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풍수는 명당을 찾는 게 아닙니다. 모자란 곳을 메워주는 비보(裨補)사상이 바탕입니다. 도선국사가 터를 잡은 1200~1300개 사찰 가운데 그렇게 좋은 자리는 몇 곳 안돼요."
―그런 자생 풍수의 맥이 언제 끊긴 겁니까.
"자생 풍수는 도선(道詵)국사에서 무학(無學)대사로 이어지다 조선 중기에 끊겼습니다. 서경천도를 주장한 묘청(妙淸)도, 홍경래(洪景來)도, 전봉준(全奉準)도 모두 자생 풍수의 맥을 이은 분들입니다."
―다 풍운아들이군요.
"자생 풍수는 개벽(開闢)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례로 고려 태조 왕건릉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요. 주산(主山)도 없습니다. 후기의 공민왕릉은 명당 중 명당입니다."
―왜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은 시신을 궁궐에 놔두고 전국에서 명당을 찾지요. 시신 썩는 내가 진동해 신하들이 간언을 했을 정도입니다. 공민왕은 원(元)나라에서 오래 살다 온 인물입니다. 그때부터 중국 풍수에 자생풍수가 밀리기 시작한 겁니다."
―중국 풍수와 자생 풍수는 뭐가 다른가요.
"자생풍수는 기복(祈福) 발복(發福)을 믿지 않아요."
―자생풍수가 중국 풍수와 개벽사상과의 연관 때문에 사라졌다는 얘깁니까?
"무학대사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입적하자 성종이 국사(國師) 칭호를 내리려는데 삼정승 육판서가 일제히 반대합니다. 무학대사가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다면 그랬을 리가 없었겠지요. 경국대전에 보면 음양지리과 교과서 목록이 있어요. 지금 남아 있는 교과서가 없습니다. 규장각에 보관된 책 중 20% 정도만 정리됐다는데 그 안에 있을지는 모르죠."
―그럼 지금 남은 풍수서들은 다 위서(僞書)겠네요.
"비기(秘記)라는 말이 붙은 건 대개 그렇다고 봐야죠."
우리 사회에서 풍수(風水)는 앉아서 천리(千里) 밖을 내다보는 술법(術法)처럼 통한다. 한마디로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과학이 종종 사생결단(死生決斷) 게임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바로 행정수도, 청와대 이전처럼 민감한 현안과 연결될 때다. 학자티 물씬한 최창조가 현대 지리학과 고전 풍수 이론을 섞어 한 말을 세상은 제멋대로 이해했다. 그의 팔자(八字)에는 갈등이란 단어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5년 전 처음 '이지메'를 당해본 겁니까.
"90년대 후반 화장(火葬) 문제를 거론했다 유림(儒林)들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의견을 말했습니다. 제 반론은 경청했지요. 의견일치를 보지는 못했지만요. 친노와 다른 것도 있어요. 반드시 해 뜬 다음부터 전화하고 해가 지면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유림과 운동권들의 차이가 뭡니까.
"운동권 출신들은 제 글을 읽어보지도 않았어요. 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반대하느냐, 그 자체에 화를 냈어요. 그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 많아요."
―또 어디가요.
"한 시민단체의 상임지도위원을 지금도 맡고 있습니다만 천성산, 사패산 터널 사례에서 보듯 대안 없이 반대만 하더군요. 낭비할 것 다 낭비하고 몇 년 후 해보면 자기들 주장이 틀린 걸로 나타나는데 사과도 안합니다."
―환경을 지키자는 취지는 좋지 않습니까.
"그 단체들 주장을 풍수적으로 말하자면… 흠, 잘생긴 산은 무조건 보호하고 별 볼 일 없는 야산은 건드려도 된다는 식이지요. 댐도 그래요. 환경단체는 무조건 못 만들게 하는데 제가 전주에 8년을 살아봐서 압니다. 그곳은 물이 부족해 금강댐 물을 끌어다 씁니다. 오죽하면 바닷물 담수화(淡水化) 얘기까지 나오겠습니까. 팔당댐에 물을 가득 채워도 유사시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이 사흘밖에 마실 수 없는 양입니다."
