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401 묵상글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등 )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저는 양성을 오래 그리고 이것저것 많이 했지만
성소 계발은 청원장을 겸하여 1년 한 것이 전부입니다.
1년 성소 계발을 하면서 기억나는 사람이 딱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입회하지 않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입회하여
저에게서 청원기를 보내고 이제는 저의 도반이 된 형제입니다.
먼저 입회하지 않은 사람 얘기를 하면
그는 계모 밑에서 컸지만 계모가 자기의 친모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계모가 당신이 낳은 자식들과 똑같이 그를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인데
그것을 저를 찾아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물론 충격이 컸습니다.
부모가 원치 않은 그러니까 불장난의 결과로 태어났다는 것과
지금까지의 엄마가 갑자기 자기 엄마가 아니라는 것과
자기가 모르는 친모가 있다는 것 등이 충격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모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한 것이 너무도 고마웠고,
수도자가 되려고 한 이유도 자기도 계모와 같은 사람이 되어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은 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련을 줬습니다.
계모처럼 되고 싶어서 수도자가 되려는 것은 좋지만
너의 출생이 부모의 불장난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요 성소임을 믿게 될 때,
그때 다시 오라고 하며 돌려보냈는데 그 형제는 결국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와 같이 살고 있는 형제도 제가 1년간의 시련을 준 형제입니다.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이 얼마나 큰지,
특히 다른 수도회가 아닌 우리 수도회에 입회하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큰지
이 시련을 통해서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소에 대한 확고함이 얼마나 큰지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정도의 시련으로 자기에게 성소가 없다고 생각하고 팽개친다면
그는 수도원 들어와서도 수없이 성소가 흔들릴 것이고 떠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교만한 사람인지, 겸손한 사람인지.
어려움을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인지, 못견디는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할 것이고 더 나아가 분노할 것이며
그 경우 이 시련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인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 지혜서를 보면 예언자의 적대자들도 이렇게 예언자를 시험합니다.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련이나 시험을 받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시련과 시험을 받고
하느님의 사람답게 시련과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적대자가 시험을 해도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을 것이고 하느님의 사람답게 받자는 것입니다.
앞서 봤듯이 겸손하지도 온유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시험을 받을 때 내가 이런 시련을 뭣하러 받느냐며 거부할 것이고
실제로 수도원 들어올 사람이 아니라면 성소의 시험을 받지 않듯이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시련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대자가 주는 시련일지라도
적대자의 손을 빌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시련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4월 1일 금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요한 7,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가장 놀라운 기적들이 거기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곳의 주민들은 가장 한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 신성의 가장 뚜렷한 증거들을 보고서도 자기 생각은 제쳐 두고 타락한 지도자들의 견해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죽이려고 날뛰다 막상 그분이 자기들 수중에 들어오자 그들이 갑자기 잠잠해진 것이야 말로 가장 놀라운 기적 아닙니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대성당을 위한 돌 하나
날이면 날마다 항구한 미드라쉬를 수행하는 그대의 독방 안에서 텍스트를 그대 삶의 흐름 안으로 육화시키는 인내롭고도 묵묵한 이 작업윷 수행하는 그대의 내밀한 독방에서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몇 가지 대목에 관해서 주석학적 연쇄/사슬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예컨대 시편 119에 대한 팔레스티나 사슐은 오리게네스와 아타나시오. 그리고 디디모스와 에우세비오 등이 각 구절에 붙여놓은 주해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성경을 읽고 있고 그대 지신의 주석을 작성하고 있을 적에, 그대 역시 주석학의 거대하고 살아 있는 사슬의 한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는가?(105)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4주간 성화/일치✝️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27-28장 / 사도 1장
✝️ 1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리옹의이레네오
이단자들을 거슬러
아들이 인간이 되심-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처음부터 하느님 곁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했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말씀은 언제나 사람들 곁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리고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에 따라 말씀은 어느 한 피조물과 결합했다. 그래서 말씀은 고통을 견디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한 인간이 되었다. 이 사실로 그리스도는 이 시간 속에 태어났으므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이 당시에는 단지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을 뿐이란 사실을 앞에서 보여주었다. 그분은 처음부터 언제나 아버지 곁에 계셨다. 그분은 인간이 되어 오시는 작업에서 당신의 인격 안에 인류의 오랜 발전의 과정을 통합하셨다. 그분은 이러한 통합 안에서 우리들에게 구원울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참된 존재에 도달해야 한다. 불순종으로 타락하고 몰릭해 버린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자신을 다시 일으킬 수 없고 승리의 월계관을 성취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 많은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둘을 아들이 해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내려와서 육체를 취하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셨다. 그렇게 히여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이룩하셨다. 사도 바오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의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로 올라갈 것인가?’ 