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43
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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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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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QcAHDHHQ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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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난 세월 뒤돌아보니 별거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많이들 불러주셔서 강의를 참 많이 다녔습니다. 자꾸 밖으로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공동체 생활에 소홀하게 되고, 어느 순간 강의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더군요. 할 수 없이 일정 기간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정중히 거절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아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꼭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시며 이해를 해주셨는데, 한 수녀님께서는 정말이지 집요하셨습니다. 전화를 열 번도 더 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찾아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속으로 웃으면서 수녀님의 이미지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끈질긴 과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불의하고 매정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가 한 판 붙었습니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더 집요하고 고집스러웠습니다. 결국 과부가 판정승을 거두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끈질김이었습니다. 결국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사실 과부는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기 위해 뇌물을 제공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몇 번을 거절당한다 할지 라고, 가고 또 가고, 청하고 또 청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투견장에 들어간 큰 불독 한 마리처럼 말입니다.
그녀의 집요한 압박에 재판관은 점점 그녀 존재 자체가 귀찮아지게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찾아와서 징징거리며 졸라대니, 스트레스가 점점 치솟았습니다. 과부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재판관은 마침내 두손 두발 다 들고 만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김 앞에 불의한 재판관도 두 손 두 팔 다 들고 도움을 주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끈질기게 간청할 때 절대로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때로 우리를 좀 기다리게 하실지언정, 때로 우리의 조바심을 유발시키실지언정, 절대로 우리의 청을 거부하지 않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청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손톱만큼의 의심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밤낮으로 청하고 또 청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끈질기게 청하고 물고 늘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절한 기도 지향들을 읽어보며, 어이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좀 더 큰 기도, 더 하느님 뜻에 맞갖은 기도, 더 영적인 기도로 성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빨리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통과 십자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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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fj5XlghY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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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은 맞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더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마지막 때가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 땅이 멸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이 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곳에 ‘독수리’가 날아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이 사라지면 시체가 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모이듯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종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종교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기도가 다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에크디케오’의 뜻은 ‘변호하다’, ‘보복하다’, ‘벌하다’, ‘복수하다’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 19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수하다”로 해석했습니다.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적대자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분명 ‘복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적대자에게 복수를 실현하여 나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토록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대상인 ‘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혹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교만과 돈’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복음말씀으로 바로 다른 사람보다 정의롭다고 여겨 타인을 깔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적, 혹은 원수라 여기는 ‘삼구’(三仇)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구에게 벌을 내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삼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삼구 교리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마키나’(2015)는 천재 과학자 네이든이 자신의 회사 직원 칼렙을 자기 연구실에 불러 자신이 만든 A.I. 로봇 에이바를 실험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네이든은 칼렙이 애정에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가 그를 유혹해 탈출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칼렙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인공지능 로봇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인 칼렙이 이용당하여 인간인 자신보다 예쁜 로봇을 더 믿고 더 애정을 두는 것을 보며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로봇에게 유혹당하게 만들고 인간보다 그것을 더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그러나 칼렙은 네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습니다. 이미 로봇에게 유혹을 당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안 네이든은 실험을 마치고 칼렙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에이바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미 칼렙이 문이 열리도록 프로그램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이것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자신이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릅니다. 물론 그 로봇은 자신을 도와준 칼렙도 가둬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립니다. 칼렙이 진짜 누가 적인지 모르게 에이바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실험을 했던 네이든의 운명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지금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비자 교리를 몇 달 동안 받아도 내가 누구와 싸우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지향이 오히려 싸워야 하는 욕구를 강화하는 것들이 됩니다. 세속적인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네이든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자신을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한 것을 잊고 오히려 자기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삼구 교리에 무관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로마 교리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존 교리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는 이 교리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179문: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 “230문: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 견진은 성령을 청하는 성사이고 기도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성령을 얻고 성령으로 삼구와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가 명확했던 것입니다.
