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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감사와 기도
삼하 7:18-29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23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24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25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7:18-29 / [다윗의 감사기도] 다윗이 나단의 예언을 듣고 성막으로 들어가 법궤 위의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시는 여호와 앞에 꿇어 앉아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저와 제 후손을 그토록 귀중하게 생각하시고 저를 이런 자리에까지 높여 주셨으나 제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제게는 그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19) 그런데도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제 더 큰일을 계획하시고 먼 후손들에게까지 좋은 일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주님,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씀을 주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는 저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21) 주께서 저를 먼저 사랑하시어 주님의 일을 하도록 불러 세우셨고, 이재는 주께서 약속하신 일을 모두 그대로 이루어 주실 줄 확신합니다. 22) 나의 주 여호와여! 저는 오직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들어온 모든 사실이 `주님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진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23) 또 이 세상에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은 족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노예생활에 시달리는 백성을 해방시켜서 자기에게 딸린 백성으로 삼으신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은 이런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크고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주셔서 주님의 위대한 성호를 온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주께서 이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오늘날까지 보호하시고 그 앞에서는 다른 민족과 다른 신들을 모조리 쫓아내 버리셨습니다. 24) 온 세계의 주인이신 여호와여, 주께서 그토록 놀라운 일들을 베푸시고 이스라엘을 영원히 주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주께서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25) 그러므로 이제 주께서 저와 제 후손을 위하여 약속해 주신 말씀을 영원히 그대로 이루어 주소서! 26) 그러면 주님의 이름이 어느 시대에나 영원히 찬양받으실 것이며, 세계 만민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온 세계의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또한 이 종 다윗의 왕조도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원히 존속할 것입니다. 27) 온 세계의 주인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여, 주께서 이 종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제가 감히 주께 이런 기도를 드릴 담력을 얻었습니다. 28) 여호와여, 주님은 진실하신 신이시요,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주께서 바로 제게 위대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29) 그러므로 이제 제가 비오니, 이 종의 왕가에 복을 내려 주셔서 제 후손들이 언제나 끊임없이 제 왕위를 계승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이것은 주께서 약속한 것이니 저의 왕가가 영원히 복받을 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18-24) 본문 전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총 10번 나옵니다. 다윗은 그만큼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 아닌 종으로서 서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누구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18). 자신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주신 은혜도 감사한데 이것을 적게 여기시고 다윗 가문의 먼 미래의 약속까지도 주셨냐고 감사의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있습니다.(19) 20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속마음은 우리 가문이 사울의 가문처럼 망하지 않을까? 그것이 항상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아셔서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다윗의 마음이 시원했을까요? 자신의 은밀한 속마음을 다 아시고 딱 맞는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 감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뜻대로 이 큰 일을 행하셔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21). 그러면서 22-24절까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25-29)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25).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셔서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이게 해주시고, 다윗의 집이 견고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26). 하나님이 자신의 귀를 여시고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는 약속을 주셨기에 이 약속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7). 그리고 28, 29절에서 역시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반복해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도를 했는지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감사가 충만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면 하나님을 더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의 선순환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한 마음을 품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약속을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감사하며 약속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높여 드립니다.
적 용 : 여러분의 기도에는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까? 성숙한 기도는 감사와 간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나의 기도에 대하여 나누어 봅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을까요? 들음에 있어서는 준비된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서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에 대한 성경 속 가르침이 매일같이 나의 속사람은 내가 읽고 보고 들은 것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가고 있으니 성경묵상처럼 귀한 것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으리.
< 설 교 >
다윗의 기도
삼하 7:18-29
❚가정을 위한 기도
전에 제가 들려드린 이야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재방송하지요. 어느 믿음 좋은 여집사님이 금식기도를 하다가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이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어 봐라” 하고 시험합니다. 여집사님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사건이 생각나서 “사탄아 물러가라!” 잘 이겨냈습니다. 이번에는 마귀가 “너, 나한테 딱 한 번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다 너에게 주겠다. 네가 원하는 금은보화 모든 명예 권세 다 주겠다”고 시험합니다. 믿음 좋은 집사님은 이번에도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이겨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탄이 이렇게 시험을 합니다. “그럼, 나한테 딱 한 번만 절하면 재수하는 네 아들을 일류대학에 떡하니 합격시켜 주겠다.” 그 믿음 좋은 여집사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사탄에게 넙죽 엎드려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우스갯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 참, 하여간에 대학이라면...” 하고 쓴웃음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자식이 소중하고 대학이 중요하면 이런 이야기가 다 나왔겠습니까? 저도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이야기가 마냥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더군요. 제가 사탄에게 넙죽 절은 안 할지 몰라도 이 이야기에 공감이 다 가더라니까요? 대학뿐이겠습니까? 결혼, 직장, 건강 등등 자녀의 문제는 늘 우리의 마음속에 가장 깊이 들어있는 중요한 1번 문제고, 또 가장 큰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자녀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 가정 전체, 가족들 모두에 관한 문제는 우리 인생에서 누가 뭐라도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지요.