하고 밀하지 말라"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자는 것입니다 - “혹은 ‘누가 깊은 구렁 속으로 내려갈 것인가?’ 하고 말하지도 말라" -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자는 것입니다(로마 10,6 이하참조).(89)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대표 음악가로,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바치는 음악을 수없이 작곡했습니다. 많은 미사곡뿐 아니라, 마태오와 요한 수난곡도 너무 유명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삶은 하느님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11살에 고아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20명이나 두었지만, 절반가량이 자신보다 먼저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자신도 돌팔이 의사에게 받은 백내장 수술로 인한 시력을 잃었고, 수술 후 4개월 후에 뇌졸중으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해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상실과 절망으로 점철된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 뜻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흐처럼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이는 행복보다, 하느님 안에서 보이는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행복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쳐야 할 중대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군중 앞에서 거리낄 없이 자유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적대자들은 이 예수님을 향해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성도 이름도 없이 언제 어디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메시아가 맞다.’, ‘메시아가 아니다.’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 같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들도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기적보다는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맡을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을 굳건히 해서 세상에 떨칠 왕국의 건설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세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주님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절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거대한 경계선은 단어 다섯 개로 표현할 수 있다. ‘내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다(프랭클린 필드).
--------------------
=========================================================
09:30 추가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태어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며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728-29). 이 소리를 듣고 유다인들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랜 역사 안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겨왔고 메시아를 기다려 왔는데 나자렛 촌놈인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은 촌뜨기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간다 할지라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이 확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기도가 모든 것은 해결하는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망을 극복하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예수님상’을 올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나자렛 출신이라 해도 하느님과 함께하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2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악인들이 놓은 덫을 탈출하는 법
오늘은 부활 신앙의 전술적 국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초막절이 가까웠을 무렵 남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당신은 생명의 물이심을 천명하시자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그분을 잡으려 했지만 그분은 무사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분이 자청해서 악인들이 놓은 덫에 제발로 걸어 들어가셔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악인들이 의인에게 덫을 놓자고 음모를 꾸미는 장면이 소개되었습니다. 악인들은 의인이 하느님의 뜻을 거론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습니다. 의인의 질책이 듣기 싫었고 의인의 충고가 고까웠던 악인들은 모욕과 고통으로 덫을 놓기로 했습니다.
구도정신을 지녔던 의인들의 노력 덕분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한국교회는 악인들의 덫으로 박해를 받았던 피어린 역사가 있습니다. 그 발단은 영조와 세자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2백여 년 전 영조가 세자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눈치 챈 노론파 유림들이 여론을 조작해서 영조의 손으로 그를 죽인 다음에, 세월이 더 흘러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정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는 말로 왕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노론은 자신들이 정조로부터 숙청될 것이 두려워 잠재적 정적인 남인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특히 채제공, 이가환이나 정약용 같은 뛰어난 남인 선비들이 정조의 총애를 받게 되자 선제적으로 남인 숙청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는데, 노론 악인들은 천주교로 덫을 놓았습니다.
마침 남인 선비들이 천주학을 공부하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천주교를 전하기 위해 명례방에서 교리 공부와 세례성사 예절을 거행하다가 적발된 사건이 좋은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는 천주교 교리 서적을 얻어서 읽어 보니 그들은 천주를 임금보다 더 높이 공경한다는 것을 알고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교(邪敎)’라고 공격했습니다. 명례방 모임에서 적발된 모양새로는 양반과 중인과 상민이 신분 구별없이 모여 있었던 데다가 남녀도 섞여 있었으므로, 반상(班常)의 신분과 남녀 유별의 윤리도 무시하는 패륜(悖倫)적인 무리라고 비난하는 구실이 더 붙었습니다. 충효의 가치와 신분 질서 그리고 삼강오륜으로 포장된 덫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북경에서 날라온 조상 제사 금지령이 좋은 빌미가 되어 주었습니다. 게다가 불난 데 바람부는 격으로 진산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연루된 남인 선비를 죄다 유배보내거나 죽이는 참극을 벌이는 와중에, 황사영이 교황께 위험에 처한 신자들을 구해달라고 탄원하면서 서양 선박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들통이 나서, 일이 단박에 대역죄로 커졌습니다.