또 김대건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한 마디막 편지에서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우리를 계속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명예와 재산과 쾌락’(마귀-세속-육신)과 같은 다른 애착을 둠으로써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되고 마니까요. …”(「자서전」, 제25장, 21항 )
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즐거움,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나온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명확히는 아니지만, 세 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네이든이 칼렙과 에이바에게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자아와 삼구의 존재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리서에서 삼구를 빼면 벌어질 일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게시되시듯, 삼구를 통해 사탄이 풀려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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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8,1-8 :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예수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거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고 하신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그 여자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과부의 끈질김이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이란 두 나뭇가지를 변화시켜 그 성격과는 맞지 않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했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정의가 우리를 변호하고 은총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게 하면 억눌린 자들은 정당한 보상으로 정의의 열매를 받고, 환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총의 열매가 생기를 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의로움의 말씀을 팔아넘기고 많은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버리게 만든다. 악마의 손에 놀아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입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예고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고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영들을 따라가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1티모 4,1-2)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풍성히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며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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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례미사를 준비하면서 고인의 관을 닫으려 했습니다. 고인을 위한 미사에 집중하기기 위해서 그렇게 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족 중에 한명이 반대했습니다. 마지막 미사이고, 곧 땅에 묻히니 관을 닫지 말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의 바람을 듣고, 관을 열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도 미사에 참례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미사에 집중하려는 원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족이 원하면 미사에 집중이 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다른 종교의 장례 예절을 잠시 해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 또한 유족이 원한다면 반대할 것도 없다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인과 유족들의 청을 무시하시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모두 털어버리고,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영성을 강의하는 김길수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글의 제목은 ‘성삼문의 죽음과 김대건의 죽음’입니다. 성삼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중에 한 명입니다. 성삼문이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형장에서 그가 지었다는 절명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절명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黃天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둥둥둥 북소리 울려 내 목숨을 재촉한다.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 하누나. 저승길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내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에게 인생의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충절을 드러내는 죽음이었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에 앞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들으라. 이 환란과 고난도 주의 허락 없이는 있지 않으니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서라도 삼가는 마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켜라.” 주교님께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교님, 우리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 일찍이 어린 자식을 이국만리에 보내고, 믿음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의지할 곳 없어 거리를 헤매는 거지가 되었다고 하나이다.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드리고 저는 편안히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나는 간다. 이제 환란도 고통도 박해도 없는 하느님의 기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성삼문과 김대건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허무’고 하나는 ‘새 출발’입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을 위해서 죽지만 그 소신이 준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인 허무입니다. 김대건의 죽음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새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을 상실하면 화가 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잠시 소유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이웃, 물건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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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따금, 기도에 임하는 제 자신을 뒤돌아보면 나의 기도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약 35넌 전 신학생 시절에는 남북통일에 대해 기도를 드린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만해도 남북통일에 대해서 일말의 작은 희망도 갖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희미하나마 인간적으로 희망이 감지될 때에만 이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는 틀림없이 저의 잘못된 믿음의 소치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끝나는 오늘 복음 말씀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권세 당당한 재판관이지만,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끈질기게 졸라대는 힘없는 과부에게 백기(白旗)를 들고 맙니다.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사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일 때 이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이 희망이 기도를 더 적극적으로 드리는 데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더욱더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을 두어야합니다.
희망하고 의지하는 나를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방법대로 나를 거두어 주십니다. 결국 나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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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윤지종 미카엘 신부님]
<어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하나 들어주셨는데, 어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주 고약한 재판관이 한 사람 있었는데, 어느 날 과부가 찾아와 그에게 억울한 일을 호소하며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늘 그를 찾아와서 졸라대며 성가시게 합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대로 재판을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좋은 뜻에서가 아니라 자꾸만 졸라대니까 더 시달리지 않으려고 생각을 바꿔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 그렇게 지독한 재판관도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니까 성가셔서라도 그 청을 들어주는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오죽 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기도드리면 하느님은 지체없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 기도하기만 하면, 그것을 무조건 다 들어주실까요?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다 이루어 주실까요?.... 글쎄요.