제가 지금까지 목회 하면서 발견하는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가 기도할 때, 특히 월삭기도회 같이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연속으로 기도할 때 나타납니다. 다른 제목으로 기도할 때도 통성으로 소리 높여 기도하지만 유독 이 제목을 가지고 기도할 때는 더 크게 기도하라는 소리를 안 해도 저절로 기도가 커지고 높아지는 그런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 기도제목이 뭘까요? 다 아는 것처럼 ‘가정을 위한 기도’입니다. 내 가정을 위한 기도, 내 가족과 가문을 위한 기도, 그 중에도 특히 ‘자녀와 자녀손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유독 여러분의 목소리가 커지고 더 뜨겁게 기도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가문과 가족과 자녀와 자녀손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이자 최대의 기도제목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가정은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겁니다. 세상에 가정을 가진 모든 사람의 1번 기도제목은 당연히 내 가정과 자녀를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가정을 위해, 가족과 자녀를 위해 열심히 제일 먼저 기도하는데 도대체 어떤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일까? 어떤 기도가 가정과 자녀를 위한 가장 모범이 되는 기도일까? 이것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자 최고의 기도제목인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좀 더 기도를 잘 하고,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가 꼭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기도, 그 세 번째 시간으로 다윗의 위대한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온 다윗의 기도가 바로 가정을 위한 기도, 기족을 위한 기도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기도입니다. 그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우리 가정을, 우리 가족과 자녀를 크게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받은 복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기도는 바로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 왕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이요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드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2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우리가 옛날 읽던 개역성경에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평가, 이런 칭찬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은 다윗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가장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상 16:7 말씀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키나 생김새나 직업이나 학식 같은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당연히 남의 외모와 외적인 조건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 즉 우리의 심장, 우리의 마음, 속사람을 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의 속사람, 그 중심을 들여다보시니까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이 이새네 집 여덟 번째 막내아들, 형들 일곱은 다 집에서 편안히 밥 먹고 있을 때 혼자 들에 나가 양떼를 치던 천덕꾸러기 막내 다윗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기로 마음먹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 마음에 꼭 든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하나님은 기뻐하시면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이런 축복을 해주십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사무엘하 7:12~13 말씀을 읽겠습니다.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여기서 “네 몸에서 날 네 씨”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다윗만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솔로몬을 축복해 성전을 건축하게 하고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튼튼히 세워주고 책임져 주겠다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아들 대뿐 아니라 그 아들, 아들의 아들, 이 가문과 후손 전체를 영원히 왕으로 세워 견고하게 지키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놀라운 축복을 우리 하나님께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의 기도
자,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후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 사무엘하 7:18~29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인 것입니다. 설교 첫머리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기도가 바로 우리 가정을 위한 기도, 우리 가족과 자녀와 자녀손을 위한 기도의 모델이라는 것이지요. 그 내용을 한 번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이 다윗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심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22절부터 24절까지 읽읍시다.
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23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24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위대하시니 이 세상에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나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윗은 그 다음에 출애굽 사건과 여러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예로 들면서 세상의 어느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영원히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그런 나라가 어디 있겠냐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자녀를 위해 간구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지금까지 보호하고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리 가정이 믿고 의지할 유일한 신이며 유일한 복의 근원이시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세상에는 하나님 안 믿는 가정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가정을 도울 수도, 복 주실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한데 문제는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만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우리 가정을 보호하고 복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그런 가정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어느 집이 그렇다는 거야? 그럼 교회 다니면서도 하나님 말고 다른 신도 믿는다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종교에 기웃기웃 거리는 가정도 있습니다.
교회 가면 복 받는다더라 해서 교회 다니다가 부처님이 복 주신다더라 하면 절에도 가고, 점도 치고 사주팔자 관상도 보는 그런 다신교(多神敎) 가정이 세상에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더 위험한 것은 이런 다신교는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도 믿지만 역시 돈이 해결해주고, 명예나 권세가 해결해주고, 역시 빽이 든든해야 그 사람이 해결해준다는 생각을 하는 가정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집은 더 많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신앙을 본받기 바랍니다. 다윗의 기도를 본받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가정을 세우신 분이다. 하나님만이 우리 가정과 가족과 자녀를 보호하고 도우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 가정을 복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이런 신앙으로 무장해야만 우리 가정이 하나님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릴 줄 믿습니다. 우리가 가족을 위해 그 어떤 간구와 기도를 하기 전에 가장 먼저 이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라고 인정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다윗의 기도의 특징은 감사와 겸손의 기도라는 점입니다. 본문 18~19절을 봅시다.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다윗은 나와 우리 집을 지금까지 지켜주신 은혜에 먼저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나와 내 가정을 지켜주셨습니다. “내가 누구인데 내 집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나를, 이런 내 가정을 지금까지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9절에 나온 것처럼 지금까지 지켜주신 은혜 뿐 아니라 장래의 일까지, 즉 나와 내 가정의 장래까지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와 가정의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과거를 책임지셔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현재도 내 가정을 보호해 주고 계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미래도 책임지고 복 주실 분인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이렇게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복 주심을 믿고 감사하는 기도를 꼭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더 훌륭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감사를 드리면서도 절대 그 복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복 주셔서 감사한데 그거야 우리 집안이 예수 잘 믿어서, 교회 잘 다니고 잘 섬겨서 복 받은 거 아닙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복을 당연시 하는 태도입니다. 감사는 하지만 내가 잘 해서 복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대 하나님의 복을,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 하지 않습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여기서 눈에 확 띠는 말씀이 바로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입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이며 내 가정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못나고 부족한 저희를 여기까지 이르도록 하셨습니까?” 복 받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 같이 못나고 우리 집안처럼 부족한 자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잘 해주시고, 복을 주시냐는 것입니다. 겸손한 기도입니다. 진정한 감사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해도, 우리 집안이 제 아무리 교회 잘 섬기고 충성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아니,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한 은혜는 없습니다. 결코 내가, 우리 집안이 복 받을 만 하다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다윗처럼 겸손하게 “하나님, 어찌 이 못난 자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이 부족한 집안을 이렇게 복 주십니까? 정말 황송할 따름입니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이런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그 사람, 그 사람의 가정을 하나님이 진정으로 복 주시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다윗의 기도의 특징은 가정과 후손을 위한 간구입니다. 25~26절을 읽습니다.
