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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章 비무대회(比武大會)
①
중원 각성에 산재한 주요 거래처를 상징하는 형형색색의 깃발과 세권표국의
기치가 일장 간격으로 줄지어 세워져 바람에 나부끼는 표국의 넓은 마당.
석백송은 저마다 애병(愛兵)을 휴대하고 마당을 메우고 있는 표두와 표사들을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 오르는 뿌듯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얽히고 설킨 실타래의 실마리를 풀어내느라 애쓸 필요 없이 일 검에 잘라내는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요, 결과야 어찌되건 자신의 지혜와 힘을 다해
나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면 그 뿐이라는 편한 마음도 들었다.
세권표국을 상징하는 철검 문양을 수놓은 남색 무복을 떨쳐입고 도검을 움켜
쥐고 있는 사내들.
하나같이 용맹하고 믿음직스러운 수하들이었다.
대륙 십팔만 리를 누비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내 무사히 표물을 호송해
내는 믿음직한 사내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당당한 기상은 가히 산악을 누르고
바다를 뒤덮을 만했다.
중앙에 자리한 열 명의 표두를 중심으로 줄맞춰 앉은 이백여 사내들의 전신에
서 팽팽한 긴장이 발해지는지라 넓은 마당을 스치고 지나가는 신선한 아침바
람마저 화기(和氣)를 잃는 듯 했다.
수하들을 둘러보며 일일이 눈을 맞춘 석백송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이백여 사내의 형형한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됐다.
오늘따라 한껏 성장(盛裝)을 하고 애검인 한로검을 허리에 찬 석백송의 모습
에서 일파의 종사다운 위엄이 풍겼다.
"대륙에 세권표국의 깃발이 나부낀 지 백오십 년, 이즈음과 같은 성세(盛世)
를 누린 적은 없었다."
석백송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백오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표국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시기가 닥쳤다는
사실이 새삼 그의 가슴을 치는 까닭이었다.
"모두가 여러분이 신명을 바쳐 애쓴 덕이라 생각하며 새삼 고마운 마음을 전
하는 바이다."
그가 정중히 포권하자, 마당에 가득한 이백여 사내들 역시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으로 답했다.
석백송은 사내들의 허리가 펴지기를 기다려 말을 이었다.
"오늘, 본 표국의 기둥인 여러분의 무공을 겨루고자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상하 구분 없이 진정한 강자를 가리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제 중원 제일로
인정받고 있는 본 표국의 기풍을 새롭게 하고 실력 있고 용기 있는 자가 대접
받는 새로운 기틀이 오늘로서 만들어 질 것이다."
그의 말은 분명했다.
말단 표사이든 아니면, 그가 좋은 조건을 약속하며 어렵사리 초빙(招聘)해 식
구로 만든 표두이든 현재의 신분을 떠나 오직 실력만으로 대우하겠다는 것.
"……!"
좌중은 침묵했으나 내심 격동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방을 보고 오늘 비무대회의 의미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정작 국주의 입을 통
해 분명한 목소리로 전달되는 순간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석백송은 침묵으로 격동을 표현하는 이백여 사내들에게 그의 의중을 털어놓았
다.
"이제까지의 직책과 서열은 모두 무시하고 오늘 비무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거
두는 열 명이 새로운 표두가 된다!"
침묵은 이내 깨졌다.
혹시했던 일이 분명해진 것이다.
"아니……!"
"이야, 설마했더니 정말이로구먼."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표사가 된 후에도 대개는 나름대로 연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단 표행을 나서는 순간부터 믿을 것은 일신의 무공뿐이라는 엄혹
한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고 장차 표두가 되어보리라는 소망을 저마다
속 깊은 곳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표행을 거듭하여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을 세우고 무공을
인정받아 표두가 되는 일은 더러 있어도 이렇듯 공개적이고 대대적인 비무를
거쳐 표두를 뽑고 표국의 체제를 일신(一新)하겠다는 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
었다.