어린 아이들은 보통 부모님께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청합니다. 가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온갖 떼를 다 쓰고 울며불며 그것을 사달라고 조르곤 합니다. 그러면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무조건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것을 다 사 줍니까? 솔직히 어느 부모인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가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대도 그것이 아이에게 맞지 않거나 좋지 않겠다 싶으면, 결코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삶 전체를 보고 아이의 장래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섭섭해 하고 부모님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아이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도 부모들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 주고 싶어 하는 부모 마음처럼 우리를 향한 하느님 마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아이의 미래와 전체의 삶을 생각해서 때론 마음 아프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부모처럼 하느님도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들을 다 들어 주시고 싶으시지만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고작 내 욕심이나 채우고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라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우리 삶 전체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얼마나 좋은 것인지조차 제대로 모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당장 필요한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되면 좋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에게 맞지 않고 결국 나쁜 결과를 빚게 되어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다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매일 사탕 한 봉지만 한 봉지만 그러는데 매일 사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왜 그런 비유를 드시고, 마치 하느님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졸라대면 무슨 기도든지 다 들어주실 것처럼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절대 거짓말을 하실 분도 아니고 쓸데없이 빈 말씀을 하실 분도 아니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용기를 잃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께서 올바른 판결을 해주신다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기도이든지 무조건 하느님께 매달리고 청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이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해주는 그런 어리석고 무책임한 부모같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하느님께서 잘 안 들어주시는 것 같다면,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청해서는 안 되는 그런 것이라든지, 하느님 보시기에 아직 때가 안 되었다든지, 혹은 하느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기도가 여러분의 욕심이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면 실망하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고 부단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여러분의 기도가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기도이거나 사욕을 위한 것이라면 먼저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하시고, 조금 욕심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하느님 뜻에 맞는 합당한 그런 기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사욕이나 채우려는 그런 어리석은 기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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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내가 드리는 기도는...>
오늘 복음의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루카복음에만 있는 고유사료이다. 비유의 소재는 루카가 즐겨 주제로 삼아 보도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의 자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중요한 점은 비유자체의 이야기에 있다기보다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격려에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 기도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종말(8b절)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비유의 내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성가실 정도로 끈질긴 친구의 청에 빵 세 개를 내어주는 비유(11,1-13)를 상기시킨다.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을 어제는 친구가 들어주고, 오늘은 거만한 재판관이 들어줄지언정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b절) 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예수께서는 종말을 기다리다 지쳐 이미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을 내다보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간청하기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11,9)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뿐이다.
이미 지나간 복음에서 인자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표징들이 언급되었다.(17,20-37) 노아의 홍수(창세 6-7장) 때나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그리고 ‘여기’라는 일상(日常) 안으로 종말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다.
일상 안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더욱이 그 날이 언제가 될지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다리를 펴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되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사실 종말의 ‘그 날’이 언제일지 정확히 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만큼 불안하고 힘든 일이다.
알고 있다면 그 날을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서는 두려움과 각박함,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모르고 있다면 넉넉함과 막막함의 엇갈린 긴장으로 불안한 인생을, 그래서 지치고 쉽게 포기할 수도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그 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다.(로마 12,12; 골로 4,2; 1데살 5,17) 우리들 가운데 고통을 받거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오늘’ 기도해 주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오늘’이 가기 전에 바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야고 5,13.15-16) 성령의 도우심으로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다.(유다 1,20) 그것은 하늘나라의 원로들이 향이 가득 담긴 금으로 된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리기 때문이다. 그 향은 곧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이다. 그 때 대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와서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향에 섞어 향로에 넣고 황금제단에 태워 올린다. 그러자 대천사의 손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태운 향의 연기가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묵시 5,8;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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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곧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그중 오늘 <복음>은 전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것으로, “밤늦게 찾아온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루카 11,5-8)와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루카는 이 비유를 들려주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언제나”, “늘”, “항상” 기도하라”는 ‘중단 없는 기도’, ‘끊임없는 기도’, ‘지속적인 기도’, ‘항구한 기도’(Laus perennis)를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이처럼, “늘 기도하는 것”(1데살 5,17)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 ‘항구한 기도’의 요청 앞에는 “낙심하지 말고”라는 말씀이 붙어 있습니다.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요, 동시에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희망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 안에 기도를 불러일으키시는 분께 대한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이 ‘항구한 기도’는 곧 믿음이 동반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비록 재판관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해도 끈기 있게 간구하는 과부처럼,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에 대한 요청입니다.
이 비유를 마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겠느냐?”(루카 8, 7)
이처럼, 기도는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 필요한 것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믿음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하면서 기도하는 실천적인 믿음입니다.
사실, 진정 하느님을 믿는 자만이 하느님께 희망을 둘 수 있고, 자신을 철저히 주님께 의탁하며, 더욱더 간절함으로 항구하게 기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음을 바로 그 분께서 우리의 기도를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곧 ‘끊임없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끊임없는 기도’는 끊임없이 그분과 관계 맺는 일이며, 그분과의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충만해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그분을 맞아들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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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가 18,1)
주님!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해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게 하소서.
의혹과 조바심에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하소서.
