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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핑-앤더슨의 <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sim>(1990)은 명확하게 복지 국가의 성격과 역할을 유형 비교를 통해 제시했다는 점에서 복지 국가 연구의 고전으로 꼽힙니다.
그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복지 국가의 정도는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와 '계층화stratification'을 통해 측정할 수 있습니다. 탈상품화는 노동자가 자신을 노동 시장에 팔지 않고 어느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말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신체장애인이 되어 더 이상 일하던 직장에서 근무가 불가능하고 구직도 힘들어졌을 때,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가 정도가 되겠네요.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미국 복지 체계는 대체로 노동 시장 참여를 근간으로 합니다. 직장이 없다면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EITC 같은 현금 이전도 일단 노동 시장에 참여하고 있어야 수급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EITC가 노동에 참여하는 가구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참이고, 근로를 하지 않으면 EITC를 받을 수 없기에 최저임금을 인상해야한다는 근본적으로 각 제도들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오는 오류입니다. 다만 여기서 복지국가 연구의 관점에서 내릴 수 있는 평가는, 미국은 탈상품화 수준이 매우 낮고 EITC 역시 이를 보전해주지 못한다 정도가 되겠죠. 만약 여기서 미국이 탈상품화 정도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인 실업급여를 인상하고, 장애 연금과 회복 및 재활 프로그램을 낮은 가격이나 무료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계층화Stratification는 보다 복잡한 개념으로, 계급과 신분의 균열 정도를 의미합니다. 예컨데 독일과 같은 대륙식 복지 국가에서는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를 억제하고, 여성이 결혼하여 가사 노동에 종사할 것을 장려합니다. 또한 연금 역시 단일한 연금 체계 대신 공무원 연금, 자영업자 연금, 종교인 연금 등 다양한 계층에 따라 분리되어 있고 이러한 분리는 계급의 고착을 촉진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편 노동 시장 참여를 전제로 하는 영미식 복지국가에서는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계층 간의 이원화가 극심합니다. 따라서 흔히 선진 복지국가라면 독일이나 프랑스, 남유럽 국가를 간혹 연상하곤 하는데 사실 보편적 사회 복지 프로그램으로 높은 수준의 탈상품화와 낮은 수준의 계층화, 복지를 통한 재분배를 달성하는 것은 노딕 국가들이 해당하는 사민주의적 복지국가가 대표적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본소득 논의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탈상품화와 복지 프로그램의 보편선 두 측면이기에 각설하겠습니다.
현재 논의되는 기본소득은 '정기적' '무차별적' '현금 지급' 프로그램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정기적은 소득의 지급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데 작년의 1차 재난 지원금이나 최근 경기도의 재난 지원금은 나머지 조건에는 부합하지만, 추가적으로 얼마나 지속적으로 어떤 시기에 재난지원금 지급이 있을 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의 기본소득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무차별적은 대상을 별도의 기준에 따라 나누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보편성과 구분됩니다. 예컨데 보편적 장애인 재활 프로그램은 모든 이가 소득이나 자산에 상관 없이 장애를 얻는다면 이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보편성이 높은 실업급여 역시 이전 직장의 연봉이 높든, 자기 명의의 주택을 가지고 있든 없든 실업 급여를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비장애인이거나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선별적 복지라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단순히 보편 복지가 아닌 무차별적 복지입니다. 끝으로 기본 소득이 보통 특정한 상품이나 서비스 대신 현금을 직접 지원하는 형태로 지불되기에 기본 소득은 현금 지급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역화폐 등 상품권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도 실질적으로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는 현금을 지원하는 것과 효과가 유사합니다. 물론 식료품 구입에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나 현금화할 수 있는 지역 특산물 등 현물을 지급한다면 다르겠지만, 이런 모델은 딱히 논의되는 바가 없는 것 같아 제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상술한 기본소득의 기본 원리로 기본소득의 판타지를 모두 반박할 수 있습니다.
0.기본소득의 재원
->산술적인 계산으로 대한민국 국회가 통과시킨 금년도 예산안에서 다른 지출(국방비, 공무원 임금, 기초연금, 노인 일자리, 무상급식과 누리 과정 지원, 한국장학재단 기금 등)에서 사회 지출을 중심으로 절반을 삭감하고 기본소득에 편성한다면 전국민이 월 50만원이 조금 안 되게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1인가구 기준 중위소득이 월 170만원을 조금 넘는데, 국채를 대폭 발행하고 거대한 규모의 증세를 단행하더라도 그 1/2조차 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기본소득이 중위소득을 대체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재정 지출을 삭감한다는 전제는 기본적으로 현실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가능성일 것입니다.