"표두들 역시 오늘의 결과에 따라 정해지는 새로운 체제에 승복하기로 동의했
다. 하니, 모두 분발하여 일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길 바란다!"
"……!"
표사들의 시선이 쏠리자 중앙에 둘러앉은 표두들의 어깨가 한껏 치켜졌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기꺼이 수하들과 무공을 겨루겠다는 당당함이 스스로도 자
랑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녔는지 익히 알고 있는 표사들
쯤이야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자신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열 명의 표두들 모두
의연하게 표사들의 시선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오늘의 결과에 따라 신분이 바뀔지도 모르건만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
어지리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석백송이 말을 마치고 좌정하자 마당에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만 가
득했다.
하나, 이백여 사내들의 가슴에는 거센 폭풍이 일었다.
그들의 심중에 이는 격동이 바람이 되어 몰아친다면 깃발은 이미 찢어졌을지
도 몰랐다.
순간, 깔깔하고 가느다란 헛기침 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에헴……."
무공은 없지만 수리에 밝고 치밀한 성격으로 표국의 회계와 살림을 관장하는
집사(執事) 이형완(李亨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비무의
방법을 설명했다.
"우선 열 분의 표두가 도전 대상이오. 누가 누구를 지목해 도전하든 상관이
없음은 물론, 마지막 열 명이 남게되면 비무는 끝이오. 대신 도전 기회는 누
구나 한 번뿐이니 앞서든 뒤서든 알아서 판단하시오. 단, 승자는 마지막 남은
열 명중 가장 많은 도전을 이겨낸 사람이 되는데 예를 들어, 열 명의 도전자
를 물리친 분을 이기면 그 분의 승수가 승계 될 것이오."
이형완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 줄지어 앉은 사내들 틈에서 아쉬움을
담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어, 포기하란 소리로군……."
"그래서야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비무의 규칙치고는 합리적이지 못한 까닭이었다.
우선, 한 수 위인 표두들을 상대로 무공을 겨뤄야 한다는 것은 각오한 일이지
만 한 두 번의 싸움에서 이기기도 쉽지 않거늘 몇 번이 될지도 모르는 도전을
감당해야 한다니 누가 감히 나설 엄두를 내겠는가.
게다가, 누구든 지치거나 허점이 보이는 상대를 고를 것이 뻔하다고 할 때 승
패를 떠나 먼저 싸우는 자가 불리할 것은 보나마나였고 그렇다면 먼저 나서서
도전하겠다는 자도 없을 터였다.
그들이 생각할 때, 목적이 어떻고 주어질 상이 무엇이든 간에 비무의 방식은
기만에 가까웠고, 표두들끼리 상을 나누어 갖는 그들만의 잔치가 될 것이 뻔
해 보였다.
석백송은 묵묵히 좌중의 반응을 주시했다.
그 역시, 이런 반응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의 의도가 단순히 수하들 중에 무공이 강한 자를 가리자는 것만은 아
니었다.
합리적이지 못하고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방법에도 불구하고 비무에 도전하
는 용기.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날지도 모르는 수하들의 숨은 능력.
무공은 물론이요, 돌연한 상황에 대처하고 해결하는 능력과 근성을 지닌 인물
을 가려내자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만일, 그가 알고 누구나 인정하는 대로 이백여 명에 달하는 그의 수하들 중
표두들이 가장 강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이즈음 순조롭기만 한 표행의 연속으로 긴장이 풀어진 수하들에게 좋
은 자극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당장, 방이 붙은 후로 연무장 바닥은 표사들이 흘린 땀으로 마를 틈이 없고,
오가는 표사들의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발해지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석백송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실망에 찬 탄식을 토하며 고개를 젓는 자, 불만스런 표정으로 옆자리의 동료
와 수군대는 자, 아예 애초부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구경이나 하겠다는
듯 태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자…….