―그래도 생태계를 생각하는 건 그들뿐인데….
"소양강댐 건설 때 생태계 걱정을 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새 생태계가 생겼어요. 새만금도 이미 방조제 밖에 새 갯벌이 생기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건설을 '유전자 변형식품' 같다고 겁주지만 배고프면 유전자 변형식품 가리겠습니까? 당연히 먹어야죠."
―토론을 해보지 그랬습니까.
"분위기 자체가 토론이 잘 안되는 풍토였어요. 한 번 논쟁을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관뒀어요. 막무가내, 토론의 부재는 제가 가본 북한도 비슷해요."
―운동권, 일부 시민단체와 북한이 뭐가 비슷하단 말입니까.
"1997년 12월 북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이리 가자 저리 가자, 자기들 마음대로더군요. 어느 날은 새벽에 깨우더니 '교수 선생, 축하합니다. 김대중(金大中) 선생께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왜 저를 새벽에 깨워 축하할 일입니까?"
―5년 전 주장했던 9불가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나요.
"제가 내세운 것 중에 무리한 근거가 있긴 해요. 남으로 도읍을 옮긴 왕조가 망했다고 했는데 그건 고구려와 백제뿐이거든요. 두 가지 사례로 일반화할 수는 없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일단 정부가 약속한 것을 어기는 건 사기(詐欺) 아닙니까? 충청도민들이 분개하는 이유를 저는 이해합니다만.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거야말로 정치적 행정적으로 결정해야지요."
―평양도 다녀왔다니, 서울과 평양 어디가 풍수적으로 좋던가요?
"당연히 서울이지요. 평양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최창조는 세상과의 불화를 원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유독 집착하는 게 현 청와대 터 문제다. 그는 청와대 터가 우리 국토를 유린하려는 일제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식민지 땅을 훼손하는 전통은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경영한 영국에서 유래됐다. 이른바 성소(聖所)를 더럽혀 기를 꺾겠다는 것이다. 최창조는 "일본은 그런 영국의 전통을 더 교묘하게 발전해 우리 땅에 실천했다"고 주장했다.
―5년 전 경기도 교하(交河)에 새 행정수도를 두자고 했지요.
"새 수도를 교하로 옮기자는 것처럼 돼있는데 행정부처는 서울에 그대로 두고 청와대만 옮기자는 것이었어요. 통일 후 서울이나 평양에 수도를 두면 남북 갈등이 생길 수 있어요. 대통령이 그 중간지대인 교하에 20년 정도 살면 어떻겠느냐는 글이었습니다. 그런 전제가 빠지니 마치 교하 신수도론을 주장한 것처럼 됐지요."
―왜 청와대를 옮겨야 합니까.
"청와대는 조선총독부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가 1927년 지은 겁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해서 처음 받은 게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던진 폭탄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시작부터 불길했군요.
"청와대 역사를 '피'로 연 거지요.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장관의 관저였고요. 우리 대통령들도 그곳에서 비극을 맞았잖아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쫓겨나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감옥가고 노무현 대통령도 퇴임 직후 비극을 맞지 않았습니까? 김영삼(金泳三) 김대중 대통령도 골치를 앓았지요."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풍수적으로 청와대 터는 백두산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는 용(龍)의 목과 머리에 해당됩니다. 일제가 입 부분에 총독집무처를 짓고 목줄에 총독관저(청와대)를 지어 눌러놓은 겁니다."
―청와대에 들어가봤습니까.
"김대중 대통령 때 두번 가봤습니다. 두번째 갔을 때 '북악산 정상에 토치카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더군요. 일제 때 만든 것인데 핵폭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해 보였어요. '지금 건드려서 뭐하겠느냐. 가까운 데 있는 흙으로 메우는 게 좋겠다'고만 했지요. 그때 청와대 내부를 샅샅이 봤는데 청와대 구 본관이나 지금 본관이 구중궁궐에서도 뒤쪽이었어요."