25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다윗이 마지막으로 뭐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종과 저희 집안이 주님 앞에 영원히 견고하게 설 줄 믿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간구는 29절에 나옵니다.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저는 이 나라의 왕이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 가장이 아니요 내 회사 사장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이 세우신 종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겠습니다. 저와 제 자손들 모두 그런 왕이 되어 영원히 겸손하게 충성스럽게 이 나라를 다스리겠습니다. 가정도 회사도 그렇게 이끌어 가겠습니다. 하나님, 주의 종과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나를 세우신 뜻이 있습니다. 나를 세우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자녀를 낳게 하시고, 내 가정을 지금까지 세우신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그 뜻을 깨닫고 받들어 충성할 때, 그리고 내 가정과 자녀가 “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이 될 때 “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 ”가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가정이 이런 복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족들 모두와 특히 자녀들, 자녀 대대손손이 영원히 견고하게 서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가정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은 쉬지 말고 기도하며 오늘 다윗의 기도처럼 내 가정을 기도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세워가야 합니다. 세상 그 무엇, 돈이나 외모나 건강이나 그 무엇도 내 가정의 기초가 되면 그것이 사라지는 날 가정도 무너지지만 기도의 반석은 우리가 기도를 멈추지 않는 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반석이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의 기도
삼하 7:18~29 / 이재훈 목사
하나님과 동행했던 분들의 기도를 말씀으로 기록해 주신 것은 이 기도들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때로 우리 기도에는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요청만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하는 기도만이 기도의 전부라고 한다면 균형이 깨어진 기도, 하나님과 교제의 축복을 상실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중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경배(Adoration), 둘째, 고백(Confession), 셋째, 감사(Thanksgiving), 넷째. 간구(Supplication)입니다. 하나님 되심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높여드리는 경배와 그분 앞에서 우리의 한없이 보잘 것 없음과 연약함, 부족함, 죄악, 허물을 고백하는 자백,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 우리의 구체적 필요와 사회와 주변의 기도제목들을 올려드리는 간구가 어우러질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다윗의 기도는 기도의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 속에는 찬양과 경배와 고백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간구가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
“그러자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 여호와 앞에 앉아 기도했습니다”(18절).
다윗이 기도하기 위해 택한 장소는 성막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단순한 기도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오래 머물며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기도 내용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오래 머물며 기도한 것은 큰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씩 헤아려보기 위하여 오랜 시간 머물며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큰 문제 앞에서 길어집니다. 아무 문제가 없고 평탄할 때는 기도가 짧습니다. 큰 문제 앞에서 오래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위기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위기도 없었습니다. 가장 풍요롭고, 평안했던 시기가 사무엘하 7장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씩 헤아려 보면서 오랜 시간 하나님 앞에 머물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깊이 되새기고, 헤아리고, 묵상하며 다윗처럼 오래 앉아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여, 제가 누구이며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이 자리까지 오르게 하셨습니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이것도 부족하게 여기시고 주의 종의 집 미래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주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입니까? 주 여호와께서 주의 종을 아시니 이 다윗이 주께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주의 뜻에 따라 주의 말씀으로 이 모든 위대한 일을 하셨고 주의 종에게 알려 주셨습니다(18b~21절).
다윗은 양을 치는 목자에서 왕이 된 신분의 변화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노력으로 성취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사울의 공격을 피해 광야를 도망 다녔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놀라운 신분의 변화로 인하여 다윗이 감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감사하고 있는 내용이 그것뿐이라면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들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감사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다윗의 신분의 변화로 인한 감사는 10중에서 1도 되지 않는 지극히 적은 부분입니다. 더 많은 감사는 또 다른 이유로 인한 감사입니다. 또 다른 은혜로 인한 감사가 다윗의 기도 가운데 풍성하게 넘치고 있습니다. 다윗은 세 개의 수사의문문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제가 누구이며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이 자리까지 오르게 하셨습니까?”(18절), “이것이 주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입니까?”(19절), “주 여호와께서 주의 종을 아시니 이 다윗이 주께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20절)
이 질문들은 의문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의 자리까지 오르게 하신 것부터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에 놀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주목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자신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생각할 때 그 위대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낮아지심, 겸손하심에 다윗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여드려도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표현할 수 없고 기록할 수 없는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정체성과 백향목으로 된 집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주 같은 분이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22절).