하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를 악물며 힘껏 검을 움켜쥐는 사내들도 더러 눈에 띄었으니
그들이야말로 석백송이 찾고자 하는 희망의 싹일지도 몰랐다.
석백송이 손을 들자 좌중의 소란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도전하는 자가 있으면 몇 날 며칠이고 비무는 계속될 터이나, 나서는 자가
없으면 열 명의 표두간에 우열을 가리고 비무대회는 끝이다!"
어딘가 비장하게 들리는 국주의 음성이 장내에 울리자 좌중의 기색도 진지해
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망설이지 말고 도전하라!"
석백송은 우렁차게 외치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드디어 세권표국 백오십 년 역사에 처음 있는 비무대회의 시작이 선포된 것이
다.
하나, 좌중은 조용했다.
누구도 나서는 자는 없고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를 반 각여.
당연하다는 듯 중앙에 앉은 표두들은 어깨가 으쓱거렸고 거북하게 이어지는
침묵 속에 먼저 나설 자를 찾는 표사들의 눈망울만 분주하게 움직였다.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색주가의 창기에게 옮은 사면발이 탓에 늘 사타
구니를 득득 긁어대며 몸을 뒤틀던 와룡 뭔가 하는 자도 꼼짝 못하고 가려움
을 참느라 식은땀만 비질비질 흘릴 정도였다.
오직 계집과 뒤엉켜 짐승도 차마 못할 음탕한 짓거리를 벌일 궁리로만 가득한
대가리에도 행여 움찔거렸다가 비무에 도전하는 것으로 오해받으면 큰일이라
는 생각이 스친 모양이었다.
이대로라면 우려했던 대로 표두들간에 무공의 고하를 가리는 것으로 끝나고
말 가능성이 높았다.
하나 와룡 뭔가 하는 따위의 한심한 족속이 있는가 하면 석백송의 기대대로
용기 있는 자도 있었다.
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했던가.
최근 몇 달간 미친 듯이 무공을 닦는데 몰두했고 이번 비무대회를 누구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왔음에도 맨 처음 나서는 것에 부담을 느끼던 최만재(
崔滿載)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 것이다.
"금모호(金毛虎) 이규대(李閨大) 표두께 도전하겠소!"
스스로도 흥분과 긴장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외친 최만
재와 최만재의 지목을 받고 살짝 미간을 찌푸린 이규대를 번갈아 바라보는 좌
중의 시선에 흥미진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머리털뿐 아니라 온몸의 털이 금빛이요, 날래고 사납기가 호랑이 같다고 해서
금모호로 불리는 표두 이규대.
두 자루의 단창(短槍)을 제 손처럼 다루는 창술(槍術)의 대가인 이규대가 맨
처음 지목당할 만큼 만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으나 최만재가 이규대
를 지목한 이유를 대개는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허허, 제 일착이 하필이면 이 몸이라……."
열 명의 표두중 제일 먼저 지목 당했다는 사실이 결코 영광일리 없기에 이규
대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 역시 최만재가 자신을 지목한 이유를 대충은 짐작했다.
몇 달 전 사천(四川)의 성도(成都)로 표행을 마친 후 술에 취한 최만재가 성
내의 파락호들과 시비 끝에 놈들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 표행을 인솔
했던 이규대가 다음날 놈들을 찾아내 혼찌검을 낸 후 세권표국의 망신이라며
최만재를 심하게 몰아세운 것은 물론, 귀환 후에 국주에게 처벌을 요청해서
석 달 간 근신의 명을 받게 만들었던 것이다.
과음하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무공도 남 못지 않고 자존심이 강한 최만재가
그 일로 씩씩거린다는 것은 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었기에 그의 도
전은 좌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나 이유야 뭐가 됐던 도전을 마다할 수는 없는 일.
이규대는 앞으로 나서며 웃음을 흘렸다.
"자네가 근신기간 내내 연무장에서 살았다더니 솜씨가 좀 늘었는 모양이지?"
