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이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시승 전날, 후배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슈퍼패스트’라는 이름을 두고 한 이야기였다. 비단 그 후배만 그런 건 아니었다. 페라리 812 슈퍼패스트는 공개 직후 이름만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과감한 단어 사용이 멋지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감이 지나치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실 슈퍼패스트는 페라리가 과거 수차례 사용했던 이름. 그러나 곱지 않은 시선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슈퍼패스트. 우리말로 하면 ‘X나 빨라’정도 된다. ‘제일 빨라’가 아니다. 페라리는 아마 이 이름으로 절대적인 속도가 아닌 성격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812 슈퍼패스트의 이전 모델인 F12 베를리네타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다음 날 아침. 하필 비가 내렸다. 난 시승 진행 여부를 두고 한참 고민했다. 다른 차라면 촬영이 문제였겠지만 이 차는 운전이 걱정이었다. 내가 과연 800마력을 뒷바퀴로만 쏟아내는 차를 빗길에서 제대로 타볼 수 있을까. 스마트폰 날씨 앱을 뒤적거려봤다. 강원도 춘천 쪽은 오후에야 비가 온단다. 그쪽에 마침 봐둔 코스도 있다. 서울 강남에선 약 한시간 거리. 잽싸게 쏘면 그럭저럭 타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이 차가 F12의 후속이 아니었다면 아마 난 시승을 포기했을 것이다. 내 기억 속 F12는 국산 중형 세단만큼이나 유연한 차였다. 타자마자 운전대를 마음껏 휘두르고, 가속페달도 부담 없이 밟을 수 있었다. 이런 성격이라면 빗속을 뚫고 가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812에 오른 난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단 걸 확신했다. 클러치가 붙을 때의 느낌과 경계석을 넘을 때의 반응이 그렇게 매끈할 수가 없었다.
812 슈퍼패스트는 GTC4 루쏘와 함께 V12 라인업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네 바퀴를 모두 굴리는 4인승 모델인 GTC4 루쏘와는 달리, 페라리 스포츠카 전통의 ‘2시터 FR’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페라리 역시 GTC4 루쏘는 GT로, 812는 스포츠로 구분하고 있다. 즉, 페라리의 기함은 812란 이야기다. 차체는 F12에 비해 조금 커졌다(휠베이스는 그대로다). 하지만 무게는 같다. 탄소섬유 사용 비율을 높였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피닌파리나가 아닌 페라리가 직접 다듬었다. 물론 고유의 미끈한 분위기는 그대로다. 공기저항을 줄이고 다운포스를 키우기 위해 여기저기 구멍을 뚫었지만 차체 표면 어디에도 도드라진 부분은 없다. 트렁크 리드에 그 흔한 액티브 스포일러도 달지 않았다(앞범퍼 안쪽 플랩과 디퓨저는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페라리는 이처럼 늘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독일이나 영국의 경쟁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노선이다.
실내는 각종 최신 장비로 채웠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품은 디지털 계기반과 사용성을 개선한 신형 운전대, 동승자를 위한 터치식 인포 스크린 등을 빠짐없이 담았다. 레이아웃은 거의 그대로지만 전체적인 짜임새와 품질은 눈부시게 개선됐다. 대시보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부품을 다시 만들었기 때문이다.
변화의 핵심은 물론 엔진이다. F12와 같은 V12 자연흡기지만 60마력을 끌어올려 기어이 800마력을 찍었다. 페라리는 이를 위해 엔진의 75퍼센트를 새로 설계했다. 배기량을 0.3리터 늘렸고(이제 6.5리터다) 가변흡기 다기관과 가변밸브로 중저속 영역의 출력과 반응을 개선했다. 배기량 1리터당 출력이 무려 123마력인, 최고출력을 8500rpm에서 찍는 초정밀 고회전 엔진이지만 최대토크(73.3kg·m/7000rpm)의 80퍼센트를 3500rpm에서 내는 것도 바로 이런 노력 덕분이다.
