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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표현의 요령(要領)
수필을 쓸 때 문장을 서술해 가면서 우리가 흔히 부딪치는 문제는 뭐니뭐니 해도 표현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 표현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문제다. 수필문학이 말할 것도 없이 언어를 사용하는
문학 양식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표현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언어로서
표현해야 문학적인 형상화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즉 표현이란 언어를 통해 대상과
사건의 진상을 이해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표현은 문장이 생명이 된다. 이런 까닭으로
서투른 표현이 오해를 낳게 하기도 하지만, 훌륭한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바르게 인도하게 한다.
이런 표현에는 주로 자연물을 표현하는 경우와 인물의 표현 그리고 사태(事態)의 표현 등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예문을 통해 살펴보겠다.
□ 자연물(自然物)의 표현 요령
여기서 자연이란 천연(天然) 그대로의 상태, 이를테면 자연 그대로의 조화(造化)를 의미한다.
즉 산천초목은 물론이며 자연 현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천지창조 이후 신(神)의 손길
그대로 생성, 소멸하고 사시사철 절기에 따라 변모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 이런 자연 속에
삶을 영위해 가는 인간은 이런 자연과 조화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순리에
적응해 가는 방법일 것이다. 자연은 때로 그 모양 그대로 있는 듯 하건만, 때로는 인성(人性)을
지닌 듯 분노하기고 하고, 때로는 순연한 모습으로 단비를 내려 초목들로 하여금 생장토록
혜택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자연에 대해 곧잘 자연 그대로를 위해(危害)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곤 한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지금 베풀어지고 있다. 어떻든 자연은
우리에게 오직 베푸는 입장에 있다. 변화하는 자연의 풍경이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삶의 활력소를 찾게 하는가 하면, 푸른 하늘이 새로운 기상을 품게 하고, 푸른 바다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갖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은 거짓
없는 자연의 이법(理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기에 수필문학은 이런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정서를 표현하고 그 자연으로부터 삶의 진리를 터득하기도 한다.
이제 구체적으로 수필 작품을 통해 자연을 통한 사람의 진리를 깨닫는 장면을 살펴본다.
① 새벽 안개로 눈 뜨는 가을 지켜보면 가슴속에서 울리는 맑은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
같은 그리움이 밀물 친다. 은빛 파랑이 구슬처럼 반짝이는 녹빛 강물 위로 솜털 구름이 한가로이
비껴가는 한낮의 강둑에 앉고 싶다. 그러면 어둠이 내리는 물빛 하늘 한 켠에 쪽머리진 여인의
눈썹 같은 초승달이 걸리는 강 언저리의 정경들과도 만날 수 있으리라.
강 건너 마을에는 불빛이 하나 둘씩 피어오르고, 그림자처럼 돛을 세운 작은 밤배가 서둘러
귀항하고 있는 강가의 저녁. 그런 강가에 서서 가슴을 열면, 내 영혼도 아름답게 승화될 것만
같은 그리움으로 설렌다.
-안미영의 <가슴 속, 한 줄기 강>에서
② 꽃이 크면 송이 수가 작고, 크기가 작으면 대개 무리 지어 피는데 1년초인 나팔꽃은 타래를
짓지 않고 무수한 꽃송이를 피워낸다. 다산과 조산은 잃어버릴 꽃에 대한 예비이리라. 그들은
거름이 없어도 투정할 줄 모르고 감을 대상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출렁거리는 몸짓으로
허우적거리다가 찾지 못하면 제 줄기를 서로 감으며 하늘을 향한다.
줄기의 가슴둘레를 재자면 꽃밭의 꼴찌를 면하지 못할 것이며 키 재기를 하자면 자를 대기가
민망할 것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사람 가까이에 피는 그는 어린이들의 소꿉놀이
밥상에서 꽃봉오리가 솜씨 좋은 음식이 되기도 하고, 나팔수의 나팔이 되기도 한다.
비바람이라도 치는 날이면 감은 줄까지 흔들려 존재의 위기를 맞기에 모진 바람과 굵은 빗줄기는
나팔꽃에게 불어닥치는 최대의 시련이다. 그래도 그는 하늘을 배신하지 않는다. 해만 들면
기지개를 펴며 꽃봉오리를 맺는다.
-오정순의 <나팔꽃 연가>에서
③ 힘 센 짐승의 등줄기 같은 태백산맥은 불끈불끈 맥박이 뛰듯 푸른 힘줄이 돋고 구름은
산골자기를 타고 흘렀으며 보라색 쑥부쟁이가 길 양켠에서 하늘거렸다.