"겨뤄보면 알게 될 것이오!"
수중의 대감도(大坎刀)를 떨치며 냉랭히 대꾸하는 최만재의 기세가 제법 날카
로웠다.
쉬익.
크게 도를 휘저으며 앞으로 나선 최만재가 양발을 가볍게 엇갈리게 벌리고 두
손으로 도를 움켜쥔 채 중상단을 노리는 자세를 취하자 이규대도 어깨에 메
고 있던 두 자루의 단창을 뽑아들었다.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감은 넉자 반쯤 되는 목서(木犀=물푸레나무)로 만든 자
루에 양쪽으로 반 자 남짓한 창날이 붙은 쌍두쌍창(雙頭雙槍)은 자칫하면 제
몸을 상하기 십상이라 익히기 쉽지 않은 병기였으나 이규대에게는 신체의 일
부나 다름없었다.
강남의 녹림패들간에는 심산(深山)의 대호(大虎)에게 상대를 갈가리 찢어 버
리는 억센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면 세권표국의 금모호에겐 쌍두쌍창이
있으니 금모호를 피하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손을 쓰게."
두 자루의 단창을 빙빙 돌리며 전신의 요혈을 가림과 동시에 언제라도 되받아
칠 준비를 마친 이규대가 상급자답게 선수(先手)를 양보했다.
휘잉, 휭……!
탄력 있는 자루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소리와 자루 끝에 매달린 붉은 수술의
그림자가 눈과 귀를 어지럽히건만 최만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전면을 쏘아보
았다.
상대의 쌍두쌍창에 달린 네 개의 창날을 피하고 자신의 공격을 성공시키려면
현란한 초식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강하고 빠른 일격(一擊).
창 자루의 탄력을 무력화시킬 힘, 그리고 방어와 동시에 반격해올 네 개의 창
날을 허용하지 않을 만한 빠르기.
이규대의 왼손과 오른손이 위치를 바꾸며 창 자루가 엇갈리는 순간, 기회를
노리던 최만재가 우렁찬 일성을 토하며 질풍처럼 전면으로 내달렸다.
"이야압!"
한껏 치켜든 대감도가 바람을 가르며 수직으로 내리쳐지는 기세가 흉흉했다.
뇌격필정(雷擊必頂)의 힘이 머리위로부터 쇄도해들자 이규대는 물러설 틈도
없이 재빨리 창날을 교차시켰다.
카가강!
두 자루의 창날사이로 내리쳐진 대감도가 불꽃을 튀기며 날카로운 금속성을
발했다.
순간, 최만재의 뇌리 속에는 자신의 도가 창날을 가르고 상대의 정수리로 내
리꽂히는 모습이 그려졌으나 이규대의 무공은 그리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만일 이규대가 엇갈린 창날로 최만재의 공세를 받아내려 했다면 문제는 간단
했겠지만 창날을 맞부딪쳐 맹렬하게 내리쳐지는 도의 기세를 누그러뜨린 순간
, 이규대가 힘을 빼며 왼쪽으로 몸을 튼 것이다.
논둑을 무너뜨릴 것 같은 거센 물줄기에 물꼬를 터 주듯 최만재의 공세를 이
규대의 창날이 흘려 버리는 찰나 최만재의 입에서 당혹에 찬 소리가 새어 나
왔다.
"어엇!"
미처 도를 회수할 사이도 없이 상대는 옆으로 피해 버렸고 오히려 자신의 측
면이 노출된 것이 아닌가.
하나 어느새 옆구리를 상대에게 내준 최만재의 대응도 신속했다.
일격이 실패했다고 느낌과 동시에 주저 없이 왼쪽으로 몸을 굴린 최만재의 신
형은 틈을 놓치지 않고 찔러든 이규대의 창이 미치는 사정권에서 간발의 차이
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규대는 멈추지 않았다.
"어딜 가느냐!"
