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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의 변천과 그 의미■
1. 들어가기
고해성사는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나 하느님과 깨어지고 상처 입은 관계에 놓였을 때, 다시 화해하고 관계를 맺는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며 구원 도구이다. 그러나 고해성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이들이 고해성사에 대해 부담을 갖거나 많이 꺼리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가 급변해 가면서 가치관도 빠르게 변하며, 이 때문에 발생하는 죄의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대상으로 봉사하고 사랑해야 하는 관계에서 자기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고 자기만을 사랑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놓는 현실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회개와 쇄신은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이는 신자들이 고해성사의 신심을 새롭게 이해하여 스스로 계속해서 쇄신하고 회개하면서 교회의 새로움에 봉사하는 것이 필요함을 뜻한다. 고해성사는 자기의 죄를 단순히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잘못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멍에가 아니라 해방과 기쁨으로 가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개별 인간의 개인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러 민족들의 충돌, 전쟁과 투쟁, 다양한 사회적 형태의 폭력과 증오, 이념적 민족주의적 분열 양상 등은 여러 가지 복잡한 근거를 갖지만 인간의 죄가 그 원인이라는 것을 통감하여야 한다. 정치?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뿌리에 대해 분석하면서, 각 개별적인 인간이 죄스러운 현상의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분석은 표피적으로 머물 것임에 틀림없다.
자유로운 인간은 진리를 선택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을 부정하는 행위가 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행위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행위인 것이다. 진리를 거부할 때 그는 자유에서 멀어지고 참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책임을 진다. 사회적 죄의 현상은 인간이 악을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이기에 인간은 이러한 죄의 현상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단순히 사회적 구조로 파악하고 책임을 미루는 것은 더욱 큰 죄악으로 빠지는 것이기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신이 잘못 선택한 것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 본연의 자유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 하느님과의 일치, 이웃과의 일치 그리고 본연의 자신을 찾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서에서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써 죄인과 하느님과의 화해, 그리고 이웃 인간과의 화해의 원형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였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19; 루가 7,34)라고 비판하기조차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과 함께한 것뿐만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이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마태 9,13; 루가 5,32)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루가 15장) 잘 드러나듯이, 하느님께서는 항상 죄인들을 용서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며 또 죄인들을 찾아다니시거나 기다리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을 알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죄를 깨우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요구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경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과 능동적으로 함께하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도와준다. 곧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선포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화해를 실현시키셨다. 예수님은 곧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가 가능하고 또 자신이 하느님과의 화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종교적 근거, 곧 율법을 뒤흔드는 행위로 보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죄인으로 판결받으시고 결국 살해당하신다. 그러나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무엇이 더욱 근본적이고, 바른 것인지 그리고 생명을 가져다주는지를 보여주신다. 단순히 율법을 준수하면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야말로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율법임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용서는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째, 죄의 용서와 하느님과의 화해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주도에 따라 그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전달된다. 그 말씀의 핵심은 바로 용서와 화해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서 인간은 자신에게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느님께 응답을 하게 된다.
둘째, 불의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이웃과의 보속을 통한 화해는 하느님과의 화해에서 본질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이러한 하느님과의 화해는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타인을 위한 삶으로 전환하는 사랑의 실천 안에서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인 사랑 안에서 죄인들은 하느님과 화해를 하고 용서를 받은 것이다.
넷째, 화해는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을 걸고 계시며 인간은 자기비판과 자기반성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다섯째,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욕적으로 사셨고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 배척받는 이들과 함께하셨으며 죄인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은 바로 이웃과 화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 된다.
여섯째, 하느님과의 화해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이 집단은 폭력과 죄로 점철된 세상의 한가운데서 화해와 평화가 실현된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교회도 죄인이 모인 집단이지만 하느님께서 만드신 교회는 이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는 근성사(根聖事)로 이해된다.
