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는 내가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직전에 잠시 살았던,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지금도 내 머리 속에서 포도 송이 처럼
마냥 탐스런 모습으로 새로운 열매를 잉태하고 있는 곳이다.
강원도와 경계를 맞댄 봉화는 오래 전에는 여러 광산이 이 지방의 젖줄 노릇을 했었고 그 이전에는 당쟁의 화를 피하려 낙향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연고로 흔히들 말하는 양반 문화가 엄청 발달한 곳이다. 그래서
봉화 출신인 내 친구넘은 학창시절 장인 어른과 틈만 나면 편지를 주고 받았었는데 온통 알아 듣지도 못하는 한문 투성이였다.
봉화 법전을 지나 태백으로 향하는 31번 국도를 타고 가파른 고개길을 쉬엄 쉬엄 오르노라니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늦재가 우리
느림보 일행을 아주 반가운 얼굴로 맞아 주신다.
신발끈을 고쳐 매곤 이내 길 건너 풀숲으로 뛰어 들어 호기롭게 노상 방뇨를 함 해 본다.
뒤에서 어떤 분이 한쪽 다리를 들라고 해서 실제로 다리를 들어 보니 그 재미도 만만치가 않다.
짐승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할 적에는 꼭 여기 저기에 오줌을 질금 질금거리듯이 사람도 오줌을 갈기면서 소유욕과 정복욕을
느끼며 자신의 나와바리를 인식하는 가 보다.
현대의 정 주영 왕회장님도 심혈을 기울여 거대한 아산만 방조제를 만들고는 매일 같이 그곳을 방문하였었는데 올 때 마다
그 너른 들판 어느 곳에서 대물을 처억 늘어 뜨리곤 션하게 오줌을 갈긴다는 것이다.
이 땅은 내 꺼란 퍼포먼스다.
어제는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귀가를 하고서도 우연히 책 한권을 집어 든게 화근이다.
거의 날밤을 꼬박 새우고도 뒷부분을 못 읽어 봉화로 오는 느림보 리무진 내에서 끝까지 정독한 책은 다름 아닌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다.
작가는 레바논 태생이나 조국이 터키의 식민지가 되자 미국으로 건너 가 2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저서는 불온한
사상서라고 하여 한때는 베이루트 장터에서 불태워지기도 했었는데 그 개략적인 줄거리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칼릴이라는 소년은 수도원에 맡겨져 목동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었는데 성장하면서 성직자라 일컫는
자들은 신자들의 무덤 위에 그 신자들의 뼈로 교회와 성상을 세우고는 끊임없이 어리석고 가난한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선
자신의 기름진 배를 채움과 동시에 권력자들에게 값진 뇌물을 바쳐서 공생 관계를 유지한다는 등 등의 바른 소리만을 일 삼다가
어느 눈보라가 많이 치는 날 수도원에서 내 쫒김을 당한다.
딸 하나만을 데리고 사는 과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슴을 건진 칼릴은 아직도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는 소문을 들은 신부와
권력자의 공모에 의해 포박을 당하여 여러 군중들 앞에서 인민재판을 당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부정과 비리로 범벅이 된 수도원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칼릴의 자기 변론이 여러 군중들의 심금을 울리게 되면서 신부는 사람들로 부터 버림 받게 되고 권력자는
권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결국엔 자살을 하고야 만다.
돈과 욕심이라는 두 물건은 참으로 뿌리치기 힘든 아름다운 늑대의 유혹이다.
구교라 불리우는 캬톨릭은 막판에 가서는 천국행 예매표 꺼정 팔아 치우다가 칼빈 루터에 의해 종당에는 종교 개혁이라는
불벼락을 맞으며 개신교가 득세를 하게 되는데 결국은 민심이 등을 돌렸다는 뜻이다.
지금도 세간에서 하는 말이 하나님 마져도 잘 모르시는 일이 몇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첫번째가 예수회라는 캬톨릭 단체의
어마 어마한 재산 규모란 것이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그 시절에는 장원 제도란 것이 있었다.
대부분의 땅은 귀족들이나 사원에서 독식을 하곤 어리석고 가난한 백성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주린 배를 움켜 안고는 힘든
노역에 시달리는 것이다.
부의 집중은 비단 캬톨릭 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온 나라가 성전이다 대작 불사다 머다 하여 몸살을 앓고 있다.
거대한 성전과 대규모의 법당 건립은 오케스트라의 원리와 동일하다.
오케스트라는 여러 종류의 악기와 함께 수 없이 많은 연주자가 단상에 자리를 하는데 다른 뜻이 없다.
이는 큰 소리를 내기 위함이다.