노론 악인들의 박해로 인해 이벽, 약전 약종 약용 등 정씨 삼형제를 비롯한 남인 출신 양반 신자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교(邪敎)’라는 노론의 모함에 대항하여 ‘대군대부(大君大父)’를 가르치는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한 중인, 양인, 천민, 부녀자 등 수많은 신자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불과 십여 명의 강학회 선비들로 시작한 한국교회가 백 년의 박해를 거치는 동안 기록상 2천 명, 구전상 2만 명이 넘는 치명자가 나왔습니다.
이렇듯 악인들의 모욕과 고통을 받으며, 의인들은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주는 자발적 성사모임을 해서 한양 선비 천여 명을 입교시키기도 했고, 박해가 시작되자 새로 입교한 평신도들이 전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섰습니다. 치명자의 유족을 비롯하여 양반 신자 가문에서 해방된 노비 출신 등이 심산유곡을 찾아 교우촌을 건설하여 2백 군데 가까운 신자 마을이 조성되면서 제발로 찾아온 입교자들이 더 늘었습니다. 그러다가 교우 중에 밀고자가 생겨 발각되고 체포되면, 목숨을 구걸하기보다 차라리 치명하여 천당에 가기를 원하여 그 끔찍한 고문을 참아 받았습니다. 그러다 힘이 부쳐서 입술로 배교한 신자들은 교우촌으로 살아 돌아와서는 자책하는 마음으로 자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이전보다 더 열심히 물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박해가 진행될수록 신자들은 더욱 늘어나는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천주교 박해는 반만년에 걸친 한민족 역사상 피지배층이 지배층과 다른 독자적 가치관을 내세워 집단적으로 항거한 첫 사태였으며,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상 가장 크고 오래 진행된 학살 사태였고, 더욱이 칼이나 창도 들지 않고 평화적으로 저항하여 끝내 신앙의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승리한 기적적인 역사였습니다. 이웃 나라를 비롯하여 천주교 박해가 자행된 나라들은 많지만 현재 순교자 성월을 지정해 놓고 해마다 순교정신을 다짐하는 교회는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밖에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복음을 들여오기도 했거니와, 자발적으로 성사를 갈망하면서 피어난 신앙의 의인들이 하나같이 터득한 전술은 악인들이 놓은 덫을 구원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되 결코 신앙과 의로움을 잃지 않고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자원하여 짊어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전술을 활용하시기 때문입니다.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한 기회에 신학교 선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1995년 이집트,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같이 갔었습니다. 1997년 미국으로 유학 온 선배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이제 교구로 돌아가면 쉽고 편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주교님을 도와서 일할 수도 있었습니다. 본당사제가 되어서 공동체와 함께 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배는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하고 삶이 변했던 것처럼 선배도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하면서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교구의 방침에 따라서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성지순례 중에 체험한 것이 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그리고 교구장님의 허락을 얻어서 교구사제에서 미국에 있는 카프친 수도회 사제로 소속을 바꾸었습니다.
선배 사제의 차는 작은 경당 같았습니다. 뒷좌석에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차의 오디오에서는 성시간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니 오랜 시간 운전도 즐겁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장밋빛 미래는 아니었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는 배신자로 취급당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교구를 떠나 수도회로 자리를 옮긴 선배도 예상치 못한 일로 오해를 받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묵묵히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지는 길에 선배는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를 번역한 책을 주고 갔습니다.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건강하게 주어진 소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1981년에 시작된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발현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성모님의 발현이 계속되고 있기에 교회는 공적으로 성모님의 발현지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자들과 사제들의 순례는 허락하고 있습니다. 순례지에서 행해지는 전례와 신심활동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교황특사를 파견하였고, 메주고리예 성지가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6년 처음으로 메주고리예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전례는 거룩했습니다. 손에 묵주를 들고 순례하는 신자들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거룩한 전례와 아름다운 신자들이 만났으니 그곳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 뒤로도 신자들과 함께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은총이 넘쳐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는 다른 성모 발현지의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미사, 묵주기도, 성경읽기, 성체조배, 성시간, 십자가의 길, 화살기도와 같이 적어도 하루에 3시간 이상 기도하도록 요청합니다. 굳은 신앙을 요청합니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며 오직 그분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회개를 요청합니다. 죄로 인해 닫힌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요청합니다.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삶의 변화가 있을 수 없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단식을 요청합니다. 단식은 비단 음식을 포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이기적인 자아를 죽이고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길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 신앙, 회개, 단식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이 됩시다
- 지혜와 선행에 대한 사랑과 훈련, 습관화 -