―그게 안 좋은 겁니까.
"저 같은 사람은 1주일만 살아도 돌아버릴 것 같더군요. 이건 풍수가 아니라 환경심리학에도 나와요. 불안감을 조성하는 자리지요. 역으로 보면 그런 터에서 몇년을 버틴 것만으로도 대통령들의 강기(剛氣)가 대단한 거지요."
―청와대 터에 있는 북악은 좋아 보이던데.
"북악산이 참 묘한 산입니다. 청와대에서는 서울 시내가 전부 조망(眺望)됩니다. 한강까지 보입니다."
―좋은 산 맞네요?
"이상한 게 가까이서 보면 웅장하고 아름다운데 멀리서 보면 인왕산에 눌려 있어요. 자기가 인왕산에 눌리는 걸 모르고 '나는 볼 것 다 본다'는 식의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바로 북악입니다. 그 터에 살다 보면 사람이 점점 더 고집불통이 되는 거지요."
―지금도 교하로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성남 근처 옛 일해재단 터가 좋아보이더군요. 지금 세종연구소가 전체의 10분의 1쯤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보안시설도 잘돼있고 서울공항까지 가는 지하도며 지하철도가 이미 다 건설돼 있어요. 아주 좋은 터라고 할 순 없지만 추가비용도 얼마 들지 않을 것 같고요."
―일해재단 터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누굽니까? 상왕(上王) 노릇 하려 했으니 괜찮은 곳이겠다 싶어 가본 겁니다. 그곳으로 옮기는데 문제가 한가지 있긴 해요. 국민들은 대통령이 한강 남쪽으로 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잖아요.
―지금 청와대는 없애야 합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그 자체로 관광명소가 될 수 있지요."
최창조가 만능(萬能)일 수는 없다. 그는 청계천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잘한 일'이라고 했다. 광주광역시에 있던 전남도청을 옮길 때도 그는 무안을 추천했지만 실제론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했다.
"당시 해양국가 운운하는 이야기가 화두가 됐어요. 어차피 광주에서 옮긴다니 무안에 있는 삼향면 남악(南嶽)이란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서울의 북악에 대한 남악의 상징성에 손을 들어준 거지요."
―한창 추진 중인 4대 강 정비는 어떤가요.
"해야지요. 지금 섬진강을 포함해 5대 강은 사람이 손을 안대면 부서질 정돕니다. 영산강이 제일 엉망이고 섬진강이 그나마 제일 낫지요."
―대운하(大運河)는?
"그건 반대합니다. 낙동강과 한강은 완전히 다른 생태계인데 그걸 연결시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고 꼭 해야 될 일도 아닙니다. 수운(水運)이 필요하면 그냥 부산에서 인천항으로 오면 됩니다."
―청계천 정비를 반대했지요.
"지금 해놓고 보니 잘한 거지요. 청계천뿐 아니라 안양천, 정릉천도 사람들이 건드려서 살려놓은 케이스입니다. 몇 년 전에는 물에 손 담그기가 무서울 정도였는데 지금은 왜가리가 날 정도잖아요. 청계천 반대한 건 풍수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조선시대 어효첨이란 분이 있었어요. 청계천은 개천(開川)이라 했는데 그때도 정비 논란이 많았어요. 명당수(明堂水)거든요. '명당수는 맑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을 때 어효첨은 '이렇게 큰 도성의 개천을 명당수라한들 어찌 맑게 할 수 있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부역이 심해질 것을 우려한 거지요. 반대한 그분도, 정비를 주장한 분들도 다 풍수의 대가였습니다."
―그렇습니까?
"당시 재상들은 다 풍수에 일가견이 있었어요. 어효첨은 죽은 뒤 강가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발복(發福)을 믿지 않은 거지요. 나중에 홍수가 나 무덤이 유실됐습니다만 옛 사람들이 지금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들보다 나아요."