3. 고해성사의 변천
고해성사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명칭을 가졌다. 과거에는 ‘참회의 성사(Sacramentum paenitentiae)’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하느님께 대한 자세와 마음의 변화를 강조한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 이후에는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을 강조하였기에 ‘고해성사(Sacramentum confessionis)’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에는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라는 차원을 강조하고자 ‘화해의 성사(Sacramentum reconciliationi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와 함께 고해성사에 대한 이해와 예식도 변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평생에 단 한 번만 고해성사가 허락되었으나 나중에는 여러 번 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1) 초대교회의 참회성사
초대교회의 법적 참회성사는 마태오 복음 18장 18절과 고린토 1서 5장을 바탕으로 실행되었다. 살인, 간음 그리고 배교가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경우에 해당되었으나 그 밖의 다른 중죄는 미사나 기도 그리고 선행을 통하여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의 법적 참회성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주교는 죄를 고백한 교인에게 보속을 부여하고 그러고 나서 다른 일반 신자들과 함께 공적인 참회예절을 한다. 주교에게 안수를 받은 다음 죄를 고백한 이는 보속을 행하는 자라는 것을 표시하는 의복을 입고 성체성사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상징적인 추방을 통해서 속죄인의 신분으로 분류된다. 교회 공동체는 큰 슬픔을 나타내면서 이 과정을 함께한다.
둘째, 고대교회 참회성사의 특징은 보상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곧 충분하고 합당한 보속이 행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포하였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달랐고 이들의 속죄 기간은 매우 길었다. 가벼운 보속이나 짧은 기간 동안의 보속은 죄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1년 또는 다년간 지속되는 보속 기간 동안에 속죄인은 자신에게 부과된 보속을 다 채워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속죄인은 기도하는 가운데 단식과 자선을 실천하고, 사회적 지위, 혼인 그리고 부부간의 성생활을 포기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속죄인은 교회 공동체 예식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참가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미사에는 참여할 수 있었으나 성찬 전례가 시작되면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보속기간 동안 교회 공동체는 그들의 참된 보속행위를 위하여 청원기도를 바쳤다.
셋째, 충분한 보속 기간이 끝난 뒤에 그들은 주교의 안수를 통하여 교회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졌다. 4세기부터는 일반적으로 성목요일 장엄 미사에 다시 받아들여져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신분을 얻게 되었다. 다시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교회 공동체와 화해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나아가서 하느님과 화해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곧 교회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짐을 통하여 죄가 용서되고 본연의 의미의 고해성사가 끝난 것이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초대교회에서는 세례성사가 한 번 있듯이 참회성사도 오로지 한 번만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또다시 중대한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회개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었고 또 다른 참회성사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교회는 다시 죄에 빠진 이 교인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기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죄에 다시 빠진 이가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하여 그가 구원될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예로, 니케아 공의회는 임종에 이른 자에게 병자성사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는 곧 임종자가 죄의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마지막 구원의 기회는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2) 비밀성을 지닌 반복 가능한 참회성사로 발전
6세기까지는 고해성사가 평생 단 한 번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오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보속이 과중했고 또한 죄가 용서되어 교회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보속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했기에 이러한 부담을 피해서 노년기 또는 죽음에 임박해서 참회성사를 하려는 경향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고해성사를 하면 보속이 비교적 가벼워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으로 말미암아 보속행위는 교회 공동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속죄인이 자신의 삶 안에서 죄를 잘 이겨나가도록 교회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기도를 하는 전통도 사라졌다.
6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새로운 고해성사의 모습이 나타났고 이것이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초대교회가 실행하였던 전통적인 고해성사와 새로운 형태의 고해성사가 공존하여 8세기 말까지는 적지 않은 논란도 있었지만 점차로 초대교회의 참회성사 형태는 사라졌다.
이 새로운 고해성사의 형태에서는 살인, 간음 그리고 배교 등의 중대한 죄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죄도 고백할 수 있었고, 또한 죄의 고백을 반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고백의 비밀이 유지되었고 보속행위 또한 공동체 차원을 벗어나 개인의 차원에서 실행되었으며, 평생 하여야 할 필요도 없었다.