한번의 연주에 많은 표를 팔기 위해선 우선 극장의 규모가 커야 하는데 극장의 규모가 크다 보니 큰 소리를 내어야 하고 큰 소리를
낼려고 하니 많은 연주자와 악기가 당연 필요한 일일 뿐이다.
거대한 성전과 대규모의 법당에 몰려 드는 신도들이 빈손으로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신도들이 앉을 자리가 많은 성전이 결국엔 수입도 클 수 밖에 없는 노릇이어서 만부득 크게 지을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왕자의 신분을 버린 싯달타는 6년의 피나는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는 49년 이라는 세월 동안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셨지만 평생을 누더기를 입으시며 따르는 신도들과 함께 풍찬 노숙을 하셨고 또한 누더기로 광야를 배회하셨던 예수님도
자신에게 바칠 재물이 있으면 가난한 이웃에게 그 은덕을 베풀라고 하셨지 으리 으리한 성전을 지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코딱지 만한 성전을 지어 놓고는 그곳에 와서 사시라고 간청을?
칼릴 보다 약간은 늦은 시기인 1936년 경에 조선일보에 사하촌이라는 첫작품을 올리며 문단에 등단한 이가 낙동강 파숫꾼이라고
불리우는 동래고를 나오신 요산 김 정한 선생님이신데 꼬장 꼬장한 강골의 선비이시다.
수라도, 모래톱 이야기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신 요산 선생님의 사하촌이라는 작품 또한 묘하게도 탄압의 주체가 수도원에서
사찰로 살짝 바뀌어 진다.
사찰 밑에 형성된 촌락인 사하촌 주민들이 일제와 손을 잡은 스님들의 감언 이설에 넘어 가서 자신의 토지와 여타 재산들을
사찰에 시주를 하곤 그때 부터 주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면서 갖은 어려움을 겪게 되다가 결국엔 모든 주민들이 사찰로
몰려 올라 간다.
물론 작품에선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임진 왜란 때 선조가 야밤에 백성들을 버리고 몽진을 하자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을
불태웠듯이 사하촌 주민들도...
오줌 한번 갈겼을 뿐인데 어느새 느림보님들은 산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리신다.
겨우 두 분의 모습만 보이신다. 후미를 맡으신 강 대장님과 으 으 음 우리 느림보에서 그 빼어난 미모와 바비 인형 처럼 쭈욱
뻗은 다리에 금방이라도 스파크가 일듯한 예리한 지성미, 이도 모잘라 강인한 기개 마져 겸비하신, 오글거리는 병아리 떼 속에서
우뚝한 모습의 오리 같으신, 산행을 하는 날 뵐 때 마다 어김없이 내 자그만 새 가슴을 핑크빛 연정으로 깡그리 물 들이고야
마시는 이팔 청춘의 허교장님. 흐 흐.
급한 경사길을 한참을 헤매이다 보니 어느새 산릉길이 보이긴 한데 사람 키 보다 높은 산죽군락이 마치 삼거리 주막집 월매년
치모처럼 빼곡히 우거겨 있다.
지리산 바래봉 산죽은 깜도 아닌 울울창창한 밀림길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마냥 허부적 거리며 오르고 또 올라 본다.
이런 일을 부모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아마도 지랄 발광을 하면서 몬하겠다고 난리를 쳤을 터인데 사서 고생을 하는 이내
심사를 나 또한 알 길이 없다.
어제는 일도 늦게 끝났지만 효자촌에 사는 살믄 개고기 같은 친구넘이 한사코 모가지를 비트는 바람에 술이 떡이 되어 산행
후기를 올리지 못하였고 지금은 또 강원도 고성으로 출장을 가야 됩니다.
마무리 후편은 출장을 다녀 와서 늦은 밤이라도 필히 올릴 것을 약속 드리면서 이만
후편은 제가 사모하는 허교장님과의 현불사 알탕 데이트가 흥미 진진한 모습으로 지둘리고 있습니더.
탄천변에서 로우 랜드 고릴라 돌삐 드립니다.
첫댓글 돌삐님 사무가 바쁘셨군요..)....
산행이 끝난 수요일부터 돌삐님의 산행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애독자님들을 위하여
수고스럽지만 숙제를 빨리 해주셨으면..하는 압력이 들어오곤 합니다.
아직도 차안에서 책을 읽으실만큼 정정하신(
돌삐님께 존경의 예를 바칩니다.
후편의 재미난 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아름다운 영혼의 순교자, 칼릴 지브란....................책장에만 있네요.....내일부터 읽어 봐야겠네요.......(재활용 때 주워온거라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