‘주 같은 분이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부이며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익숙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삶 속에서 하나님만이 전부인 것처럼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고백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정시대의 왕은 하나님과 같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시고,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권세, 물질, 지위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을 높여드리는 고백이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도 일평생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주 같은 분은 없고 주님만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다윗의 감사기도가 풍성해진 두 가지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는 ‘주 여호와여’라는 호칭이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라는 단어에서 ‘주’라는 글자는 쓴 것은 자신이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는 의식 이전에 하나님께서 왕의 신분을 주신 것이지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쓰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종 된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감사기도를 만들었던 또 다른 핵심 단어는 ‘집’입니다. 이 기도문을 보면 ‘주의 종의 집’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자신의 집에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집’은 부동산이 아닙니다. 기도의 주제가 집입니다. 사무엘하 7장 1~17절까지 일어난 사건이 집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사무엘하 7장의 역사적인 시점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왕권이 가장 평안했을 때입니다. 경제적으로 부강했고, 정치적으로도 평안했습니다. 다윗왕국이 정점을 이루었던 시대입니다. 다윗이 거주했던 집이 백향목으로 된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던 곳은 성막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백향목으로 된 집에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막에 있다면 마음이 들겠습니까? 다윗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윗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막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찾아가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합니다. 나단 선지자도 그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광야를 지나는 동안 백향목으로 된 집을 지어주지 않았다고 불평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의 임재는 집의 크기, 규모, 재료와 상관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는다고? 짓지 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순수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다고 하는 순간 잘못된 신앙으로 흐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단 선지자를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발표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왕조)을 짓겠다”
“내가 사사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던 때와는 같지 않게 할 것이다. 내가 또 너를 네 모든 원수들로부터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할 것이다. 나 여호와가 직접 너를 위해 왕조를 세울 것을 선포한다. 네 날들이 끝나고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자손을 일으켜 네 뒤를 잇게 하고 내가 그의 나라를 든든히 세울 것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집을 세울 것이고 나는 그 나라의 보좌를 영원히 세워줄 것이다”(11~13절).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됐다고 하시며 “내가 너를 위해 집(왕조)을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집은 보이는 집이 아니라 왕조입니다. 히브리어는 단어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저런 뜻이 함께 쓰이는데 집과 왕조를 함께 씁니다. 12절에 나오는 왕조는 솔로몬을 통한 왕조 같은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보좌를 영원히 세워줄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만은 아닙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로 ‘벤’은 ‘아들’이라는 뜻인데, 1대 아들도 벤이고, 2대 아들도 벤이고, 100대 아들도 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몇 대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네 몸에서 나올 네 자손”은 솔로몬도 되고, 솔로몬의 아들도 되고, 그 후의 아들도 되고, 예수 그리스도도 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중심적으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는 말씀에만 “아멘”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나타나는 말씀에 감동하고 무릎을 치면서 성경은 인간 성취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때에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왕조를 세우시고, 후손을 통해 영원한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 계시를 받고 기도합니다. 이 계시가 임했을 때 감격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된 것에 감동해서 하나님 앞에 오래 머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왕이 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전율을 느끼며 감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
“주 하나님이시여, 그러니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해 약속하신 말씀이 영원히 변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영원히 높이며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세워지게 해 주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종에게 드러내며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리라’ 하고 말씀하셨으니 주의 종이 용기를 내어 이런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주 여호와여,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말씀은 진실하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이런 좋은 것으로 약속하셨으니 주의 종의 집에 기꺼이 복을 주셔서 그것이 주 앞에서 영원히 지속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주의 종의 집이 주께서 내리시는 복으로 영원히 복을 받게 해 주십시오”(25~29절).
‘영원’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보좌를 영원히 세워 줄 것이다”라고 딱 한 번 말씀하셨는데 다윗은 그 계시를 받고 영원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가슴에 품고 그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드려지는 기도가 진짜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본성을 통해서 기도할 수 있고, 위기일 때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말씀이 주어질 때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고, 올바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임했을 때 다윗은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리라’하고 말씀하셨으니 주의 종이 용기를 내어 이런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용기를 얻어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다니엘이 금식기도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니엘이 금식기도를 할 수 있게 한 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받은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메대 사람인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왕이 돼 바벨론을 다스린 첫해였습니다. 곧 그가 다스린 지 1년 되던 해에 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을 보고 여호와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연수를 정해 말씀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 70년 만에 돌이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단 9:1~2절).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과 계시를 받은 것을 메모하고 기록한 서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그것을 다니엘이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거기 보니까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다니엘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의 말씀이 임할 때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다윗은 기도 후반부에서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담겨있는 한 단어를 붙잡습니다. ‘영원’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에서 다윗의 왕조가 잘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쓴 단어가 아닙니다. 실제 영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원은 실제적인 영원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주신 분이 영원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하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영원히 계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역사의 시작자요, 심판자가 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영원한 시각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이 왕이 됐다는 것에 감사하고,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는 감사를 뛰어넘어서 자신의 후손을 통해, 다윗의 집을 통해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나라이고, 영원히 복된 나라이며, 영원히 축복된 나라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영원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 이 땅에서 수많은 일을 겪게 되고, 이 세상은 더 절망적이 될 것이며, 전쟁과 기근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진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종말의 예언대로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안전은 바로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다가 가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고, 이 땅에서 우리는 잠시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기도가 너무 중요합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기도, 미래의 은혜를 사모하는 기도가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영원의 시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가졌던 감사, 경배, 그리고 고백과 간구가 우리의 기도 속에도 풍성하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의 감사기도
삼하 7:18-29 / 이희우 목사(신기중앙교회)
자기만 호의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멋진 집을 지어드리고 싶었던 다윗, 그 마음을 나단 선지자에게 전한다. 나단이 기쁜 마음으로 저녁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 “내 집 짓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집을 짓지 않았다고 꾸중하신 적도 없고, 집 지어달라고 부탁하신 적도 없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멋진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생각한 다윗이기에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신다(11~12).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언약을 맺으신다. 핵심은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절), ‘집’이라는 단어로 하나님과 다윗이 서로 사랑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히브리어로 ‘바이트’(בַּיִת), 헬라어로 ‘오이코스’(οἶκός), 이 단어가 7장에 15번은 나오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했던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다윗은 하나님 앞에 앉아 감사기도를 드린다(18),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하기, 나단을 통해 주신 다윗과 그 가문과 나라에 존귀와 평안과 견고의 복을 영원히 주시겠다는 언약이 너무 감사해서 메시지를 받자마자 감사기도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앉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앉은 다윗은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본다. 아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회막의 법궤 앞에 앉았던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서서 기도하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았다. 왕이라서 그랬을까? 서서 기도하든 무릎을 꿇고 기도하든 중요한 것은 겸손한 기도인데 교만한 자세로 보이나?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얼마가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과 긴 시간 함께 하겠다는 태도 같다.