사제는 참회성사에서 중대한 죄뿐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죄까지 다루어야 했으므로 죄에 따른 적절한 보속을 부과하도록 기록한 ‘보속 일람표’를 참조하였다. 이 보속이 끝나면 속죄인은 사제에게 와서 사죄를 받았다. 이는 곧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졌던 죄의 고백→보속→사죄의 형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는 속죄인이 사제에게 사죄를 받은 다음에 보속행위를 실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물론 중세까지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죄는 일반적 죄 고백, 선행 그리고 자선과 단식을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고 또 극복될 수 있다는 초대교회의 의식이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아울러 초대교회에 있었던 공식적인 보속기간은 점차로 사라져 보속은 속죄인이 개별적으로 비밀리에 실행하도록 맡겨졌으며, 교회 공동체의 성체성사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속죄인의 보속과 교회 공동체가 강조되었던 반면에 초기 중세에는 속죄인의 죄 고백이 강조되었고, 죄의 고백 자체가 겸손한 행위로서 속죄의 일부라고 인정되었다.
초기 스콜라 시대(12세기)에는 통회가 가장 본질적인 요인으로 인정되어 진정한 통회가 이루어진 가운데 하느님께서 용서하신다고 보았다. 그러나 13세기에는 사제의 사죄를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초대교회 때에는 사제의 사죄가 죄의 용서를 청하는 기도로 이해되었기에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이후에야 진정으로 죄가 용서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13세기부터는 사제의 사죄경이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속죄인의 보속행위와 교회 공동체와의 화해를 중요하게 여긴 초대교회의 이해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토마스 데 아퀴노(1225-1274년)는 사제의 사죄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통회가 성사를 갈망하는 것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그 자체로 죄를 용서받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질료형상론을 바탕으로 참회성사에 주관적 차원을 ‘질료’로 그리고 객관적인 사제의 사죄를 ‘형상’으로 보았다. 이는 곧 주관적 차원인 통회, 죄의 고백 그리고 보속과 객관적 차원인 사죄 모두가 고해성사에서 빠질 수 없는 구성 요소라고 본 것이다. 그의 이론은 피렌체 공의회(1439년)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교회의 가르침으로 채택된다.
또한 1215년 라테라노 공의회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던 새로운 참회성사의 전통을 받아들여 모든 신자가 양심에 따라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참회성사를 의무적으로 하도록 규정하였다. 1983년에 개정된 교회법에서도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후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중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제989조)라고 말하면서 라테라노 공의회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한다.
4. 현대의 새로운 고해성사 이해
1) 기본 노선
20세기 초에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참회성사의 참여도가 절정에 달하였다. 교황 비오 10세(1903-1914년)가 고해성사를 보고 모든 미사성제에서 성체를 영하도록 권고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들은 점차 감소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초대교회에서 강조되었으나 지난 400여 년간 잊었던 고해성사의 교회론적 차원을 다시 강조하였다. 「교회 헌장」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하여 그분의 자비로 용서를 받으며, 또한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노력하는 교회와 화해를 한다”(11항). 지난 400여 년 동안은 고해성사에서 죄를 고백하는 이와 죄를 용서하는 사제 두 부분만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용서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봉사’라는 차원이 강조되고, 이를 하느님과 세상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삼위일체적인 구원역사의 관점에서 고찰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을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다시 확인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고해성사가 교회의 기본과제이며, 교회는 화해를 위한 표지이고 도구라고 가르친다.
또한 1973년에 반포된 「고해성사 지침」은 고해성사가 전체 교회의 사업이고 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곧 고해성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인간에게 부담을 주고 경악하게 하는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전 인격적인 인간을 포괄하는 전례적 축제인 것이다. 이 축제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들과 화해하며 자신이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있음을 느낀다. 이 축제가 열리는 교회는 바로 인간과 화해한 하느님께서 현존하는 곳이고, 바로 이 교회 안에서 인간들은 하늘나라를 이웃 인간들과 미리 맛보는 것이다.
2) 주관적인 차원
(1) 통회
통회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가르치듯이 용서를 받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다. 이 공의회는 통회가 우선 죄의 무가치함을 인식하는 것이고 죄에 대한 혐오와 죄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 나아가서 삶을 변화시켜야 하겠다는 원의 그리고 하느님께 향하겠다는 결심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회는 곧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다시 한번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자신의 삶에 재생하고자 하는 첫 단계이다. 곧 통회는 하느님과 화해하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고 준비인 것이다.