고한에서 두문동재를 넘어가는 해발 1280M의 산등성이 도로 주변에는 자작나무 숲이 이어져
있었다. 하얀 몸매로 서 있는 자작나무는 스스로 허물을 벗겨내며 성장하였는데 숲의 귀족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유레아의 <자작나무>에서
④ 동해 바다엔 유난히도 모래사장이 많다.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失鄕民)들의 눈물이 모여, 모래라는 결정체를 이루어서
그랬을까.
동해 바다의 몸짓은 몹시도 처연하기만 하였다. 어쩌면 북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워 몸부림치는
이산인들의 서러움이 모여 파도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태고적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동해 바다.
-양미옥의 <모랫벌에 그린 그림>에서
위의 ①은 강둑에서 바라보고 있는 강 주변 모습에 착안하고 있는 자연물의 표현이며, ②는
나팔꽃의 성향을 통한 인간의 삶을 통찰하고 있는 장면이고, ③은 태백산맥 고한에서 만난
자작나무를 통한 삶의 인식이다. 또 ④는 동해안에 모래벌에서 자연을 감상하며 심회를 적은
글이다.
이와 같은 자연물의 표현에서는 대상에 대한 통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상에 대한 피상적
관찰에서 벗어나 대상의 속성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자연물인 대상이
갖는 속성을 통해 인간 사람에 천착하여 대비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만 주제 의식이
분명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본다.
① 서산(西山)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이 없을 것이다.
-나도향의 <그믐달>에서
② 이 부패한 소택(沼澤) 속에 이런 앙징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물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라 무엇을 먹고 사나. 버러지를 먹겠지. 그러나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버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있지 않는다. 저물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떼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를 향하여 군상적(群象的)으로 이동한다. 저렇게 하류로 가다가 또 어쩔 작정인가.
아니 그들은 중로(中路)에서 또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이상의 <권태>에서
①에서는 작가가 그믐달과 보름달을 대비하면서 대상에 대한 관찰의 폭을 넓혀가고 있으며,
인간사에 견주어 삶에 천착하고 있으며, ②에서는 송사리떼의 움직임을 쫓아 예리한 관찰이
진행되고 있다. 즉 송사리의 생태와 생리가 잘 반영되어 있다. 한낱 보잘 것 없는 미물인
송사리에게까지 작가는 미세한 관찰의 시선을 보이고 있다.
□ 인물의 표현 요령
사물의 표현 중에서 특히 인물의 표현은 그리 쉽지가 않다. 인물처럼 복잡다단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얼굴의 생김새도 그러려니와 성격이나 행동, 정서 또는
생각 등 천태만상이어서다. 그러나 아무리 천태만상이라 할지라도 인물의 외적, 내적 특징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 점에 착안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인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도 필요하
겠지만, 그보다는 인물의 행동이나 대화 또는 성격과 관련지어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
요구된다. 아래 예문은 원어민 강사의 인물됨을 표현한 부분이다.
더 고약한 것은'J'가 가끔 군화 신은 다리를 응접 테이블에 얹어 놓고 흔드는 것과 우리가 먹는
물을 먹지 않는 점이었다. 그런 ‘J'가 이해타산 면에는 대단히 밝아서 모처럼 영양보충을 하려고
마련한 우리의 식탁에는 먼저 와 앉아 3-4인분의 고기를 거침없이 먹어 치웠고, 강사료 지급
시간을 앞 당겨 달라고 치사할 정도로 재촉하며 몇 푼 안 되는 십 원 짜리까지 일일이 따져
챙겼다.
초등교사들이'J'에게 회화 연수를 받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예의 바른 선생님 한 분이 ‘J'를
강의 장소에까지 매일 승용차로 모시는 친절을 베풀었는데, 상석에 앉은'J'는 당연하다는 듯,
그 흔한 "땡큐"소리 한 마디 없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기사 취급을 하더란다. 이에 식상한
우리의 선생님은 ’J'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까지 고약하게 느껴져서 더 이상 모시고 다니는 친절을
거둬버리고 말았다.
-신건자의 <영어가 몰고 온 풍경>에서
위의 수필은 원어민 교사와 관련하여 그의 성격이나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미 이 부분적인 문장에서 원어민 교사인 그의 사람됨을 간파해 내기에 어렵지 않다.
길 가운데에 두 다리도 없이 쪼글트린 한 남자가 눈에 띈다. 그는 갈잎처럼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썰매만한 방물차에 기대인 채 쳐다보지 않고 엎드려 있다. 그 남자를 보는 순간 후두둑거리던
빗방울은 우루릉! 하늘이 우는 천둥소리로 변하여 내 가슴을 두드리고 순식간에 목줄기에 감전
되어 울대를 꺽꺽 튕기며 아프게 그어댄다.