어느 교회 장로가 대표기도를 하는데 담임목사가 좀 짧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그날도 습관대로 기도가 길어졌다. 창세기 아담 하와부터 시작해 가인과 아벨, 300년을 동행한 에녹, 969세를 산 므두셀라, 대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 등을 거론하며 성경 전체를 섭렵하는데 계시록의 천년왕국까지 거창하게 계속 이어갔다. 한 시간을 기도하고 눈을 떠 보니 교인들인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담임목사와 자기밖에 없다. 깜짝 놀라 “목사님, 성도들은요? 이게 웬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담임목사님 왈, “성도들은 노아 홍수 때 다 떠내려갔습니다.” 그랬단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지 성경 지식을 과시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함께하는 것이 좋은 시간이다. 행복이 별거냐? 집에 들어와도 자기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던 아이가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옆에 앉기만 해도 행복이지. 무슨 많은 말이 필요한가?
다윗의 함께하기는 사람을 의식하는 함께하기가 아니다. 영원히 축복해 주신다는 하나님 앞에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앉은 것, 다윗의 감사기도는 하나님과 함께하기였다.
겸손한 기도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18), 하나님은 겸손한 기도를 들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 주시는 분이다.
통일왕국의 왕, 여느 백성들과는 다른 신분이다. 대단한 인물이다. 국민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고 주변국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존재다. 골리앗의 머리를 쳐들고 선 소년 장군 다윗의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블레셋 병사들이 기겁했던 역사적 인물, 한껏 기죽었던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겼다!”고 환호하며 이름을 연호했던 바로 그 다윗이다. 소년 장군 다윗만 대단했나? 아니다. 다윗 제국의 황제가 된 지금은 더 대단하다. 그런데도 다윗은 “주 여호와여”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 왕으로 앉은 것이 아니라 종으로 앉았다는 것이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 자세는 변함이 없다.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29). 계속 ‘주’ 여호와, ‘종’의 집이라 한다. 영원히 말씀을 듣는 종이 되겠다는 기도다. ‘복’자만 보지 말고 ‘주’ 그리고 ‘종’이라는 표현을 봐야 한다. ‘주’ 그리고 ‘종’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나오는 이유는 이게 진짜 복 받은 비결이기 때문 아닐까?
다윗의 기도는 폼 잡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종이 폼 나야 얼마나 날까? 다윗은 그저 “나는 누구며 내 집이 무엇인데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그런다. 그뿐인가? 왕족, 다윗 가문은 이제 이스라엘 최고의 가문이지만 다윗은 “내 집은 무엇이기에”라고 했다. 겸손한 기도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할 때도 겸손했지만(삼상18:18) 왕이 된 지금도 자기 집안에 대해 변함없이 겸손하다.
다윗은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고 감탄하며 기도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대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잘 알았던 다윗, 분석해 보면 볼수록 그의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나오는 겸손이었다.
사실 다윗 정도면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드릴 수 있는 형편이 됐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기 능력이나 재물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뭘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안 것, 주신 복이 감사할 뿐이다. 다윗의 감사기도는 철저하게 겸손한 기도였다.
친근한 기도
흔히 보면 신분 높은 분들은 “목사님 기도해주십시오. 우리는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지만 목사님이 기도해주시면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런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라는 미국의 유명한 작가가 ‘기도’라는 책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기자였을 때 대통령 두 명, 록밴드 U2의 멤버들, 노벨상 수상자들, 텔레비전 스타들, 올림픽 영웅 등 앞에 가기만 해도 주눅 들 만큼 쟁쟁한 인물들을 인터뷰했단다. 무엇을 물어볼지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막상 취재 때가 되면 전날 밤부터 잠을 못 이루고 신경쇠약증과 싸웠단다.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에게 ‘대신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다. 자기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와 2인칭으로 기도한다.
우리말 번역에는 ‘주’라고 되어 있지만 그 ‘주’라고 하는 번역은 전부 ‘You’, ‘당신’을 뜻하는 2인칭의 고백이다. 그만큼 친근한 기도였다는 뜻이다. 다윗은 연속 하나님 앞에서 “당신께서”라고 말씀한다. 우리 문화에서는 좀 건방지게 보일 수 있는 표현이다. 실제로 대표 기도자가 하나님을 “당신”이라 표현하면 듣기가 거북하다. 시를 쓸 때 3인칭 극존칭으로 쓰는 표현을 기도 때 사용하면 ‘하나님이 왜 3인칭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말 2인칭 대명사는 좀 복잡하다. 영어는 누구에게나 ‘You’ 그러면 된다. 대통령이든 할아버지든 손주든 만나는 사람 모두가 다 심플하게 ‘You’, 즉 당신이다. 우리 같으면 혼날 일 아닌가? 잘못하면 꿀밤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남편이 집에 가서 아내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면 “당신이라니?” 그러며 싸우나? 그 호칭에는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다.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 거기에는 2인칭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다윗은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20). 이 말은 “당신 여호와는 당신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당신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마치 사랑하는 부모 앞에 나아가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하나님, 저 하나님 좋아해요. 사랑해요. 하나님, 당신이 제 인생의 최고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사랑하신다는 그 말씀 너무 좋아요.”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을 아뢰고 있다. 그때 다윗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속에서 영혼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22) “하나님, 당신같이 위대한 존재는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가 당신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어떤 신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최고이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어린아이처럼 감사의 찬양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이런 은혜가 하늘에서 부드럽게 내리는 보슬비처럼 우리에게도 지금 내린다. 일이 잘될 때만 내리는 게 아니다. 일이 잘 안 될 때도, 어려울 때도 내린다. 푸른 초장이든 사망의 골짜기든 원수의 목전이든 하나님은 늘 함께 하며, 보호하고 위로하고 공급하신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기억하라. 다윗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고, 행복한 기도였다.