―갑자기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 이야기는 뭔가요?
"풍수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반대하던 분들이 어느날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더니 산소 자리를 잡아달라더군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니나면서요. 허허."
―풍수의 대가도 잘못 볼 때가 있는가 봅니다.
"돌아가신 풍수대가 중에 육관도사와 지창룡 선생이 계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분들이 자진해서 묏자리를 봐준 적이 있어요. 그분들이 아버지가 경기도 여주에 잡은 터에 매장하면 '6개월 내에 큰일이 난다'고 하니 제 형이 '네가 한번 가보라'는 겁니다."
―두 도사(道士)의 말에 당황했겠습니다.
"풍수적으론 안 좋은 땅이었어요. 정북향(正北向)이었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버지 성품 그대로 잡은 터였습니다. 형에게 그 말을 하니 '그러면 됐다'고 하더군요."
―6개월 내 큰일이 생겼습니까.
"아들 녀석이 '서울대에서 잘렸으니 큰 일 난 게 맞다'고 해서 '이놈아 잘린 게 아니라 내 발로 걸어나왔다'고 했지요."
▲ 최창조는 풍수가도 많이 틀린다고 했다. 명당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풍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커다란 돋보기를 들고 웃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최창조와 지리학, 더 나아가 풍수와의 인연을 맺어준 매개체는 아버지다. 그의 선친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장작을 사 서울에서 파는 일을 했다. 최창조는 일곱 살 때부터 조수(助手)로 그런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어린 그에게 우리 땅, 우리 마을은 뇌리와 몸속에 박혀버렸다. 그래서 그는 천성적으로 도시를 싫어했다. 그는 전북대에서 서울대로 옮긴 지 4년 뒤 교수직을 내던졌다. 만일 전주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서울대 교수는 왜 그만둔 겁니까.
"사람 만나는 게 겁났고요, 또 한가지는 영어를 잘 못했어요. 하와이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지금 이 장소로 다시 오느냐'는 영어를 운전기사가 못 알아듣는 거예요. 20분 동안 대화했는데도. 사실 서울대로 간 건 여러분 특히 류우익 교수의 권유가 컸어요. 그분이 제 어머니께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어머니가 제게 '내가 보기 싫으냐'고 해요. 내키지 않았지만 서울로 왔죠."
―교수가 사람 만나는 걸 겁내다니요.
"완치됐지만 한때 '공황장애'에 시달렸거든요."
―서울대 교수 그만두고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아내와 재래시장을 며칠 동안 관찰했는데 새벽 4시부터 짐나르고…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농사는 어렸을 때 해봐서 어려운 걸 알고. 집을 줄여 남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SK그룹 고 최종현(崔鍾賢) 회장이 도와줬습니다."
―무슨 대가로….
"처음엔 산소자리 봐달라는 줄 알고 거절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집은 유목민 텐트 이상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었고 자기 소유의 집도 없었어요. '젊은이들이 한국인이라는데 자부심을 갖도록 연구를 해달라'는 거였어요. 지금은 삼성생명과 한화건설에서 도와주고 있고요."
―결국 부동산 터 봐주는 거 아닌가요.
"종합적인 자료가 올라오면 판단을 도와주는 거지요. 직관(直觀)을 빌려준다고나 할까요."
―재벌가의 명당터 운운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서울에선 어디가 좋나요.
"서울에선 가회동이 제일 낫지요. 성북동도 북촌(北村)의 범주여서 아늑하고. 이태원동, 한남동은 외명당(外明堂)이어서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갈 곳입니다."
―강남 갑부들이 많다는 ○동은?
"서울 지세로 보면 청와대가 목줄기, 위장에 해당되는 곳이 무교동입니다. 대기업 본사와 은행 본점이 많지요. 창자 부위가 마장동 쪽입니다. ○동은 변기(便器)쯤 되는 위치인데 그 얘길 했다가 항의를 많이 받았어요. 저는 곧이곧대로 말한 거고, 요새 항외과라는 것도 많이 생기잖아요. 아들이 뭐라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창자에 비유하는 게 좋아? 변기에 비유하는 게 좋아?'라고요."