내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저 남자를 보는 순간 가슴속 울대가 콱콱 죄인 걸까? 허물어질
듯한 그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비슷하게 느껴져서일까? 소외층에 밀려 서 있는 나의 모습이 저
사람과 동질류로 겹쳐 보여 서러워졌기 때문일까….
-신건자의 <소외감 벗어나기>에서
위의 글은 박물장수의 모습을 표현한 글이다. 집중적인 인물에의 묘사는 아니어도 작가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다리도 없이 엎디어 기어 다니면서 행상을 하는 박물장수에 대한 연민과
함께 자신의 내면의 변화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 사태의 표현에 대해 알아보자.
□ 사태(事態)의 표현 요령
여기서 말하는 사태(事態)의 표현이란 사고, 사건, 잔말(顚末) 등 실제 상황이 적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가 매일 같이 만나는 사건과 사태는 부지기수이다. 이런 현상들은 항상 수필적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수필을 쓰는 이가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의 모든 상황들은 그것이 독자
에게 의미 있는 문학적 소재로서 형상화될 때 하나의 메시지로써 독자들에게 다가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들이 수필적 소재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어서 수필가의 안목에 따라 취사
선택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글을 쓰고자 하는 이는 다음과 같은 사태 표현에 대한 유의가
필요하다.
첫째로 사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분명한 판단과 파악이 요구된다.
둘째로 시각적(視覺的)으로 표현해야 한다.
셋째로 문장 속에 사태를 용해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한다.
밖에서 주눅이 들어 있는 놈을 붙잡아 닭장 안에 집어넣자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담한 광경이
벌어졌다. 기척을 챈 새 장닭이 잽싸게 다가오더니 어름거리고 있는 아비 닭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쪼면서 발길로 세차게 걷어차는 것이다. 맥없이 나동그라진 아비 닭은 궁서설묘(窮鼠齧猫)의
전의조차 잃고 연신 단장의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이리 부딪고 저리 나뒹굴면서 쫒겨 다니는
서슬에 닭장 안은 삽시에 발칵 뒤집어지는 난장판이 되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영락없이
포살을 당할 것만 같아 다급히 들어가서 쫓는 놈을 제지하자, 그 틈을 타서 가까스로 암탉들의
알둥지로 날아올라 납작하니 엎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엎드린 채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진종일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았다. 널브러져 있는 꼴이 갈 데 없는 걸레 조각이다.
-박재식의 <쇠망과 성장>에서(수필집 <<대장닭>>.PP,117-118)
이 수필은 대장닭의 쇠망을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휘하에 모든 닭들을 거느리던
대장닭이 어느 날 급전직하 쇠망해가는 과정과 새로이 대장닭의 지위를 차지한 아들 닭의
성장의 모습이 짐승의 세계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비견하고 있다. 권좌를
승계한 자가 전대(前代)의 은공을 없이 하고 괄대와 핍박을 일삼는 일이 그다지 희한하지 않은
세상에 대장닭의 쇠망과 성장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많은 시사를 한다. 아비닭에 대한 천륜의
법도를 깨고 불효 막급한 횡학을 일삼은 대장닭의 횡포가 바로 이 사회에서도 버젓이 치러지고
있어서다. 도 다른 작품을 보자.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렇건만 때때로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에 초대되곤 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으레 그의 이름이 불려졌다. 그리곤 노래 한 곡을 청했다. 그러면 그는
마지못해 노래 한 곡을 불렀다. 제멋대로 부르는 기가 막힌 그의 노래가 불려질 때마다 손님들은
요절복통했다. 그러나 노래를 불러 그들에게 웃음을 선물해야 하는 그의 슬픔은 한 마디로
통곡이었다. 노래에 대한 그의 한(恨) 맺힌 사연.
그녀는 첫사랑의 여인이었다. 어느 남녀공학의 고등학교. 그는 아리따운 여학생을 사모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와의 만남을 위해 그는 어렵사리 합창반의 일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의 노래는 음치에 가까웠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엉뚱한 음이
튀어 나오곤 했다. 끝내는 사랑하는 여학생의 앞에서 처절한 몰골로 쫓겨나야 했다. 절망이었다.
노래에 의한 첫 시련이자 사랑을 잃은 아픔이었다. 노래에의 콤플렉스. 그 후 그는 평생을 노래에
대한 콤플렉스를 마치 자신의 부적처럼 매달고 살아간다.
-필자의 <노래방 신드림>에서
이 또한 노래와 관련한 한 회사원의 고뇌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같은 사태의 과정은 다음에
올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논리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