어둔 밤마저도 몰아가는 당신을 믿게 하소서.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항구히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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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8,1)
<끊임없이 기도하는 믿음!>
오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었을 과부 한 사람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계속 졸라댑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 17,4-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의 부르짖음을 물리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간청(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이 말씀은 끊임없는 간청(기도)은 '믿음의 행위'이고,
'믿음 안에서 나온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필요할 때만 적당히 간청하고 마는 믿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배교하는 믿음은 아닌지요?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들어주시는 분을 굳게 믿으면서 단지 '청할 뿐'입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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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루카 18,1-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
밤낮으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내편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을
있는 그대로
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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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여름의 막바지에 휴가를 떠났었습니다. 특별히 부친상을 치르면서 휴식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충북 단양에 걷기 좋은 길들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푹 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동시에 많이 걸으면서 몸도 마음도 회복할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성지에서 출발해서 막히는 서울 올림픽대로를 타고 쭉 가다가 드디어 고속도로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교통 체증이 심했기에 첫 번째 휴게소에 들어가 쉬면서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지갑이 없는 것입니다. 급하게 떠나느라 지갑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돈 한 푼 없고, 신용카드도 없어서 밥 한 끼 사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2시간 갔던 거리를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충북 단양까지는 8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무조건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챙겨야만 합니다.
하느님 나라 가는 것도 입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가겠다고 말하면 그만일까요? 꼭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난관에서도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오만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가난한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과부는 돈도, 그리고 권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의지할 때가 없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어떤 공정한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기게, 그리고 성가시게 재판관을 조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끈질긴 노력을 통해서 이 여인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시지요.
지금 나는 과연 어떤가요? 나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는 안돼’라는 포기의 마음으로 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가난한 과부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님 앞에 나가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챙겨야 할 한 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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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
혼자 휴가 가는 것은 참 좋습니다. 사제로 살기에 많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오랜만에 혼자의 시간을 가지며 침묵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식당에 들어갈 때 깨닫게 됩니다. 휴가 중이라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데, 대부분 2인 이상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만의 장점도 있지만 분명 단점도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요? 장점과 단점의 조화 속에서 사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장점만을 보면서 기쁘게 살고, 또 다른 이는 단점만 보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휴가 중에 유명한 맛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침부터 계속 걷다가 오전 11시 20분쯤 그 식당에 갔더니 벌써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딱 한 자리가 남아 앉았는데, 그 뒤 더 많은 사람이 밖에서 대기하는 것입니다. 직원이 없고 가족이 함께하는 식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많아져서 바빠지니 싫은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습니다. 화도 자주 내서,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손님들이 그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지을까요? 힘들다는 단점만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와 내 주위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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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카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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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
-기도가 답이다-
“땅의 행복은/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별들
가득/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만 20년전 “땅의 행복” 이란 시詩가, 정원 잔디에 잠시 누워 있는 동안 떠올랐습니다. 날씨가 초겨울에 접어든 듯 쌀쌀하지만 하늘은 맑고 별들은 총총한 밤입니다. 바로 기도의 은총을 상징하는 시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기도할 때 마음 가득 담아지는 하늘 은총에 끊임없이 사랑의 꽃들로 피어나는 행복한 인생입니다.
선택하지 못할 타고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 “늙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만 결코 유쾌할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너무 자명한 객관적 팩트(사실)입니다. 누구도 선택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이자 늙어감이요 죽음입니다. 이런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은 내 영역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께 맡겨야 할 하느님 영역입니다.
하느님은 내 선택할 수 없는 주어진 것들, 타고난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책임을 묻거나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요 믿음입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이나 부모를, 환경을 탓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것만큼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반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無窮無盡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좋은 선택으로 습관화할 때 습관은 성격이 되고 성격은 복된 운명이 됩니다. 어제는 “하느님이 답이다.” 였는데 이런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보다 큰 행복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선택이듯 행복도 선택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기도가 답이다-”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 역시 우리의 선택입니다. 기도든 삶이든 최종 승자는 항구하고 간절히 노력하는 자에게 돌아갑니다. 기도의 복음이 루가 복음입니다. 기도하는 예수님 모습이 참 많이 소개되며,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많은 루카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가르치는 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바오로 서간 역시 끊임없는 기도의 선택을 많이 강조합니다.
“희망중에 기뻐하며 환난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12,12)
“여러분은 늘 성령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에페6,18ㄱ)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콜로1,3)
“그 때문에 우리는 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2테살1,11ㄱ)
제가 가장 많이 써드리는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가훈家訓이나 내 삶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도 참 좋은 성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도하며 기쁘게 감사하며 살 때 하느님께서도 감동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끊임없는 기도에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기쁨이자 감사입니다. 새삼 기도처럼 기쁨도 감사도 선택이자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기쁨, 감사를 선택하여 영적 승리의 삶을 사는 자가 지혜로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입니다.
