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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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
무제봉.옥녀봉 산행기
2007.2.20
설 다음날 백두산악회를 따라 진천에 있는 무제봉을 산행키로 했다.
역시 이대희,장수남과 셋이서- 설 다음날이라 결행하는 줄 알았는데 손님이 있는지 산행이 취소되지 않았다. 정확히 7시30분 양재역 서초구청 정문 앞에서 탑승을 했는데 이곳에서 예전 삼도산악회 멤바를 두분이나 만났다. 진천은 서울서 가깝기 때문에 산행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점심은 하산해서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간식으로 떡과 김밥을 준비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음성인터체인지를 나와 산행지인 진천군
이월면 서원마을로 들어갔다.
서원마을비,경노당,산행시작점
산행은 9시30분부터 시작되었다. 서원마을은 조선 선조 때 백원서원이 있던 마을로 효,충,예를 근본으로 가르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어 마을 입구에 비를 세워놓았다.
마을에서 산쪽을 바라보니 나즈막한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우리일행을 어서 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등산로는 마치 시골 뒷산길처럼 아늑하고 정이 넘치는, 등산객이 많이 다니지 않은 한적한 길이었다.
줄을 서서 열심히 오른다. 날씨가 봄날처럼 포근해 아예 윗자켓은 벗어 베낭에 넣고 가벼운 차림이다.
등산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온이다. 바닥은 낙엽과 갈비가 푹신하게 깔려 있어 마치 융단길을 걷는 것 같다. 서울사람은 갈비를 모른다. 언젠가 산에 갈비가 많다고 했더니 왠 갈비냐고 - 소갈비냐? 돼지갈비냐?
우스개 소리를 하던 생각이 난다. 갈비는 마른 솔잎을 말한다. 먼지도 나지 않고 약간 촉촉한 등산로는
걷기에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지난주 조금 힘들어하던 장곡이 저멀리 앞서 나가고 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가 보다. 가파른 오르막 길이 계속된다. 처음 오르는 목적지는 옥녀봉이다.
옥녀봉이라는 이름은 하도 많아서 헷갈린다. 서울 청계산 옥녀봉은 서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산이라
그 이름을 쉽게 외운다. 능선에 올라서니 멀리 마을이 보인다.
등산로 주변은 온통 소나무 군락지이다.
멀리 부락이 보인다.
철탑이 그렇게도 높이 보이더니 철탑을 지나고 있다. 철탑 넘어서 옥녀봉이 있다고 했다.드디어 옥녀봉에 도착했다.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 사방을 둘러보니 누군가 나무에다 옥녀봉이라고 페인트로 칠해 놓았다.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
우측으로 선회하여 능선길을 따라 산행을 계속한다. 다음 목적지는 장군봉이다. 출발지 서원마을에서 장군봉까지는 비록 3km밖에 안되지만 처음 오르막 코스 때문에 꽤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나 능선길이 시작되고부터는 힘드는 코스가 없다. 소나무군락지를 벗어나 이제는 잎이 큰 떡갈나무들이 온통 산을 채우고 있다. 잎은 하나 남지않고 떨어져 나무뿌리를 덮고 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자생장치이다. 나무이불을 덮고 동면하는 것이다.
장군봉에 닿으니 옥녀봉과는 달리 제법 근사한 표지석이 서 있었다. 사진도 찍을 겸 휴식시간을 가졌다.
베낭에 준비해온 떡을 꺼내 먹었다. 아침을 먹고 왔는데도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배가 고프면 힘이 빠져 등산이 어려워진다. 장군봉 가까이에 나무에 가지를 걸어 만든 의자가 있어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행 셋이서 사진을 남기려면 천상 둘이서 찍고 합성을 하는 수 밖에 없다. 합성하는 재미도 있다.
깜쪽같이 속아주니 만드는 사람도 신이 난다.
옥녀봉 정상
장군봉에서 간식타임을 가졌다.
해발 480m의 장군봉 표지석
앙상한 가지만-바람에 낙엽이 날리고 있다.