―이런 질문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댁이 명당은 아닌 것 같은데. 아파트인데 1층이고.
"명당, 명당 하는 건 배우가 무대 탓하는 것이나 목수가 연장 탓하는 것과 같아요. 제가 이곳으로 온 건 대학 그만둔 후 생계가 막막해 넓은 집을 팔고 남은 돈을 생계에 쓰려 했던 겁니다. 1층은 장점이 많아요. 공짜로 수목 감상하고 엘리베이터 고장나도 염려없고 사고가 나도 금세 대피할 수 있잖아요. 자기가 좋으면 다 명당입니다."
―경기고 다닌 분치곤 꽤 괴팍한 성격 같은데.
"성적은 거의 꼴찌였어요. 단(段)은 못 땄지만 유도부 주장도 했고요. 고1 때부터 술을 마셨는데 그 덕을 톡톡히 봤어요. 당시 경기고에 '체인' '세븐스타'라는 서클이 있었는데 안상수 인천시장이 '체인' 보스였어요. 어느날 술집에서 마주쳤는데 유도부 주장이라 건드리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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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조와 자생풍수에 대한 학계 평가[소성]
잡술에서 사상풍수로…선언에 그친 이론 자생풍수에 대한 학계 평가를 정리하는 일은 실로 지난하다. 이 어려움을 몇가지로 나눠보는 것도 자생풍수의 위상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첫째, 제도권 풍수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어도 거의 모두 최창조의 직계 제자이거나 사숙한 이들이다. 둘째, 그러다 보니 풍수를 ‘부전공’으로 하는 인접학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지리학, 역사학, 윤리학, 조경학 등 연관자들의 목소리는 한계가 있다. 동어반복적인 인상적 코멘트는 가능하나, 더 이상의 비평적 목소리들은 없다. 셋째, 최창조의 풍수사상이 학문(사이언스)의 언어이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전언에 가깝기 때문에 분석 적인 접근을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다. 이 부분은 자생풍수를 잇는 후속타를 불발하게 만드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구체성을 요구하는 제도권 학자들의 배척심리를 키우는 원인을 제공해왔다.
학문화의 길 스스로 포기 풍수사상에 대한 제도권의 냉대는 전통이 깊다. 1994년 ‘한국사 시민강좌’ 제14집에서 역사학계와 지리학계에서 최창조의 풍수작업에 맹공을 퍼부은 이후, 최근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는 저서 ‘한국전통문화론’(일조각 刊)에서 “최창조가 ‘풍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상, 그가 배척하는 ‘잡술 부스러기 풍수’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게 명백하다”며 배척론을 편 바 있다. 또한 자생풍수 자체의 학문적 성격에 대해서도 의문의 눈초리가 던져지고 있다. 중국의 이론풍수를 우리의 풍토에 맞게 수용한 도선풍수에서 자생의 연원을 더듬는 역사적 작업, 풍수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꿈꾸는 사상이라는 점을 裨補풍수를 통해 역설한 초기의 ‘파격적이고 신선한’ 주장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진정한 명당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식의 아포리즘으로 일관한다는 비판이다. 그것은 최창조가 1991년 학계를 떠나 풍수학의 학문적 제도화를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공감을 사고 있는 부분도 많다. 김기현 전북대 교수(윤리학)는 “풍수사상을 전통 지리사상이나 환경철학과 연관시켜 살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입장이고, 이문종 공주대 교수(지리학)는 “과거로 올라갈수록 우리의 생활과 정신 세계에 미친 풍수의 영향은 크다. 최창조로 인해 역사적 작업에서 풍수사상의 존재를 더욱 고려하게 됐다”고 평가한다. 풍수강사로 더 이름이 높은 김두규 우석대 교수(독문학)는 “풍수를 땅에 대한 전통 적인 지혜라고 하는 자생풍수의 논리는 국토 전역을 유기체로 파악, 환경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깊다”고 평가한다. 조용헌 원광대 교수(불교학)는 “최창조에 의해 풍수는 학문적 영주권을 얻었다”며 “풍수 가운데 인간의 영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부분이 있는데, 최 교수가 건강과 영성이라는 풍수의 밝은 부분을 되살려” 풍수의 이미지를 쇄신시켰다고 본다.