종에게 말씀하옵소서
삼하 7:18-29
다윗이 남 유다의 왕이 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다음에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시켜서 다윗에게 여러 가지 복된 일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8-1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8절에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리라”
9절에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1절에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12절에 “네 후손들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6절에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나 같이 다 좋은 말씀이고 복된 약속들입니다.
다윗은 이 말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이 기도에서 먼저 감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자신의 소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는 모두 열두 절로 되어 있는데 18절에서 24절까지 일곱 절은 감사의 기도이고 25절에서 29절까지 다섯 절은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있는 기도입니다. 감사와 소원의 비율이 7:5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참고가 될 수 있는 비율입니다.
다윗의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을 때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시험에 합격했을 때, 취직이 되었을 때, 승진했을 때, 군대에서 제대할 때, 결혼하게 되었을 때,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기뻐하며 이웃들에게 자랑하고 여기 저기 한턱도 내고... 그런데 그런 것을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영국의 명장인 웰링턴 장군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무찌르고 돌아왔을 때 영국 국민은 환호하며 그를 환영했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여왕에게 개선보고를 드리기 전에 먼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다윗의 기도에는 '말씀'이라고 하는 말이 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어디에 나오는지 차례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 말씀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을 영어로 적을 때는 'The Word'라고 대문자로 쓰는데 모두가 그런 뜻의 말씀은 아닙니다. 동사도 있고, 명사도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word' 'said' 'speak' 여러 가지 단어가 쓰이고 있고, 한문 성경을 찾아봐도 '언(言)' 또는 '설(說)' 여러 글자가 쓰이고 있습니다.
하여튼 한글로는 모두 '말씀'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과 신앙을 연결할 때 감사한 것 가운데 하나가 '말씀'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말씀'이라는 말을 상당히 무겁게 생각합니다. '공자의 말씀'은 조선왕조의 통치철학이었습니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그럴 수 있어?'라고 꾸짖으면 아무리 버릇없는 아이라도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이라고 하면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그런 바탕 위에 말씀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교회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모두가 잘 이해를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로고스'라고 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로고스'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다른 말로도 번역할 수 있었지만 말씀이라고 번역한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 말씀의 역사, 말씀의 중요성,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 말씀과 관련된 것들 중에서 오늘은 다윗의 기도에 나타난 말씀의 교훈을 몇 가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말씀은 장래의 일에 대해서 말씀해줍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라고 하는 말씀은 ‘주님, 이것이 어떻게 사람의 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뜻입니다. 또는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아주 귀한 사람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집안의 먼 장래 일까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장래의 일이 궁금하십니까? 나의 장래, 가족들의 장래, 국가의 장래가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앞날을 알기 위해서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입시철이 되고 선거철이 되면 이름난 점쟁이들의 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선거철에 서로 경쟁자끼리 같은 점쟁이 집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점쟁이의 입장이 많이 곤란할 것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장비를 구입할 때에도 돼지 머리를 앞에 놓고 절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직원을 채용할 때 관상쟁이를 옆에 앉히고 그 관상쟁이의 조언에 따라서 채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업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믿는 성도들 중에도 그런데 출입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성도들이 할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믿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먼 장래의 일이 원칙적 또는 추상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재림을 앞두고 전쟁과 난리, 기근과 지진이 일어난다’ ‘많은 이단들이 출현한다’ ‘선한 일을 하는 민족이나 개인은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는 민족이나 개인은 심판을 받게 된다’ 이런 것들은 다 원칙적인 언급들입니다.
동시에 말씀에는 먼 장래의 일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세계가 앞으로 이렇게 되겠구나!’ ‘내가 앞으로 이렇게 되겠구나!’가 깨달아집니다. 그것도 확실하게 깨달아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먼 장래의 일도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도 말씀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겉으로는 ‘주님께서 나를 잘 아시는 데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속뜻은 ‘제가 더 많은 말을 주님께 하고 싶습니다’ 또는 ‘제가 주님께 말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뜻입니다.