항구히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내 아쉬워서 기도하는 것이지 하느님은 전혀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기도할수록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됨으로 하느님의 뜻을 잘 깨닫게 되어 무엇이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알게 되니 저절로 단순소박한 삶입니다. 마침내 하느님 뜻과 내 뜻이 일치되어 하느님 뜻대로 기도하게 되어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끊임없는 기도 역시 영적 훈련입니다.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일정 장소에서 일정 시간,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는 물론 명상기도나 비움기도, 향심기도나 반추기도등 무엇이든 끊임없는 기도를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영적 훈련과 더불어 늘 깨어 있는 삶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답입니다. 하느님과의 사랑과 생명의 소통인 끊임없는 기도가 답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기도할 때, 하느님 뜻에 따른 탄력 좋은 믿음과 삶도 선물로 받습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 좋은 믿음의 삶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즉각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내 하느님을 선택하기에 앞서 이미 하느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내 자신의 기도와 믿음 생활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참으로 밤낮 부르짖으며 기도하다 보면 마침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게 되고 하느님은 당신 최고, 최상의 방식으로 때에 맞게 응답해 주십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기도와 믿음의 자세로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유일한 선택입니다.
반대의 묵상도 참 깊고 흥미롭습니다. 끈질긴 과부를 하느님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우리 사람으로 바꿔 묵상해 보는 것입니다. 끈질긴 과부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의 사랑으로 응답할 때 까지 결코 물러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났지 복음의 항구하고 간절하고 끈질긴 과부처럼 하느님은 당신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사람인 우리를 결코 끝까지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회개로 응답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하느님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지혜서는 기도 은총을 통한 우리 삶의 내외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주님, 그들은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대로 기도하는 지상 순례 여정중인 우리 교회 공동체에 내려 주시는 주님 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뜻에 따라 성공적 순례 여정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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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자세와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에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많은 경우 기도한 내용에 대해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해서 기도를 중단하거나 분노하며 다른 신(?)을 찾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지요. 하지만 기도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어느 부족의 기도 성공 비결처럼, 이루어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줄곧 드려야 하는 겁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비유 속 과부가 오만하고 무심한 재판관을 줄곧 찾아가 졸라댑니다. 누군가와 분쟁에 휘말린 듯한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대개 재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자기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길 바라지만 그녀는 다릅니다. 올바른 판결의 수혜자가 자신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서일지 모르지만 재판이란 모름지기 끝까지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되기 마련이지요.
"올바른 판결"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은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우리의 바람이 신앙과 사랑, 공동선에 합치되고 또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우리 각자의 소명과도 일치한다면 그 기도에는 반드시 올바른 응답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하물며 사람도 인내와 끈기로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마음이 움직이는데 하느님은 어떠시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아버지는 절박한 처지에서 부르짖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며 마음을 다해 도와주는 분이심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적 구심점인 파스카의 밤이 언급됩니다.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5)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시고 역사에 개입하신 장면이 펼쳐집니다.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그와 맺으신 계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다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탈출 2,23-25)
이 내용이 바로 오늘 지혜서 대목이 있게 된 배경이고, 아울러 복음에서 말씀하신 기도의 응답에 관한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네 신앙 역사의 원천이고 정점인 파스카가 그들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며 이 믿음을 통해 정체성을 다집니다.
"그들은 ...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지혜 18,9)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에 기뻐 뛰며 그분을 찬양합니다. 파스카를 겪으면서 진심으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는 가장 절박하고 처절했던 순간에 자신이 주님께 올려드렸던 울부짖음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기도하는 내용을 제대로 알면서 지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만이 자기 기도가 응답을 받았음을 인식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기도하는 바가 무엇이며, 기다리는 응답은 또 무엇인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당장은 하느님게서 우리를 잊으신 듯 더딘 응답에 갈망만 깊어가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의 원체험이 된 각자의 파스카 순간을 기억하며 희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좋겠지요. 인내와 끈기로 주님만을 향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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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6woJLHPp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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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삶이 있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가 있기에
삶은 더더욱
풍요롭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해답을
주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다.
참된 기도는
절실하기에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는
기도는
우리의
삶 자체를
비추어준다.
그래서
기도는 생활이며
생활은 기도와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기도로 만나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기도로 만나는
사랑의 일상이다.
기도가 없으면
내적 기쁨도 없다.
모든 것의 출발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기도이다.
끊임없는 기도로
우리 자신이
바뀌게 된다.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평화를 체험하게
한다.
이와같이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사랑이며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
마음 자세를
낙심에서
희망으로
바꾸어놓는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시다.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과의
내적교감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놓는
기도이다.
기도로 하루를
새롭게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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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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