자생적 환경철학의 가능성 서구에서도 지난 10년간 풍수에 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해외에서 풍수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홍기 오클랜드대 교수 등 한국학자들도 풍수이론가로 활약중이다. 해외의 풍수는 인테리어 풍수라 해서, 정원가꾸기 등 삶의 보다 나은 조건과 건강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양택풍수를 주장하는 최 교수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세계사적인 흐름과 같이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런 평가를 종합해볼 때, 자생풍수의 功過는 몇가지로 나눠진다. 우선 음지에서 기형적으로 자라온 풍수를 양지식물로 거듭나게 해, 전통사상을 계승했다는 점, 그리고 지리학, 조경학, 윤리학 등에서 풍수적 요소를 고려하게 함으로써 학문의 영역을 넓힌 점, 또한 땅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현대인의 삶과 죽음의 문화를 성찰적으로 만들고, 이를 자생적 환경철학이라는 측면으로 이끌고 있는 점이 긍정적인 측면이다. 다만 자생풍수라는 나무가 좀더 세부적인 뿌리와 이파리를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샤머니즘화한다는 비판도 여기서 제기되는데, 과거 여러 문헌에 흩어진 전통 풍수사상을 발굴해서 합리적인 이론과 체계로 만들어나가는 측면은 약하다는 게 대체적인 충고들이다.
최창조는 드디어 이론적 바탕 없는 궤변에 가까운 말까지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자생 풍수 연구가 드러내 준 우리 풍수의 방법론적 본질은 본능과 직관과 사랑, 바로 이 세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순수한 인간적 본능에 의지하여 땅을 바라본다. 거기에 어머님의 품속 같은 따뜻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를 좇으면 된다. 성적 본능에 의한 터잡기도 자생 풍수는 마다하지 않는다. 본래 성적 본능이란 것 자체가 종족 보존의 본능이 발휘된 현상이 아닌가. 거기에 음탕과 지배의 욕망이 끼여 든 것은 본능이 아니라 부자연의 발로일 뿐이다. 그래서 자생 풍수의 명당 지명 중에는 좆대봉이니 자지골이니 보지골 같은 것들이 심심찮게 끼여 있을 수 있다.
풍수 이론은 본능과 직관에 방해가 되니 개입시키지 말고 오로지 본능과 직관 그리고 사랑으로 혈을 찾으며, 그것이 묘터를 잡는 최선이라고 말하였다. 먼저 부모님을 모시고자 예정하는 자리의 맨흙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오로지 돌아가신 그 분만을 생각하며 한 시간만 앉아 있으라. 그것이 권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다. 그 분과 이 자리가 맞는 자리일지에 대한 판단이 반드시 선다. 그 분이 이 자리에 영면의 터를 잡아 편안하실지 아닐지에 대한 판단이 본능과 직관을 통하여 전달될 것이라는 말이다. 표현을 달리하면 땅이 그의 효성에 감응하여 돌아가신 분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사 표명을 해 올 것이라는 뜻이다. 먼저 최창조에게 묻고 싶다. 만약 당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경우, 불행히도 그 때가 엄동설한이라면 당신은 당신의 주장처럼 맨 흙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시간 이상을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결코 무엇엔가 물들지 않는 무아적(無我的) 직관이 가능하겠는가? 아마도 인간적 본능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머님의 품속 같은 포근함이 아니라 꽁꽁 언 엉덩이를 어서 빨리 땅에서 떼고 싶은 인간적 본능 말이다. 그렇다고 엉덩이를 떼어서는 물론 안된다. 왜냐하면 엉덩이를 떼면 땅이 효심에 감응치 않아 의사표명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엉덩이를 땅에 뭉개서 혈을 잡으라는 조언은 황당함을 넘어서 어떻게 민족풍수학자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납득이 안간다.