통회는 대화의 과정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말씀을 하시고 인간은 하느님께 향하고자 하는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의 빛으로 말미암아 죄를 보고 자신이 하느님을 향하는 길에서 많이 벗어났음을 깨닫고,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완성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죄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고 있고 인간이 이미 그 은총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2) 죄의 고백
죄의 고백은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는 성사권을 가진 사제에 의하여 대표된다.
① 초대교회의 공적인 법적 참회가 나중에 개인적인 비밀고백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죄의 고백은 화해의 성사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이 고백은 고해라고도 불린다. 이른바 ‘죽을 죄’ 또는 대죄의 경우 빠짐없는 고백이 중요하였다.
②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대죄를 고백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공의회는 사제 앞에서 하는 고해성사가 그리스도께서 부과하신 과제이고 신법에 따라 제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법에 따라 모든 ‘죽을 죄’가 있는지를 잘 성찰한 다음에 자세히 고백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밖에 다른 죄들은 필요에 따라 고해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죄의 고백은 정확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며 형식적으로 완전해야 하고 비밀이 유지되어야 한다.
③ 오늘날의 ‘죄의 고백’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 중대한 죄를 교회 앞에서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하는 필요성은 교회의 신앙전통의 핵심에 속하는 것이다.
- 죄와 ‘죄의 고백’은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이고도 교회적인 차원이다. 따라서 대죄가 무엇인지는 이웃 인간이나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고찰되어야 하고, 고백이 실행되어야 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죄의 양적인 고백보다는 질적인 고백이 중요시된다.
- 속죄인은 ‘죄의 고백’에서 자신이 구체적인 죄의 상황 안에서 하느님을 갈구한다는 것을 깊게 표현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그분의 응답, 곧 사죄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속죄인은 하느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 이웃 인간과 교회 공동체에서 새롭게 살게 되는 것이다.
(3) 보속
보속은 하느님의 은총을 바탕으로 이웃과 하느님께 죄를 보상하는 행위이다. 초대교회에서 보속은 그야말로 형벌의 성격이 짙었으나 오늘날에는 죄로 상처 입은 이웃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성격으로 이해된다. 피렌체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는 보속을 통회, ‘죄의 고백’과 함께 고해성사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라고 가르친다.
3) 객관적 차원인 사죄
사죄는 ‘죄의 고백’을 들은 사제가 실행하게 된다. 사제는 그리스도에게서 파견되어 직무를 맡은 이로서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여 사죄권을 받는다. 초대교회에서 사죄는 속죄인이 주교를 통하여 다시 교회 공동체와 화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세에는 대죄의 용서는 속죄인의 통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토마스 데 아퀴노는 통회와 사죄가 동시에 죄의 용서를 가져다준다고 종합한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
사제의 사죄는 법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죄인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고 설명하는 봉사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죄는 결국 교회의 봉사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용서를 말함으로써 통회하는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가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미디어 시대의 고백 문화■
미디어 시대의 만개(滿開)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이다. 이 무슨 새삼스런 말인가? 미디어의 어원이 중개(medium)에 있다면, 또 그것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중개를 말한다면 미디어는 문화 생성의 도구로서 인류와 처음부터 함께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자신의 시대를 일컬어 미디어의 시대라 하는 것은 미디어가 단지 어떤 도구적 관점에서 매개나 중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의 변화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견인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특히 현대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등이 속속 역사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것이 갖는 위력은 점점 가속화되었다.
