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257 (7권 5. 김홍신. 펌글)
무초 스님은 참선에 들어가기 전에 언제나 그런 말을 했다.
약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자는 결코 강자가 아니며 강자는 관용이 없으면 비열한 자라는 걸 일깨워 주곤 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의 강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세상은 강자가 없지. 세상에 나가 보면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깔고 뭉개려 들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짓누르고 쥔 자가 못 쥔 자를 괴롭히고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무시하고....
육체적 강자는 많아도 진정한 강자가 아니며 정신적 강자는 참으로 드물지.
그러나 눈을 똑바로 뜨고 보면 의외로 강자가 많다네.
남모르게 이웃을 도와 주는 사람도 있고 어려운 이들에게 힘을 주는 이들도 있지.
자기 갈 길만 묵묵하게 가는 사람들도 많다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개가 보통 사람이지. 평범한 사람들 있잖은가.
길거리에서 마주치고 시내버스 속에서 부딪치고 공중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목욕하는 그런 사람들 말일세.
그렇다고 배우고 돈 있고 여유만만한 사람들이 모두 엉터리라는 얘기는 아니지.
그들 가운데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잡배들이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보면 어지럽지.
아무리 힘이 있는 배경 좋고 가질 것 다 가진 자들이라도 관용이 없는 자,
젊은이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자, 그들에게 힘을 과시하는 자,
힘 없는 자와 같이 대거리하는 자, 약자를 우습게 보는 자들이야말로 이 땅의 미래를 망쳐먹을 자들이지.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게나. 부처님이 무슨 힘이 있었나?
예수님이 무슨 힘이 있었나? 그분들이 아니라도 좋네.
역사에 남은 자는 힘 있을 때 관용을 베푼 자들이며 언제나 약자 편이 되어 준 자들이지.
전쟁을 통해 영웅처럼 대접받는 사람들도 자기네 백성만은 끔찍하게 아꼈기 때문에 추앙받는 걸세.
역사 기술이 어차피 인물과 사건 중심이라 하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보게.
이 땅의 역사에 진정하게 살아남을 자가 누구인가를. 이완용이처럼 역사에 남는 건 참으로 쉽다네.
아무리 하찮은 주먹이라도 폭력은 폭력일세. 그러나 폭력이 아닌 정당한 권리일 때가 있다네.
진리와 진실과 정의와 사랑을 지키려고 할 때일세. 항용 폭력을 행사하며 누구나 변명을 하지.
비열한 강자들 틈에 결코 끼여 들지 말게. 혜안이 필요하지.
입으로 떠드는 애국자가 되지 말게. 형식을 갖추고 체면치레하는 사랑도 하지 말게.
그리고 양심이 시키는 일만 하게. 나는 완벽을 요구하지는 않지.'
"두 번째로 반가운 소식이다."
내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뭘 믿고 까부냐?"
김인덕이가 제법 호기있게 나왔다.
"내가 내 주먹밖에 믿을 게 있겠냐. 슬슬 덤벼 보시지 그래?
먼저 주먹을 뻗으시라 이 말이다. 인정사정 보지 말고 능력대로 쳐보시지?"
"정말, 이게...."
녀석은 주먹을 들어 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갔다.
"얘들아!"
녀석이 소리지르기 전부터 사장실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사내들의 얼굴이 유리창 너머로 드러냈다.
우리가 소리를 높여 떠들 때부터 사내들의 눈치는 미심쩍게 보였다.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몰래 에워싸도록 훈련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봐, 김인덕 동지! 얘들 가지곤 안 되겠네. 힘깨나 쓰는 애들 없나?"
"저 새낄 팍 꺾어 앉혀 버려!"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소리쳤다.
그의 손엔 인쇄판 앉힐 때 쓰이는 끝이 뾰족한 망치가 들려 있었고 다른 녀석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연장을 들고 있었다.
"형씨들, 먹고 살기 힘들겠네. 연장 가지고 사람 잡으려면 며칠 고민쯤은 해야잖아?"
문을 밀고 나서면서 나는 가장 멀리 있는 녀석부터 공중회전으로 걷어찼다.
녀석의 손에 기분 나쁜 무기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나뒹굴었다.