성난 호랑이가 포효(咆哮)하듯 일갈을 내지른 그는 최만재가 자세를 바로 할
틈을 주지 않고 맹렬하게 쌍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휙, 휘익……!
매섭게 바람을 가르는 쌍창의 끝에서 번뜩이는 네 개의 창날이 숨쉴 틈 없이
전신을 노리자 최만재는 다급하게 도를 휘둘렀다.
카강! 채챙!
창날을 움켜쥔 손이나 몸뚱이를 노리고 일격을 가하면 좋으련만 그에게 그럴
기회는 없었다.
미처 크게 도를 휘두를 여유조차 없이 계속해서 압박해오는 쌍창의 그림자에
갇혀 정신없이 방어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이규대 역시 우세를 점하고 있을 뿐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것은 아니
었다.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쌍창의 공격을 막아내는 최만재의 도와 부딪힐 때마다
강하게 전해지는 반 탄력은 그의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였고 효과적인 공세를
모두 차단해내는 도의 움직임이 예상외로 신속하니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전
세가 역전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조속히 승부를 내기로 결심한 이규대는 최만재의 도를 강하게 튕겨내며 큰 소
리로 외쳤다.
"회선난풍(廻旋亂風)!"
순간, 상대의 반격 권에서 한 발 뒤로 빠진 그의 쌍창이 맹렬하게 회전하자
네 개의 창날이 어지럽게 번뜩였다.
휘이이익!
대기를 광란케 하는 회오리처럼 요란한 파공성을 울리며 회전하는 쌍두쌍창이
일으키는 경력의 기세가 비무를 관전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비무장으로 쓰이는 대전의 앞마당은 잔돌 하나 없이 깨끗할 뿐더러 단단하기
가 석판을 깔아 놓은 듯 하건만 쌍창의 움직임에 따라 자욱한 흙먼지가 일며
중인의 시야를 가렸다.
좌중은 숨을 죽였고 최만재는 절망의 그림자를 보았다.
전력으로 쳐내는 도검만큼이나 강한 힘을 지닌 네 개의 창날이 거센 바람에
돌아가는 풍차처럼 전신의 요혈을 파고드는 형국이라 최만재가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에잇!"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며 쌍창의 공세를 겨우겨우 모면하던 최만재가 질끈 입술
을 깨물고 비장한 외침을 내지르며 몸을 던졌다.
자신의 근육과 뼈가 창날에 꿰이더라도 일도(一刀)를 격중시키겠다는 의도였
다.
"아니……!"
막 결정적인 기회를 잡아가던 이규대는 난데없는 공세에 경호성을 토했다.
하나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전신을 휘감아 도는 네 개의 창날에 몸을 다치지 않으려면 쾌속하고 영활한
신법은 필수였고 쌍두쌍창의 달인 이규대는 신법에도 일가를 이룬 몸이었다.
비록 거의 무의식적인 방어이긴 할망정 정신없이 몰아치는 자신의 공격을 막
아내던 최만재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들자 땅을 박차고 도약할 듯이 움
츠렸다가 그대로 좌측으로 몸을 피하며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힘차게 뻗은 네 자 남짓한 창은 목표를 잃고 쇄도하던 최만재의 다리를 걸어
그대로 곤두박질 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이쿠!"
최만재의 신형이 나뒹구는 순간 이규대가 중심을 받치고 있던 오른 발에 힘을
주고 순식간에 도약한 거리가 일 장여.
최만재는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뒷목에 와 닿는 서늘한 감촉에 눈을 내리
감았다.
"더 펼칠 재간이 있느냐?"
따끔하게 뒷목을 찌르는 창날보다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져, 졌소이다……."
이규대가 창을 거두어 등뒤로 메는 것이 먼저였는지 중인들의 함성이 터져 나
온 것이 먼저였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와……!"
"과연, 금모호로구먼!"
곳곳에서 이규대의 실력에 감탄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나 좌중의 누구보다 최만재 자신이 이규대의 무공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
다.