아울러 직분사 시스템의 압력도 200바에서 350바로 높였다(가솔린 양산 엔진 최초다). 자연 착화로 인한 노킹 등 리스크가 컸겠지만(돈이 많이 들겠지만) 목표 출력과 효율, 그리고 환경기준 등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0→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2.9초)은 0.2초나 줄었다. 물론 이런 결과에는 변속 속도가 30~40퍼센트 빨라진 신형 7단 듀얼클러치 변속기도 한몫하고 있다. 0→시속 200킬로미터는 7.9초며 최고속도는 시속 340킬로미터다.
슈퍼패스트라는 이름의 의미
오는 내내 하늘만 바라봤건만. 야속하게 춘천에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래도 바닥에 물이 고일 정도는 아니다. 한 시간 정도 탔다고 제법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가볍게 달려보기로 했다. 운전대 반응은 굉장히 빠르고 정확하다. 페라리 최초의 EPS(전자식 파워 스티어링)인 데다 뒷바퀴 조향 시스템까지 들어가 있는데 이질감도 전혀 없다. 차체 크기도 거의 의식되지 않는다. 다만 회전반경은 생각보다 크다.
페라리가 EPS 카드를 꺼내든 건 성능이나 효율보단 안전 때문이다. 차선유지 시스템과 같은 장비라도 달았냐고? 그럴 리가. 812에는 EPS를 활용한 FPO(페라리 파워 오버스티어)라는 장비가 들어간다. 오버스티어가 발생할 때쯤 운전대의 토크가 변해 차의 궤적이 지나치게 변형되는 것을 막는다. 트랙션을 제어해 슬립이나 스핀을 막는 SSC(사이드슬립 앵글 컨트롤 시스템)가 있음에도 차를 박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아마 타이어 그립의 한계치를 운전자에게 알려주는 FPP(페라리 피크 퍼포먼스)의 개발 배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의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엔진을 차체 앞쪽에 달고 800마력을 뒷바퀴에 ‘몰빵’하는 차는, 사실 괴물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과부 제조기’라는 오명을 얻지 않으려면 이 정도의 첨단 안전장비는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812는 출력에 비해 부담이 거의 없다. 운전자 압박 수위가 굉장히 높은, 그래서 타는 내내 차와 싸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경쟁사의 기함(V12 엔진을 차체 가운데에 얹은)과는 결이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난 이 새 장비들의 완성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빗길에서 그러기엔 내 간이 너무 작았다(라고 쓰고 가난하다고 읽는다). 그래도 성향만큼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엉덩이가 바깥쪽으로 살짝 살짝 밀려나고, 그걸 바로 잡아주는 과정 모두가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마른땅에서 한계까지 밀어붙이면 빠른 속도에서 오는 기쁨과 함께 운전 실력이 수직 상승한 듯한 자부심을 안겨줄 게 분명하다.
가속 감각은 아주 가뿐하고 또 짜릿하다. 바퀴가 구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엄청난 힘을 쏟아내며, 회전 한계인 8900rpm까지 그 힘이 쉬지 않고 늘어난다. 가속 성능은 말도 못할 정도로 폭력적이지만 두렵거나 불안한 느낌은 전혀 없다. 차체가 워낙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운전자는 트랜스 액슬 방식의 프런트 미드십(엔진은 앞 차축 안쪽에 있고 변속기는 뒤 차축 부근에 있다) 구조에서 비롯된 경쾌한 느낌(앞쪽이 딱 기분 좋을 만큼 가벼워진다)과 회전수 상승에 따라 점점 더 커지는 V12 엔진의 울부짖음만 즐기면 된다. 도대체 세상 누가 이런 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페라리가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아니 만들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차. 그게 바로 812다. 난 길이 뚫릴 때마다 몇 번이고 이성의 끈을 놓고 가속페달을 힘껏 짓밟았다. 아마 시승 때마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직업관(라고 쓰고 또 가난하다고 읽는다)이 없었다면 코너에도 무턱대고 뛰어 들어갔을 것이다. 그만큼 812는 언제 어디서나 아주 쉽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차였다. 슈퍼패스트. 그 이름에 담긴 의미가, 페라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마 이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