飮湖上初晴後雨(음호상초청후우)
수광염염청방호(水光瀲灎 晴方湖) 산색공몽우역기(山色空濛雨亦奇) 욕파서호비서자(欲把西湖比西子) 담장농말총상의(淡裝濃抹總相宜) 넘실거리는 호수 위에서 반짝이는 맑은 햇빛이 좋아라. 가랑비 오던 산색은 비가 내리니 더욱 신기하구나. 가만히 서호를 바라보니 西施의 모습이 떠오르네.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짙게 치장한 모습이 서로 잘 어울리는구나.
瀲..넘칠렴 灎...물결 출렁거릴 염 濛...가랑비올 몽
이 시는 북송의 대시인 蘇東波가 杭州通判으로 재임할 무렵에 쓴, "飮湖上初晴後雨"라는 시이다. 이 시는 중국의 고대 미인 西施와 西湖를 비교한 것으로, 오랫동안 인구에 膾炙되었으며, 서호를 노래한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소동파(1036-1101)는 이름을 軾, 字를 子瞻 또는 和仲이라 하였으며, 46세 이후에 스스로 號를 東波라 불렀다. 四川省 眉山縣 출신으로 아버지 洵, 동생 轍과 함께 "三蘇"라 불리기도 한다. 唐의 韓愈,·柳宗元, 宋의 歐陽修·曾鞏·王安石 등과 함께 唐宋八大家에 속하기도 한다. 당송팔대가란 당나라와 송나라의 뛰어난 8명의 散文家를 말한다.
한유와 유종원은 空疎하고 화려하기만 했던 육조시대 이후의 四六變麗體 문장을 비판하고, 秦漢 이전의 古文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古文運動이다. 이 운동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점차 기 세가 약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표현과 착상의 연구는 물론 오히려 의미전달 마저 어렵게 되었고 , 道德指向的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문학이라기 보다는 道學的 냄새가 짙었기 때문이었다.
그 반동으로 당나라 말기에서 5대에 걸쳐 六朝式 耽美的 散文이 부활했다. 北宋의 天聖期가 되자 구양수가 한유의 문집을 규범으로 하여, 알기 쉽고 유창한 산문을 만드는 혁신운동에 앞장섰다. 이 운동으로부터 소순·소식·소철·증공·왕안석 등 뛰어난 문학자가 배출되었다. 당송팔대가라는 竝稱은 송나라의 眞西山이 처음으로 주창하였고, 뒤이어 唐順之가 당나라와 송나라의 우수한 작가를 이 8명으로 묶어 산문선집 《文編》에 수록했다 그 이후 明나라의 茅坤이 《唐宋八大家文》(160권)를 편집하여 보급하였다.
소동파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였으나, 사람됨이 밝고 도량이 넓었다. 왕안석이 變法을 제창했을 때는 거기에 반대를 했지만, 왕안석이 죽고 난 후에는 지방관으로 전전했던 그는 오히려 왕안석의 靑苗法이 발효된 후에 백성들이 살기가 좋아졌다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왕안석의 반대파였던 재상 司馬光의 面前에서 왕안석을 변호하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소동파는 모든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산문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던 것처럼, 그는 書道에서도 北宋四大家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詩와 詞의 작가로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관리로서의 길은 평탄하지 못하여, 자주 관직을 깍이기도 하고,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그는 두 차례나 항주에서 관리로 있었다. 처음은 熙寧 4년인 1071년 11월에 통판으로 임명되었다가, 희령 7년 7월에 3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 떠났다. 첫 번 째 항주행은 王安石의 新法을 반대하다가 배척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항주에 있으면서도 , 詩를 통하여 줄기차게 신법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黃州의 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나중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 翰林學士가 되었으나,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元祐 4년인 1089년 7월, 두 번째로 杭州知州의 신분으로 항주에 왔다가, 2년 후인 원우 6년인 1091년 6월에 서울로 돌아가 翰林學士承旨, 知制調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정을 비난했다는 죄명으로 해남도로 좌천되었다가, 원부 3년인 1100년에 겨우 사면되어, 그 이듬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常州에서 병사하였다.
소동파가 처음 항주에 왔을 때는, 30세의 나이로 젊고 힘이 넘칠 때였으나, 두 번째 왔을 때는 이미 50세를 넘겼다. 그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다. '항주에 있었던 5년 동안 , 나는 본래부터 항주인이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말은 소동파와 항주의 관계를 잘 나타낸다. 지방장관으로서의 그는 항주 사람들을 위하여 적지않은 일을 하였고, 시인으로서의 그는 호수와 산을 짝으로 삼아,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 중에서 서호에 관한 詩와 詞는 무려 수 백편이 남아 있다. 그의 아우 蘇轍은, 그가 항주에 있을 때, '360개의 寺刹 곳곳에서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는 것이 과장이 아니라고 하였다. 소동파는 물 맑고 산 좋은 항주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詩興을 높일 수가 있었고, 항주와 서호는 소동파의 뛰어난 文才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질 수가 있었다.