리본은 산악나그네의 길을 인도하는 이정표이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을 자랑하는 진천
능선을 따라 산행이 계속된다.
이른 봄소식을 전하는 듯 파릇파릇한 풀잎이 보인다. 올겨울은 도무지 눈도 없고 추운날도 며칠 되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 때문일까? 기후변화로 많은 생태계가 파괴된다고 하는데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오늘은 날씨도 좋지만 산행코스가 힘든데가 없어 노인코스로 적합한 것 같다. 시간도 넉넉하니 그렇게 바쁘게 서두를 필요도 없다. 친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걸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25분가량 가니 무제봉 가는 팻말이 나왔다. 표지판에 '생거진천'이라는 글이 있어 무슨 말인가 했는데 生居鎭川 死居龍仁에서 나온 말로 살기좋은 진천을 광고하는 글귀였다. 과연 사람이 사는데는 곡식의 보고인 넓은 들이 있고 물의 원천인 산이 있어야 하는데 진천은 두가지를 다 갖춘 곳이다. 강원도 땅처럼 험한 바위산이 아닌 400~600m의 많은 산들로 싸여있고 기름진 옥토가 많아 그렇게 자랑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에는 몇가지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진천땅에 추천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잠을 자다 깨어보니 아내와 자식이 통곡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알고보니 자기가 죽어 누워 있었다. 깜짝 놀라 아내를 불러도 대답이 없이 울고만 있다.
곧 자신은 혼만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에게 불려 갔다. 생년월인이 똑 같은 용인 사는 추천석을 불러들인다는게 그만 잘못 불러들인 것을 안 염라대왕이 그를 돌려보냈다. 진천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육신은 이미 매장된 후였다.어쩔수 없이 들은대로 급히 용인으로 달려갔다. 용인에서는 육신이 아직 온기가 있었다. 꿈털대니 가족들이 살아난 육신을 보고 좋아서 춤을 추고- 그러나 혼과 육신이 다른 추천석은 그 내막을 얘기를 해도 가족들은 전혀 알아듣질 못했다. 정든 고향 진천으로 다시 가서 그 가족들을 붙들고 애걸복걸 했지만 미친사람이라고 얼씬도 못하게 했다. 결국 관가에 불려가서 재판을 받았다. 고을 원님은 그의 사연을 쭉 듣고서 다음과 같은 명쾌한 판결을 내렸다.
“진천 땅의 추천석은 저승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이라 생각하노라. 진천 땅 추천석은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 논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 진천 땅 추천석의 혼이 들어간 그 사내는 생전에 자기의 주장대로 진천 땅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고, 이후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본래 용인 땅에 살았던 추천석의 것이므로 그곳 가족이 찾아가게 되었다.
한편 이런 일이 있어서인지 그 이후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또 다른 전설--
옛날에 진천에 살던 어느 생원의 딸이 용인으로 시집가서 아들을 낳고 살다가 남편이 죽어서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시집에 두고 진천으로 개가를 하여 아들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데 용인에 두고 온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한편 용인의 아들이 장성하여 친어머니를 모시겟다고 진천에 찾아왔다.
진천아들은 안된다고 부랴부랴 화를 냈다.
서로 싸우다가 용인의 아들이 진천의 원님에게 소장을 내어 해결해 달라고 하였다. 고을 원님은 고심끝에 생전에는 진천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용인에서 모셔 제사지내라는 생거진천사거용인의 판결을 내렸다. 여기에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나왓다.
3번째 전설
옛날 두 효자아들을 둔 나이든 아버지가 살았다. 아들이 커서 큰아들은 진천에, 그리고 둘째는 용인에 살았다.
큰아들 집에서만 사는 것이 못마땅한 둘째가 아버지께 간곡히 청을 했다. 지금부터는 자기가 모시겠다고-
그러나 형이 용납하지 않았다. 이를 본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말했다. 살아있는 동안 지금까지 살던 형네집에서 살겠다. 내가 죽거든 둘째로 가마- 그래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을 남기게 되었다.
