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시절을 생명력이 있고 기쁘게 보낼 비결이 있을까? 과학도로서 실험의 감옥에 갇혀있어도, 일 감옥에 갇혀있어도 생명력 있고 기쁘게 지낼 비결이 있을까? 대학원생이 하는 일 속에서 정말 기쁜 순간은 참 드문 것 같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실패가 기본이고, 논문이 채택되는 순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대학원생 뿐일까? 주변을 보면 삶이 너무 반복적이라며 새로운 자극을 찾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남보다 비교우위에서 앞서간다는 것은 그 비결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이미 서울대에 입학하고 한 달이 채 못 되어서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교우위에 서는 것이 삶의 기쁨을 누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행복의 큰 분기점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실제로 입학해보니 참 허무했다. 이제 사람들은 좋은 직장을 목표로 살고 있다. 그렇게 할 때 이 허무함은 반복될 것이 뻔했다. 따라서 대학원 생활에서도 비교우위에 앞서는 것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해답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성경을 보면 실제로 감옥에서 생명력과 기쁨을 보인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찬송하게 된다(행 16:25). 서신서들에서 이 기쁨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기쁨으로 너희 무리를 위하여 간구한다.”(빌 1:4). “그리스도가 전파되니 기쁘다.”(빌 1:18).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골 1:24). 이렇게 영혼들을 돌보는 일, 즉 전도와 양육에 그 비결이 있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이러한 성경 인물들의 모습과 교회 선배들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정말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변 영혼들을 돌보려고 노력하고, 동시에 삶에서 생명력과 기쁨이 흘러나오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인생의 모든 해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를 결단했다. 세상의 모든 문제와 고통의 근본 원인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수 복음을 통해 이 온갖 죄의 영향들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 너무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삶은 힘들었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왜 나를 당장 천국으로 안 부르시는지 기도하게 되었다. 그때 얻게 된 응답은 영혼들을 돌보라는 것이었다(빌 1:23-24). 오늘 갑자기 주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다고 하실 때,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꽃피울 것이고, 어쩌면 각 영역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일, 누릴 수 없는 일이 있어 보였다. 바로 그 하나님 나라에 사람들을 초대하고(눅 16:26-31), 그 일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었다. 살면서 아무리 바빠도 주님과의 매일의 교제 시간과 최소한 영혼 한 명 돌보기만큼은 계속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대학원생 시절에 개인적으로 꾸준히 기쁠 수 있는 이유는 영혼을 돌보려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첫 번째로 가장 큰 기쁨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마 28:19-20)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대학생들을 직접 만나 도와줄 경로는 노방전도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캠퍼스에서 노방전도는 점점 어려워진다. 이러다 보니 오히려 누군가 복음을 들어주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하신 기적이라고 느낀다. 거의 매주 그러한 기적을 경험하며 기뻐할 수 있었다. 더욱이 영혼이 연결되고 정착까지 하게 되면 진짜 그날은 그것 때문에 밤에 퇴근할 때도 잠이 들 때도 한 해를 돌아볼 때도 너무 기쁘다. 매년 그러한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모든 것을 더하시는(마 6:33, 고후 9:8)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논문이 채택될 때마다 정말 주님의 도우심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전도와 양육을 하는 나는 연구에 쓰는 시간이 다른 이들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험을 실수해서 다시 실험했는데 실수한 실험이 오히려 더 좋게 되어서 이 실수의 도움으로 작성하게 된 논문도 있었다. 지난여름, 수련회 기간인 8월 중순에 논문작업을 하지 않도록 6월 말에 미리 다른 학회에 제출할 수 있도록 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막판에 실험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왔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제출할 수 있었고 채택도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정신없이 지나가는 기간에도 뚜렷한 의미가 남는다는 것이다. 너무 바쁘던 기간에 돌보고 있던 대학생 중 한 명이 너무 힘들어하며 밤 열두 시에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상담을 해주었는데, 내게는 그 시간이 그달에 가장 뚜렷이 남은 감사한 기억의 사건이었다.
우리의 정체성은 ‘작은 예수’가 되는 데 있다고 배웠다. 대학원 생활을 하며, 이러다가 뛰어난 박사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싶은 때가 있다. 친구들을 보면 논문을 정말 잘 내는 사람도 있고, 진짜 작은 교수가 된 것처럼 잘하는 대학원생들도 본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곤 한다. 그러나 설혹 박사가 못 되거나 장차 교수가 못되어도, ‘작은 예수’만큼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한 명이라도 더 돌보며 믿음으로 그런 삶을 걸어갈 때, 인내로 기다릴 때,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