선인이, 의인이, 현인이 됩시다.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타고난 선인도 의인도 현인도 없습니다. 사랑과 선택, 훈련과 습관에 따라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청정욕은 언제든 좋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평생 성인이 되고자 하는 목표보다 더 좋은 목표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샤를르 드 푸코의 의탁의 기도가 좋았습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진다면
이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바치옵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선인이, 의인이, 성인이 되는 길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문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정성껏 바치면 성인이 됩니다. 선행도 성인도 훈련입니다. 어제 언뜻 발견한, 윤 당선자의 사진과 기사에 모처럼 연민의 마음과 더불어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동밥집에 다녀왔다.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대주교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곳에 손길이 닿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렵고 힘든 분들께 먼저 손을 내밀고 힘이 되겠다. 명동밥집,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내용이었습니다. 타고난 악인은 없습니다. 악은 디테일 안에 숨어있다 합니다. 그러니 마음속 선심善心을 잘 보고 키우는 선행의 선택과 습관화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악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악인이란 말 들어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참 좋은 사람이다’ 찬사를 들으면 싫어할 사람 또한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타인의 칭찬은 아이의 운명을 결정해요.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칭찬을 해주기’, 이것이 제 삶의 모토입니다.”
마침 어제 면담고백 성사차 찾았던 불우했던, 그러나 지금은 행복해 보이나 죄책감에 아파하는 자매에게 드린 격려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부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전혀 불필요한 죄책감입니다. 자매님은 죄인이 아니라 피해자예요! 약하니까 상처와 피해를 당할 수뿐이 없었어요. 하느님께서 좋은 남편과 좋은 자식들 선물로 주셨으니 이제 오늘부터 사순시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더불어 보속으로 써드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 처방전’입니다. 아마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일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이런 말씀의 실행이, 또 규칙적인 고백성사의 수행이 점차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악인들의 삶과 생각에 대한 긴 내용의 나열입니다. 지혜서 1장 서두에 앞서 ‘하느님을 찾고 악을 피하여라’라는 소주제가 선명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하라. 영원히 남으리라.’(시편37,27)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지혜서 서두 말씀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지혜1,1)
어찌 통치자뿐이겠습니다. 참으로 언제나 정의를 사랑하고 주님을 찾을 때 성인입니다. 오늘 악인에 대한 묘사를 보면 평범함을 느낍니다. 새삼 악은 디테일 안에 숨어 있음을 봅니다. 주님을 잊고 수행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본능대로 살면서 허무주의에 자신을 맡겨버리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서서히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순시기 깨어 절제, 극기, 자제의 선택과 영성훈련이 참으로 적절한 처방입니다. 다음은 악인의 뇌까림입니다만 이또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우리의 삶은 짧고 슬프다. 인생의 끝에 다다르면 묘약이 없고 우리가 알기로 저승에서 돌아온 자도 없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몸, 뒷날 우리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지혜2,1-2ㄱ)
바로 이것이 악인의 생각이랍니다. 바로 이런 평범한 허무주의가 악의 온상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섭리의 ‘필연’이 아닌 ‘우연’이란 생각이 도덕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하는 원흉입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지혜2,12ㄱ.19-20)
우리 마음 깊이에는 이런 어둠의 요소도 잠재해 있기 마련입니다. 집단적으로 약하고 착한 이를 왕따 소외시키는 행위에서도 이런 악의 발현을 봅니다. 결론 같은 후반부 말씀이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며 중심을 잡아 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지혜2,21-22)
이어지는 오늘 독서에서는 생략됐지만 다음 인간의 정의가 고무적입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2,23)
특별히 드러나는 악이 아니라 누구나의 평범한 생각이 바로 악의 토양이라니 놀랍습니다. 이래서 악의 평범성이라 하며 식별이 힘든 겁니다. 악이 눈멀게 한다, 바로 무지의 악에 눈멀 때 비로소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이 문제입니다. 참으로 동방영성에서 많이도 강조해온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입니다. 무지에 눈멀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악인입니다. 그래서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요, 하느님께 돌아가는 참된 회개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말 그대로 악에 포위된 고립무원의 곤궁한 처지에 있는 예수님처럼 보입니다. 무지에 눈먼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호심탐탐 기회를 노립니다.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고자 예루살렘에 갈 때도 남몰래 올라갑니다. 이런 악의 무수한 덫과 함정 속에서도 예수님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림 없이 자기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확고불변의 자아정체성에, 신원의식에 있음을 봅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무지에 눈먼 유다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만 하느님은 그분의 때가 될 때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나를 알아갈수록 비로소 무지의 악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성인이, 의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점차 당신의 사람,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다음 시편은 흡사 예수님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아멘.