소동파의 일생은 비록 험난하였으나, 그는 시종일관 정직하고 선량한 성품을 가졌다. 그는 항주에 있으면서 인재를 선발하여 추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항주통판이 된지 이듬해, 과거를 열어 선비를 얻으려고 하자 조정은 그를 監試에 임명하였다. 그는 많은 관리들이 "裙帶之親" 즉, 처가 덕에 관리가 되었거나, "循權貴之道" 즉, 권세가나 귀족들이 돌아가며 관직에 오르는 것을 보고, 이들이 모두 쓸모 없는 무리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과거시험를 통하여 관직에 선발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실력 있는 학자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재는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근면하게 배우고 꾸준히 독서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항주는 우리나라 동남지방에서 빼어난 인재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고, 시험관들로 하여금 응시자 중에서 "寶玉"을 골라내라고 당부했으며, 선발된 인재는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중용했다. 그의 주재 아래 선발된 인재들이 나중에 유명한 "錢塘의 선비로 禮部의 9인"이 된 사례도 있다. 이들은 모두 소동파로부터 시를 배웠고 훌륭한 관리가 되어 백성들의 칭찬을 들었다.
항주의 민간에는 지금도 "畵扇斷案"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그 말의 유래는 이렇다. 어느 날 소동파가 집안에서 정좌를 하고 글을 쓰고 있는데 綾絹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吳小一이라는 소상인이, 부채를 매매하는 張小二라는 사람을 고소하면서, 능견을 외상으로 사가서 반년 동안이나 갚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소이는 비가 많이 오고 기온이 서늘하여 부채를 팔 수가 없었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고 하였다. 소동파는 장소이가 충직하고 선량한 사람이라 생각하여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소동파는 장소이에게 부채를 가져오게 하고 손수 붓을 잡고 흰 부채에 노송이나 대나무, 바위 등을 그리고 "蘇東波"라는 落款까지 찍어서 장소이에게 가져가서 팔게 하였다. 부채가 모두 팔렸다는 소식을 들은 소동파는 장소이를 불러서 오소일에게 진 빚을 모두 갚도록 하였다. 장소이의 부채집은 유명해졌다고 한다.
소동파는 평복을 입고 자주 민정을 시찰하였고 거리나 마을에서 가난한 집을 찾아가 어려운 점을 묻고 그것을 해결하는 정책을 고민하였다. 그는 당대의 李泌이 만든 六井이 상당 부분 파괴되고 메워진 것을 살펴보고, 보수공사를 진행하여 백성들의 식수난을 해결하였다.
북송의 元祐 4년인 1089년 7월, 소동파는 "江山故國 所至如歸"라는 심정으로 두 번째 항주의 지방관이 되었다. 마침 큰 旱害를 입어서 곳곳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본 시인의 마음은 쓰라리기 짝이 없었다. 그는 구제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강구하고, 대담하게 상소를 올려 항주의 供米의 1/3을 경감해 달라고 하였다. 또 한 僧牒 백장을 다시 내려 주어 거기에서 생긴 쌀로 배고픈 백성들을 구해 주었다. 가을이 지난 후에는 다시 큰비가 내려 전당강과 서호의 물이 넘쳐 항주 부근이 침수되어 농촌이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들은 언덕이나 묘에서 기거하였고 배를 타고 다녀야 할 만큼 水魔는 항주 일대를 괴롭혔다. 소동파는 다시 상소문을 올려 공미의 절반을 경감해 달라고 하고, 정부 보관미 40만석을 풀어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한 편, 대대적으로 義捐金을 모금하여 의료시설을 설립하였다. 그는 관리와 의사들을 파견하여 질병치료에 전념하게 하여 많은 환자들을 구해 냈으며, 각처에서 약제를 거두어 들였다. 소동파의 이러한 노력으로 항주인들은 두 차례의 재해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소동파는 항주 살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지방관으로서 말고 공정했고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이 많았던 덕분이었다.
재해가 있은 후, 소동파는 서호의 수리시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깨달았다. 당시의 서호는 줄뿌리가 모이고, 그 위에 흙이 쌓인 곳에 농작물을 심는 봉전( 田)으로 절반이 뒤덮였다. 따라서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이라도 물을 모아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물 때에는 호수물이 말랐다. 그래서 그는 기회를 보아서 서호의 浚渫作業을 시작하였다.