미디어의 위력은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이 없던 시절을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가 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 신자 가정의 예를 보아도 텔레비전이 집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족 간의 대화도 텔레비전 드라마나 뉴스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텔레비전 없는 우리의 일상이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창백하고 메마르던가. 전화, 특히나 휴대전화는 이제 개인의 새로운 수호성인(?)으로서 언제나 함께하면서 우리의 무료함을 달래주고 있다. 인터넷은 세계 각국을 제집 드나들 듯이 넘나들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이들 미디어는 이종교배의 결합을 통해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최첨단 미디어들로 장착한 인간 자신과 그의 일상은 얼마나 달라진 걸까? 미디어를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지만,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미디어 자체가 인간을 재창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때로 우리는 자기 행동을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행동방식과 비교하여 거기에서 일정한 정당성을 얻으려 하기도 하며, 이들 매스미디어 속에서 모방의 대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삶의 양식들이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처음부터 어떤 섣부른 가치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 앞서 이런 사회적 미디어가 파생시키는 문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의 미디어들은 우리에게 점점 더 이런 성찰의 시간을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든다. 이를테면 미디어는 점점 더 자신의 본질적 속성인 매개 자체를 없애는(im-mediate)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방금 일어난 사건을 즉각적으로(immediately) 전달받고,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우리를 호출하여 타인과 관계를 맺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소통의 즉각성이 곧 성찰의 심화나 친밀감의 깊이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소통의 엄청난 양적 발전이 이것을 저해하고 있다고까지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런 미디어 환경은 성찰과 반성의 측면보다는 찰나적 이미지와 즉각적 행동양식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미디어의 상업주의 전략은 이것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된다. 미디어는 결코 일기를 쓰지 않는다. 곧 오늘날 미디어는 그렇게 성찰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쏟아내고 제공할 뿐 우리에게 성찰과 고백의 여백을 따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아니, 이 성찰과 고백마저 하나의 이미지로 복제해서 다시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이 복제된 이미지를 보고 스스로 성찰하는 척하는지 모를 일이다.
고백의 상품화
일기는 아주 솔직한 자기 고백의 기술이라 불린다. 세상이 잠든 이슥한 시각에 자기 방에 들어가 책상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정성스럽게 연필을 깎은 뒤 흰 종이 위에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 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는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들과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 내면적 단상들을 ‘솔직하게’ 적는다.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과 대화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듯이 일기는 언제나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항상 내밀한 자신과의 대화에 그치지 않는다. 일기를 쓰는 사람 자신이 이미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일기를 쓰면서도 항상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읽힐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일기는 우선 가족 중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면 그의 일기는 개인사의 기록이 아니라 사회적 기록으로까지 확대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언제든 공개될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일기는 자신만의 내밀한 기록으로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는 늘 자기 정당화와 자기 미화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 우리가 처음 일기 쓰기를 배우던 시절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요즘도 초등학교에서는 한글 익히기의 일환으로, 그리고 바른 생활 어린이 육성하기의 방법으로 일기를 쓰게 한다. 어쩌면 일기라는 내밀한 자기 이야기 서술 방식은 사회에 적응하고 성장하기 시작한 개인의 사회화 도구일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아예 출판을 목적으로 일기를 쓰는 사람도 있다. 몇 년 전 탤런트 출신의 한 여성은 『나도 때로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일종의 고백의 상업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과연 그런 내밀한 사생활이 공개적으로 수많은 익명의 대중에게까지 읽힐 필요가 있었을까?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정답은 대중이 그걸 원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대중이 원한다면 출판사는 그것을 채워줘야 한다. 그리고 미디어는 이것을 홍보해 주어야 한다. 왜? 대중이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것을 바라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그들을 부추겨서 그것을 욕구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상품화 전략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그 책이 기술하는 일탈적 성윤리를 문제삼지만 정작 더 문제인 것은 이를 통해 돈벌이를 하려는 일련의 욕망이다. 시장의 무제한적 욕망은 전통적 사고방식에서는 도저히 사고팔 수 없는 것마저 상품화시켜서 저자거리에 내놓는다. 그리고 오늘날 이런 자본의 상품화 전략에서 미디어는 최고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고백, 그 가운데서도 개인의 성적 체험을 상품으로 연결하고, 많은 사람이 거기에 몰두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다는 연예인들의 누드 사진 찍기 열풍도 모두 이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예인들의 누드 사진 찍기는 일종의 ‘몸의 고백’, 고백의 영상매체적 변용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누드 열풍의 선두주자도 이 탤런트였을 것이다. 평소에 볼 수 없는 곳, 감추어진 부분을 보고 싶어하는 대중의 욕망을 이용한 이런 상업 전략들은 스스로 고백을 창출한다. 여기서 물론 고백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고백자 자신이 아니라 이것을 바라는 대중의 욕망, 미디어의 욕망이다.