다음 주장들을 더 들어보자. 묘터를 잡았어도 다음의 세 가지는 피해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는 지하 수맥 위에 터를 잡으면 안 되고, 둘째는 땅기운이 소용돌이 쳐 음산한 곳을 피하고, 셋째는 땅 속의 움직임이 있는 곳, 즉 시신이 없어지는 자리[도시혈(逃屍穴)]는 피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피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이 방법은 자생 풍수건 정통 풍수건 어떤 풍수적 이론에도 없는 '최창조 풍수'의 1장 1절이다. 수맥은 팡듈이란 추를 이용하여 알아낸다고 하였다. 그것은 프랑스식 추를 사용하여 사람이 그 동물적 본능에 의지하여 지하수가 내뿜는 일종의 특이한 방사자력을 감응하는 식으로 찾는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최창조가 추를 이용해 수맥을 피하라 한 것은 그가 패철(풍수가들의 방위 결정의 필수적인 도구)의 현장 적용 방법을 전혀 모르거나 무시해서 일것이다. 풍수사라면 당연히 동양의 도구인 패철을 사용해야지, 서양의 추를 왜 사용하는가? 패철에 정통 풍수 이론을 적용하면 당연히 수맥을 피한 길지(吉地)을 찾을 수 있다. 또 음산한 땅은 직접 서 있으면 스스로 알게되고, 도시혈은 약간의 현지 훈련만 받으면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되고 어떻게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정통 음택풍수는 이기적인 잡술이고, 자생풍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자연의 지혜를 많이 담고 있다고 말한다. 혹자는 풍수에 무슨 이론과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며, 최창조는 이제 불경에 얽매인 학승(學僧)이 아니라, 도통한 선승(禪僧)같은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한 것이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풍수 이론을 개입시키지 말고 오직 본능과 주관에 따라 묘 터를 잡으라는 주장은, 위험천만한 사회적 폐단을 가져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으로 체계화시켜 전승시킬 수도 없다. 언젠가 기(氣)를 느껴서 명당을 잡는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산에 올라 정신을 집중시키면 생기가 모인 지점이 손에 느낌으로 전해 와요." "풍수는 경험 과학인데 이론의 바탕 없이 오로지 느낌만으로 혈을 잡는다면 자신의 직감에 확신이 섭니까?" "물론 백퍼센트 확신은 없지만, 그렇게 잡은 경우 치고 한 번도 물이나 돌이 나온 경우는 없었어요." "단순히 물이나 돌이 없다고 생기가 모인 혈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 터가 왜 좋은가 하는 객관적인 설명을 타인에게 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나는 풍수 이론을 몰라 객관적으로 설명은 못해요. 다만 내 느낌만을 믿을 뿐이죠. 간혹 시골 영감들이 저 자리가 좋아 보이는데 왜 이 자리로 정했느냐고 덤비면, 호통을 치면 돼요. '이 영감탱이야, 당신 말을 듣고 저 자리에 묘를 쓰면 일주일 안에 큰아들이 죽어. 당신 말대로 묘를 쓸까?' 이렇게 말하면 슬금슬금 도망을 가지요. 왜냐하면 그 영감대로 묘를 썼다가 진짜 큰아들이 죽으면 그 영감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하니까요. 지관을 해 먹으려면 사람 다루는 방법부터 배워야 해요." 2천 년을 넘게 동양사상의 근저를 이룬 중국과 한국의 이론 풍수를 잡술로 몰아붙인 뒤 자생 풍수라는 지리적 지혜를 일깨워준 것까지는 학자적 견해로 인정하지만, 생기가 응집된 혈을 맨 흙에 엉덩이를 붙이고 인간적 본능에 의지해 잡으라는 궤변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