----------------------------------------------------
=========================================================
10:30 추가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때와 뜻을 따르는 수난의 길 ♣
“예수님께서는 남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한 7,10)
살다보면 한 개인이든 정치집단이든 재벌이든, 종교집단이든 자신 안에 자리 잡은 악과 부정을 감추거나 합리화하려고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 지닌 ‘선’과 ‘진실’을 시기 질투하며 비난하고 왜곡시키는 이들을 만난다. 행복과 기쁨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주기보다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나 자신이 그렇게 처신할 때도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 앞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지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신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악인들, 곧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진 알렉산드리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지혜 2,1) 의인들을 비난한다. 그들은 의인들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2,13) 것에 대해 질투하고 증오한다. 그들은 의인들이 ‘자기들을 성가시게 하고 자기들이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긴 것을 나무라고, 자신들을 상스러운 자로 여긴다며’(2,12-16) 반감을 갖는다. 그들은 악을 버리기는커녕 의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2,14)고 투덜거린다. 그들은 정말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며 하느님께서 의인들을 돌보아주시는지 의인들에게 모욕과 고통을 주어 시험하고 죽이려 한다(2,16-19).
하느님의 의와 선을 시기하고 박해하는 이런 상황이 예수님에게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요한복음 7장에서부터 예수님의 죽음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치 않으셨다.”(1절) 그러나 그분은 초막절 축제 때에 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에서 유다인들을 직접 대면하여 자신의 신성(神性)과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선언하심으로써(7,10. 28) 닥쳐올 죽음을 준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계획이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하느님의 때’를 살아가신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는 분명한 자신의 소명의식과 인류 구원을 위해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경멸하고 시험해보려는 자기 형제들의 반응이나, 증오심으로 가득했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반응에도 굽히지 않고 목숨을 다바쳐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다.
나는 매순간이 하느님 안에서의 호흡이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담긴 ‘하느님의 때’(카이로스)임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목적 추구를 위한 ‘나의 때’(크로노스)에 매여 정신없이 헤매지는 않는가? 신앙은 온갖 어려움과 고통, 반대와 증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참된 가치를 선택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보였던 군중들의 반응, 군인들의 반응, 자신의 위험 때문에 예수님을 직접 변호하지 못했던 니코데모의 태도가 오늘을 살아가는 내 자신과 우리 사회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지혜서의 악인들처럼 하느님의 선을 질투하고 추구하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모르고,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도 바라지 않으며,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2,22) 악의 늪에 깊이 젖어 있음도 알아채지 못한 채 무디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내 목숨을 해치려 할 때 가까스로 피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작정해서 나를 폄하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못살게 군 끔찍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럴 경우 통상 즉시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체로 동태복수법에 따라 처신하든지 아니면 더 센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내세우다 보니, 특히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예식 등을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파기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노기등등하던지, 얼마나 살기가 번득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보다는 위험부담이 조금은 덜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매일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인류 구원 사업의 완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윽고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 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명절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남몰래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또 난리들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끝도 없는 불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도를 넘어선 적개심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비애와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하려고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끝까지 귀를 굳게 막은 그들은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성당으로 파견 받는가, 성당에서 파견 받는가?
오늘 복음의 시기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포도 수확 철에 가을걷이를 도둑맞지 않으려고 초막을 치고 농장을 지켰던 가나안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전통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초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을 되새기는 새로운 축제로 바뀐 것입니다.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친 초막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막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축제는 이렇듯 무언가를 기억하며 그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굳이 시기가 초막절이라 말하는 이유는 초막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남모르게 올라가십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치르시려는 초막절이 그들이 원하는 초막절에는 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수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인데 자신들이 알 수 있는 곳에서 온다면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 떼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야 하는 목자는 양 떼가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와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동의하시면서 결국엔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오셨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그 아버지를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곳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 초막절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영화 ‘안테벨룸’(2022)의 줄거리입니다.