다윗은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뒤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기도’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우리는 ‘설교, 또는 선포’라고 부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것도 다 여기에 속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눈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로 눈만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 관계가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화의 양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관계일수록 대화가 더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말씀을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선포하거나 가르치는 일에도 더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말씀은 더 큰 일을 하게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큰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큰 일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에 대한 기록인데 동시에 말씀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478장 3절에 보면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듯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작사자 바브콕 목사님은 자연을 많이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힘이나 돈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고려 초기의 정치가이며 외교가가 서희 장군입니다. 993년에 거란 장수 소손녕(蕭蓀寧)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말로 담판해서 거란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여러분! 말씀은 사람을 깨닫게 하고 새 힘을 줍니다.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큰 일을 행하는 말씀의 역사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말씀은 영원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 있습니다. 찬송가 135장 1절 가사를 보면 “어저께나 오늘이나 어느 때든지 영원토록 변함없는 거룩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에서 금반지를 가지고 예물교환을 하는 것도 금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보다 더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책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집니다. 디자인도 변하고 표기방법도 변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새로워집니다. 배가 어두운 바다를 항해를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등대입니다. 등대가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이유는 변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등대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번째로, 말씀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간구할 마음”은 ‘간구할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은 이 부분을 “주께 이런 기도를 드릴 용기를 얻었습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용기를 얻습니다. 또한 말씀의 내용들이 우리에게 격려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용기를 얻게 됩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선교사로 일할 때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선교사들도 리빙스턴을 따돌렸고 백인 노예상인들은 리빙스턴이 하는 일을 방해했습니다. 맹수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리빙스턴에게 용기를 주어 선교사업을 계속하게 했던 것은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이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도 말씀을 통해서 항상 용기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여섯 번째로, 말씀은 참되다고 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여러 군데서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 증거가 참 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바울 서신 여러 곳에서 ‘내가 참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을 때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라고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시경에 있는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짓이 없다’라고 해서 ‘사무사(思無邪)’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이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가르침이 되고 있습니다.
‘시는 순수한 마음으로 써야 하고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에는 거짓이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은 진실 덩어리입니다.
고후 13:8 말씀에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도 진리에 푹 젖어서 살아야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은 약속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말씀은 곧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25절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라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말씀도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은 약속이기 때문에 성경을 ‘구약’ 과 ‘신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좋은 약속을 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말씀을 통해 좋은 약속을 해주십니다.
‘내가 너를 더욱 사랑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라’ 이런 약속들을 듣고 그 약속이 꼭 이루어짐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서 미래의 일도 아시고, 기도도 하시고, 더 큰 일도 경험하시고, 말씀이 영원한 것임을 알아, 용기도 얻으시고, 참된 것임을 알아, 하나님의 귀한 약속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는 저와 여러분과 우리 평온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손 대대로 복을 받는 기도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
다윗의 기도
3) 기도의 내용
다윗의 기도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너무도 위대하고 숭고하여 그 뜻을 확연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집을 주권적으로 인도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고백과 이스라엘의 장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의 표명, 이스라엘 나라의 특별성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대한 진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의 성취에 대한 기원으로 구성되어 있다(삼하 7:18-29). 무엇보다도 다윗은 나단의 신탁을 듣고 자기가 하나님께 지어 드리고 싶어하는 성전과 자기의 왕조가 하나님이 출애굽 때부터 계획하신 제사장 나라 건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긴 안목으로 자신의 현재와 자신의 후손에게 적용될 먼 미래의 일들에 대해 깊이 통찰할 수 없었다. 다윗은 단지 소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었을 뿐이지 “하나님의 집”(성전)이 그렇게 깊은 의미를 지닌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통치 하에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 특별한 “나라”라는 것과 이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참조. 삼하 7:12-13, 16, 23-24). 본문 내용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사의 고백: 나와 내 집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18절)
다윗은 자신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다윗 성”이라 명명하고, 이곳에 백향목 궁전을 짓고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언약궤가 안치된 장막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앉아 이렇게 기도한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 다윗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화려한 궁전에 거하게 된 것은 자신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거나 자기 “집”(여기서는 “가문”이라는 뜻)이 다른 집보다 탁월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윗은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생각할 때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노(老) 선지자 사무엘을 어린 소년에 불과한 자기(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말째)에게 보내셔서 기름 부음을 받게 하심으로(장남 우대 풍속에 비추어볼 때 상상하기 힘든 일)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내정해 주신 일(삼상 16:13), 연소함에도 불구하고 악령에 시달리는 사울 왕의 수금 타는 궁중 악사 겸 경호관이 된 일(삼상 16:14-23), 이스라엘 백성을 공포에 떨게 했던 블레셋 장수 골리앗에게 물매 돌을 날려 쓰러뜨렸던 일(삼상 17:48-51),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삼상 18:7)이라는 백성들의 환호에 분노한 사울이 자기에게 창을 던져 벽에 꽂아 죽이려 할 때 위기에서 살려 주신 일(삼상 18:10-11), 사울이 블레셋과 접전하고 있는 전장(戰場)의 최전선에 내보내어 전사(戰死)시키려던 음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신 일(삼상 18:17-29),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받으며 쫓겨 다니는 중에 엔게디 굴(삼상 24:1, 4)과 십 광야(삼상 26:2, 5-7)에서 사울을 처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나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결코 죽일 수 없다(삼상 24:6; 26:8)는 일관된 신앙적 원칙을 고수할 수 있도록 지켜주신 일, 잠시 피신해 있던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치광이 연기를 하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신 일(삼상 21:10-15),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유다의 한 성읍 헤브론으로 가서(삼하 2:1) 유다 사람들에 의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옹립되었던 일(삼하 2:4), 북부 지역 이스라엘의 실권자 아브넬과 이스보셋 왕(사울의 아들)이 살해된 후에 기름 부음을 받고 통합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었던 일(삼하 5:3),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된 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곳을 새 수도로 정한 후에 “다윗 성”이라 명명한 일(삼하 5:7, 9), 하나님의 전략을 따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일(삼하 5:17, 19, 23-25), 언약궤를 수소문하여 우여곡절 끝에 다윗 성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옮겨와 장막 안에 안치했던 일(삼하 6:1-2, 5, 10-19; 대상 15:1; 16:1)... 이 모든 일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주권자 하나님이 계셨다.
