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종목으로는 세계 최대 스포츠 축제인 2002 한·일 월드컵의 개막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월드컵은 이미 음식문화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 우선 서울의 몇몇 식당들은 서울 상암경기장 부근에서 개고기 시식회를 마련할 예정이다. 이에 질세라 또다른 식당은 비싼 맥주 대신 새로운 맛을 찾는 축구팬들을 위해 개소주 캔을 내놓을 계획이다. 개고기 햄버거와 보신탕, 그리고 말 그대로 개고기로 만든 ‘핫도그’를 선보이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탁월한 사업 수완으로 유명한 일본 기업들은 축구공 모양의 안락의자에서부터 축구공을 응용한 재미난 여성 속옷 세트까지 갖가지 월드컵 테마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한편 세네갈 축구대표팀 지원 업무를 맡은 시즈오카(靜岡)縣 후지에다(藤枝)市 체육진흥과장의 죽음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오카무라 오사무(岡村修) 과장은 월드컵 준비로 인한 과중한 책임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을 택했다.
17회를 맞는 이번 월드컵은 역대 대회들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우선 72년 월드컵 사상 최초로 아시아에서 개최된다. 이로써 아시아의 이색 요리들이 세계에 선보이게 됐을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은 축구 자체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대회 개최에서만큼은 서양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막대한 부가가치가 창출될 이번 월드컵 기간에는 약 1백만명이 경기장을 찾고 수십억명이 TV로 경기를 지켜볼 전망이다. 한편 개최국이 속한 대륙에 우승이 돌아가던 월드컵 전통은 올해로 깨질 것이 확실하다. 지금까지 단 한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유럽 대회에서는 항상 유럽 국가들이, 미주 대회에서는 항상 남미 국가들이 우승했다. 그러나 이번에 개최국으로서 본선 자동 진출권을 획득한 한국과 일본은 16강 진입조차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전례없이 두 나라를 공동 개최국으로 선정한 것은 세계 최대 인구를 보유한 아시아 대륙에서 월드컵붐을 조성하려는 FIFA 관계자들과 스폰서들의 강력한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공동 개최국인 한국과 일본만큼 어울리지 않는 짝도 없을 것이다. 두 나라의 역사적 반목은 일제의 강압 아래 양국이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1876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2차대전이 종식될 때까지 한반도를 강점했고 이후 양국은 줄곧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양국 간에 첨예한 갈등을 초래했다. 그러나 최근 양국 정부는 부쩍 우호 증진을 위해 애쓰고 있다. 특히 일본 국왕은 왕실 혈통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화해 무드 조성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런 새 해빙 무드의 이면에는 수백년 묵은 갈등과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가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들과 달리 한국에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한국에 지기 싫다는 경쟁심리가 있다”고 오라클 재팬社에 근무하는 첨단기술 분석가 스즈키 쓰토무(鈴木務)는 말했다.
한국인들 역시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의 연간 국내총생산(GDP) 7천6백50억달러는 겨우 일본의 4분의 1 수준이지만 한국은 경기장 건설과 보안 대책 및 기타 준비에 일본의 20억달러와 맞먹는 거금을 들였다. 한국은 경기력에서도 일본을 능가하고 싶어한다.
양팀 모두 결승전에 오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경기장에서 맞붙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비해 월드컵 경험이 풍부한 한국은 지금까지 출전한 5번의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 한국팀은 올해 5월 열린 평가전에서 스코틀랜드를 4對1로 꺾고 잉글랜드와 1對1로 비기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어 6월 4일 對폴란드전이나 6월 10일 對미국전에서 승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극 문양의 얼굴 화장에 한국팀의 트레이드마크인 붉은 유니폼을 입은 김도향(24·학생)은 “한국팀의 경기를 보는 동안은 모든 근심걱정을 잊을 수 있다”며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하게 돼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경쟁은 외국 손님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경쟁일 것이다. 거기에서는 한국이 낙승을 거둘 것 같다. 서울의 많은 택시들은 최신 원격 통역시스템을 설치했다. 이 시스템은 뒷좌석에 앉은 외국인 탑승객에게 영어 등 해당 외국어로 길안내를 하고 관광 명소들도 소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의 자세는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기보다는 방어적이고 고압적인 모습이다. 지난주까지도 일본 TV에서는 일본 경찰이 유럽인 취객들의 난동에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난동 진압 훈련을 장시간 방영했다.