그 옆에 내가 제일 기분 나빠하는 연탄집게도 나동그라졌다.
숨 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사내들을 차례로 바닥에 눕히고 손바닥을 털었다.
얼굴이 금세 굳어 버린 김인덕이를 향해 나는 씩 웃었다.
"김됭지, 김됭지는 애들을 목욕이라도 시켜서 덤비게 만드소.
주먹질하고 손 씻게 하는 예의는 도대체 어디서 배우셨소? 이놈의 존경하는 학교 동문놈아."
"장형, 우리 말로 탁 까놓고 합시다."
"왜 얼굴이 그렇게 누렇게 떴냐? 좀 당당하시잖고. 뒤가 든든하다고 했잖아. 뒤가 얼마나 든든한지 좀 보여 줘라."
"뒤는 무슨...."
"이자식아, 사내새끼가 한번 뒤를 보여 준댔으면 보여 줘얄 거 아냐! 치질 걸린 거라도 내놔라."
"장형...."
김인덕은 금방이라도 무릎 꿇을 자세로 말했다.
"뒤로 돌아라."
"장형.... 제발...."
"인쇄기에다 집어넣어서 네 상판대기에다 음란한 사진 박아 대기 전에 뒤로 돌아라.
금방 네 눈깔로 봤지? 한 방이면 너를 저렇게 빨간 잉크 만들어 버린다는 걸."
"장형, 압니다. 내가 그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걷어찼다.
녀석은 치질 수술 받은 놈처럼 어기적거리며 몇 발짝 걷다가 고꾸라졌다.
"일어나라, 그리고 뒤로 돌아라."
녀석은 기가 질렸는지 돌아섰다.
"허리띠를 풀어라."
허리띠를 조심스럽게 풀고 뒤를 흘끔 돌아다보았다.
"바지를 벗어라. 어서!"
사내가 엉거주춤 바지를 벗었다.
"구부려서 나머지도 벗어라."
별수 없이 사내는 시키는대로 팬티를 벗었다.
엉덩짝이 드러났다.
"임마, 뒤를 봐도 별거 없잖아."
"이러지 마시고 말씀으로 하시죠."
"그래 말씀으로 하자. 구린내 풍기며 그 꼴로 살고 싶으면 이 짓을 계속해라."
"그만두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대로 있어라. 내가 네 잘생긴 뒤를 보면서 옛날 얘기 한마디 하마."
"예."
"내 어렸을 때 얘기다. 어린 촌놈이 극장 구경은 해야겠고 돈은 없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개구멍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극장에 개구멍이 많았니라. 밖에서 퍼내는 변소였기 때문에,
변소 속에 오물이 적을 때는 돌멩이를 던져 발판으로 삼고 들어가기도 했고,
창문 틈의 쇠창살로 머리통만 들어가면 기를 쓰고 빠져 나갔니라.
어때! 엉덩이 까고 구부린 채 옛날 얘기 듣는 맛이?"
"......"
녀석은 대꾸하지 않았다.
바닥에 나뒹굴었던 녀석들은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얌전하게 주저앉았다.
저희들의 두목이 엉덩이를 보인 채 구부리고 있는 모습과,
그 뒤에 내가 팔짱을 끼고 서있는 모습을 번갈아 보며 사태를 짐작한 탓이었다.
"그런 재미로 극장 구경을 심심찮게 다녔지만 더러 걸렸니라.
걸리면 잡혀 들어가서 알밤도 맞고 따귀도 빌려 주고 후레새끼란 소리도 들었다.
싹수 노란 놈 취급도 받았고 학교에다 연락해서 퇴학시킨다는 엄포에 눈물을 찔찔 짜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고약한 사람이 있었지. 극장의 간판 그리는 아저씨였다. 듣냐?"
"예."
"이 장면을 사진 한 방 박아 뒀다가 네 가문에 가보로 보관해도 괜찮기는 하겠다만.... 사진기 없냐?"
"예, 없습니다."
"역사적인 이 순간을 놓쳐서 너는 참 불행한 놈이다. 옛날 얘기를 마저 끝내자.
