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5(토)■
(골로새서 1장)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묵상/골 1:24-29)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창조주되시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방금 전의 본문에서 그것을 감동 속에서 전했다.
그런데 그러하신 분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이것만큼 모순처럼 보이는 사건이 없다. 종이 주인을 위해 죽는 일은 있어도 주인이 종을 위해 죽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당하신 고난은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특별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남은 고난이 있단말인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죗값을 치르기 위한 고난이 아니다. 그런 고난은 충분히 채워졌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기 위해 남은 고난이란 없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사랑을 위한 고난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원해서 고난을 감수하신 것처럼 우리도 동일한 원리로 고난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수고와 고난은 각자의 선택의 몫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채우는 일을 "우리가"라고 하지 않고 "나는"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갈꼬라고 하실 때,
이사야처럼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사 6:8)라고 말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짊어지는 자들이다.
오늘날은 이런 사람들이 간절히 필요할 때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과제, 곧 사랑의 수고와 고난을 기꺼이 치르겠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단 한 명도 없을 때 그 교회는 더는 지속되지 않고 흩어진다.
복음을 전하고자 애쓰는 성도에게서, 시간과 돈과 마음을 다 쏟아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형제들에게서, 그리고 형제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여기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채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 복음의 비밀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지금까지의 오랜 세월(만세)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세대의 사람들(만대)에게 감추어졌던 비밀이 있다.
이 비밀은 구약에서 예고되었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감추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도들을 통해서 온 천하에 드러났다. 이제 성도들에게는 비밀이 복된 소식이 되어서 삶을 충만하게 한다.
이 비밀이 무엇인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27) 아멘!
나는 아주 오랫동안 복음을 어떤 지식으로만 인지했다. 그래서 죽어가는 바람에 정신이 몽롱한 사람에게도 율법과 복음의 지식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복음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아야 구원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성령 충만할 때는 단 몇 마디로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받았다.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실체로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버스를 탔을 때 어떤 극단적인 교파에 속한 자매가 내게 전도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하자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구원받은 것과 다르자, 깔깔대면서 그동안 내가 구원받았다고 착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일한 방법, 동일한 대답을 해야만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오히려 그 자매가 구원을 착각한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구원이다. 모든 지식은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루터처럼 로마서를 읽다가 구원받은 자도 있지만, 브라더 로렌스처럼 눈이 하얗게 덮인 나뭇가지를 보고 구원받은 사람도 있고, 조지 뮬러처럼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구원받은 사람도 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의 한마디 질책으로 꼬꾸라졌고 구원을 받았다. 모두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바로 그리스도를 깨달은 것이다.
◆ 완전한 자로 세워짐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과거에 아주 쉽게 '성화(聖化-sanctification)'를 의미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성화란 인간의 성장처럼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낳았다.
성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차피 주님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되고(고전 13:12), 모두가 그리스도와 같아진다고 했다(요일 3:2).
만일 모든 사람이 열심히 뛰지만 결승선에서는 모두가 일렬로 서게 된다면 그동안 열심히 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성화는 시간과 비례하는 것일까?
막상 내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주변을 살펴보아도 성화는 시간과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랫동안 예수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화는 커녕, 오히려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교만과 고집으로 꽉 찬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러했다. 물론 신학 지식은 많이 늘었다. 그러나 그것이 성화와 전혀 비례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신학지식과 정확하게 비례한 것은 교만뿐이다.
만일 성화가 영적 키가 크는 성장이라면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키가 줄어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키가 줄어든 성화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성화란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정도와 비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란, 많은 시간을 걸쳐서 끊임없이 성장하여 먼 미래에 도달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매 순간 완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 살아가는 그런 신앙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바울은 육신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영을 따라 사는 자들을 '온전한 자'라고 부르기도 했다(고전 2:6)
만일 성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면 매 순간 우리는 깨어있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한다.
완전한 자로 세워지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이 지식은 신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다. 이 둘의 차이를 모른다면 무조건 하나님께 나아가서 무릎꿇고 기도하라. 그리고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구하라.
그리스도를 더욱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더욱 그와 연합을 추구하게 된다.
주님, 주님을 더욱 알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매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과 수고를 내 육체에 기꺼이 채우겠습니다. 더욱 깊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