1.기본소득이 탈상품화를 보장하는가
-> 이어서 기본소득의 복지 정책으로서의 효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볼 때, 우선 현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것은 가계 소득에 좋은 효과를 유발합니다. 기본소득만으로 기초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더라도 기본적인 근로 소득을 전제로 한다면 생활이 더욱 윤택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질병이 찾아오면 어떨까요. 꼭 의료보험과 실업 급여를 폐지하고 이를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돌리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실질적으로 위와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위기 상황에 대한 보장성을 공급하지 않습니다. 실업 급여나 연금, 보험 같은 전통적인 복지 프로그램에 비해 기본소득이 탈상품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매우 낮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기본소득은 소득 재분배를 촉진하는가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복지 프로그램은 '누구나' '해당 상황에 있다면' '따지지 않고' 혜택을 줍니다. 예로 보편적인 육아 수당을 운영하고 있다면 소득을 따지지 않고 아이만 있으면 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어야겠죠. 하지만 보통 보편적 복지라 하더라도 실질적인 소득의 측면에서 가장 혜택을 크게 입는 이들은 취약 계층이나 저소득층입니다. 보편적 복지에 힘입어 국가는 이들이 감내해야하는 지출의 많은 부분을 보장하고 소득을 지원합니다. 고소득층이나 부유층 역시 특정 상황에서 이런 지원을 언제든 받을 수 있기에 그럼에도 보편적인 복지인 것이고, 세금을 납부하며 복지 프로그램에 효용감을 느끼는 것이죠. 그러나 기본소득의 기본 원리는 무차별적으로 동등한 액수를 지급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실질적으로 소득이 격감한 이들에게 많은 소득을 보전시켜주지 못하고, 부유층들에게 동등한 지원을 한다는 것이죠. 양극화 해소 효과가 전통적 복지 프로그램에 비추어 열등하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은 OECD 자살률 1위 국가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통계를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기본적으로 통계에 깔려 있는 평균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년층에 해당하지 않는 65세 미만의 자살률은 OECD 평균을 하회하는 반면, 65세 이상 노년층의 자살률은 압도적으로 높거든요. 마찬가지로 노년층의 절반에 가까운 다수(40% 이상)는 빈곤 상태입니다. 이는 OECD 1위를 찍는 기록임은 물론, 한국 사회의 양극화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들은 국민연금 같은 복지 프로그램이 설계되기 전에 노년층에 진입했기에 자력구제를 강요받아왔고, 다행히 박근혜 정부 시기에 이루어진 기초연금 지급과 문재인 정부가 단행한 기초연금 인상은 다행히 위와 같은 노인 빈곤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노인 일자리의 공급의 정책 목표 역시 궤를 같이 하죠. 그렇다면 만약 20조의 초과세수를 놓고 기본 소득을 하는 것과, 기초 연금을 인상하는 것 두 가지를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20조의 기본소득 재원은 전 국민에게 월 3만원을 지급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면, 이를 65세 이상 노인에게 보편적으로 지급한다면 월 15만원 이상 기초연금을 인상할 수 있죠. 양극화 완화의 측면에서는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일까요? 모든 사람은 늙고, 생애주기에 따라 은퇴 이후에는 소득이 급감할 가능성이 늡니다. 굳이 이런 전제를 설명하지 않아도 답은 뻔할 것 같지만요
3.기타
* 현금의 동시다발적인 직접 살포는 인플레이션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 한국의 인구 구조와 국채 비율 증가 추세를 고려했을 때, 그 자체로 새로운 산업을 개발하거나 교육 및 보육에 투자되지 않는 기본소득은 미래 세대의 부담을 크게 늘릴 것입니다.
복지국가의 기본적인 이해에 대한 토대는 상술한 Esping-Andersen의 저서에서, 기본소득 논의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양재진 교수의 인터뷰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양재진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복지국가 연구자이자 복지국가 옹호를 주장하는 학자입니다. 최근에는 자신의 주장을 논문으로 기고한 것으로 아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다수의 인터뷰에서 일관된 논지를 볼 때 그 내용이 짐작되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주간동아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
https://weekly.donga.com/List/3/all/11/2107172/1
[기고] 기본소득보다 사회보장이 우선 / 양재진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양재진 교수 “기본소득 가성비낮아... 사회보장 강화로 가야” < #기본소득 < 기획 < 기사본문 - 이로운넷 (eroun.net)
https://weekly.donga.com/List/3/all/11/2107172/1
-기본소득이 복지국가 틀을 흔드는 정책이라니.
“현대 복지국가 개념은 ‘실직 같은 사회적 위험(social risks) 때문에 돈을 못 벌게 되거나, 질병 치료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욕구(needs) 때문에 갑자기 돈이 필요해진 시민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공적 보험 시스템’이다. 자동차보험을 예로 들어보자. 차량 소유자가 보험료를 납부하지만 보상은 사고가 난 사람에게만 사고 정도에 따라 차등 지급하지 않나. 현대 복지국가 개념도 이와 똑같다. 누구나 세금이나 국민연금 같은 사회 보험료를 내지만 실업자에게는 실업급여가, 가난한 사람이나 노인에게는 생계급여나 연금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사람에게는 육아휴직급여나 아동수당이 제공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전 국민에게 매달 현찰을 나눠주겠다는 기본소득의 발상은 차 사고가 나지 않았는데도 보험금을 나눠주겠다는 논리다. 이렇게 보험료를 써버리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가 없다. 결국 보험료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 가입자들이 낸 돈을 가치 있게 써야지 꼭 n분의 일로 나눠 현금으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본소득이야말로 보편복지라는 주장이 있다.
“보편의 개념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은 보편주의가 아니라 무차별주의다. 현대 복지국가에서 말하는 ‘보편’의 개념은 아플 때, 실직을 당했을 때, 아이가 생겼을 때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상급식을 떠올리면 쉽다. 저소득층 아이에게만 급식을 제공하면 선별급식이지만, 모든 학생에게 주면 보편급식이다. 기본소득은 학생만이 아닌 모든 국민에게 급식을 제공한다는 건데 이게 어떻게 보편주의인가.”
-4차 산업혁명 시대 고용구조 변화가 소득 불평등과 불안정을 가져오므로 모든 시민에게 일정액의 안정적인 소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것도 결이 다른 얘기다. 그런 사람들이 생기면 기존 사회보장제도에 넣어 혜택을 주는 노력을 하는 게 맞지, 이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대다수 국민에게까지 기본소득을 지급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취약계층을 위해 써야 할 재원만 부족해진다. (...) 사각지대 노동자는 일반 재정으로 운영하는 실업부조제도를 통해 보호하면 된다. 국민건강보험을 예로 들어보자. 사회보험이지만 사각지대가 없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소득이 낮은 사람은 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혜택을 받고 본인 부담금도 면제받을 수 있는데, 이는 일반 재정에서 충당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헛... 시간 날 때 읽어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