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열리면 무대에 맹수조련사가 등장해 관객에게 다양한 동물들을 소개합니다. 그런 다음 이제 ‘여성의 원형’인 뱀을 보여주겠다고 말하는데요, 그가 소개하는 뱀은 바로 룰루(소프라노)입니다. 이 부분은 프롤로그에 해당합니다.
1막은 보건위생국 참사관 골 박사의 집입니다. 박사의 아내 룰루는 신문사 편집장인 쇤 박사(바리톤)와 혼외관계를 맺고 있죠. 하지만 룰루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테너) 역시 룰루에게 빠져 있습니다. 귀가하다 화가와 룰루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 룰루의 남편은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쇤 박사는 룰루에게서 벗어나려고 룰루를 화가와 결혼시킵니다. 화가가 결혼생활의 행복에 흠뻑 젖어있을 때, 과거에 룰루를 데리고 있었던 건달 쉬골히(베이스)가 돈을 얻으려고 찾아와 체조선수 로드리고(베이스)를 룰루에게 소개합니다. 한편 유력인사의 딸과 결혼하려는 쇤 박사는 룰루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그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화가의 질문에 박사는 룰루와 자신의 관계 및 룰루의 과거를 털어놓게 됩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화가는 절망에 빠져 자살합니다.
쇤 박사는 룰루를 쇼걸로 만들어 무대에 서게 해줍니다. 룰루는 쇤의 아들 알바(테너)가 작곡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지만, 극장 객석에 앉아있는 쇤과 그 약혼녀를 발견하자 분개해 무대 위에서 실신합니다. 쇤이 분장실로 달려오자 룰루는 탐험가인 대공이 자신에게 결혼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질투를 느낀 쇤 박사는 결국 룰루가 시키는 대로 약혼녀에게 ‘헤어지자’는 편지를 씁니다.
2막에서 룰루는 마침내 쇤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룰루의 레즈비언 연인 게슈비츠 백작부인(메조소프라노)이 찾아옵니다. 쇤 박사의 아들 알바가 나타나 룰루에게 격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자 아들과 룰루의 관계를 알게 된 쇤은 룰루에게 권총을 주며 자살을 종용하지요. 하지만 룰루는 오히려 그 권총으로 쇤을 쏘아 죽이고 경찰에 체포됩니다. 룰루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백작부인은 희생적으로 룰루의 도주를 도와주고, 룰루는 알바와 결혼해 파리로 떠납니다. 베르크는 여기까지 작곡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답니다.
3막은 프리드리히 체르하가 이어 작곡한 부분입니다. 룰루는 백작부인 행세를 하며 파리의 호화저택에서 알바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탈주범으로 쫓기는 룰루의 처지를 알고 포주인 후작은 룰루를 카이로의 매춘굴에 팔아넘기겠다고 협박합니다. 체조선수 로드리고도 룰루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압력을 가하고, 알바는 주식투자를 했다가 전 재산을 날립니다. 룰루는 체조선수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쉬골히를 시켜 그를 죽여버립니다.
시간이 흐르고, 런던의 허름한 다락방에서 룰루, 알바, 쉬골히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룰루가 매춘을 해 겨우 모두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데 이곳으로 백작부인이 찾아옵니다. 알바는 룰루의 단골손님인 흑인남자와 싸우다가 죽고, 룰루는 유명한 연쇄살인범 '칼잡이 잭(Jack the Ripper)’의 칼에 찔려 죽지요. 백작부인은 룰루를 도우려고 잭에게 달려들었다가 역시 그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둡니다.
12음기법과 음악의 다중적 심리묘사
원작자 프랑크 베데킨트는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난 극작가입니다. 괴테와 하이네의 영향을 받아 문학과 예술의 길을 걸으려 했으나 법관이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식품회사에 취직했지만, 결국 뮌헨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서커스 등의 신체예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비판적이고 대중적 성격을 지닌 카바레 작품들을 집필했는데요, 그의 문학작품들은 시민사회와 인간본성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구하고 있고, 음악적 리듬감과 빠른 템포가 특징입니다. 작곡하기에 이상적인 리듬을 지닌 작품이라는 것이죠. [사춘기], [땅의 정령], [판도라의 상자]가 그의 대표작입니다. [사춘기]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연극으로 공연된 작품이고, [판도라의 상자]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미모의 여배우 루이스 브룩스가 주연한 팝스트 감독의 1929년 무성영화로 유명합니다.
베데킨트는 일반적인 시민사회의 도덕적 잣대로 룰루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부 [땅의 정령]에 나타나는 룰루의 성적 매력과 유혹적 태도에는 면죄부가 주어집니다. 베데킨트는 목적의식으로 남자를 대하지 않는 룰루의 천진하고 순수한 모습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2부 [판도라의 상자]에서 이런 룰루는 결국 윤락여성으로 전락하고 파멸을 맞게 됩니다. 가부장적 사회의 희생양으로 그려지는 것이죠. 아무리 완벽한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여성은 남성의 전리품에 불과하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닐 수 없다고 외치는 남성중심의 사회를 작가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룰루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욕구와 이기심을 위해 철저하게 그녀를 이용할 뿐인 시민사회의 속물 남성들을 다양한 유형으로 독자와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겨운 청소년기를 보낸 작곡가 베르크는 대입자격시험에 실패하고 실연까지 당하자 자살을 기도합니다. 공무원으로 취직했지만 작곡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독학한 그는 쇤베르크에게서 한때 작곡을 배웠지요. 1차대전 중에 입대했지만 몸이 허약해 후방에서 근무했던 그는 이때의 체험을 살려 오페라 [보체크(Wozzeck)]를 구상했습니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고, 베르크는 음악평론가로도 명성을 얻었는데요, [보체크]에서 쇤베르크에게 배운 무조음악과 표현주의 기교를 선보인 베르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2음 기법으로 [룰루]를 작곡했습니다. 한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라이트모티프가 특색이며, 음악으로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다중적 심리묘사를 탁월하게 성취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