 10월 다시 우위를 차지할 때까지 정부를 장악했다. 양측의 적대 행위는 1459년말에 재개되었고, 1460년 7월 요크의 유능한 부관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노샘프턴에서 랭커스터 가문을 무찌르고 왕을 포로로 잡았다. 그후 헨리는 죽을 때까지 왕위를 지키고 요크는 그의 뒤를 잇는다는 내용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기 아들의 왕위계승권 박탈을 인정하지 않은 마거릿은 북부 잉글랜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를 처치하려던 요크는 웨이크필드 부근에 있는 자신의 성 밖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이듬해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다./브리태니커
[ 668년] 고구려 멸망
백제가 멸망한 후 고구려에 대한 당의 공격에 버티고 있었던 고구려가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내부 분열로 인해 힘이 약해지고 있었고,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구심점을 잃게 되어 666년 이후 요동성이 함락되고,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보장왕이 백기를 들게 되었다. 당은 고구려 점령 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서서히 펼쳤고, 이때부터 신라와 당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 대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귀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는 돌궐이 발흥하였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나제동맹을 깨트리는 한편, 돌궐의 침공에 대항하였다. 돌궐과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고구려는 다시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때 수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하자, 고구려는 항전하였다. 수나라는 598년과 612년에 각각 침공해 왔는데, 두번째 침공 때 을지문덕 장군이 활약하여 살수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수나라는 이 전쟁의 충격으로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도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와도 대치하였다.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이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일단 645년 당 태종의 침공은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자식들의 권력 투쟁이 일어났고, 결국 백제를 멸망시키고 여세를 몰아 침공해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668년 28대 705년만에 멸망하였다.
그 후에도 검모잠, 안승 등의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다. 또한 671년까지, 안시성은 (보장왕이 항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함락당하지 않고 남아있었다고도 전한다. 결국 698년 고구려 귀족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위키백과
그밖에
2005년 한미, 대화력전 지휘통제 임무이전 서명
2004년 미국 피아니스트 겸 가수 작곡가 빌리 조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
2004년 한국-러시아 정상회담, ‘포괄적 동반자관계’ 선언
2002년 러시아 최악의 눈사태로 영화촬영팀 100여명 몰사
1999년 ‘금오신화’ 현존 최고본, 중국에서 발견
1998년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 제4회 서울평화상 수상
1989년 베트남군, 11년에 걸친 캄보디아 군사개입 종식. 철수시작
1982년 김상협 제16대 국무총리 취임
1982년 제23차 세계여성단체협의회 개막
1982년 미국-프랑스-이탈리아, 레바논의 치안회복 위해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파병 결정
1982년 레바논 대통령에 아민 제마옐 당선
1981년 동력자원부, 5차 5개년 에너지부문계획을 마련
1981년 한국탁구, 리비아 국제친선탁구대회 단체전 우승
1981년 한국기계전 개막
1963년 서울서 열린 제5회 아시아 야구대회서 한국 우승
1962년 아르헨티나반란군, 기도대통령의 전투중지령 무시하고 수도 입성
1962년 유엔총회, 쿠바문제로 미국-소련 설전
1961년 유엔군사위원회, 아무 토의없이 한국통일문제 등 차기총회 의제로 채택
1961년 미국 캐네디대통령, 신설 국제개발처(AID) 처장에 국제법 전문가인 포울러 해밀튼 지명
1957년 태국 임시국회, 수상에 포테 사라신 선출
1949년 서독, 민정이양 발표
1948년 유엔총회, 주한 미국-소련점령군 철병안 심의
1947년 대동청년단 결성. 총재 이승만, 단장 이청천
1941년 배(胚)발생 유도를 발견한 독일의 슈페만 사망
1939년 왕조명, 친일 신중앙정권 수립을 성명
1935년 부산방송국(JBAK) 개국
1922년 조선일보, 연중무휴간제 실시
1832년 영국 계관시인 월터 스코트 사망
1374년 공민왕 시역(弑逆)사건 발생
454년 로마 장군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