일본을 찾는 대다수 외국 축구팬들은 기차역에서 경기장까지 이동하는 동안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또 일단 경기장에 도착하면 ‘월드컵 대회를 방해할 소지가 있는… 특정 정치·이념·종교를 선전하는 내용의’ 피켓과 응원용 색종이 등이 포함된 반입 금지 목록을 만날 것이다.
광고대행사 랜도 어소시에이츠 재팬社의 가와다 가즈모토(川田一元) 사장은 “일본은 월드컵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며 “일본은 이번 대회를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일본을 홍보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틀린 철자들이 많은 수많은 영문 표지판들이라도 손봤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테러리즘에 대한 우려는 당연한 것이다. 이번 월드컵은 9·11 테러사건 이후 개최되는 최초의 진정한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다. 축구는 격렬한 세계화의 시대에 걸맞은 21세기 최고의 스포츠다. 콜롬비아와 네덜란드 국민들은 비록 자국팀의 출전이 좌절되긴 했지만 월드컵 기간 내내 TV 화면 앞에 눌러붙어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는 전세계를 사로잡는 마력이 있는 만큼 특유의 안전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 해도 아랍인처럼 보이는 20대 남성이 6월 1일 삿포로(札幌) 거리를 걷는 모습이 아주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날 저녁은 사우디아라비아팀이 독일팀과 경기를 치르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은 9·11 테러범 모하메드 아타처럼 보이는 아랍인들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스킨헤드족 축구팬들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과거에는 월드컵 대회의 안전 유지가 비교적 쉬웠다. 1990년 이탈리아 대회 때 현지 당국은 영국인 훌리건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술을 판매하는 것만을 금지했다. 그러나 해외여행객이 많아지고 국경보안이 허술해진 요즘에는 일본과 한국의 정보·경찰 당국이 보안을 유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일본과 한국에 총 8만5천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이번 대회에 미국팀(이들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분자들에게는 좋은 표적이다)이 출전한다는 사실이다.
테러리즘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달간 FIFA와 제프 블래터(66) FIFA 회장은 금전 스캔들에 휩싸였다. 논란은 지난해 FIFA의 국제 홍보 파트너인 ISL社가 파산하면서 FIFA에 적어도 3천2백만달러의 손실을 안겼다는 블래터의 발표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초 미셸 젠-루피넨 FIFA 사무총장이 작성한 21쪽짜리 비밀 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됐다. 보고서는 블래터가 부패와 부실운영으로 FIFA에 약 5억달러의 손실을 안겼다고 비난하면서, ISL 파산으로 인한 손해액도 그가 밝힌 것의 약 4배인 1억1천6백만달러로 추정했다.
최근 11명의 FIFA 집행위원들은 블래터에 대한 법적인 대응절차를 밟기로 의결했다. 정몽준(鄭夢準) FIFA 부회장은 최근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블래터 게이트’ 때문에 FIFA의 평판과 신뢰성이 크게 훼손됐다”고 비판했다. 물론 블래터 자신의 평판과 신뢰성도 추락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정치’는 지엽적인 것이다. 여느 월드컵 대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대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다. 각종 새로운 기록도 나올 것이다. 우선 이번 월드컵에서는 에콰도르·세네갈·슬로베니아·중국 등 4개국이 처음으로 본선무대를 밟는다.
월드컵 4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한 챔피언 중의 챔피언 브라질이 최초로 우승 후보 2∼3개국에 포함되지 않은 것도 기록이다(물론 브라질의 우승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확실한 우승 후보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다수 축구 전문가들은 지난 대회 우승국 프랑스, 월드컵 3회 우승국 이탈리아, 2회 우승국 아르헨티나 중 하나가 우승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아르헨티나팀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사상 가장 비싼 선수인 미드필더 후안 세바스찬 베론이 이끌고 있다.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팀은 그를 데려오기 위해 이탈리아 1부 리그의 라치오 구단에 4천1백만달러의 이적료를 지불했다.
충고 한마디. 월드컵 때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산낙지 요리를 조심해야 한다. 혓바닥에 기름칠이 충분히 돼 있지 않을 경우 꿈틀거리는 촉수들이 당신의 입천장과 목구멍에 찰싹 달라붙는 통에 곤경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마치 상대팀 수비수들이 잉글랜드팀의 슈퍼스타 데이비드 베컴 선수에게 달라붙듯이). 그럴 경우 당신은 자국팀을 목청껏 응원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