한 번 해 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쉼 없이 연무에 전념했건만 이규대의
무공은 그가 상상한 이상이었던 것이다.
몸을 일으킨 최만재는 정중하게 이규대에게 포권했다.
자기보다 잘난 것도 없는 자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성미가 돋긴 했으나
분명 인정할만한 고수임에도 못난 자존심을 세울 만큼 용렬(庸劣)한 위인은
아니었다.
"언제고 다시 도전할 테니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허, 좋네! 자네 덕에 앞으로 한가할 틈이 없겠는걸."
이규대는 최만재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규대의 웃음에 호응이라도 하는 양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백여 사내
들이 하늘높이 병장기를 치켜들고 다시금 환성을 질렀다.
중인의 환호에 포권으로 답한 두 사람이 제 자리로 돌아가자 석백송은 빙긋
남모르는 웃음을 지으며 좌중을 살폈다.
'됐다, 물꼬는 터졌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이 어떤 사내들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혈관에 흐르는 것이 단지 붉은 선혈만이 아니며, 그들의 팔다리가 꿈
틀거리는 것이 단단한 근육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석백송의 기대는 이내 충족되었다.
이규대와 최만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표사들 중에서 두 사내가 거의 동시에
손을 들고 일어섰다.
"번운수(飜雲手) 악정(岳程) 표두께 도전하겠소!"
"청살검객(靑殺劍客) 위지천호(慰遲千浩) 표두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전력을 다해 지닌바 재주를 겨루고 깨끗이 결과에 승복한 이규대와 최만재의
모습이 눈치를 보던 사내들의 호승심에 불을 질렀고, 드디어 비무는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군명은 손바닥에 축축하게 배어 나오는 땀을 닦아낼 정신도 없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사람들 머리사이로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며 계속되는
비무를 지켜보는데 몰두한 사군명의 눈은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예리하게 빛났고, 가끔씩 안타까움과 감탄이 서린 탄성을 조그맣게 토하기도
했다.
'연무장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구나…….'
지난 십여 년 간 연무장을 기웃거린 사군명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무공수준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지금 실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비무
를 펼치는 표두와 표사들의 모습은 그가 알고있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초식은 날카로웠고, 몸놀림은 영활했으며 내뻗는 일검 일수마다 막강한 힘이
담겨져 있음을 멀리서도 느낄 정도였다.
하나 정작 놀랍게 달라진 것은 사군명 자신이었다.
"저런, 허초에 속았구나……."
"아니지! 어떤 검법이든 연환검식(連環劍式)의 묘용은 힘보다는 빠름에 있고
빠르려면 간결해야 하거늘……."
"쯔쯧, 저기서는 궁보(弓步)가 아니라 삽보(揷步)를 취하는 것이 효과적일 텐
데……."
부지중 나직하게 토해지는 사군명의 지적은 정확했다.
이즈음 새로운 무공의 경지를 열어 가는 그의 안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무를 펼치고 있는 사람들의 허점과 잘못을 잡아내기에 충분할 만큼 높아진
것이다.
워낙 나직한 혼자 말인데다 장내의 긴박한 분위기와 수시로 터지는 함성 탓에
다른 사람이 듣기는 힘들었으나 실로 정확하고 예리한 평가가 이어졌다.
물론, 직접 싸우는 사람보다는 관전자가 유리한 입장이라는 것은 재론할 여지
가 없는 일이긴 했지만 돌아가며 도전을 받는 표두들은 차치하더라도 비무에
나서는 자들이 표사들 중에서도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
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군명의 안목은 놀라울 정도였다.
스스로의 능력을 시험할 생각은 못하고 그저 남들이 겨루는 모습에 정신이 빼
앗긴 '놀라운 안목의 관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비무대회는 서서히 끝을 향
해 치닫고 있었다.
마침내, 제각기 서너 명에서 십여 명에 이르는 도전자들을 물리친 열 명의 표
두들에게 도전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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