간판 그리는 아저씨한테 잡히면 극장의 무대 옆으로 끌고 간다. 거기가 간판 그리는 방이다.
페인트통이 어지럽고 색깔 진한 붓이 어지러운 속에서 나는,
이동이발소에서 머리 깎는 놈처럼 꼼짝 못한 채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고,
간판 그리는 뼁끼장이는 내 얼굴에다 시뻘건 페인트로 글씨를 멋드러지게 써 줬다.
이마 한복판에 큼지막하게 축이라고 쓰고 오른쪽 볼에다는 개 자, 왼쪽 볼에다는 구 자, 턱에다는 멍 자를 말이다.
축, 개구멍이 되지. 어떤 땐 빡빡 깎은 머리에다가 토인들처럼 색색깔의 페인트로 범벅을 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다음에 뺑끼장이를 내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극장 주인이 돼야지 하고 포부를 크게 가진 적도 있었니라.
페인트가 마르면 뼁끼장이가 극장 문 앞까지 데려다 준다.
사람들이 키들거리며 웃는 속을 헤쳐서 집까지 오면 우리 아버님께서 날려놓고 치셨다.
어머님은 그것도 내 자식이라고, 아프리카에서 금방 데려온 놈같이 생긴 나를,
석유를 쏟아붓고 박박 문질러서 조선놈 만들어 주셨고,
미처 지워지지 않은 건 빨랫비누 묻힌 수세미로 빡빡 긁어 대서 살갗이 벗겨지기도 했었다."
김인덕이는 어째서 엉덩이를 까 놓고 이런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짐작은 하겠지?"
"잘 모릅니다."
"너도 아이큐를 집에다 두고 다니냐?"
"아닙니다. 백 십 칠...."
녀석은 엉겹결에 대답을 했다가 뒤늦게 내 말뜻을 알아차리고 엉덩이를 꿈틀거렸다.
"오늘부터 당장 이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처벌을 가볍게 할 수도 있다."
"약속하겠습니다. 진실입니다."
"좋다. 너 키 큰놈, 너 말야. 거기 가서 인쇄 잉크통하고 붓 가져와라."
키 큰 녀석이 다리를 절며 쫓아가서 빨간 색깔과 검정 색깔의 페인트통을 가져왔다.
"오늘사 내 소원 푸는구나. 뼁끼장이 아저씨가 나도 돼 본다 이 말이다.
잔소리하면 잉크를 아가리에다 처넣을 테니까 그대로 눈 감아라."
김인덕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엉덩이에다가 빨강과 까만 색깔로 글씨를 써 내려 갔다.
"임마, 난 친절한 사람야. 여기다 이렇게 썼다. 축, 나는 뒤를 봐도 별볼일 없는 사람. 됐냐?"
"......"
나는 구부린 녀석의 얼굴을 들고 다시 붓을 들었다.
녀석은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내 친절 본위는 알아 주는 사람이 많다. 축, 음란서적, 가짜 상표, 배경 센 사람, 이렇게만 썼다.
더 쓸데만 있으면 평소에 닦은 문장 실력을 써먹을 텐데 이쯤 했다.
그리고 머리칼을 빨강색으로 좀 바꿨으니까 현대 감각에 맞게 놀기 바란다.
어이 큰 친구, 이리 와서 부채질 좀 해. 빨랑 말라야지."
키 큰 녀석이 신문지로 부채질을 하는 사이에 나는 담배 한 대를 천천히 피웠다.
"이제 나가자."
"장 형, 제발....."
나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끌고 지하실을 나섰다.
"하라는대로 다하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세요.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예배당도 다니냐?"
"예."
"할 건 다하네, 이 친구. 하나님이 웃겄다. 하나님 웃기면 코피 터져 임마."
"저를 믿어주십쇼. 싹 청산하겠습니다. 불이라도 당장 지르라면 지르겠습니다."
"임마, 기계와 종이와 여러가지는 우리나라 재산이다. 네 맘보만 고치면 용서야 쉽지.
저쪽 동네까지 한 바퀴 조깅하고 와라. 그리고 약속을 지켜라."
"예."
녀석은 정신없이 뛰었다.
'하니님, 사람 좀 그만 웃기쇼.
그러다 코피 터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