미디어는 스스로 대중을 호명하고, 대중의 욕망을 창출한다. 사람들은 일기장이나 가까운 사람, 또는 고해소에서가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고백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거기서 고백은 카메라의 묘사로 이미지화된다. 이른바 위안부 누드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던 한 탤런트는 문제가 확대되자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가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창백한 뺨, 흐르는 눈물, 자갈 위에 꿇은 무릎 등의 이미지가 참회를 대신한다. 모든 내면의 속뜻이 샅샅이 이미지로 떠올라 보인다. 또는 겉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어도 외면적으로 그런 모습을 취하고만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참회한 것으로 헤아려진다.
모두가 이런 식이다. 이로써 이 누드집을 기획했고, 파문을 확산시켰던 미디어는 위안부 누드 파문이라는 드라마를 종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한 사죄만으로는 부족한 사회적 토론이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이런 사죄들은 여하한 사회적 토론에 의해서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가 아니라 단기적 봉합에 머물면서 문제를 잠복시키고 있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이미지만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시대정신에는 엄밀한 반성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내용 없는 이미지의 남발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한 여야의 정치적 공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 가운데 하나가 ‘고해성사’라는 가톨릭 교회의 신앙언어였다.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고해성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고해성사를 사용하는 문맥을 살펴보면 진실한 참회와 자기 고백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이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스스로 고해성사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고해성사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회와 고백, 보속으로 이어지는 고해성사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다. 고해성사의 이미지를 빌려 타인의 도덕성을 압박하는 것은 고해성사를 욕보이는 짓이다. 타인의 부정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제고하겠다는 사고방식은 전혀 고해성사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외에도 이번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유달리 이런 종교적 언어와 이미지를 과도하게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는 우리가 무척이나 종교적인 나라에 살고 있다는 착각마저 하게 된다. 여당의 대표라는 사람은 노인 폄하 발언으로 문제가 생기자 노인 단체 대표들을 찾아다니면서 무릎 꿇고 큰절을 하면서 용서를 빌었고, 한 야당 대표는 명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조계사에서 108배를 하고, 영락교회에서 참회예배를 하였으며, 또 다른 야당의 선거대책본부장은 자기 정당의 전략적 실수에 대해 사죄하려고 삼보일배를 했다. 물론 선거 전략에서 매스미디어의 중요성이 그 어느 시기보다 높아진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서 무조건적으로 이것을 타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지 정치가 그것이 갖고 있는 본질적 내용마저 왜곡하거나 생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 이미지의 활용은 일순 많은 신자들의 불쾌감을 자아내지만, 매스미디어로 중계되는 선거는 이런 그림을 선호하고, 이는 정치인들에게 더 많은 이미지를 창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밑으로 한 움큼의 의미도 동반하지 못하는 가시성의 언어들이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정치는 바야흐로 관객에게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하는 삼류배우들의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들이 이제 고해성사마저 자신들만의 연극을 위한 무대장치로 호출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사실상 정치와 여론을 대변하는 것은 미디어이다. 미디어는 때로는 연출자가 되어, 때로는 관객이 됨으로써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 이미지를 먹고사는 미디어는 심층적 정책 토론을 지양하고, 이미지의 효용성에 몰두하게 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이런 미디어를 매개로 한 이미지 정치는 스스로가 가리키는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부실한 내용에 대비되는 이미지의 과장이 반복될수록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는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어쩌면 오늘 우리 정치에 요청되는 것은 영상매체적 이미지가 아니라 문자매체적 텍스트이리라. 이미지만 헛되이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책을 정독하듯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이를 채우기 위한 정책적 수단을 고민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고백과 사죄를 담보하는 실천적 내용의 획득만이 이것에 이르는 첩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참된 미디어인 성사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입체적 심층적 보도보다는 평면적이고 즉흥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짙다. 또한 ‘얼짱’과 ‘몸짱’ 등의 유행어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을 단지 얼굴과 용모만으로 평가하는 천박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과 사회, 자연계에 대한 분열적이고 단절적인 관점으로 왜곡된 인간관과 세계관을 낳을 우려가 있다. 심층적 의미에서 절연된 표피적 관점, 그리고 대상을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으로 분해해서 바라보는 것은 인간 자신과 그 사회적 관계, 생태계, 초월적 존재자와의 관련성을 상실케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대적 소외 현상을 오늘의 미디어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크게 분열되어 있다.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가 서로 맞서서 자신의 이익만을 극단화하고 있다. 아니, 인간은 바로 그 자신 안에서 가장 먼저 분열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런 분열적 상황을 해소하려면 우리는 먼저 현대인의 인식구조와 삶의 자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디어를 복음의 힘으로 성화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성사적 사고방식을 다시 복원하고자 미디어를 올바르게 활용해야 할 것이다.