소동파는 서호의 아름다움을 고려하여 서호를 보존하는 것이 항주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조정에 올린 서호 공사를 바라는 상소문을 통하여 서호가 황폐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 번째 서호가 각종 동식물을 기르는 放生池라는 것과, 둘째 灌漑를 하면 1寸을 放水하여 관하 양쪽에 있는 전답 1,500畝에 물을 댈 수 있다는 점, 셋째 백성들이 먹는 물로서 사용할 수가 있다는 점, 넷 째 배를 띄울 수 있도록 성안의 수로에 호수물을 끌어와야 한다는 점, 다섯 째 호수물을 이용하여 맛이 좋은 술을 담으면, 매년 20여만 緡의 주세를 거둘 수가 있고, 이 수치는 전국에서 가장 많다는 점을 들었다. 이 중에서 첫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는 백성들의 생업과 관련된 것이다.
이 밖에도 "6가지의 서호 공사를 위하여 3省을 동원하는 요청"을 통하여 포괄적인 준비사항을 제출했다. 이 계획서에는 修理, 分界, 違禁에 따르는 經費와 管理 등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財源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100도의 승려들에게 度牒을 발행하여 1,700관의 돈을 모으고, 救災基金을 공사비에 전용하여 인부를 고용하는 한 편,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 봉전의 수확을 마친 후에 봉초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서호는 다시 아름다운 옛 모습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는 봉초와 진흙을 이용하여 남북으로 긴 제방을 쌓아, 서호를 양쪽으로 나누었다. 제방에는 6개의 다리와 9개의 정자를 건설하고,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부용을 길렀다. 이것을 蘇堤라고 한다. 그는 또한 호수 가운데 3개의 석탑을 세우고 석탑 둘레에 다시 호수를 만들어 그곳에 연뿌리를 심었다. 이 3개의 석탑이 나중에 서호십경의 하나가 된 "三潭印月"이다. 소동파의 서호 준설공사와 제방축조에 대하여 당시의 孤山 智果寺 주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찬양하였다.
일조미사수능기(一朝美事誰能記) 백척창애상가마(百尺蒼崖尙可磨) 천상열성당역희(天上列星當亦喜) 월명시하욕청파(月明時下浴淸波) 하루아침에 아름다운 일이 일어난 줄을 누가 기억하겠는가? 백 척의 푸른 언덕이 오히려 다듬어진 것을. 하늘에 늘어선 별들도 당연히 기뻐하리라. 달 밝은 밤에 내려와 맑은 물결에 목욕하리라고.
소동파도 대단히 기분이 좋았던지, 나중에 穎州에 있으면서 서호의 공사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아재전당척호록(我在錢塘拓湖 ) 대제사녀쟁창풍(大堤士女爭唱豊) 육교횡절천한상(六橋橫絶天漢上) 북산시우남병통(北山始于南屛通) 홀량이십오만장(忽 二十五萬丈) 노봉석권창연공(老 席卷蒼煙空) 내가 전당호를 개척하여 다시 푸르게 하였더니 큰 제방에서 남녀가 다투어 노래를 하더라. 가로지른 육교 위에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북산에서 남병산에 이르기까지 걷고 있었네. 갑자기 이십오만 장의 제방이 생기니 오래 된 봉초가 연기가 되어 창공으로 흩어졌구나.
소동파는 또 한 커다란 우환이었던 鹽橋河와 茅山河에 대한 준설공사에 주력했다. 염교하는 호수물을 받아들이게 하고 모산하는 강물을 받아들이게 하여 수문을 만들고 호수물을 모으고 뺄 수 있도록 하여 물이 시가지로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소동파는 서호를 대단히 사랑하여 항주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했다. 그는 항주에 살았던 5년 동안, 서호 주변의 모든 산에 족적을 남겼다. 늘 두 명의 노병을 데리고 용금문 아래의 호수에서 놀다가, 가끔은 호수가로 나와 靈隱寺와 天竺寺 부근을 돌아다니며 산과 호수를 구경했다. 날이 저물면 말을 타고 錢塘門을 지나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당시에 서호에서 유명하였던 고승들인 佛印, 道潛(參寥子), 海月, 辨才 등이 그와 어울려서 같이 놀았다.
서호의 孤山 智果寺에는 옛날부터 돌 틈에서 솟아나오는 샘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參寥泉"이라 했다. 도잠이 그 곳에 머물러 있어서 소동파로부터 參寥子라는 이름을 얻었다. 삼요자는 절강성 사람으로 詩와 詞에 능했다. 그는 초여름 어느 날에 監平湖를 지나다가 연꽃이 핀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풍포렵렵롱경유(風蒲獵獵弄輕柔) 욕립청정부자유(欲立 不自由) 오월감평산하로(五月監平山下路) 우화무수만정주(藕花無數滿汀洲) 바람에 흔들리는 창포가 누가 더 가볍고 유연한지 자랑하는데 똑 바로 서 있고자 하는 귀뚜라미와 잠자리는 불편하기만 하다. 오월의 감평산 아래 길가에는 연꽃이 수도 없이 모래사장에 가득하구나.