또한 다윗은 자기 가문이 이스라엘 다른 족속보다 뛰어나서 왕조의 가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사울이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무엘의 제사장직을 침범하고 번제를 드리는 월권행위를 했을 때 당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를 당신의 백성의 지도자로 내정하셨다(삼상 13:12-1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후일에 다윗으로 드러났다. 사울은 제사장직에 대한 심각한 월권행위 이후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포획한 살진 양들과 소들을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핑계로 따로 살려 두었다. 이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헤렘” 명령(삼상 15:3)을 거역한 행위였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이 거주하던 지역을 통과하고자 할 때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던 일을 기억하시고 징벌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가나안 행군을 훼방하는 세력들을 최적의 순간에 반드시 심판하신다. 사울의 변명에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라고 책망하였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 번 더 사울의 왕위 박탈을 결심하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의 왕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을 분명히 하셨다(삼상 15:23, 28).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서 그의 아들들 중에 당신이 점지하시는 자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내정해 두라고 명령하셨다(삼상 16:1, 3).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이새의 말째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삼상 16:12-13). 이 일은 이새의 가문이 다른 족속들보다 특출나서가 아니라 구원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새의 족보를 족장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고,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이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둘째 소생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적장자(嫡長子)다. 다윗의 족보는 인간의 권위 질서나 상속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언급한 대로, 결국 다윗은 유다 사람들의 지지로 가나안 남부지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나중에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합의로 기름 부음을 받고 가나안 전 지역을 통치하는 통합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생각할 때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결과였다.
(2) 하나님의 장래 계획에 대한 이해 표명과 그분을 향한 신앙고백(19-22절)
다윗은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계시의 말씀에 대해 단지 자기 개인이나 가문이 받은 복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반응하면 될 정도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19절). 이 고백은 두 가지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다윗은 나단이 받은 신탁에 자신의 왕조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영원한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의 왕조를 세워 주시고 그의 나라를 영원히 보전해 주시며 견고하게 해 주시리라고 하신 약속(삼하 7:11하-16)은 다윗으로서는 분에 넘칠 뿐 아니라 상상할 수조차 없고 감당하기 어려운 축복의 말씀이었다. 다윗은 이 약속이 자기나 자기 이후 몇 대(代) 정도에 그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집에 일어날 “먼 장래의 일까지” 말씀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표본으로 하는 이스라엘 왕조 역사를 통해 당신의 영원한 뜻을 나타내시며 그 뜻을 성취해 가시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세상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그것이 최종 완성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는 다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 단기간의 어떤 역사(歷史)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였다. “먼 장래 일”은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마 1:1, 6, 20; 9:27; 12:23; 15:22; 20:30-31; 21:9, 15; 22:42)과 그가 “하나님의 성전”이신 것(마 26:61; 27:40; 요 2:21),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마 12:8; 막 2:28; 눅 6:5), 교회의 머리이신 것(엡 1:22; 4:15; 5:23)으로 나타났다. 좀 더 확대 해석하자면, “먼 장래 일”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새 창조와 최종 성취를 선언하시며 주의 나라의 최종 완성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었다(계 21:5-7).
둘째, 다윗은 자신의 왕조를 통해 하나님이 먼 장래에 이루고자 하시는 영원한 뜻이 인류를 위한 대헌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여기서 “이것”은 다윗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 포함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의 고백은 자신을 필두로 하는 이스라엘 왕조의 먼 미래의 사건까지 포함하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이야말로 “사람의 법”(토라 하아담), 곧 인류가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삶의 대준칙이라는 말이다. 출애굽 사건의 관점에서 볼 때, 다윗 왕조의 출현은 제사장 나라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역사적 실현 국면이며, 결국 메시야의 오심과 함께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예표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인류의 대강령(大綱領)이 되어야 한다. “제사장 나라 – 하나님 나라” 개념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 처음 창조 때부터 피조세계에 대해 세우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묘사하는 가장 큰 개념이다. 이 개념을 저버린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법칙에서 벗어난 허무하고 무의미한 삶이다. 인간의 소외는 그의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로부터 오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왕조를 통해 제사장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삶의 대원리를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하나님은 주의 종을 너무도 잘 아시오니 저는 주께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20절). 이 고백은 마치 욥이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라고 고백한 것과 흡사하다. 욥의 이 고백은 하나님이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라고 다그치신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많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보다 뛰어난 통치자인 양, 그분보다 탁월한 학자인 양, 그분보다 우월한 능력자인 양 하나님을 트집 잡고 원망하는 것 같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을 책망하고 가르치려는 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뜯어고치려는 듯이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 같다.
둘째, 하나님은 친히 언약하신 말씀을 근거로 당신의 뜻을 따라 이 모든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고 주의 종으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21절). 다윗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주신 언약과 출애굽 사건, 시내산 언약, 사사시대의 혼란, 왕정시대의 개막을 반추하면서 자신의 왕조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 가운데 출범하게 된 것을 음미하는 가운데 이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언약(말씀)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 진행된 위대한 일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믿는 자의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해 얼마만큼 깨닫고 확신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윗은 역사 속에서 움직이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손을 섬세하게 느끼며 이렇게 고백한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22절). 다윗은 언약의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유일성(신 6:4도 볼 것)을 고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