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셋째주 메시지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예수님(부제 억울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 만들기)
요한복음 5장 7부 강해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5:30-32
요절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공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입니다. 억울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공의가 있어야 사랑이 썩지 않습니다. 잠언에 보면 공의가 있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의 세로 막대가 사랑이라면 가로 막대는 공의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처럼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공의롭다 보면 사랑을 하게 되고, 사랑하다 보면 공의롭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억울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요? 도대체 공의는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은 심판자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보내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듣는 대로 심판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보내신 이가 18번 나옵니다. 우리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셔 온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심판하지 않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대로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지 않은 사마리아 사람을 곧바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목박은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회개치 않으면 재림의 날 심판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공의로운 것일까요? 공의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의 공의와도 다릅니다. 제가 아는 범위에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공의는 어떤 것인가 몇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공의는 하나님의 법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십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말씀에 따라서 판단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속 뜻을 알아야 합니다, 탐심도 우상숭배입니다. 미움도 살인입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간음입니다. 노동하여 자립하지 않으면 도둑질입니다. 자족하지 않고 불평하면 탐심입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입니다. 팩트보다 중요한 것은 문맥 속에서 진실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의료대란으로 응급실 뺑뺑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료대란 전에도 빅5 병원에는 응급실 뺑뺑이가 있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여 의료대란 때를 보는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교회는 규약이 있습니다. 선교사가 오면 지원하는 법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재산을 처리하거나 후임자를 세우는 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법에 따라서 우리 교회를 운영해야 합니다. 내가 가깝다고 더 많이 지원하고 나에게 잘 못 대한다고 덜 지원하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둘째,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평등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외모지상주의’라는 웹튠을 보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똑샅은 사람인데 낮과 밤의 외모가 달라집니다. 외모에 따라서 사람들이 대하는 것이 천지 차이입니다. 이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외모는 생김새입니다. 외모는 학력이나 권력이나 돈도 포함됩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교회의 성도수로 목회자를 차별 대우하거나, 제자양성을 많이 했느냐 안 했느냐로 목자를 차별 대우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본인이라고 다 악하고 조선이라고 다 선하다는 선입견도 버려야 합니다. 차인표의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에 보면 일본인 중에서 위안부에 끌려가는 가는 것을 반대하는 일본 군인이 나오고 위안부에 끌려가는 것을 도와주는 조선 사람이 나옵니다.
셋째, ‘나’와의 관계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그 사람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나와의 관계로 보면 원수입니다. 다윗 중심으로 보면 그를 죽이는 것이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로 보면 사울왕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종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그를 죽일 수 있응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선대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압논 형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겁탈한 것을 알고 분노하였습니다. 참다가 이 년 후에 압논을 죽여서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공권력으로 압논을 처단해야지 자신의 처단해서는 안 됩니다. 공권력이 미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원수 갚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공의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로 돌아오는 길을 막은 사람이 너무 미워서 그 집 개를 독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 집 개를 독살했다면 그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나도 또 죄를 지은 것입니다.
넷째, 공의는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동기와 목적을 보아야 합니다. 똑 같은 행동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가 위해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중심이 자신에게 있었고 다윗은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헌금한 액수만 봅니다. 액수가 많으면 많이 헌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 재산 이천 원을 드린 과부가 백만 원을 헌금한 부자보다 더 많이 헌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름 있는 사대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하고 헌금이 많이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할 것 같다고 하십니다. 작은 교회인 빌라델피아 교회를 큰 교회라고 하고 핍박받는 서마나 교회를 살아 있는 교회라고 하십니다. 한 목동이 자신이 번 돈의 십일조를 드리고 남은 돈의 전부를 헌금하였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몇 억을 헌금한 것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다섯째, 결과보다 과정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결과만 보고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과정만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착하고 충성되므로 똑 같은 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악하고 게을러서 심판을 받습니다. 세상은 결과인 열매만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무를 보십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성경책만 던지고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큰 상을 줍니다. 스데판도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므로 하나님의 큰 상이 있습니다.
여섯째, 과거보다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를 지었어도 지금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시고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것을 믿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현재로 판단해야 합니다. 처음보다는 끝을 보아야 합니다. 과거 예수님을 믿었어도 지금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가룟유다는 과거 예수님을 잘 믿었으나 끝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세례 마태나 사도 바울은 과거 예수님을 잘 못 믿었으나 끝에는 잘 믿었습니다. 다윗은 과거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고 새로워졌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죄를 지은 사람을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한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2) 억울할 때 공의로 심판하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의 증거는 참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증거를 한다면 참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거하시니 그 증거가 참됩니다. 예수님은 공의롭게 판단한다는 것은 참됩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공의롭지 못한 현실로 차별당할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아시고 반드시 공의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이 공의롭게 판단하신다는 것을 믿고 때로는 억울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대학와플을 하는 손정희씨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옷장사를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중간 업자가 현금을 가로채고 어음으로 거래하다가 부도내고 도망갔습니다. 그는 재판할 돈이 없어서 재판을 포기하고 억울하게 채무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 부모님이 믿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가 교회에 가자 딸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딸이 새벽기도 가도록 교회 근처로 이사도 갔습니다. 자신도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였습니다. 장사 밑천이 없는 그는 리어커 한 대를 사서 겨울에는 붕어빵 장사를 하고 여름에는 와플장사를 하였습니다. 매일 주님께 만원씩 헌금을 1천 번 드렸습니다. 매일 교회에 갈 때마다 새벽기도를 하며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청소부인 줄 알고 화장실에 화장지가 없으면 그녀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는 너무 억울하고 슬펐습니다. 하늘을 보며 울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안다” 공의로 판단하실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억울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상주시고 벌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억울함을 아시고 갚아주셨습니다. 그가 먹기 위해서 만든 와플이 불티나게 팔리고 이제는 대학와플 프랜차이즈를 내고 그 대표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손정희씨처럼 공의롭지 못한 판단을 받아서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공의로 판단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다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불공정한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안고 살아갑니다. 인터넷 뉴스를 보면 ‘화나요’에 가장 팒은 공감 표시를 합니다. 묻지마 살인도 그런 분노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억울해하지 말고 원수 갚으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아시고 다 갚아주십니다.
나도 억울한 일을 당하여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로 인하여 너희를 박해하고 욕하면 복이 있다는 말씀을 잡고 하나님이 상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억울함을 많이 갚아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갚아주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 공의롭게 행하며 억울할 때 공의로 판단하실 하나님을 믿자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공의와 기쁨과 평화가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공의롭게 살아야 억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공의롭게 재판하고자 재판할 때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삼심에 걸쳐서 판단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완전히 공의롭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공의롭게 판단하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섣부르게 판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잘못 판단하면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 공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공의롭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그런 노력을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공의롭지 못한 판단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억울한 것을 배나 갚아 주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억울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5장 7부 강해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5:30-32
요절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복음 5장 강해 7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