소동파는 이 시를 보고 크게 칭찬하고 지과사에서 만나 한 눈에 친구가 되었다. 나주에 소동파가 黃州로 좌천되었을 때, 도잠이 시를 지어 보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식청명도과후(寒食淸明都過後) 석천괴화일시신(石泉槐火一時新) 한식 청명 다 지난 후에 석천 옆의 괴목에는 한 순간 불빛이 새롭다네.
7년이 지난 후, 소동파가 다시 항주에 왔을 때, 다시 지과사로 도잠을 찾아갔더니 도잠은 석천에서 물을 길러서 차를 끓여 소동파에게 대접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한식 다음날이었다. 소동파는 그가 보낸 시를 생각하여 그 우물을 "參寥泉"이라 하였다.
소동파는 친하게 지내던 서호의 고승 辨才와 함께 龍井의 過溪亭에서 놀기도 했다. 북송 원풍 2년인 1079년, 辨才禪師는 나이 82세에 天竺으로부터 용정으로 돌아와 스스로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동파가 龍井으로 찾아가니 그는 소동파를 배웅하느라고 歸隱橋를 지나쳐 버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辨才가 다시 나왔다"라고 소리쳤다. 辨才가 웃으면서 소동파에게 말했다. "杜子美가 말하기를 '그대와 함께 늙는다면, 풍류를 함께 나누리'라고 하였는데 그 것이 나를 이르는 말이구료" 후세의 사람들은 이 다리를 "過溪橋"라 하였고 다리 위에 있는 정자를 "過溪亭" 또는 "二老亭"이라 하였다.
소동파는 서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자칭 항주에 있을 때 1,000수가 넘었다고 하니 서호에 대한 그의 사랑을 알 수가 있다. 그 중에 "밤중에 서호에 배를 타고"라는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고포무변수망망(菰蒲無邊水茫茫) 하화야개풍로향(荷花夜開風露香) 점견등명출원사(漸見燈明出遠寺) 갱대월흑간호광(更待月黑看湖光) 줄창포는 가이없이 물위에 가득하고 밤에 피는 연꽃은 바람결에 향기를 흩날리네. 깜박이는 등물은 멀리 절에서 비치고 다시 달빛이 흐려지기를 기다렸다가 호수빛을 바라보네.
비 내리는 서호를 보며 지은 "6월 27일 누각에 앉아서 술 한잔 먹고 쓰다"라는 다음과 같은 절묘한 시도 있다.
흑운번묵미차산(黑雲飜墨未遮山) 백우도주란입선(白雨跳珠亂入船) 권지풍래홀취산(卷地風來忽吹散) 망호루하수여천(望湖樓下水如天) 검은 구름이 먹빛으로 바뀌었지만 산을 모두 가리지는 못하고 흰 빗방울은 구슬처럼 흐트러져 어지럽게 배 안으로 들어온다. 땅을 휘감고 불어오는 바람이 갑자기 흩어지니 누각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파란 하늘과 같구나.
그는 계절마다 맑고 아름답게 변하는 서호를 그림처럼 묘사하였다. 千變萬化하는 서호를 노래한 "崔準郞과 함께 서호에서 놀면서"라는 다음의 시는 그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하요창호심갱유(夏 漲湖深更幽) 서풍락목부용추(西風落木芙蓉秋) 비운암천운불지(飛雲暗天雲拂地) 신포출수류영주(新蒲出水柳映洲) 여름 장마에 호수가 깊어져 다시 그윽해지고 서풍에 낙엽지니 부용꽃에도 가을이 왔구나. 갑자기 몰려 온 구름이 하늘을 어둡게 하더니 눈발이 휘날리고 새로 난 창포는 물 위로 떠오르고 버드나무는 모래섬에 뒤덮였구나.
소동파의 서호에 대한 시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변화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감성으로 세밀하게 관찰하여, 짧은 순간에 절묘한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여 시에 담았다.
소동파는 만년에 이런 말을 하였다. "나아가서는 백낙천과 비교하기 어렵고, 선현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하다" 소동파와 백거이는 200년의 격차가 있지만 , 공통점이 너무도 많다. 그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잘 이해했고, 특히 항주 사람들에게 善政을 베풀었다. 정치적으로 타격과 박해를 받았으며, 공교롭게도 둘 다 항주로 좌천되어 서호의 준설공사를 했다. 항주를 떠날 때, 백거이는 "天竺山에 가서 돌 두 개만이라도 가지고 싶다"라고 하였고, 소동파는 "천축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구름의 뿌리를 캐다가 가는 곳마다 심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청렴했고, 항주인을 사랑했다. 소동파가 항주에 있을 때, 항주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집에 걸어 두고,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소동파를 위해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소동파가 항주를 떠난 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蘇東波祠"를 세우고, 그가 수축한 긴 제방을 "蘇堤"라고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