성사는 상징이며 표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가시적인 물질적 표징에 머물지 않는다. 그 물질적 언어와 사물을 통해 인간의 탄원이 올라가고 신적 현실이 전달되는 그런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사야말로 참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성사는 탄생, 성장, 혼인, 늙고 병듦, 고통과 죽음에 이르는 전체적인 인간 삶을 하느님 안으로 모아들이고 성화시킨다. 저 세속의 미디어가 실재하는 것은 오직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뿐이라고 사람들을 현혹할 때, 성사는 그 너울을 벗기고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게 한다. 교회의 성사는 이 세계가 참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종국에는 다시 그분에게 복귀할 것임을 미리 보여준다. 성사가 세계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듯, 인간의 미디어 역시 구원적이어야 한다.
현대의 분열과 단절, 그리고 뿌리깊은 자기소외에 대항하는 교회의 정신은 화해이다. 그리고 이 화해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의 말씀처럼 참회와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참회는 모든 성사의 전제 조건으로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화해의 성사, 참회의 성사를 거행한다.
여기 자신의 잘못에 대해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던 사람이 있다. 다소 퀭한 눈과 야윈 얼굴이 그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괴로움의 깊이는 반성의 깊이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그 잘못을 불러오는 삶의 습속을 버릴 용기는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이제껏 그의 쾌락의 원천이었고, 삶이 주는 우울한 단조로움에서 그를 구해줄 유일한 근거였다. 그는 주저한다. 하지만 마지막 한 순간에 그는 그것이 주는 일시적 쾌락보다 빛나는 햇빛 아래서도 당당할 수 있는 평온한 기쁨을 선택하기로 작정한다.
마지막 죄를 고백하고 고해사제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고해자의 등으로 땀이 흐르고 있다. 사제의 사죄경이 고해소를 가득 채우는 순간, 고해자는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빛을 느낀다. 그 빛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아주 적당하다. 이어지는 보속에 그의 마음은 희열로 가득 찬다. 고해소를 나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눈물이 그의 망막에 그토록 오랫동안 맺혀있던 무엇인가를 씻어냈나 보다. 갑자기 세상이 변했다.
이렇듯 고백은 참회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온 존재를 걸고 자신의 잘못과 생활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참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참회는 우리 자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지금까지 내게 베풀어주신 그 한없는 은혜를 인식하고 감사하는 데서 싹튼다. 거기서 나는 내가 얼마나 그분의 간절한 손길을 거부해 왔는지, 내 탓으로 얼마나 많은 이웃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했는지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의 참회는 이런 마음의 다짐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육신 없는 영혼만의 존재, 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깨달음은 말과 몸짓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것은 얼굴 붉어지는 부끄러움이다. 지극한 겸손과 자기 극복의 의지가 없다면 고백은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설령 고백을 했더라도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머문다.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을 늘어놓거나, 헛된 이미지에 호소하는 것은 진정한 고백의 모습이 아니다. 부끄러움과 고통을 감내하며 자기 죄로 넘쳐나는 쓰레기통에 코를 박고 나서야 우리는 장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기쁨에 넘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죄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 상처 자국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법원의 판결에 따른 강제적 보상과는 다른 것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기가 받은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과 희망으로 그렇게 한다.
때때로 그의 몸과 마음이 떠나온 마을과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세례 이후로 그는 그곳이 자신이 영원히 머물 곳은 아님을 안다. 그는 때로 힘에 겨워 비틀거리지만, 고갯마루를 향해 한 발자국씩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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