남부 연합군이 운영하는 루이지애나 노예 농장, 노예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말을 누군가 먼저 걸어주지 않으면 말도 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탈출 시도하는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그들의 시체는 화장당합니다.
그들을 도왔던 이든이라는 여자는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장군에 의해 낙인이 찍힙니다.
이든의 친구인 줄리아도 매를 맞아 유산합니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은 꿈이었던 것입니다.
이든은 본래 베로니카 헨리 박사라는 유명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인종차별에 대해 TV 토론 쇼에서 강력한 발언을 합니다.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고 우버를 타고 레스토랑을 나가는데 실제로는 엘리자베스가 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재스퍼가 베로니카를 때려눕힙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내용에서 이든과 흑인 노예들을 부리던 백인 부부였습니다.
베로니카가 눈을 뜨니 다시 과거의 농장입니다.
농장에서 베로니카는 줄리아가 목을 매 죽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분노한 그녀는 일라이에게 그날 밤 탈출할 거라 말합니다.
일라이는 이든과 함께 탈출하려다 아내를 잃은 남자입니다.
사실 현재 노예 생활하는 장소는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이 과거 시대를 재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실제 목화를 따는 흑인들이 납치되어 말도 못 하고 실제 노예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로니카는 다시 한번 오두막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장군의 전화를 훔칩니다.
장군이 베로니카를 공격하는데 일라이가 베로니카를 보호하다 살해당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총검으로 장군을 찌르고 전화기 잠금 해제하고 GPS를 사용해 남편에게 위치를 보냅니다.
베로니카는 그와 다른 병사들을 화장터에 끌어들이고는 불을 지르고 장군의 말을 훔쳐 타고 나갑니다.
FBI가 들이닥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 장소를 부수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납치되어 온 흑인들은 이 집단이 너무 무서워 조금씩 자신의 신원을 잊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적어도 생존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로니카만은 자신이 갇힌 곳에 딸이 그려준 그림을 새깁니다.
그 그림을 보고 만지며 자기 집이 본래 어딘지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문에 왁스를 바르고 방에서 걸을 때 바닥의 나무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을 외워둡니다.
그리고 장군이 쓰는 핸드폰을 두는 위치를 기억하고 결국엔 자신만이 아니라 그곳의 모든 이들을 해방합니다.
내가 본래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온 곳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기억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부터 온 분은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출신입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의 의미임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루살렘이 목적지였지만 예수님은 이 축제 때 당신의 목적지는 천국임을 되새기시는 유일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에 성당으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의
초막은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 나가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잊지 않고 살게 됩니다.
성당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집 밖에 천막을 짓고 일주일을 삽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이를 기억하게 하는 초막이 지금의 성당입니다.
영화 ‘집으로’에서 아이는 버릇이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할머니와 지내면서 남도 생각할 줄 아는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는 할머니에게 가슴을 쓸며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영화 제목이 ‘집으로’인 이유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집으로일까요, 아니면 다시 힘들 때 돌아와야 하는 집이 할머니라는 의미일까요? 아무리 봐도 후자일 것입니다.
사랑이 주어지는 곳이 참으로 집입니다.
따라서 성당에 올 수 있음에도 TV를 보며 미사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로만 부모님을 만나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전에 직접 와야 하는 이유는 베로니카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짜 집이 성당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성당으로 파견받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서 집으로 파견받는 것입니다.
성당은 우리가 축제를 지내야 하는 초막입니다.
----------------------------------------------------
22040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지혜2,1ㄱ.12-22)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런 죽음을 내리자."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18~22)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2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 사상가인 필로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대린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대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 윤리, 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대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대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대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서 유대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全知)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지혜서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 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지혜서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 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 자연, 우상, 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 '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하시고 전능(全能)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惡)이 범람하는가? 전선(全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왜 악(惡)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法)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죽는지? 하는 것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 (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天罰)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 신(神)은 과연 계시는가?
도대체 신(神)의 공의(公義), 정의(正義)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善을 위해서, 보다 더 큰 惡을 예방하기 위해서' 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 하신 하느님께서악(惡)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攝理)안에서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2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신정론(神正論)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지혜서 3장이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永遠; 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點)에 지나지 않고, 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 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公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며 의로운 영혼은 결코 불사불멸하지 않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 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신(神)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義)를 바로 세우시며, 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당신이 천상천하(天上天下)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 불의와 불법, 거짓과 오류, 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義)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來世)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 믿음을 가진 의인들은 내세(來世)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 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