전설을 그대로 믿을순 없지만, 진천에서는 살기좋은 고장으로 선전을 하고 있고, 용인에는 산소자리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용인이 주거지 특히 아파트 대단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용인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용인에서는 거주자 우선분양제도를 채택한 후부터 전세를 얻으려는 사람이 쇄도하여 야단들이란다.
송림정 싐터
무제봉 가는 갈림길에 표지판이-생거진천을 강조하고 있다.
임도를 따라 조금 가면 무제봉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멀리 부락이 보인다.
장군봉에서 계속 능선을 따라 25분 정도 가니 팔각정 휴게소가 나왔다. 송림정(松林亭)이라는 정자였다. 바로 아래에 넓은 임도가 나오고 무제산 가는 표지판과 산행도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목표지인 무제봉까지는 1.8km이니 그리 멀지는 않다. 임도에서 무제봉 방향으로 조금가니 무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 표시가 있었다. 편한 능선길을 가다가 또 오르막 길을 오르자니 힘이 든다. 능선에 오르니 멀리 부락도 보이고 무제봉도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25분 가량 산행로를 따라 가니 드디어 오늘 최종 목적지인 무제봉 표지석이 나타났다.
해발 573.7m라는 숫자를 자랑스럽게 적어놓은 표지석이 두개나 있었다. 세워놓은 것과 눕힌 표지석 두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해발 573.7m의 무제봉(武帝峰)
무제봉 정상은 포근한 햇볕으로 늦은 봄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 12시가 안된 시간이지만 가져온 김밥과 남은 떡을 먹고 가기로 했다.
정상 부근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고 간단한 중식시간을 가졌다. 2시까지 하산하면 된다고 했으니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여유있게 식사를 마치고 하산을 시작했다.
40분가량 산중턱으로 내려오니 넓직한 임도가 나왔다. 신계리방향으로 방향을 잡고 임도를 따라 느린 속도로 걸어 내려왔다. 포장이 된 도로라 도무지 하산 기분이 나지 않았다.
하산 도중에 보니 산사태가 크게 난 흔적이 아직도 상존해 있었다.
제방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봄날씨 인지라 눈이나 얼음을 도무지 상상을 못하는데 그래도 응달진 곳에 쌓인 눈과 얼음을 보니 아직 계절은 겨울이구나를 실감케 했다.
임도를 터덜터덜 내려간다. 강원도의 돌산처럼 경치가 빼어난 곳은 없어도 나지막한 산 능선에 가지런히 서 있는 앙상한 나무가지를 보면서 아직도 황량한 겨울산이구나 하는 느낌을 가진다.
우리가 가장 후미인 것 같아 열심히 걸었다. 2시까지 하산하라고 했는데 이제 겨우 1시10분.
거의 9km를 3시간 40분만에 마친 셈이다. 역시 편한 산행은 시간도 여유가 있다.
이제 나이도 무리할 나이는 아니니 이런 노인성 산행코스가 마음에 들었다. 하산후 식사를 안한 사람을 위해 버스로 광혜원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마침 뼈다귀 해장국집이라 소주 생각이 났다. 장곡은 못하지만 이회장은 애주가라 해장국에 소주 한병을 시켜서 맛있게 마셨다. 소주는 산악회장이 쏜다고해서 공짜술을 마신 셈이다.
가까운 산이라 산행도 일찍 끝나니 더욱 좋다. 설휴무 뒤라 교통편도 걱정을 했는데 비교적 빨리 귀가할 수 있었다. 나른한 버스에서 졸다보니 즐거웠던 하루해가 저물고 있었다.
가는 실핏줄 같은 앙상한 나무가지가 산 능선까지 -
산사태가 난 상흔이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빨리 복구되지 않으면 또 큰 재난이 날 태세다.
그래도 겨울이라고 눈구경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전원주택인 모양인데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라 카메라에 담았다. 집이름도 걸작 "笑笑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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